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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로하《이브》 2012.08.19 23:14 조회 수 : 0






01.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이브로시아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농후한 생크림과 딸기, 초콜릿 시럽과 바나나를 넣어 만든 크레이프 한 조각을 마저 입에 털어넣었다.



"얀 씨, 잘 먹었습니다──"



"아, 벌써 가려고?"



"네에.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뭐, 다른 때보다 일찍 왔으니까. 아무튼, 조심해서 들어가──"



"네. 워스트 씨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럼 이만──"



정말이지? 믿어볼까. 으으, 여기서부터 걸어가려면 조금 먼 거리일까. 뭐, 그래봤자 몇 킬로미터도 안 될 테니까. 

이브로시아는 걸었다. 키득키득. 옆에서 웃는다. 거기, 우리 같은 것들이 득시글한데, 아무리 재밌대도 갈 거야? 

물론, 당연하지. 내가 너희들 같은 것 몇십이 더 달라붙는다고 해도, 뭔가 달라질 것 같니? 그렇게 쉽게 너희들의 

바램을 들어줄 것 같아? 천만에 말씀. 그러니까 괜히 기대하면서 걱정하는 척 하지 말아줘.



뽀득, 뽀득. 



발 밑에 남은 살얼음을 밟으며 걷는다. 어머나. 방금 전에, 또다른 누군가가 너희들이 알려준 곳으로 들어갔는걸.

혹시 그 쪽도 초대손님? 으응, 그래. 그 전부터 있었던 사람이 불러낸 쪽에 가깝다고. 에에, 상관 없어. 괜찮아.

하아? 이렇게 말 해줘도 불만인거야? 무시할 때는 무시한다고 소란스럽더니,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조금 대꾸해주니까.

아무튼, 칭찬해줄게.



으음, 그럼 저기 서번트 두 기가 있는 걸까. 



그 정도 마력의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을, 이브로시아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원한다면 전 마스터들의 마력의 '색'

혹은 서번트들의 마력을 갖고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그건 정해놓은 룰 위반이니까. 응.



그리고, 소녀가 도착한 곳은 주택가 끝 공터에 횅하니 서 있던, 방치된 낡은 건물이었다.



"흐응, 제법 마니악하네. 오컬트라던가 그런 것 애호가들이나, 담력 체험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올 법한 곳이잖아?

아니면 공포 영화 촬영이나. 어떡하나─나도 무서워서 원, 단단히 마음 먹고 들어가야겠는걸."



능청스럽게 지은 걱정하는 얼굴과는 달리, 이브로시아는 한가하게 키득거렸다. 사실, 새하얀 수의 입고

입가에 피 묻은 채 걸어오는 산발의 여자 귀신 같은 건 진짜 약해 빠진 거잖아. 말 그대로 별볼일 없는 것.

기껏해봤자 심장 약한 사람들 깜짝 놀래키는 일 밖에 더 하겠어. 안 그래, 너희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맞장구에 소녀의 입가가 힐쭉 올라간다.



"자아, 그럼. 보이지 않는 우리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막을 올려볼까요───"







02.





     흐응. 아무래도 저건 정말로 '초대장'을 보낸 것 같네. 저 정도로 풀풀 티를 내서야. 뭐, 급습도 좋지만

정면에서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흥취가 돋는 일이니까. 하암, 가볍게 하품을 하며, 이브로시아는 폐건물의

입구 근처까지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쌍의 남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이것 참, 어째

서로 싸늘해져서 들어가지 않을 분위기다. '함께'는. 으응, 그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휴우, 하는 수 없지. 구경하는 쪽이 더 재미있지만, 어쩔 수 없어. 끼어드는 것은 정말이지 본의가 아니라고.



이브로시아는 코트의 치맛단을 탁탁 폈다. 주름 잡힌 것은 없고. 좋아. 아아, 내가 직접 들어가 준 거라고.

그러니까 부디부디, 즐거운 구경거리를 보여 줘.



“―――흐응. 안으로는 들어가시지 않을 건가요? 이 앞에서 부턴 꽤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질 것 같은데 말이죠. 

이대로 돌아가시려 한다 해도 말릴 권리 같은 건 없지만, 흐음…….”



시치미를 뚝 뗀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머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보네. 뭐, 당연한 일이지만.

에에. 의도적으로 마력을 숨겼다던가 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어지간해서 내가 '알려 줄 생각 없이' 움직인다면

보통 인간으로서는 저게 당연하겠지.



“……클로에 웨스트우드.”



그래그래. 그렇게 날을 세워 주세요. 가증스런 귀족 아가씨의 웃음이나 거드름빼는 태도, 잔뜩 아양부리는

목소리는 당신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아. 모른 척 하는 바보같은 여우보다는 그렇게 대놓고 훤히 드러내는

편이 더 좋아요. 전자였다면 정말로, 비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인걸. 



그리고, 적어도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객관적으로' 가치가 높은 인간일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뭐,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일까요. 지금이 아니더라도 별로 재미 있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 레이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참 우연이네요. 아니, 레이씨도 이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느끼고 오신 

거라면 딱히 우연은 아니려나? 흠, 어쩌다 이곳에 오신건가요? 대충 9할 정도는 제가 말한 게 맞는다고는 

생각하는데…….”



“……이쪽이 무슨 이유로 왔던 그쪽이 알바는 아니겠죠. 그보다 당신, 지금 그렇게 여유부리고 있을 때인가요? 

보아하니 곁에 서번트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과 나는 경쟁자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요?”



서번트...서번트라. 그러고보니 나, 정말로 서번트 대동의 필요성 따위는 느끼지 않고 있구나...하긴, 그래서 

여직 계약을 안 찢어버리고 나름대로 버텨온 것이겠지만. 전혀 관계 없는 듯한 생각을 하지만, 입으로는

착실하게 대답을 내뱉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흐음……. 어쩔까나. 여기서 죽어봐야 별로 재미도 없는데 말이죠.



우리 아가씨, 또 거짓말했네. 네가 죽을 생각이 없다면 정말로 안 죽을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잖아?      

──아니, 그러니까 이런 것이려나?      



뭐, 그러려나. 하지만 사실이니까. 네 말을 부정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지금 저 쪽한테 맞는 것은 정말로

불필요한 일이라고. 아무리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맞는 것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니까? 휴우, 조금

무마나 해둘까.



“그럼 목숨 구걸이라도 해봐야겠네요. 지금 저로서는 당신들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흐음... 그리고 만약 레이 씨와 

그쪽의 신사분. 그리고 제가 싸움을 벌인다면, 지금 이 건물 안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만 

안겨주는 것 아닐까요? 못해도 서번트 하나와 마스터 하나는 사라질 테니까요.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신사분'이라고 지칭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미 '레이'라는

존재를 방금 전 본 순간부터, 그녀의 입과, '말'에 대해서 생각하는 뇌의 극히 미세한 부분은 그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지웠으니까. 머릿속 안을 마음대로 채우다 빼었다 하는 것 정도, 일도 아니다. 숨쉬는 것과 진배없는 것.



아, 아무튼. 어머나. 마지막 말은 조금 위험했으려나?



에에,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그럴 생각은 없는데. 방금 했던 말 그대로, 저럴 바에야 그냥 내가 죽어주는

게 뒷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클로에 웨스트우드는 재빨리 무마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아, 그리고 말이죠. 저, 보조 마술 같은 것에도 꽤 자신 있는 편이랍니다? 여기서 무사히 보내주신다면 여러 가지로 

서포트 해드릴 수도 있는데, 역시 어려울까요?” 



떠나는 님을 붙잡으려는 비극의 여주인공마냥, 애원하는 어조로 살짝 팔을 굽힌 이브로시아는 여전히 미소 흐르는

얼굴로 레이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흥, 멋대로 하세요. 애당초 오늘의 목표는 당신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가요. 라이더.”



어머나. 기분 나쁘지 않니? 너, 따위 취급 당했다고? 시끄러워. 너는 아직 열흘 밖에 안 되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조용히 하고 있어. 그래그래, 아가씨. 저 바보는 무시하고. 그래, 이제 뭘 할 생각이야? 아가씨 덕분에

드문 구경거리를 많이 봐서, 정말이지 기대된다구.



뒤에서 떠들어대는 한 무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이브로시아는 자신의 옆을 흘끗 본다. 그리고는 한숨. 순식간에

앞의 두 사람과의 사이에 소리를 막는 결계를 치고 내뱉는다.



"이제 그만 조용히들 하지? 보아하니 이 건물 주변에도 아─주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응, 그래. 역시 분위기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



이브로시아는 슬쩍,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이합집산의 산,마냥. 순식간에 소란이 사그라든다. 그래, 평소에도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역시, 자신들도 나름대로 정말 기대했었나봐? 



한가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고, 이브로시아는 두 명의 뒤를 따랐다.







03.





     건물 내부는, 꽤나 어두웠다. 아무래도, 레이 아리시에 린느는  신체능력을 강화하여 주변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브로시아는 그저 흐흥, 뜻모를 표정으로 여유를 부릴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는 걸.



헤에? 재밌는 게 있네?



먼지 투성이인 공간이었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벽을 올려다보았다. 어라라, 제법 귀여운 연출이잖아? 

이것 '자체'만 보면 꼭 놀이 공원의 어트랙션 같구나.



이브로시아는 소리없이 키득거렸다. 뭐, 그다지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지만. 소녀는 머리칼을

두어 번 가볍게 흔들었다. 물결치듯 흘러내린 머리칼에서, 공간과는 이질적인 싱그러운 빛이 끝에 맺혔다.



삼류 연극의 무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의외성이라고는 없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무대이지만, 

런데도 관람하시겠다면 이 위로 향하시기를.



아하하하하. 그래도, 장단에는 좀 맞춰줘야겠지? 이 정도도 오랜만이잖아!



“어라어라, 이건 또 재미있는 연출이네요. 붉은 글씨의 전언이라니,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다소 진부한 감이 

들기는 하지만……. 응?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어머나, 설마 나도 이런 걸 할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아니, 무엇. 부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난  먼지 투성이인

장소는 굳이 고르고 싶지 않은데. 말 그대로 조금 '진부하기 그지없는' 장소잖아. 브뉴엘의 절멸의 천사 같은 그런

느낌 쪽이 더 취향이라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레이라는 눈 앞의 여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버서커 조는 지금 랜서의 마스터인 그 소년과 함께 있는 것 같아요. 자칫하면 2-1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랜서 역시 첫날부터 그 정도의 소모를 벌인 이상 만전의 상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다, 자신으로부터 협력하겠다고 말한 이상 당신도 여차할 경우 령주를 써서 서번트를 불러낼 정도의 협력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클로에 씨?”



음?



아아. 상관 없는 일이다. 령주 정도야. 그 전에 저 서번트, 라이더가 그녀가 다치는 것을 내버려둘 것 같진 않지만.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라도 시켜주는 편이 그 쪽한테도 나은 이야기겠지.



“뭐, 그 히키코모리 서번트도 가끔씩은 바깥나들이를 하는 편이 좋을 테니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을지도?”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흐응. 이건 또 소소한 트랩 발동...인가.



보이는 것은, 순식간에 어긋난 세계. 누군가가 외치는 '음파'가 보인다. 불에 타오르는 건물과 잿빛 매연이 보인다. 

이브로시아는 쯧, 가볍게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재 현장 따위가 아닌, 그야말로 완벽하게

휘말린 듯한 '레이'. 그녀의 뒤에서, 라이더가 끊임없이 이름을 외친다. 레이. 레이. 



──호오?



순식간에, 다른 이물감이 끼어든다. 버서커로구나. 마력의 '음색'으로 대략 예측은 했지만. 라이더가 뻗었던 손은 

허무하게 공중에서 춤출 뿐. 뭐, 죽지는 않겠지. 기사님이잖아. 빨리 악당을 무찌르고 여주인, 아니지. '동료'를

구출하러 올 걸. 이브로시아는 머릿속에서 두 서번트의 인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브로시아는 싸늘하게 세상의 변화를 주시할 뿐이었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리고, 왠

교실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복도에서 달리며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뒤에 일렁이는 것은 불꽃. 소녀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툭, 중얼거렸다.



"기분 나쁘네."



어쩌라는 걸까. 휴우, 답답해라. 저렇게 당황해서야, 비논리적이다. 매뉴얼 정도는 숙지하고 있잖아. 그걸 그냥

그대로 꺼내기만 해도 멀쩡히 나가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고? 건물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불운이 생긴다면야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유감이고. 도대체 왜 하질 못해? 지극히 단순한 일이잖아. 유치원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워오지 않았어? '어째서 아는 걸 할 수 없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브로시아는 흘끗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아, 완벽하게 말려버렸구나. 저 사람. 의외로 멘탈은 그리 강하지

않을지도? 뭐, 대충 저 유형은 어떤 스타일인지, 그 정도야 알지만.



후웃,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쉰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팔을 앞으로 한 번 휙, 움직이며 발을 내딛자. 모든 환상은

여름날 아지랑이마냥, 흔적도 없이. 



"어디 볼까..."



'레이'가 어느 지점에서 '튀어나올'지 알 수도 없고, 언제 나올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건 취미가 아니다.

그래도, 계단 위라니. 그건 다소 곤란한 장소였는데 말이지. 행여나 굴러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이잖아. 



이 모든 생각을. 이 모든 행동을 불과 수 초 안에 해버린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마저 계단을

걸어 올랐다. 아아, 옆으로 갈 것 같네. 좌표 이동일까. ■ ■ ■ ■ ■라던가, 그 계통의 힘은 아니지만. 아니, 애당초.

'지금의 인간들'이 그런 것, 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네. 



예상대로, 한 단을 올라가는 순간 세계가 일그러졌다. 그래. 보통 공간이랄까, 지각 능력 중에서도 공감각 관련을 다루는 

이능력들의 가장 기본이니까. 흐응. 아무튼, 그럼 이건 어떤 식일까. 백만대미로? 환상감옥? 흐응. 일단 가능한 루트로는

약 87가지. 그 중에서도 가능성 높은 것들만 제한다면 11가지. '일그러진' '자리 이동' '환상' '특정 조건에 발동하며

공감각 지배- 혹은 정신 감응' 으음, 역시 그 쪽이려나.



소녀는 살짝, 바닥에 손을 대었다. 먼지투성이의 더러운 땅이, 섬섬옥수에 검은 재를 묻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역시, 그거구나. 확실히, 포인트들의 좌표는 파악이 끝났지만. 으응, 역시 이런 데서 혼자 빠져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끝까지 함께 어울리는 게 더 즐겁잖아.



아아. 그나저나 '레이'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으려나... 슬슬 올라가고 싶은데. 이브로시아는 가장 가까운 연결점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결점이랄까. 자신이 계단에서 바로 발을 딛게 된 곳이지만. 

그 입가에는, 나즈막한 흥얼거림마저 걸려 있었다.




"정──답!"



바닥에 쓰러진 긴 머리칼의 여성을 보며, 이브로시아는 발을 재촉했다. 정말로, 이렇게 보면 평범한 아가씨로밖에

보이지 않잖아. 어라어라, 깨어났네. 셋, 둘, 하나!



소녀는 튕기듯 몸을 빼며 짝, 양 손을 마주쳤다. 



“레이씨, 일어나셨군요! 이런 곳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어서 걱정했답니다.”



정말로. 당신이 여기서 그 심해에 가라앉아버리는 건 정말로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구요. 이브로시아는 푸른

눈을 곱게 휘며, 다행이라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선, 걱정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죠.”



“아뇨, 별 말씀을.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괜찮아요. ……그런데, 제 서번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흐흥, 역시. 생각보다는 침착한 반응. '거짓 정보'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걸, 겁쟁이들은 모르지.

바보들도 알 수 없어. '거짓'이든 뭐든 '정보'라는 건 수십 가지의 판단 근거가 되어주니까...뭐, 이만큼 해 둘까.

응, 그래도 역시 조금 슬프네. 저렇게 대놓고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표정으로 물어보면. 나, 그래도 입 밖에

내는 사실 중에 거짓말은 없는걸. 사실 전혀 신경쓰지는 않지만!



“아아, 그 분이라면 지금 아래층에서 버서커 씨와 싸우고 계실 걸요?”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어요?”



으응, 확실히 조급한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사실 너무 침착해도 지루할 뿐이지만. 이브로시아는 싱긋 웃고는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이 씨가 몇 개인가의 계단을 올라가던 중 갑자기 레이 씨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일그러졌고, 뒤를 따르던 

라이더 씨가 레이 씨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버서커 씨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어요. 다시 레이 씨를 

보았을 때는 이미 레이씨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고요.”



살짝, '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라이더가 아래쪽에서 싸우고 있었다면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확실히, 옳은 말이다. 좋은 지적. 서번트 전투는 분명히 상당한 볼거리임이 틀림 없지만.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그저

무용의 향연. 이브로시아는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아, 확실히 아래쪽에서 싸움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테지만…….

흠. 그렇네요. 굳이 말하자면 직감일까요? 위쪽으로 올라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 계단을 

오른 순간 여기로 옮겨지더군요. 아마 건물 내부의 공간이 이것저것 꼬여 있는 것 같아요.”



“계단을 통해 올라왔다면…… 당신도, 그걸 본 건가요?”



그것? 아아. 그 화재 현장. 하지만 당신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겠지. 감정이, 혹은 무엇인가가 반응해서 당신에게만

보여준 그런 것. 그것을 내게 묻는 거잖아. 난 그게 뭔지 모르니까.



“흐응?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마냥, 고개를 갸웃한다. 



“……아뇨, 집히는 게 없다면 상관없어요.”



“아, 아래로 내려가시려 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요.”



“──무슨 의미죠?”



조곤조곤, 이브로시아가 설명한다. 남에게 '가르치는 건' 그다지 특기가 아니지만, 그냥 알려주는 것 정도야

전혀 상관 없으니까.



“방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건물 내의 공간이 뒤얽혀 있어요, 아니, 정확히는 본래의 장소에 무언가 다른 게 

[겹쳐] 있다고 해야 하려나?”



──그러니까. 이 벽도 '이 건물의 벽'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종의 그런 비유죠.



“공간의 [연결점]들은 꽤 이곳저곳에 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아래로 향하는 건 없어요. 아마도 목적은 버서커가 

라이더를 쓰러트릴 때까지의 시간 벌기. 하지만 아예 출구를 막아놔서야 이쪽이 강경수단, 예를 들면 령주 같은 것을 

쓸 수도 있으니까. 위로 향하는 길은 열어둔 거겠죠.”



“싸움은 서번트들에게 맡기고, 마스터들은 기다려라. 그게 불만이라면, 직접 항의하러 와라. 그런 이야기군요.”



“네, 정답이랍니다.”



어린 아이를 칭찬하는 것마냥, 클로에 웨스트우드는 박수를 쳤다. 텅 빈 폐허 안에서,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자아. 이제 남은 건 당신의 선택이에요. 어떻게 할 건가요? 만약 뭐, 친애하는 라이더 씨를 보고 싶으시다면야

일그러진 공간 쯤이야 단번에 뚫어버리고 모셔다 드리죠. 하지만 올라가는 것을 고르신다면, 글쎄요. 어떤 희극이

나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너무 늦지 않게, 길을 밝힌 촛불이 꺼지지 않게. 부디 빨리 마음을 정해주세요,

자안의 아가씨.



“──위로 가겠어요. 당신, 아까 말한 걸로 봐서는 그 [연결점]이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협력해줄 수 있겠죠?”



역시, 그 쪽을 고르는 건가요. 확실히, 그 쪽은 '미지수'기 때문에. 조금 더 리스크가 있겠죠. 단순한 '서번트의 공격'

과는 다른 무언가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것 또한. 아니. 그런 선택지야말로 훌륭한 극. 주연께서 그것을 

                       연출자                                                                                                       관객

선택하신다면 저는 마음껏 춤추실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야겠지요. 그리고, 제게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세요.



이브로시아는 한 쪽 코트의 치맛자락을 살짝 끌어올렸다. 무릎을 20도, 우아하게 숙이고 답례한다.



“물론이죠, 어디든 바라시는대로.”






04.




     이브로시아는 살짝, 양 눈을 가늘게 찌푸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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