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천로역정 컨셉 #금비은비
2014.04.15 12:31
도깨비란 묘한 존재들인것 같다.
도깨비 호족 '아지랑이'의 땅에 초대되어 그의 대궐 같은 집에 잠시 머무를 때. 하인으로 있던 도깨비 아가씨들 덕분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예뻤고, 풍만했으며 옷으로 그 몸을 가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매번 노닥거리거나 서로를 주물럭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만 봤는데 그 큰 집안의 일은 멈추지 않고 잘 돌아갔다.
그 당시의 나는 정신이 없었다.
아사달 왕의 칙명으로 아지랑이를 돕기 위해 돌구름으로 왔지만 어떤 사전 정보도 없는 상태였고, 난생 처음으로 본 도깨비들이 전부 여자인데다 품행마저 방정하기 그지 없어서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했다.
"좀 가리는게 어떻겠소."
[싫습니다. 랑(郞)이 제 젖꼭지를 의식하면서도 점잖은 척 하는 게 무척 재미있으니까요.]
"저, 점잖은 말을 쓰셔야 하지않겠소?"
[저랑 자고 싶으면서 왜 그리 사리분별을 하려 하십니까? 랑은 이름 난 무인이라 들었습니다만, 칼부림 외에는 자신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자 어서."
도깨비 영주 아지랑이의 47번째 딸이자, 내 시종을 자청한 도깨비 아가씨 '금비'는 내가 급하게 내민 장옷을 들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처자들에게 농을 거는 아저씨들의 짖궂은 미소를 그 아기자기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에서 볼 수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옷깃을 여미는 금비의 모습에서 애써 눈을 돌리며, 나는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렇지요, 가랑이 사이에 있는 게 쓸모가 없으니 사내로서 수치를 느끼셔야죠.]
"그 말이 아니라..."
[아니라?]
"일부러 그러는게요? 사내에게 이런 방정한 태도를 보이다니."
[그럼 인간 처자들은 마음에 드는 사내에게 어떤 표현을 합니까?]
"... 그,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수줍음이란게..."
금비의 손가락 끝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리자 금을 녹여서 만든 듯한 눈동자가 가늘어진 눈 사이에서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난 금비가 날 '마음에 들어 한다.'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직설적이라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 그럴리가 없잖소.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오."
[그럼 제가 좀 더 수줍음과 조신함을 갖길 바라십니까? 그렇게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전 도깨비니까요.]
표정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무서웠다.
인간과 도깨비 사이를 떠나서,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여인이었고 그 눈 안에는 진심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금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거절하시는 겁니까?]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이 역력한 두 눈이 상당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도깨비식으로 말하고 싶은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소."
[... 무슨?]
"... 젖가슴이 보고 싶소."
금비는 빙그레 웃었다.
도깨비는 묘한 존재다.
격정적인 밤이었고, 거의 밤을 세워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었다. 간신히 눈을 붙이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침소에 금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눈을 뜨고 그녀를 찾으러 다녔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곤란해하던 참에 옷을 정갈하게 입은 도깨비 여인이 식사를 알려왔다.
"그, 어제 내 시종을 봐 주던 금비라는 처자는 어디 있소?"
[두 번째 남편한테 갔어.]
"... 뭐라고 했소?"
[당신은 언니의 여덟 번째 남편이야.]
허탈함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오늘 시종은 내가 볼 거야. 은비라고 부르면 돼.]
은비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작은 체구의 도깨비 아가씨는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몇번 끄덕 끄덕했다. 눈빛이 거북하기 그지 없었다.
"... 왜 그러시오?"
[불륜에 관심 있어?]
도깨비는 정말 묘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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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짧은 글인데. 왜 이리 마음에 들지?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들이 나온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