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다
야예이는 머리를 들었다. “쿵. 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둔중하고 거대한 바위 거인들이 점차 멀어져 갔다. 적어도 한 동안은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리라. 야예이는 바위거인들이 산의 능선을 넘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잘 참았다.”
야예이는 거인이 지나가는 동안 함께 숨죽이고 앉아 있었던 토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토른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낸 다음 야예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예이는 능선 넘어로 바위거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의 발자국이 커다랗게 남아있었다. 야예이는 그 발자국을 넘어 경사를 타고 걸어 내려갔다.
갈색 산맥은 여지없이 겨울의 경치를 내보이고 있었다. 마른 가지들 위에 앉은 눈이나 그 이름 그대로 갈색 빛을 잃고 이제는 하얗게 변한 땅이라던가. 야예이는 어제 밤 내내 몰아쳤던 눈보라를 생각하며 이제는 새하얀 갈색 산맥의 수풀을 해쳐 나갔다.
타닥타닥.
건조해져 마른 가지들이 야예이가 지나갈 때마다 부러지며 소리를 냈다. 길이 아닌 곳을 걷고 있는 야예이는 그가 있던 레인저의 오두막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브리잔드 변경백령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걸을 수 없는 길이지만 야예이는 거의 억지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이동하며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시간 외에는 전부 걷는 일에 할애하고 있었다.
장비가 좀 가볍긴 하지만 그래도 절벽과 바위산을 타면서도 일반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10시간을 넘게 걷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강인한 오크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산을 타는 일 자체가 신물이 났을 부류에 속해 있는 야예이는 눈으로 미끄러운 거친 바위산을 꾸준히 걸었다. 비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두텁고 팽팽한 근육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일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토른은 그런 야예이의 뒤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용케도 따라다녔다. 어찌 보면 손이 없는 짐승이 다니기에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토른은 뒤처지지 않았다. 조금 지친 듯이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손쉽게 도약해 때로는 야예이를 앞서곤 했다. 이번에도 토른은 상당한 높이를 단 세 번의 도약으로 뛰어 오른 후 야예이를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야예이는 양 팔을 뻗어 바위의 돌출부를 잡은 후 급경사를 타올랐다.
그는 곧 토른과 함께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지 낮은 능선의 너머로 잘 포장된 도로가 보였고 도로의 끝으로 브리잔드 변경백령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에버런스 게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산맥에서 브리잔드 변경백령으로 들어갈 수 있는 3개의 게이트 중 하나였다.
야예이는 안력을 북돋아 멀찍이 보이는 에버런스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써늘히 부는 바람 속에서도 석상같이 굳건한 뒷태를 보이는 그의 얼굴은 우울하고 그늘져 있다.
브리잔드 변경백령이 다가옴에 따라 야예이의 기분은 점점 우울해져 갔다. 무의식적으로 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그의 코앞으로 끊이 없이 들이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의 단 한명 뿐이 가족의 죽음.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돌리고 피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저 에버런스 게이트 너머 브리잔드 변경백령에 살고 있을 에크로반의 친우에게 스승의 부고를 전해야하기 때문이었다.
토른은 그런 야예이의 답답함을 함께 느끼는지 낑낑 거리며 야예이의 곁에서 함께 우울한 자세를 취했다. 한참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에버런스 게이트를 바라보던 야예이는 토른을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도피 중이었다.
스승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육체를 혹사하며 우울한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야예이는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직시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약함이 한심했지만 그런 것은 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야예이는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언젠가 이 고통도 괴로움도 단지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오겠지만 그것이 대체 언제쯤일까?
야예이는 그런 약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다시금 한숨을 쉬어 주고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그의 스승인 에크로반은 자신이 이런 약한 생각을 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야예이는 조금 결의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라앉은 기분은 돌아올 줄 몰랐다.
여전히 우울한 기분을 이끌고 에버런스 게이트로 향하던 야예이는 그제야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결코 못 볼 리 없는 것인데 이제야 발견한 것을 보며 어지간히 정신이 해이해져 있었나 보다. 비록 에크로반이 대지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야예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래서야 스승의 무덤 앞에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그렇게 자학을 하며 야예이는 몸을 숨겼다.
산 아래 가까운 곳에 몸을 숨기고 도로를 주시하고 있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었다.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전부 무장하고 있는데다가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것으로 모아 길 잃은 사람들을 안내해주기라고 할 목적으로 숨어있는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산적들인가.”
야예이는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추측을 입으로 담았다.
일단 들키지 않았으니 조용히 뒤로 돌아간다면 저들과 마주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민한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 익힌 잠행술은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는 일에도 쓸 만하다. 만약 야예이 자신이 원한다면 자갈밭에서도 목표인 사람의 바로 뒤까지 다가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야예이는 생각했다.
이대로 그들을 무시하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생기게 될 피해자들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야예이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야예이의 무력으로는 저 산적들 전부를 무력화 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위험을 무릎 쓰고 그들에게 적당한 피해를 입히고 치고 빠질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걸면 전멸시킬 수도 있다. 지형적인 유리함과 선제공격에서 오는 유리함. 그리고 자연령들의 힘을 빌리는 위장술과 속임수. 단련해온 육체로부터 나오는 예리함.
이 모든 것들 합치면 저 산적들과 근소차로 앞설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있을 피해를 막자면 그런 유리함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서신을 전달해야하는 의무를 진 이상 함부로 목숨을 걸 수도 없는 법. 그렇다고 친다면 적당한 치고 빠지기도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게 된다. 어찌되든 전투란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야예이는 고민했다. 그 고민이 길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 작은 포장마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고 야예이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 순간 야예이는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있다가는 저 마차는 산적들의 공격을 당할 것이다.
야예이는 서둘러 활을 들고 시위을 먹였다.
그러면서 야예이는 집중해 주변의 환경에 동화했다. 그 육체에 주변의 나무껍질 같은 외피가 씌워지고 마른 가지들이 삐져나왔다. 거기에 색깔역시 맞춰서 변화했다. 가까운 거리라면 모를까 산적과 야예이가 있는 장소만큼의 거리라면 눈치 채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야예이는 산적들 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엄폐물도 많으니 야예이에게 있어 이곳은 천해의 요새 못지않았다.
-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야예이의 화살이 가장 뒤에 있는 산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털썩하고 동료가 너부러지는 소리에 산적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인다. 그 사이에 야예이는 두어번 화살을 더 쏘았다. 처음처럼 정조준 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추지 못했지만 몸통을 맞추는 것으로도 충분히 전투력을 앗을 수 있으므로 야예이는 만족했다. 그리고 산적들이 그를 찾아 시선을 굴리는 사이에 야예이는 토른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지시를 하고 바위들 틈으로 숨어 이동한 다음 다시 화살을 쏘았다.
순식간에 산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애초에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을 그들을 상대로 초자연적인 힘을 다룰 수 있는 유격수인 야예이와 대적하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많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산적들 중 한명이 야예이가 숨어서 화살을 쏘는 장소를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땐 이미 많은 산적들이 바닥에 스러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예이의 화살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고 산적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야예이는 뛰어 올라오려는 산적들에게 돌과 바위를 던져 그들은 돌진을 저지 했다. 산적들도 화살을 쏘았지만 그들의 조잡한 도구와 실력으로는 명중률이 엉망진창이라 야예이의 근처에 닿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야예이는 힘을 잃은 화살을 손으로 쳐내기도 했다.
그래도 야예이는 여전히 불리한 상태였다. 적어도 상대는 열 명이 넘었고, 야예이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10명이 넘는 성인 남성에게 둘러싸이면 알짜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연히 닿은 화살들이 체인셔츠 위에 입은 가죽에 박히기까지 했다. 그들의 활이 조금만 더 질이 좋았다면 야예이는 상당한 상처를 각오해야 했었을 것이다.
산적들이 충분히 가까이 오자 야예이는 각오를 굳히고 도끼를 빼들었다.
그리고 전투의 함성을 내지르며 산적들에게 뛰어들려고 했다. 그 순간 산적들의 일부가 쓰러졌다. 순간 야예이는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
마법이었다.
이런 기묘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마법 밖에 없었다.
야예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도로 쪽을 바라보자 그 곳에서 무장된 남자 둘과 로브를 입은 여자 한명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얇은 막대를 들고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이 현상은 저 여자 마법사가 일으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기회다.’라고 야예이는 생각했다. 야예이는 휘파람을 불어 토른에게 지시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단 3명뿐이지만 무장으로 모아 모험가로 보이는 그들이라면 남은 산적들은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들 사이에는 마법사도 있었다.
야예이는 순식간에 산을 타 넘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108 | 바람의 꿈 광풍의 날개 2/5 [4] | G.p | 2008.10.26 | 351 |
1107 | 패스파인더6 [2] | azelight | 2008.10.25 | 328 |
1106 | 패스파인더5 [1] | azelight | 2008.10.25 | 339 |
1105 | . [1] | pe脫 | 2008.10.25 | 324 |
1104 | 바람의 꿈 광풍의 날개 1/5 [4] | G.p | 2008.10.25 | 309 |
1103 | 패스파인더4 [1] | azelight | 2008.10.24 | 294 |
1102 | 패스파인더3 [1] | azelight | 2008.10.22 | 291 |
» | 패스파인더2 [1] | azelight | 2008.10.21 | 322 |
1100 | 패스파인더1 [1] | azelight | 2008.10.21 | 301 |
1099 | 프레이-1 [1] | azelight | 2008.10.21 | 246 |
1098 | 문 [2] | 라온 | 2008.10.20 | 264 |
1097 | 바람의 꿈 광풍의 날개 0/5 [2] | G.p | 2008.10.20 | 283 |
1096 | Endless Dream - 끝나지 않는 꿈 - 05화 [4] | 카와이 루나링 | 2008.09.27 | 420 |
1095 | Endless Dream - 끝나지 않는 꿈 - 04화 [3] | 카와이 루나링 | 2008.09.23 | 389 |
1094 | Endless Dream - 끝나지 않는 꿈 - 03화 [3] | 카와이 루나링 | 2008.09.22 | 492 |
1093 | Sky Walker (3) | 낙일군 | 2008.09.10 | 4 |
1092 | 정신병리학精神病理學 : 섭식장애Eating Disorder [1] | Lunate_S | 2008.08.25 | 674 |
1091 | 300포스트 기념 소설, Long Long Ago. [2] | Lunate_S | 2008.08.17 | 612 |
1090 | 천로역정~★ - 당고마기 (3) [1] | 비렌 | 2008.08.17 | 684 |
1089 | 천로역정~★ - 당고마기 (2) [1] | 비렌 | 2008.08.15 | 584 |
그게 올바른 듯 하지만요.
.... 모 산맥의 레인저들 처럼 쓸어 담는건 무리가 있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