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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B #→막간1

2008.06.25 14:12

빨탕 조회 수:200

독하게 더운 일요일이였다.
아침 개그 TV 프로그램도 끝나고 쓸모없는 이야기만 하고있을 한가한 오후. 나는 언제나처럼 거실에 드러누워 아무생각없이 TV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공중파, 케이블, 공중파. 뉴스, 홈쇼핑, 뉴스. 개그 프로그램의 재방송. 어느하나 눈길을 주는 것이 없었다.

“정신사납잖아!”

그때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신의 방에서 PC를 하고있던 남동생녀석이 소리쳤다. 방문 너머로 TV화면이 보이는 탓이겠지. 그녀석은 그 한마디만하고선 다시 모니터로 차선을 돌렸다. 아무런대꾸도 해주지 않으면 그저 혼자서 식어버리는 타입이다. 상종을 말아야지.
그렇게 보자면 정말로 한가하고 덥고 찝찝한 여름이다. 입고있는 티셔츠와 팬츠는 이미 축축한 땀으로 젖은지 오래다. 선풍기가 그나마 위로가 되어줬지만, 그 선풍기마저 지금은 남동생에게 뺏긴 뒤다. 방금전까지 선풍기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녀석도 남자였는지 결국은 뺏지 못했다.
덕분에 내 가슴이 이렇게 땀범벅이로…….

“못참겠다!”

그래, 결심했어.
이집이 아니라 다른곳으로 가는거야.

“요예랑! 누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집 잘봐!”
“다시는 돌아오지마!”

정안가는 녀석!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마당을 지나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래, 우선은 혜지의 자취방으로 가보자. 그녀의 자취방에는 에어컨까지 있으니까 쾌적한 주말 여름을 보낼수 있을것이다. 작년에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작년에는 정말 천국이였지. 에어컨 나오는 방 안에서 둘이서 함께 TV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헤─”

침닦자. 우선 발을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이 열대야 아래에서 움직이는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여야 된다. 난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꺅─!”

발 데일뻔 했어, 발 데일뻔 했다구!
이정도 온도라면 아마도 아스팔트바닥에 계단을 던져놔도 순식간에 계란후라이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가 있었잖아? 아스팔트 바닥에 계란을 떨어뜨렸더니 새하얗고 샛노란 후라이가 되었습니다~, 라고. 시험해볼까.
아니아니, 지금은 우선 혜지네집에 가는게 먼저다. 그곳으로 가면 천국을 맛볼수가 있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나는 햇빛아래에 온몸을 노출시켰다. 이런… 덥지만 생각보다 살만하다. 아직은 걸을수 있다. 이정도면 견딜수 있어.
…라고 말한게 얼마나 지났을까.

“덥다.”

아직 혜지네 자취방까진 반이나 남았다.

“더워.”

이러다 쓰러지는걸까 몰라. 나는 아무도 보이지않는 주택가의 골목길을 노려봤다. 이상한 모습으로 일그러지는 골목길. 이건 내 눈에 이상이 온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골목길의 아지랑이가 올라오는것인가? 알수없다. 알수있는건 지금 지구역시 무지하게 덥다고 눈물을 흘리는거 뿐이야.
태양은 어쩌면 S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재차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어머.”

반가운 목소리다.

“여기서 뭐하는거야?”
“서혜지!”

나는 나도모르게 그녀의 품에안겼다. 그녀의 놀란 목소리와 더위따윈 잊고 그녀의 가슴에 안겨 뺨을 부비적 거렸다. 보통 더운 날씨와 땀투성이 여성을 좋아할리 없을텐데, 그녀는 아무런 싫은느낌도 없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옳지 옳지, 무슨일이야 하랑아?”
“응~ 그러니까. 내말을 들어봐 서혜지. 난 오늘 무지하게 슬픈일을 당했어. 글쎄있지, 이렇게 더운날에 남동생이라는놈이 누나한테 선풍기를 양보는 못해줄망정 날 집에서 쫓아내지 뭐야. 그래서 난 어쩔수없이 혜지네 집에가서 시원한 오후를 보낼려고 해서…….”
“자, 하랑아.”

그녀는 들고있는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아이스바였다. 나는 아무말도 없이 그걸 받아들고 포장을 뜯어 아무렇게나 버린 뒤에 입에 물었다.

“살거같애!”
“그치?”

파란색 소다맛 아이스바였다. 처음보는 상표인걸 보니 얼마전에 나왔다거나 나오자마자 역사속에 감추어져 이제서야 눈을떤 물건들중 하나겠지.

“응… 그럼 이참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데이트는 어때?”

데이트?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지만 그녀는 미소로만 대답할 뿐이였다. 이렇게 더운날에 데이트라니, 확실히 한동안 딱히 놀러간다고 한것도 없었고 그저 집에만 있었으니까. 데이트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이 더위속에서는…….

“수영장 데이트.”
“승낙!”

그곳에 흔쾌히 승낙을 하는 내가 있었다. 수영복의 유무, 몸매의 아름다움 같은건 이미 뒷전에나 있었다. 그게 그럴게… 수영장이잖아!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초등학교 이후로는 수영장을 가본적이 없을것이다. 중학교시절의 나는 굉장히 까치했으므로, 수영장같은건 전혀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러니까, 꽤 오랜만의 수영장일까?

“수영복은 있어?”
“내기억으로는 없을걸? 있어도 지금은 안맞아서 못입을거야.”

초등학생때나 입던 수영복이 지금 맞을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그럼 사러가자.”
“뭐?”

그녀는 갑작스레 내 손을 붙잡더니 어디론가로 휭, 하고 가버렸다.
불가항력, 나는 힘도 못써보고 그녀가 가자는대로 끌려갈수밖에 없었다.




-
성원동 주택가에서 얼마 걷지않아도 금방 나오는 시내. 인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차도에는 수많은 버스와 자동차들이 다니는 그곳. 등학교 할때마다 들려야 하는 이곳은 주말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욱 북적였다.
혜지가 가자고해서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여기서 수영복 가게라니. 생각해본적도 없다.

“서혜지, 너 수영복가게 아는데 있어?”
“아니.”

굉장히 즐겁게 말하는 그녀.
가게의 존재유무는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그럼 어디서 살 생각이야?”
“백화점… 같은데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하며 그녀는 손으로 커다란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커다란 백화점, 분명 전국적으로 유명한 저 상표는 그저 눈길을 준것만으로도 ‘난 비싼 몸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는듯이 보였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비싸잖아! 애초에 수영복이야 수영장에서 빌려 입으면 되고…….”
“어머, 하랑아. 수영장 이번만 갈 생각이였어?”

응?
나는 벙찐얼굴로만 대답했다.

“우리 여름에 할거많잖아. 그치?”

응?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잊지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여름방학때 바다갈 계획 세우고있어. 하랑이도 괜찮지?”
“뭐어? 바, 바다라니… 무슨 소리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거기다가 수영복까지 사고 수영장가고 바다까지 갈생각이면 보자 자금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내게 팔짱을 껴오기 시작했다. 이젠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은가보다. 나도 더 이상은 아무래도 좋으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거의 없고 말이지.

“그때 경비정도야 내게맡겨! 하랑이 정도는 책임질수 있으니까.”

위험한 발언이다. 엄청 위험한 발언이야.
하지만 조금은 가슴 한쪽구석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잖아, 혜지한테.”
“우리 사인데 뭘. 미안할게 뭐있어?”

그녀가 바짝 붙여져 온다. 팔에 그녀의 가슴이 닿긴했지만 자주있는 일이다.신경쓰지 말자.

“자, 그럼 가자. 꼭 내가 원하는걸 입힐 테니까, 각오해 요하랑!”
“그래? 그럼 혜지 너도 내가 입어라고 하는걸 입어야될걸?”
“그건 하랑이를 위해서라면 상관없는걸!”
“뭐, 뭐야?”
“헤헤─”

조금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와 그녀는 백화점을 향해 걸었다.




-
해는 이미 산중턱에 걸려있었다. 티셔츠 하나에 반바지 하나만으로는 조금은 쌀쌀했는지, 낮보단 시원한 느낌이였다. 그런다고 더운건 아니지만, 응. 아직 확실히 덥긴해. 햇빛이 조금은 약해져서 그렇지.

“정말… 내가 골라주는거 사라고 했잖아.”

혜지는 투덜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저녁노을 아래, 그녀의 머리카락이 빛난다.

“누가 학교수영복같은걸 입고 수영장을 가겠어?”

백화점 수영복 커너에 도달했을때는 솔직히 뭘 골라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런 고민하고있는 나에게 그녀가 추천한 수영복이 바로… 코스프레 사진에서나 나올법한 학교 수영복이였다. 우선은 아무리 큰 백화점이라해도 멀쩡한 대한민국 국내에서 학교수영복을 시중에 판다는것에 놀랐고, 그 수영복을 입어본 결과 생각보다 내몸에 착 맞았다는것에 한번 더 놀랠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진 않았지만.

“치이─, 기대했었는데.”
“그래도 한번은 입어봤잖아. 그정도로는 만족해줘.”
“바다가 아니면 의미없잖아!”

그녀가 우는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였다.

“그래서 서혜지. 넌 무슨 수영복 샀어?”
“응? 내가 산 수영복?”

그녀는 내 물음에 잠시 들고있던 쇼핑백 안을 다시 확인해보고 말했다

“흐흥, 그건 비밀.”
“뭐어? 모처럼 학교수영복까지 입었고, 사진까지 찍게 해줬는데!”

응, 확실히 수영복을 다입고 나와서 그녀가 폰카를 들고있을때는 진심으로 놀랐지. 플래쉬가 터지고나서 지우라고 버럭 화내긴 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도 않고 그 사진을 고히 폰에 남겨두었다. 뭐, 나야 그녀만 볼것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걱정마, 사진은 아무한테도 안보여줄거야. 매일밤마다 나만 볼거니까.”

그게 좀 더 위험해보이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내 사진을 보고 다른사람들이 기뻐해준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나한테도 기쁜일일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있지…….

“혜지야.”
“응?”
“여긴 어디지?”

물음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 역시 이곳이 뭐하는곳인지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청동 철장으로 되어있는 담장에는 분홍색 담쟁이덩굴들이 온몸을 비꼬아가며 매달려 있었고, 그 담장 너머로는 새파란 나무 이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전까지 보였던 빌딩들의 위엄도, 사람들의 떠들썩함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린 분명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원동 주택가 골목길을 걷고있었을 텐데…….

“마치 몽환의 숲 같네.”
“그렇지? 왠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거 같은 기분이야.”

정말로 그런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한듯 오묘하고 어지러운 기분이였다. 시야가 시냇물처럼 조금씩 흘러내리는 환상이 보였다. 아름답다. 우리동네에는 이런 길이 없을텐데? 이렇게 예쁜길이 있었다면 벌써 관광명소로 소문이 자자할것이다.

“하랑아, 저쪽으로 길이 있는데.”

그녀가 가리킨곳,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리킨곳으로 가자 그곳에는 의미없어 보이는 십자도로가 있었다. 우리가 온길 하나와,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할길인 세 갈림길이 놓여있었다. 어디로 가야하는거지?

“막대기 세워서 쓰러지는 쪽으로 가볼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선 들고있던 핸드백에서 펜을 하나 꺼내서는 우리가 서있는 타일바닥위에 조심스레 세웠다. 그리고 손을떼자, 펜은 쓰러지기 시작하며…….

“응?”

가로막혀있는 왼쪽 담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혜지… 이거 정말로 믿어도 되는거야?”
“어쩔수 없잖아?”

그녀가 미소지었다. 그녀는 재밌어하듯 웃었지만, 내게 있어선 그저 그런 걱정거리일 뿐이다.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자, 그럼. 담장을 넘읍시다!”

혜지는 그렇게 말해놓고선 담쟁이덩굴들이 얽혀있는 담장을 넘으려 낑낑거렸다. 힘든건가?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그러자 쑥, 담장을 넘어가버리는 혜지. 괜찮은것일까? 알려면 나도 당장 이 담장을 넘어가봐야 하겠지.
나는 담장끝에 손을 짚고, 발을 내딛고서는 가볍게 담장위로 올라가 다시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있다, 혜지는 똑바로 길 위에 서있었다.

“서혜지 뭐해?”
“응… 응?”

넋나간 표정. 내가 물어보자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다는듯이 이쪽을 쳐다보고선 베시시 하고 웃어버린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아무렇게나 흘려버리고서는 그녀가 보고있던 풍경에 시선을 옮겼다.
……우리동네에 이런 풍경이 있었던가? 마치 영화에서나 볼수있었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타일,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져있는 꽃화분들. 인적하나 보이진 않지만 마치 사람이 살고있을법한 곳. 등 뒤의 담쟁이덩굴이 말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초대받은거에요’ 라고. 웃기지도 않는 얘기지만… 이곳은 우선 상식외의 장소같았다.

“아…….”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에서는 꽃잎이 춤추며 내리고 있었다. 여기 어디에도 꽃을 뿌리는 사람도 없는데, 꽃잎을 흩날릴 나무도 없는데 그 연분홍 꽃잎은 흩날리고 있었다. 혹시 궁금해서 흩날리고 있는 꽃잎 하나를 잡아보았다. 벚꽃잎은 아니였다. 한번도 보지못했던 꽃잎이다.

“혜지야… 우리 꿈속에 있는건 아니지? 아야야야야얏.”

그녀가 아무말도없이 내 뺨을 주욱, 하고 잡아당겼다.
아픔은 확실히 있었다.

“꿈이 아닌가봐…….”

나는 아직 아픔이 가시지않은 뺨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향했다. 우리가 걷고있는 곳은 벽돌같은게 빽빽히 깔려있는 인도였다. 차도로보이는 곳에도 똑 같은 타일이 깔려있었지만 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이 있는데로,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막길이 점점 완만해지고, 삼거리길이 나와 모퉁이를 돌아가려 했을 때.
용도모를 건물이 있었다.

“와, 예쁘다.”

혜지가 감탄하듯 말했다. 마치 꽃정원 사이에있는 아담한 탑 같은 느낌이였다. 마치 벽돌들을 쌓아 고풍적인 느낌을 살리려는것과 동시에 현대적인 것을 지우지않으려는듯한 느낌이였다. 말로해서는 잘 모르겠지? 아마도 직접봐도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모를텐데 뭐.
겉보기에는 음식점? 레스토랑? 카페? 그정도 같았다. 첫번째 계단을 올라가면 야외 테이블도 있었고, 두번째 계단을 올라가면 깨끗한 유리문이 있었다.

“하랑아, 우리 들어가볼까?”
“야, 야… 서혜지. 어딘줄 알고 들어갈 생각이야?”
“그래도… 나쁜데 같진 않잖아?”

그렇게 말하며 폴짝 폴짝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혜지, 난 하는수없의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딸랑 딸랑, 예쁜소리를 내며 울리는 문에달린 종소리. 건물… 역시, 예상대로 그곳은 카페였다.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인테리어, 테이블 위, 그리고 카운터. 전체적으로 밝고 상쾌한 느낌이나는 카페 내부는 굉장히 조용한듯해 보였다.
그야… 카운터도, 홀에도. 아무도 없었으니까.

“누구 안계세요?”

혜지가 소리내어 불러보자,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쾅쾅쾅 우당탕탕!  발소리와함께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 그와함께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카운터 바로 뒤에있는 문을 박차고 나온 것은 예쁜 웨이트리스복장을하고 긴 갈색머리를 한 어느 소녀였다.
나이는 우리또래쯤?

“아, 어서오세요!”

그녀는 발랄한 목소리로 그렇에 인사하고선 싱긋 웃었다.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 나와 혜지가 그녀와 카운터, 그리고 홀 주위를 천천히 들러보고있자 그녀는 당황한듯이 입을 열었다.

“그, 그게요! 손님! 다들 잠꾸러기라 그렇습니다! 개점시간이야 지나긴 한데 다들 어제 너무 노는바람에…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런다고 해서 절대로 영업 안하는건 아니니까요. 우선 맘에드는자리에 앉아주세요, 주문받겠습니다~”

그녀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우리는 손을흔들며 아니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와 혜지는 창밖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고, 곧바로 그녀가 다가와 우리들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심플하지만 예쁘게 장식된 메뉴판이였다.

“주문하시겠어요? 오늘 같은 더운날하면 역시 만인의 아이스티겠지만, 차가운걸 좋아하신다면 두분이서 빙수류나 파르페같은것도 추천드려요.”
“응… 그럼 저는 아이스티───,”
“절대 빙수!”

혜지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얼굴이 가까워, 서혜지.

“왜, 왜그래…….”
“절대 빙수먹을거야. 빙수 하나만 시켜서 절대로 하랑이랑 같이 먹을거야! 사 이 좋 게!”

‘사이좋게’가 묘하게 강조되어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웨이트리스와 혜지는 그렇고 그런 눈빛을 교환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로써는 알수가 없었지만 그런 눈빛교환만으로도 그녀도, 혜지도 꽤 즐거워해보이는듯 했다.

“서혜지… 빙수가 그렇게 먹고싶어?”
“하랑이랑은 절대로 먹고싶어.”

기대충만의 눈빛이였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했느냐하면 내가 눈을 마주치지 못할정도.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해서 창밖을 바라봤다.

“얼레?”

창밖은 신기하게도 이제까지 우리가 봐온 장면을 비추고있진 않았다.
우리가 걸어온 벽돌타일바닥,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자동차 역시 거리낌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방금까지 보고있었던 꽃잎은 흩날리지 않는다. 마치 꽃밭 같은 풍경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게 있다면, 이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볼수없다는 이야기다. 아니, 적어도… 우리동네에서는 이런풍경따윈 볼수가 없다.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이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우리나라에선 절대로 볼수없는 자동차들 뿐이였다.
말하자면 외국, 유럽의 어느 도심의 한가운데에 있는듯한 느낌이였다. 이건 나의 착각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보고있는 이 창밖의 풍경이야말로 현실이 아닌것일까?

“빙수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희 요리사랑 바리스타가 아직 출근하지 않아서… 어깨너머 배운걸로 제가 한번 만들어봤는데, 어떠신지 맛좀 봐주실수 있을까요?”

글라스 위로 수북히 쌓여있는 얼음조각들. 그 얼음조각들 사이로 시럽이라거나 젤리라거나 과일들이 잔뜩 얹어있는 빙수가 이제야 나왔다. 요리사가 없다고? 그럼 이건 아마추어의 솜씨라는건가.
나는 조심스레 스푼을 들어서 빙수를 섞기 시작했다.

“맛있어.”
“먼저 먹지마.”

다 안섞였다고.
혜지는 다 섞이지않은 빙수를 몇번이고 입안으로 넣어놓곤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이정도로 빙수를 좋아했었나? 잘음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좋아하는 혜지를 본것도 오랜만인거 같다.

“두분, 연인이세요?”

푸웁!
나는 그만 섞고있는 빙수그릇을 넘어뜨릴뻔하다가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고선 그 말을 꺼낸 웨이트리스를 바라봤다.

“어머, 그렇게 보여요?”
“서혜지 너!”

그녀는 한술 더뜨고…….
우리의 이런 모습이 즐거웠는지 웨이트리스는 작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후후… 농담이에요. 두분 너무 즐거워보여서요. 그렇게 즐거워보이시는건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엑… 놀란눈으로 웨이트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친절하게 웃고있었다. 왠지모르게 그녀가 크게보여서 조금은 주눅들었지만, 나는 신경쓰지않고 빙수를 한스푼 떠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도는 차가운 느낌, 괜찮은 맛이였다.

“네, 맛있어요.”
“고맙습니다 손님.”

그녀가 다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선 다시 무언가 할일이 있는지 꾸벅, 다시 실례하겠다는 인사를 하고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카운터 뒤에있는 문으로 들어간것일까? 저곳이 뭘하는곳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잠꾸러기 직원’들을 깨우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

나는 쉴새없이 빙수를 입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이러다 배탈이라도 나지 않는걸까? 상관없지만…….

“좋지않아? 사랑.”

혜지가 한쪽손으로 턱을 괴고선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천진난만해서 나까지 벙, 쪄버렸지만, 그것도 한순간.

“나쁘진 않아.”
“그래?”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더 즐거운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있을까? 알수없지만 혜지의 표정을 빌리자면 분명히 좋은표정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하랑아.”
“응?”
“오늘밤 기대할게.”

기대하지마 그런거…….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말없이 빙수그릇을 비워내고 있었다.




-
“잘먹었어요, 그러니까 계산은…….”

혜지가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낼려고 하자, 이제 막 나타난 웨이트리스는 놀란눈을 하며 전혀 계산을 할 생각을 하지않고 있었다.

“아뇨, 아뇨아뇨. 안내셔도 되요. 어차피 정식영업한것도 아니고, 두분한테는 제가 제맘대로 만든걸 드렸는데요. 오히려 저희가 돈받는게 더 죄송할 따름이에요.”
“그런, 가?”

혜지는 웃으며 지갑을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대로 가기도 뭣한데, 어떤걸로 보답해야될까…….
이름이라도 알아둘까 싶은 마음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미소를 잊지 않는 얼굴, 그와함께 웨이트리스를 입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명찰일까? 알루미늄재질로 보이는 그 반짝이고 깔끔한 이름표에는 검은 필기체로 ‘Ariah Café Noir’라고 새겨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업 번창하세요!”

혜지가 먼저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난 그 뒤를 아무말 없이 따를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 있는 웨이트리스가 손짓한다. 안녕히, 언젠가 저희가게에 다시한번 들러주세요. 그때는 정말 제대로된 빙수를 대접해 드릴게요.
그녀의 미소에, 나 역시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딸랑 딸랑, 카페문에 달려있는 종이 울렸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땅을 딛는 순간.

“어?”

들어오기전에 봤던 꿈 같은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언제나 평소 같은 성원동 주택가의 골목이 눈앞에 펼쳐지고있었다. 아직 해는 지지않았다. 새빨간 노을이 그림자를 만들어가며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어?”

혜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역시 등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그저 누구의것인지 모를 주택의 담벼락만이 있을 뿐이였다. 그곳에는 담쟁이덩굴도 없고, 분홍색 꽃잎도 없었다. 벽돌타일로 되어있던 바닥은 어느샌가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 바닥이 되어버렸다.

“꿈은… 아니지?”
“아닌거 같아… 꿈.”

내 물음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두사람이 같은 꿈을 꿀리가 없겠지, 꿈이였으면 이렇게 생생히 기억날리가 없겠지. 웨이트리스의 목소리와, 빙수의 맛. 그리고 이름표에 붙여져있는 그 이름.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아마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겠지.

“…이것도 ‘재생’의 능력일까?”

혜지가 갑작스레 그렇게 물었다.

“잘 모르겠는걸?”

잘은 모른다. 하지만 알거 같은 기분도 들긴 했다. 사이코메트리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꿈 같은 현실을 꾸는 사람이 없을까? 만약 그저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라 하더라도, 그저 꿈만 같은 현실이라 해도, 평생 잊혀지지않을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 풍경, 그 맛,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미소.

“요하랑, 기분좋아 보이는데?”
“서혜지, 너도 만만찮게 기분좋아보여.”

서로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언제나처럼 손을잡고, 집으로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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