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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수필]하나 다를 것 없던 하루

2008.05.25 16:57

라온 조회 수:391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tv나 돌려보다 못 견디게 읽고 싶은 것이 문뜩 떠올라 밖으로 나왔다. 학교도서관은 토요일이라 문을 닫았을 시간인데다 연체를 해서 책을 빌릴 수도 없으니 택시를 타서 무작정 가까운 도서관으로 데려다 달라는 말을 했다. 기사아저씨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손님에게 좋은 도서관을 찾아주려는 건지 잠시 돌다가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도서관 앞에서 세워주셨다.

도착하고 나니까 괜히 불안해졌다. 생각해보면 도서관이라고 해서 꼭 일주일 내내 하란 법은 없으니까. 옛날 살던 곳이 일주일 내내 하다보니 다른 곳도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괜히 공돈 날리고 기분 나빠지는 걸 취미삼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혹시 쉬고 있다면 대충 화풀이나 하다 갈 거라는 실없는 결심을 하며 입구에 닿았다.

다행히 도서관은 열려 있었다. 무작정 열람실로 들어가 회원증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증명사진이 없어 언덕길을 내려가 사직사거리에서 사진관을 찾아 헤매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회원등록을 했다.

800, 그리고 그 중에서도 06번, ㅂ으로 시작되는 작가, 그렇게 잠깐을 찾아보니 책장의 몇 칸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작가가 보였다. 박완서, 내 눈 앞엔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창작의욕을 불태워주는 값진 연료가 있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박완서 아줌마(선생님보다 훨씬 좋지 않은가?)의 글에 열광하느냐고, 괜히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수줍게, 하지만 끝없이 그 이유를 말할 것이다. 아줌마의 글은 내 이상이고 그 마음 속 어딘가에 천천히 뿌리박아 한동안 떠날 줄 모르는 그런 글을 닮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박완서 아줌마의 글을 처음 제대로 접한 것은 아마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MBC에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책을 홍보하고 국민들에게 읽을 것을 권유하는 방송이었는데 나는 어린 마음에 남들 따라 책을 읽는다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아서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책의 내용이 꽤 맘에 들어 수업시간에 몰래 볼 생각으로 빌려보게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아줌마의 생을 생생하게 쓴 자서전같은 소설이다. 내게 있어 이 책은 글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박완서 아줌마의 소설은 정원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같이 인위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어 보는 사람을 절로 설레게 해준다. 물론 컨셉에 따라 감정의 기복과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름답다는 그 자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박완서 아줌마의 글은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런 정원이다.

박완서 아줌마의 글을 보기 전의 나의 글은 어땠나싶다. 당시의 내 글은 딱히 목표가 없었다. 게시판에서 리플이 많고 본 사람이 많은 글을 모방하긴 했지만 내 세상을 표현할 도구가 없었다. 어떤 글을 써야 될지 몰라 헤맸다. 아마 그 때 박완서 아줌마의 글이 없었다면 징크스니 뭐니 하며 재능없네 뭐네 하면서도 글쓰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나는 없었을 것이다. 박완서 아줌마의 글은 나의 이상이고 교과서였다.

잠깐을 헤멘 끝에 ‘꽃을 찾아서’라는 단편집을 골랐다. 1982~1986년의 글을 모은 것이라 소개되어 있다. 일단은 여기까지, 서문으로 책의 간을 본 후 빌리고 도서관 밖으로 나와 다시 책을 폈다.

첫 페이지에 눈을 붙이자마자 마음이 설레었다. 노트를 꺼내면 슬럼프따윈 잊어버리고 글이 술술 써질 것 같다. 누가 보면 오버한다고 핀잔을 주겠지만 이런 기분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아마 집에 가는 길은 꽤 길어질 것이다. 느릿느릿, 중간에 쉬기도 하고 일부러 뺑뺑 돌며 돌며 집에 가겠지. 평소에도 자주 그렇게 다녔지만 오늘은 정말로 전봇대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니느라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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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첫글(...)

수필이지만 소설적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생각해주면...

안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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