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36
2008.02.15 17:02
유난히 긴 것 같았던 밤이 지나고,
그 만큼이나 아침은 천천히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난방을 강하게 한 것도 아닌데도,
어쩐지 더운 느낌이 드는 아침, 평소답지 않게 기분나쁜 꿈도
신경쓰이는 기분도 없었다. 대신,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몸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이대로 요리를 한다면 땀이라도 흐르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건 싫다. 그렇다고 겨울에 냉방을 하는 것도
오묘한 문제, 몸을 가볍게 식히기로 한다.
오늘은 잠도 조금 뒤척이며 잔 것일까, 이불이 걷히지는 않았지만
구깃구깃, 나이트웨어도 다 걷혀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
"으음…"
일어나서 이불을 대충 정리한 뒤 속옷을 챙겨들고 욕실로 향했다.
문득, 욕실 문 옆에 속옷을 놓아두고 들어가려는데, 어제 밤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아침부터 난데없이 올라올 일은 없겠지.
그래도 나올때는 수건이라도 두르고 나오자고 생각했다.
나이트웨어와 속옷을 벗어 한 쪽에 정리해 두고,
샤워 배스에 들어선다. 그리고 레버를 올리자, 노즐로부터 물이
나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흐읍…"
차가운 물이 갑자기 몸을 식히자, 한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몸이 경직된다.
"하아…"
길게 내쉬어 지는 뜨거운 숨, 그리고 몸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디 클리너를 약간만 써서 가볍게 몸을 씻어낸 뒤, 다시
몸을 헹구어 낸다. 조금 더 끼얹는다면 추워질 것 같은 느낌,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머리칼에 물을 가볍게 털어내고,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낸다.
몸이 식어 준 덕분일까, 다행히 조금 전의 몸의 예민함은 가라앉아
있었다.
새 수건을 꺼내어 몸에 두르고, 천천히 욕실 문을 열었다.
…괜한데 신경 쓰는거겠지.
이내 그런 생각을 하고 활짝 문을 열고 나왔다.
두른 수건을 풀어내어 다시 한 번 물기를 닦아낸 다음 속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온다. 머리칼의 물을 한번 더 털어 내어 준 뒤에, 가벼운
헤어 드라이어를 이용한 건조. 적당한 길이에 심플한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를 끌어 올려 입고, 팔을 조금 힘겹게 꺾어 등 뒤의 버튼을
잠근다. 가운데 즈음 있는 버튼을 조금 힘겹게 잠그어 낸 뒤,
거울을 보고 확인.
그리고, 방을 나서서 1층으로 내려온다.
아직 마루는 일어나지 않았는지, 아래층은 조용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 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부엌에 들어서는데,
무언가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방에서 뭐라도 놓쳤나,
마루의 일이겠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에그 프라이와 토스트를 만들 때 즈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나?"
거실까지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자,
한 호흡 늦게 마루의 대답이 돌아왔다.
"응, 잘 잤어?"
마루의 목소리에 괜히 또 어제 밤의 일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마루가 들어 온 것일까,
왠지 내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부러 고개는 돌려 보지 않았다.
"밥 준비하는거야?"
마루는 아직 잠이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짐작해 보건데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모양.
조금 전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니까.
"그렇다. 씻고 와라."
마루는 그 자리에서 잠깐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걸음을 돌렸다.
마루가 나올 때 즈음, 난 겨우 자꾸 떠오르는 어제밤의 장면을
떨쳐내고 오트밀 죽과 샐러드를 추가로 준비할 수 있었다.
"잘 먹을게."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둘러보는 마루.
"그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혹시 기다리게 하지 않을까 해서, 간단하게 준비한 것이었으니까…
"저기, 에렐."
식사를 거의 마치고, 에그 프라이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려는데,
마루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무슨 일인가?"
그러자 조금 머뭇거리는 듯 얘기를 꺼내는 마루.
"그, 잠시 집에 좀 다녀와도 될까?"
집에 가지 말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뭔가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
집에 가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무슨 문제라도 잇는 것인가? 집에 가는 것이?"
의아해하는 나의 질문에 마루는 머리를 긁적인다.
"아니, 그게…… 출근 시간이 늦어지잖아."
그의 말을 듣자, 새삼 그가 이 곳에 나름대로의 일을 하러 온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어제는 왠지 묘하게 지나가 버렸지만,
그 동안 제법 충실하게 말을 가르쳐 주고 있었으니까.
"상관 없다. 다녀와라."
특별히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 처음 그와 얘기할 때에도 시간에 관한 것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래. 빨리 갔다 올게."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어서려는 마루,
"음? 차라도 마시고 가는 것은 어떤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금방 올 거니까. 1시간 정도면 충분할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겠지.
티 타임은 그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루는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선다.
....
금방 온다는 말을 한번 더 반복하며 마루는 집을 나섰고,
난 대문 앞까지만 배웅을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현관을 닫자 알 수 없는 적막감.
"……"
조용한것이 당연한데, 무얼까, 새삼 느껴지는 이 느낌은.
침묵이,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뭐, 당연한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어제의 일로 쓸데없이 예민해 져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어제는 당황한 모습을 보여 버렸으니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추태마저 보였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거나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지만,
결국 떨쳐내도 다시 떠오르고야 만다.
"후우…"
거실의 소파에 걸터 앉아서, 괜히 차오르는 것 같은 숨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보면, 어제, 이 자리에서 나란히 앉아 있었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살며시 더듬어 본다.
그래, 그리고 분명히…
입술이…
"하아…"
숨이 가라앉기보다 오히려 가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다른 생각을 하자.
이 알 수 없는 기분, 적응을 할 수가 없다.
그러고보면, 로베스가 이틀 후면 도착하는구나.
반가워 해야 할까…
기왕이면, 내가 남겨주고 온 것들을 써 가면서, 그 곳에서
편하게 살아 주었으면 했다. 내 곁에 있는다고 해서, 잘 될 것도
없을 터인데, 알려주지도 않은 전화번호와 주소까지 찾아내 가며
찾아 오다니, 그 아이도 말리기 어려운 아이다.
사실, 속에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했던가, 혼자가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누군가를 찾게 되는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난 겨우 내 일생의 1/10도 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렇게도 떠올리고, 내 운명에 냉소를 지으면서도 로베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억지로라도 떨어졌나, 하고 생각했더니,
로베스는 다시 날 찾아오고야 마는 것일까.
"후우…"
원망할 수도, 반길 수도 없는 오랜 친구.
그 모습을 떠올리며, 잠깐 소파 위에서 눈을 감았다.
....
이대로는 잠이 들어버리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어느 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한시간쯤 걸린다더니, 한시간 반 정도는 지나 버린 기분.
생각보다 눈을 오래 감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잡 생각이 길었던 것일까.
혹시나 하는 기분에 현관을 열고 정원에 나서 보니, 저 쪽에서
기척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
차 소리가 들린다, 마루는 차를 타고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차가 있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마루는 아니겠지.
그렇게 다시 들어가려는데, 대문 앞에서 소리가 멎었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번, 그리고 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