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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마루 - 29

2008.02.08 02:07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201

에렐이 일어난 뒤에도 움직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새하얗게 타버린 머릿속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바라볼 뿐이었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이 손에 담겨 되돌아왔다.
지나치게 앞서나가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최소한 부정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손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에렐의 손에서 전해지던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다.
두근거리는 심장, 그와는 달리 멈추어 있는 두뇌.
그렇게, 에렐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앉아있는 것만을 할 수 있었다.

“마셔라.”

에렐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멈추어 있던 머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리자 주스잔을 내 앞에 내려놓는 에렐의 모습이 보인다.

“……아, 그……. 고마워.”

에렐의 모습을 보자 호흡이 한층 가빠지는 것 같았다.
태연함을 가장하려 애써 평범하게 답해보려 하지만 말을 더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에렐의 모습은 평소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주스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양손으로 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시듯 조금씩 마실 뿐.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며, 똑같이 양손으로 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적신다.

“…….”

“…….”

둘 사이에는 말이 없다.
그저 주스잔이 천천히 줄어드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

에렐의 모습을 힐끔 바라본다.
에렐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잔은 반 이상 줄어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이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쩐지, 우습네.”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제서야 에렐이 약간의 반응을 보여줬지만 잠시 뿐이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오늘 처음으로 발걸음을 제대로 내딛었다.
떨리는 한 걸음.
겨우 조금씩 무언가가 변해간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멈추어 있을 것인가?
이어지는 걸음은, 조금 쉬울것 같았다.
단지, 스스로가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에렐.”

주스를 마신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어지는 대화.
하지만 다행히도 에렐은 그에 답해주었다.

“무슨 일?”

그에 잠시 숨을 들이킨다.
한껏 들이킨 숨 속에 가라앉는 마음.
에렐의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전한다.

“그…… 손, 다시 잡아 봐도 될까?”

“…….”

내 말에 에렐은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에렐의 손을 잡았다.

약간 뿐이었지만, 흠칫 하는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

단지 손을 잡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느껴진다.
차마 에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다시 잔을 향해 시선을 돌려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 뿐.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이 정도 만으로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으니까.

에렐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에렐.”

다시 한 번 에렐의 이름을 부른다.
시선은 여전히, 에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쪽.

더 이상 나갈만한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나아가고 싶은 마음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끌어주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것을 무작정 기다리기 보다는
부탁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스스로를 바꾸어 나간다. 조금씩이나마,
그렇다면, 에렐 역시 조금씩은 바뀌어주지 않을까?

“말을 해라.”

에렐이 말을 재촉한다.
그 말을 들은 뒤에야, 겨우 고개를 돌려 에렐을 바라본다.

“혹시…….”

말을 꺼내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더 이상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발을 내딛는다.

“에렐의 옛 이야기, 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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