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28
2008.02.07 05:44
마루는 내가 건네어 준 커피를 조금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에 대었다. 낯선 것을 대하는 눈빛,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표정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커피를 천천히, 깊게 들이 마시고 있는 모습,
어쩐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로베스 외의 사람에게 커피를 만들어 준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낯선 커피를 대하는 것 처럼,
나도 낯선 무언가를 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생각해 본다면 내가 사람을 이렇게 대하고 있는 일 부터가
낯선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대로, 이래도 괜찮은걸까.
처음에 마음 먹었던 것 처럼, 계약자의 관계로만 끝내는 것은
이미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런 관계일 뿐인 남이라면,
이 정도로 신경이 가지는 않는다.
그래, 여긴 아누라크가 아니고,
내가 살던 레페스티아의 변두리도 아니다.
내 눈과 머리칼을 보고 마녀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다.
난 그저 조금 낯선 모습의 이국인일 뿐…
불행은 불행을 만든다고,
그들의 인식이 날 그렇게 보이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들이 나를 저주해서 내 저주받은 운명이 만들어 졌다는 생각도
해 보았었다.
하지만…
나를 저주하지 않은 이들조차.
내가 잃고 싶지 않았던 이들조차,
내 앞에서,
내 눈빛처럼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평소라면, 이 곳에 오기 전의 나였다면…
망설임 없이, 눈 앞의 사람을 타인으로 만들고
떠나게 했을 터였다.
그런데, 난 그러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망설이고, 필요 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고,
물러 터지게 만드는가.
"에렐?"
그의 목소리가 잠기어 가는 나를 깨웠다.
그대로 한참을 그를 빤히 바라보아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내 시선에 의문을 표하는 마루,
왠지 모르게 실수를 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뭐 이상한… 말 했어?"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루 때문은 아니었기에.
"아니라고 했다."
나의 망설임 섞인 대답은 더욱 의문을 불러 올 뿐이겠지.
말할 수 없다면 잘라 버리는 편이 편하다.
"뭐… 그럼 됐고."
내 부정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는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고는 컵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리고, 나도 커피에 입을 대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두 개의 컵이 비었고,
난 빈 컵을 들고 일어났다.
"이제 되었나? 더 필요한 것은?"
처음 나를 부른 것이 커피를 타 달라는 부탁이었기에,
용무가 그것 뿐인지를 묻는다.
어딘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루,
하지만 그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짧은 기다림의 시간,
난 그 시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망설임이 끝나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시간이라면 지금도 내고 있다.
조금 더 긴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이라면 그다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대로 얘기해도 될 것을 다시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
앉아 달라는 의미인 듯, 마루는 옆 자리 소파를 살짝 쳤다.
굳이 다시 부탁을 해 가면서까지 부르는 그를 보며, 컵은 잠시 후에
정리하기로 하고,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나를 보며, 어딘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은 그의 눈동자.
난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에렐."
빤히 바라보며 나를 부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를 답아 곧바로 대답을 내어 주었다.
"듣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재촉하는 투가 되어 버렸을까,
내 답에 그는 살짝 위축되는 듯 했다.
하지만 금방 다시 되살아 난 듯 다시 시선을 마주하며,
긴장이라도 한 것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숨을 내쉬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줄래?"
숨겨둔 이야기라도 꺼내려는 것일까,
거듭 할 말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 그.
이번에는 난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은…"
말을 멈추고 침을 삼키는 마루,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에렐을 처음 봤을때, 다른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났었어."
마루가 나를 처음 봤을 때의 눈빛.
그 때는 그의 표정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어딘가 아득한 곳을 보는 듯한 눈빛만이 기억이 났다.
"으음…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건 실례라고 생각해,
그래서 미안하지만… 사실 처음에는 나도 잘 몰랐어.
어딘가 먼 곳에서 온 신비한 누군가를 보는 기분이었고…"
그는 시선을 계속 마주하지 못하고 내가 다시 내려놓은 빈 컵을
향해 시선을 피한다.
"아하하, 먼 곳에서 온건 맞구나…
이 집에 왔을때 좀 더 확실히 느꼈지. 응, 난 이 집이 익숙해.
이 집의 전 주인은… 얼마전까지…"
망설임, 또다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루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얼마전까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었어. 이 집의 전 주인은."
또다시 나의 대답은 작은 끄덕임.
"지난번 바닷가도… 예전에 그 사람이 날 그렇게 데려갔었지.
미안, 내 기분만 생각하고 에렐을 억지로 데리고 가서…"
마루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그리고, 난 숙여진 그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싫었다면 가지 않았다."
"응?"
그가 다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바다,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땐 갑작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라."
마루는 머뭇거리다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다행이네."
다시 빈 컵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고개를 살짝 돌린 채 그는 웃었다.
"아하하… 잘 모르겠어, 아직은…
에렐에게서, 그리고 지금 내 모습에서,
예전의 나와, 그 사람의 모습을 보려고 했었던 걸까…"
그리고, 천천히 마루는 나를 바라본다.
머뭇거림이 조금 담겨 있지만,
눈동자에 망설임은 없었다.
"미안…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난 그림자를 찾는건,
내 기분만을 비춰 보는 일은, 이제 하지 않아.
그래서… 얘기하고 싶었어."
그렇게 잠시 마주 보던 그의 시선은, 다시 조금씩 숙여진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손에 무언가 닿는 것을 느꼈다.
마루의 손이, 내 손 위에 살짝 얹혀져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어딘가 멍청한 소리를 내 버리고 만다.
그런 나를 보며 마루는 웃었다.
"아하하, 난 이정도가 한계인가봐."
그리고는 마루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 숙여 버렸다.
…
그리고,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난,
마루의 손을 조금 더, 꼬옥 잡았다.
"…에렐?"
약간 놀란듯한 마루의 눈동자.
잠깐이었지만, 난 그렇게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그 잠깐이 지나고,
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 일어났다.
"…커피 외의 마실 것을 가지고 오겠다."
"으, 으응…"
난 왠지 모르게 갈증을 느끼며 그렇게 부엌으로 들어와,
마루가 보이지 않는 위치에 와서야 멈추어 섰다.
왜인지 모르게,
숨이 가쁘다.
어째서일까.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 진 것 같았다.
그렇게 난 한참이 지나서야,
난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어 들었다.
그 차가운 느낌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컵에 채운 주스를 들고, 난 다시 마루가 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댓글 5
-
ronian
2008.02.07 06:01
이런 새벽 6시에 와보니 올라와있군요 [...] 미에링님은 새벽을 지키는 수호자이십니까 [먼산] 그나저나 마루와 에렐의 러브러브 진행도가 치솟고 있는 기분. 와아아아 부럽다. 우와. 만년솔로인생인 내게 염장을 하는것인가! [어이?] 다음 화가 심히 기대되고 있습니다 오오. -
미에링
2008.02.07 10:31
두근두근.. 새벽은 두근거리잖아요. (그러냐...)
그러고보면 이 하루밤에 진도가 확? 나간 느낌도. .....[.....]
토닥토닥. 힘내요.
바카루냥이 다음편을 어서 올려야.. <-[.....이상하게 붙이지마] -
카츠라
2008.02.07 12:00
오오 분위기 고조~! 정말 두근두근 모드네요.
카루나씨 어서 다음 다음! -
카와이 루나링
2008.02.07 15:18
... 바카루나.. 결국 타이틀 고정?
... 음... 러브러브~ 휴휴~ -
미에링
2008.02.07 17:09
자 이제 남은건 서비스신뿐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