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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20

2008.01.19 21:19

미에링 조회 수:192




그곳은 언제나 보아 오던 정원 구석의 벤치.
이젠 말라버린 덩쿨이 벤치의 다리를 잔뜩 휘감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차가운 바람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벤치에는 누군가가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모습,
아버지도 집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아.

"오늘은 어때?"

그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물어 왔다.
분명히 모르는 사람일 것인데도, 난 익숙한 느낌으로 답을 해 버린다.
마치 아는 사람인 것 처럼.

아니, 그는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르는데도,
난 당연한 듯이 답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도 느끼지 않은 채.

"대체 어제, 뭘 했던거야?"

난 아무 말 없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도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지,
정원 저 쪽의 나뭇가지와 하늘이 닿는 부분을 바라보며 있었다.

바람일까, 머리칼이 뺨을 살짝 간지럽힌다.
차가운 바람 사이로 알 수 없는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일까.

"고마워."

무엇에 대한 인사일까, 난 그렇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나 스스로 편안한 기분에 젖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파아란 하늘은 조각 구름들을 군데 군데 띄워 놓고 있었다.

"잘 자요, 하얀 공주님."

그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채,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미소짓는다.
그리고, 곧 주변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정원도, 하늘도,
벤치도,

그의 모습도.


모두.





…………
……

"…아."

새하얗던 눈 앞이 시려 왔다.
그리고 뿌옇던 모든 것이 한 순간 선명함을 되찾았다.
약간 어두운 실내, 그리고 난 그제서야 꿈을 꾸었다고 자각한다.

몸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난 소파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고개를 들자, 바로 옆에 얼굴이 있었다.

"…뭐 하나."

마루는 난처함과 아쉬움을 섞어 놓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또 한 가지의 감촉을 확인했다.

다급히 그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서야 주변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벽에 걸어둔
시계를 보고 지금 시간이 저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는 것은..
마루가 도착한 것은 분명히 아침…

"계속 이대로였나."

끄덕이는 대답.

"미안하다."

고개를 가로젓는 마루.

"아니야, 나도 앉아서 좀 쉬었어."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어주지만, 시간으로만 봐도 6시간도 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내 옆에 앉아서
기댄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의 모습에 잠들었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보다 더 신가한 것은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잠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몸이 닿았는데도 잠이 깨지 않아니.
어째서일까. 최근 내가 그렇게 지쳐 있었던 것일까…?

"시간, 늦었다."

오늘은 이대로 일까, 이미 시간은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루가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괜찮아. 그보다, 배고프다."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가벼운 콧노래 소리도 간간히 섞여 온다.
그러고보니, 마루, 내가 식사 준비를 시키거나 한 일도 없는데
어느새 저녁식사 준비를 스스로 하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슬쩍 돌아보며
눈짓으로 끄덕인다.

분명히 그대로인데,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태우지 말아라."

뒤에서 내가 해 줄 말한 말이라고는 이정도 뿐이었다.
그의 콧노래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왠지, 줄곧 느껴지던 마루 어딘가의 무거운 느낌이 사라져 버린 느낌,
그의 모습이 낮설지 않다. 닮은 사람도 뭣도 모르는데, 어째서일까.
며칠동안 같이 지내다시피 한 탓일까.

하지만 단순히 사람을 많이 본 느낌과는 달랐다.
무엇일까.



그렇게 그는 화려한 식탁을 만들어 내었고,
난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을 몰래 고민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식사를 시작하면 평소 돌아가던 시간에 늦어 버릴텐데…

"돌아갈 때가 지났다. 곧 차량 운행도 종료된다."

그는 스푼을 들고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어차피 가까운데 뭐. 정 어려우면 자고 갈까?
  농담이야, 친구 집이면 그러겠지만.. 금방 가니까, 괜찮아."

그는 상관 없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문득,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밤, 혼자 올려다 보먼 천창과
새벽의 햇살이 차례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난, 마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고 가라."



마루가 스푼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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