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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마루 - 05

2007.12.26 21:15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223

선을 넘는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뿐.

초인종이 울리는, 달아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도착해 있는 곳은 너무나 익숙한 집 앞.
어느새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다.

난 왜 이 곳에 와 있는거지?
난 왜 그 사람을 만나러 이 곳에 온거지?
대체 그 사람을 만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저문다.

기억 속에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조금 전 그 위에 덧씌워진 새하얀 여성의 모습.
끝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새롭게 새겨지는 현재의 모습들.

역시, 그냥 가 버릴까?

무작정 이 곳에 와 버리기는 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
제정신을 차린 지금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다짜고짜 불러낼만큼 뻔뻔하지 않다.

몸을 돌린다.

방금 전의 일은 스스로의 변덕.
더 이상 이 곳에 자신이 관계될 일은 없다.

사랑했던 사람은 추억 속에만 남아서 언젠가는 잊혀지리라.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영화를 본 것 마냥 꿈과 함께 흩날리리라.

그래, 그렇게 모든 것은 없던 일처럼…….

“응? 누군가 했더니, 토종인이었군.”

하지만, 뒤에서 들려온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조금은 낮게 울리는 듯한,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벼운 느낌이 살아있는 미성.
여전히 단어의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 이국인의 목소리.

“무슨 일인가? 역시 차 한 대 필요한가?”

등 뒤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그 하얀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와서 닿는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 있나?”

그녀를 만났을 때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일 뿐인데, 어째서일까?

“어이, 토종인.”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간다.
한 걸음,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진다.
침을 꿀꺽 삼킨다.

“마루다.”

“……뭐?”

“내 이름은 ‘마루’다. ‘수입인’이라고 하기 전에 고쳐줬으면 하는데.”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

“응? 아아, 그런가? 사과 깎지.”

그리고, 그 말을 유연하게 받아 넘기는 한 여성의 목소리.

“여전히 말하는 것은 엉망이군.”

등을 돌린 채, 그렇게 말한다.
바보같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런 이야기나 꺼내고 있다니.

“별 수 없다. 아직 이 나라 말은 않다. 익숙하지가.”

그런 말과 함께 가볍게 ‘후우~’하고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있을까?
이렇게 뒤돌아 서 있는 나를 보고 비웃고 있을까?
아니면 그런 말을 한 자신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을까?
혹, 그저 무덤덤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용건은 그 것뿐?”

이어지는 물음.
그 말에 다시 한 번 속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꺼내려 시도해본다.

하지만, 역시 여의치 않다.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단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것을 내딛기에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했다.
단순한 겁쟁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렇기에, 난 아직도 이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 때도……, 지금도…….

“이상한 친구로군.”

대답이 없는 내게 그녀가 말을 건넨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답할 수는 없었다.

정말…… 바보 같다.

“…… 탈 말이 없으면 실례하지.”

그리고, 결국은 기다리다 지친 것일까?
조금 전과 변함이 없는, 하지만 이상하게 가시가 돋힌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가시가 가슴을 찌른다.

육중한 쇳소리.
쇠로 되어있는 검은색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또 다시, 한 사람이 떠나간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을 잡지 못하고 보내버린다.

불과 얼마 전에 있던 일.

그 때, 얼마나 후회했었지?
겨우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보냈던 일을.
한 번 잡아보려고도, 한 번 말려보려고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겨우 용기를 내어 이곳까지 왔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가?
다시 한 번, 손 내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웅크릴 것인가?

선을 넘는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해 후회하는 일은 이미 경험해 보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잠깐!”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내 딛지 못한 채 공중에서 파들파들 떨고 있는 발.
그 다리에 힘을 넣는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줄기의 의지를 불어 넣는다.

“연어演語. 가르쳐줄게.”

비록,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선을 넘는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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