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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02

2007.12.24 18:15

미에링 조회 수:192




달칵.
아직 떠나지 않은 차의 문이 열린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고 해야 할까, 로베스는.

"정말 혼자서 괜찮겠니?"

바닥에 쌓인 눈이 밟혀 소복한 소리를 낸다. 그렇게 난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내 딛었다.

"새삼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바람이 분다. 내 말을 듣고 있을 로베스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부러워했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겠지.
또 그 애매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겠지.

"돌아가. 네 숙박비까지 내줄 만큼의 여유는 아직 없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가도 움직이는 기척은 없다.
또 바보같이 뒷 모습이나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렇게 열 걸음쯤 멀어졌을때, 겨우 들릴듯한 목소리로
로베스가 말했다.

"정리 되는대로 나도 이리 올테니까..
  잘 지내고 있어. 너무 혼자 쓸쓸해 하지 말고..
"

그 말을 끝으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직도 출발이 서투른건지 문이 닫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엔진 소리가 들린다. 운전석 위치부터가 반대이니 헷갈릴 만도
하지만. 공항에서 빌린 차, 어디 부딛히거나 하면 귀찮아 질텐데.

그렇게 엔진 소리는 내 걸음보다도 훨씬 빨리 내게서 멀어져 갔다.
조용한 거리. 하지만 이 곳의 조용함은 이제까지 내가 있던
레페스티아 변두리의 조용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것이 바다 건너의 이국의 느낌이라는 것일까.

생전 처음 와 보는 나라. 아직 이 곳의 언어도 완전히 익숙해 지지
않았다. 낮밤이 반대인 나라까지도 왕복하는데 한나절이면 된다지만
아직 아누라크의 사람들 대부분은 국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라온 나 또한 별 다를게 없었다.
세상이 넓다지만 난 그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릴 일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곳이 내 고향이었단다-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평소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지냈던 말이었다.
아버지도 굳이 묻지 않는 나에게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고,
난 나라 이름 정도만 기억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 내게 아버지가 남긴 편지는
마치 나를 유혹하듯 이 곳으로 이끌었다.
언젠가부터 나를 보는 모두가 나를 저주받은 자라 하여
멀리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것은, 나 또한 나의 운명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일까..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일로 나에 대한 그런 인식은 더욱 심해졌고,
그 이후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기색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어릴 때 부터 친 언니처럼 나와 함께 지냈던 로베스만이
날 떠나지 않았다. 그래, 유일하게 내 곁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는 안심이 된 걸까. 그녀를 굳이 내가
뿌리치지 않은 것은…

그 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이젠 사람도 거의 남지 않은
넓기만 한 저택의 소유권도 로베스에게 넘겨 두고,
난 재산의 반 정도만 내 계좌로 옮겨둔 뒤 아버지의 편지에 따라
이 곳으로 왔다.

이런 애매모호한 말만 따라서 오다니, 아무렇지 않다던 나도
딱히 그 곳이 내키지는 않았던 걸까. 가질 것도 애착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을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치르릉,
한참을 걸어 도착한 2층집 앞의 대문. 버튼을 누르자 조금 오래된
벨소리가 들린다. 주소도 확인 했고, 사진으로 본 모양과도 같다.

=누구세요?=

아직은 이 나라 말을 듣는 것이 어색했다.
한달동안 속성으로 익힌 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찬찬히 의미를 생각하고, 최대한 발음에 유의해서 말을 꺼낸다.

"이 집, 계약자 에렐리니아 라고 한다."

그런데, 어쩐지 답이 없다. 무언가 실수한건가?

=잘못 오셨네요=

달칵. 이건 아마도 인터폰이 끊기는 소리일거다.



"....................."


난 대문을 강제로 열어 버릴까 하는 충동을 참아내며
다시 확인을 했다.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다니,
예의란 건 없는거냐…


분명히 사진과 같은 집인데.
주소도 분명히 확인 했다, 사림 중천가의 140-5…

아, 여긴 148-5 다.

…잘못 봤군.
다시 찾아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실수로 인한 수치심 때문일까, 더 이상 잡생각은 나지 않았다.
언제 묻은건지 하얀 코트에 묻어 있던 눈을 털어 내며, 난 다시
거리를 걸었다.

생각보다 한참을 걸어다닌 모양인지, 어느 새 날이 저물거 가고 있다.
도착했을 때 이미 정오가 한참 지나 있었으니 새삼스러울건 없지만..
이렇게 계속 찾기만 하다가는 날이 저물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날이 저물기 전에는 도착하고 싶었는데…

방금 확인한 이 근처의 주소는 149-6 이었다.
어쩐지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약도가 너무 단순하다.
내가 외지인이라는걸 설명하지 않았던가?


아, …설명하지 않았다.


결국 난 계속 헤메이는 것 보다는 길을 묻기로 결정했다.
내키지 않지만 이렇게 계속 헤메는 것은 더 내키지 않는다.

정하고 나자, 왠지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둘러보는데,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난 그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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