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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Craneske . SIR Fantasy / Knight (5)

2007.09.18 20:09

로스나힐 조회 수:210

5.
시르는 소년을 준비시켰다. 자신의 재료로서 단련시켰다. 그녀의 작품에는 재료와의 교감이 우선시된다.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시르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켜야했다. 이번 소년 또한 그런 과정이 필요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물론, 호숫가에서처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강제 회유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을 이해 시켜야만 할 상황일 때의 이야기다. 시르는 재료와의 교감에 있어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년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즐길 것을 주었다. 다양한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과거의 이야기, 가족 이야기,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하지만 이름만은 묻지 않았다. 이미 시르는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이름은 중요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자신의 이름에 안주한다. 이름을 상기하는 것으로 자신은 비로소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르는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묻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호사스러운 생활로 소년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재료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점차적으로 소년이 자아를 잃어버리고 그녀가 되어가는 것을 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뒤 시르는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다양한 대화의 주제를 자신의 사상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대화의 강도는 계속해서 강해졌다.
인간은 평범하다. 기본적으로 평범하지만, 더러 뛰어난 인간이 등장하곤 하는 법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돌아간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재능을 믿고 노력했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적당히 얼버무린 말일 뿐이다. 그런 자들은 모두 기원이 다르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삶을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기원을 달리하는 자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여태까지의 천재들과 조차도 시작을 달리하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술가로서 생명을 재료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시르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반복적인 대화 끝에 소년은 어렴풋이 시르의 사고방식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소년의 반응은 점차 거부에서 관심으로 바뀌어갔고, 대화가 어느 정도 전해졌다고 생각한 시르는 이제 단숨에 소년의 사고방식을 뒤바꿔도 좋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소년을 작업실로 인도했다.
그곳은 소년이 처음 시르의 거처에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하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다가가지 못했던 장소였다. 소년에게 있어 거대하고 불길한 것이 중앙에 놓여있는 공간이었다. 시르는 소년을 붉은 천의 앞으로 인도했다.
소년의 시선이 무언가의 가리개에 집중되었다. 시르는 순식간에 베일을 벗기고 자신의 작품을 공개했다. 거대한 다리의 형상이 나타났다. 시체가 얽혀 만들어진 두 개의 다리는 방의 중심에서 기둥 같은 모양새로 서있었다.
기괴하게 꺾여 깊게 파인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시체들이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명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작품에 시선을 빼앗긴 소년을 보며 시르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의 완성도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시르는 천천히 자신의 작품세계로 빠져들어 갔고, 소년은 점점 시르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소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시르는 천천히 소년의 입을 응시했다. 어서 발설하라고 다그치고 싶어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단숨에 먹이를 낚아채는 상위종의 생물로서 그녀는 소년의 각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멋…….”

독액 시르가 담긴 주사기가 소년의 목덜미에 꽂혔다.

“져…….”

본디 시르는 1분의 유예기간을 가진 후 독극물로서의 작용을 하지만, 소년에게 주입된 액은 시르가 한층 더 진보시킨 것으로, 순식간에 소년의 몸 구석구석으로 향해 작용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몸이 떨렸다. 자신의 목에 꽂힌 주사기를 곁눈질로 보고 시르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시르가 웃었다. 양손에 메스를 들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메스가 소년의 하복부를 향했다. 피가 튀었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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