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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Craneske . SIR Fantasy / Knight (1)

2007.09.08 01:48

로스나힐 조회 수:237

1.

“해가 중천인데 일 안 가고 뭐하는 거야? 일어나.”

걸걸한 목소리가 방 안의 소년을 깨운다. 말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고귀한 집안은 아니다. 그저 더러운 방 한 쪼가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빈민인 것이다. 계급 제도 따위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제도적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귀족은 귀족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평민이었던 자들은 평민답게 평범한 위치에서 살아가고, 빈민이었던 존재들은 계속해서 빈민굴에서 썩어갔다. 평민에게만 해도 그렇게 흔하다는 돈을 벌 기회 따위 그들에겐 감히 일말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아빠.”

소년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불은 안에 벌레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이 불쾌한 느낌이었다. 이불이라기보다는 그냥 천 쪼가리 같았다. 곰팡이도 피어있었다. 하지만 빈민가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이불로 취급받는 물건이었다.

“뭐야?”

“잘렸어요. 어떡하죠?”

아버지 세이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빈민가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죽는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하루 종일 부려먹는 악덕업자 들이라도 함부로 해고를 하지 않는다. 빈민가에 남겨진 마지막 인정이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중노동이라도 그들에게는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지푸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르와 제지가 널 해고 했단 말이지?”

세이즈는 천천히 사실을 되물었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하르와 제지의 구두 공장에서 일을 해왔다. 9년을 정말 악착같이 일했다. 1년 전 불행하게도 쌓아놓았던 원자재 더미가 무너지면서 거기에 깔려 한 팔과 한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린 아들을 공장에 보냈다. 그리고 1년, 정확히는 10여개월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가서 해가 진 뒤에 돌아왔다. 일을 못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르와 제지가 악덕 업주인 것도 아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당장 하르와 제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슬픔을 가지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를 따라나설 준비를 했다.

“…….”

아버지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걸레 같은 천 쪼가리로 덕지덕지 기운 코트를 걸쳤다. 아들은 상대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작은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겨울바람이 허름한 부자를 덮쳤다. 두 사람의 먼지투성이인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하르와 제지가 직접 널 해고한 거냐?”

“예. 더 이상 올 핊요 없으니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세이즈는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장 달려가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공장을 향했다.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공장을 본 세이즈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무너져가던 공장 건물이 잿더미만 남아있었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사방이 검게 변색되었고, 철골조차 부러지고, 부서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졌다. 아직도 여기 저기에 불길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세이즈는 화재 현장을 향해 긴급히 달려가는 소방대원 하나를 불러 질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안에서 무언가가 터졌습니다. 자세한 건 알아봐야 하겠지만, 아마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빈민가에서 구할 수 있는 허술한 폭탄이 아니에요. 위력도 위력이지만, 정확히 공장 건물만을 태우고, 주변으로는 번지지 않았습니다. 치밀하게 계산 된 수제 폭탄일 겁니다. 그런 건 만드는 데 자취조차 감추는 기법들이 사용되죠.”

친절하게 대답해 준 대원은 더 이상 질문이 없자 화재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불길을 진압하고, 알에 있었을 사람들을 탐색했다. 시체가 연이어 끌려나왔고, 그 중에는 하르와 제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항의를 위해 공장으로 달려온 부자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들은 조용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돌아오는 군.”

분명 아무도 없어야할 집에 누군가가 있었다. 세이즈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방 안을 살폈다. 조그만 창 옆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긴 흑발이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와 있는 걸 보아하이 여자인 것 같았다. 세이즈는 물었다.

“누구야!”

거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여자는 미소를 띠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세이즈에게 접근했다. 가죽으로 된 재킷을 열며 다리를 움직였다. 세이즈는 본능적으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불구자라고 해도 여자 하나를 상대로 당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여차하면 주먹을 날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그것이 돈다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세이즈는 펀치를 날렸지만, 그녀는 그 주먹을 쉽게 피하며 그의 코앞에 섰다.

“받아요.”

세이즈는 당황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돈다발을 받았다. 빈민가에서는 아니, 평민이라도 감히 쉽게 소유하지 못할 액수였다.

“그 돈을 받으시고, 아드님을 넘겨주십시오.”

세이즈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녀는 정중한 말투로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간단 명료. 아들을 넘겨주면 이 상상도 못할 돈을 그냥 주겠다는 거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큰돈을 주더라도 쉽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저 정도 액수의 돈이 있다면 빈민가를 나가는 건 물론이고,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다. 돈을 손에 쥔 채 입을 닫은 그의 눈이 떨렸다.

“어서 아드님을 넘겨주십시오.”

이내 그는 결정을 미루고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왜 내 아들을 데려가려는 거지?”

여자는 잠시 세이즈를 노려봤다. 일을 빨리 끝마치고 싶은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마치 맹수의 것 같다고 느낀 세이즈는 잠시 주춤했지만, 그가 질문을 철회하기 전에 대답이 나와 버렸다.

“작품을 만드는 데 아드님이 필요합니다.”

“……. 화가 입니까?”

“화가는 아닙니다. 그림도 그리긴 하지만, 본업은 조형이죠.”

세이즈는 어느새 아들이 자신의 뒤에 서있다는 걸 느꼈다.

“덧붙이자면, 제게 아드님을 넘겨주시면 죽을 때까지 호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겁니다. 아버님도 그 정도 돈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게 평생을 살 수 있겠죠. 그리고 전 작품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길을 찾자는 겁니다. 협력해주십시오.”

절대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세이즈는 고민했다. 분명 자신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녀에게도 득이 되는 거래다. 하지만 무언가가 거린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아빠. 나, 가겠어요.”

갑작스럽게 아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여자도 아버지도 모두 소년을 주목했다. 작은 아이의 결의에 찬 눈빛은 분명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며 봉급을 받아 본 소년은 아버지가 손에 쥔 돈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만 이 여자를 따라간다면 아버지는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소년이 결심하는 것에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알겠소. 데려가시오.”

세이즈는 아들을 바라보며 결정을 내렸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 보다는 저 여자를 따라가 지내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며 한가지 요구를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이 애의 옷과 식사를 사도록 해 주시오.”

여자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번화가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도 뒤를 따랐다. 먼저 옷가게에서 옷을 골랐다. 아들은 휘둥그레진 눈을 원상복귀하지 못하고는 신나서 옷을 골랐다. 여자는 옆에서 아이에게 참견하며 옷을 골라주었다. 두터운 갈색 점퍼와 검은색 바지를 고르고, 모자도 골랐다. 옷을 들고 기뻐하는 아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여자는 세이즈에게 다가왔다. 식사를 하러 갈 거면 차림새를 말끔하게 하라고 충고했다. 그 말을 이해한 그는 자신에게 맞는 옷도 골랐다. 옷을 다 고른 그들은 계산대를 향했다. 방금 전까지 빈민촌에 있었던 더러운 부자를 보며 점원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내민 돈다발을 보고는 이내 태도를 바꿔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황스러워하며 돈을 지불했고, 그들은 옷을 갈아입고 옷가게를 빠져나왔다.

“역시 이게 훨씬 낫겠구나.”

어느새 여자와 친해져 웃으며 떠드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깨끗한 옷을 입은 자신의 아들을 보며 자신의 선택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음은 식당이었다. 당당하게 고급 식당으로 들어간 그들은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쳤다. 하지만 여자를 제외한 둘은 메뉴판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여자는 웃으며 부자가 먹을 만한 음식을 골라주었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고, 생전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음식에 두 부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다 이내 열심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주위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진정하고 천천히 먹으라고 충고한 뒤 자신의 몫을 먹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음식을 모두 해치운 그들은 계산을 하고 거리로 나왔다. 근처의 공원에서 부자는 이별의 때를 맞이했다.

“아빠.”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을 안았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이렇게 운 좋게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었다. 더 이상 고민의 여지가 없는 필수적으로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이었다. 아버지는 미련을 버렸다. 자신이 데리고 있어봐야 굶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생각하며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다. 품에서 아들이 느껴졌다. 곧 아들을 품에서 떨어뜨린 아버지는 웃으며 아들을 여자에게로 보냈다.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연신 여자에게 부탁했다. 아들 또한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를 구원해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아들은 웃으며 여자에게로 갔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행복을 손에 넣었고, 시르는 자신의 작품에 쓰일 재료를 손에 넣었다. 완벽한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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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제자리 걸음이던 소설이 드디어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갔습니다.

고로 복귀... 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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