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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처럼 휘몰아치는 기륭의 검을 멈추게 한 것은 다급하게 내뱉는 희연의 숨넘어갈 듯한 음성 때문이었다.
기륭은 잠시 검을 거두고 희연이 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비참한 몰골의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심 따위가 남아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목숨에 위협을 느낀 희연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뭔가 유용한 정보를 털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희연은 목숨을 구걸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바로 저주 섞인 독설
그리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담긴 푸념이었다.
하지만, 그 최후의 발악도 푸념도 오래가진 못했다.

[빠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희연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륭의 발이 그녀의 턱을 으깨어 버린 것이었다.
기륭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두 차례 희연의 등과 복부를 더 걷어찬 다음, 걸레처럼 늘어진 그녀의 멱살을 잡고 높이 들어올렸다.

“정신이 남아있다면 똑똑히 들어둬라.”

그렇게 말하곤 기륭은 희연을 다시 아무 곳에나 거칠게 던져버리며 말을 이었다.

“동료들을 기다리나 본데....... 그럴 필요는 없다. 이유는.....”

일순, 기륭의 눈빛이 잔혹한 빛을 뿜었다.

“기다리는 건 네가 아니라 동료들이기 때문이지. 다섯 명 전부.......”

희연은 ‘거짓말!’ 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부서진 턱에선 ‘아으어’라는 고통과 절망이 가득 담긴 신음성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륭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황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기륭의 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기륭의 등장은 영준의 선언 이후, 조금 시간이 흐른 상태였으며 지금까지 보인 기륭의 행동이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일부로 영준을 괴롭히거나 극적 반전을 위해 시간을 끌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영준의 말대로라면, 기륭은 영준이 나가지 못하고 결계를 느낀 그 순간부터 이 장소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준이 내기를 제안한 약 10여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동료들과 격전을 치루고 처리까지 끝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놈은 동료의 숫자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괴물.....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네 정체가 뭐냐고........!’

희연이라면 몰라도 다섯 명의 동료는 일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워오던 실력자였으며 조만간 일반 전투원에서 간부급으로 승급할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오가던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단 10분 만에 모두 격멸하고 상처하나 없이 건재한 눈앞의 소년은 희연으로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지의 상대에 대해 공포와 함께 의구심이 솟구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러나 희연의 이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시에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과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오기 시작했다.

“가서 키신저에게 전해라. 결계의 기륭이 보내서 왔다고.”

‘말도 안 돼!!!’

희연이 속한 조직 최고위 간부들. 통칭 가장 강한 100인의 친위대 ‘100인 간부’ 중의 한 사람인 마왕 키신저의 죽음에 대해선 익히 들은바가 있었다.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도중 암습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는데, 비록 기습이었다지만, 1:1로는 상대할 적수가 없다고 이름난 ‘100인 간부’가 죽음을 맞은 것만으로도 당시엔 엄청난 충격이었고, 당시 신입으로 들어왔던 희연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대동했던 호위 병력들은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동 중에 갑작스럽게 흔적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그를 찾다가  몇 시간 후, 사라진 장소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키신저를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어떤 방법으로 그를 격리했는지, 어떤 수법으로 처치했는지 모든 것이 미궁에 빠진 사건이었지만 지금, 희연은 똑똑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로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결계. 결계를 사용하는 능력자는 많았지만, 그것을 아무런 매체도 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특정인만 격리시키는 능력을 지니는 사람은 손에 꼽기 어려웠다.
만약 눈앞의 이 녀석이 그런 능력을 지녔다면,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

‘애당초 적수가 아니었어.............’

희연은 전의도 분노도 모두 버린 채, 무력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적이라 불리는 ‘100인 간부’를 쓰러뜨릴 정도의 능력자라면 자신이나 동료들은 어떤 작전을 세우고 발악을 하더라도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더 이상 희연은 생존이나 승리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에서는 최후의 기력을 끌어 모으며 마지막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난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실 만큼은 반드시 알려야해!’

조직 최고위 간부와 승부를 벌일 정도의 강력한 능력자가 적진에 알려지지 않고 숨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조직이 계획할 많은 일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
게다가 암습에 매우 적절한 기륭의 능력과 특징이 조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한 다면 희연은 결코 여기서 헛되이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희연은 모든 신경을 집중해 기륭의 발언저리에 굴러다니는 방울을 응시했다.
단 한순간만 저것을 손에 넣고 집중할 수만 있다면........ 희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곳을 주시하는 영준을 번갈아 보았다.
몇 번이고 자신의 조작이 통하지 않은 영준.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오직 최소한의 가능성에라도 모든 것을 걸어볼 뿐.............

그러나, 그런 희연의 멱살을 다시금 움켜쥐는 우악스런 손길이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뭔가 하기도 전에 희연은 한 번 더 기륭에 의해 내던져지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단, 이번엔 바닥이 금방 다가오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는 팔다리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허공.
희연은 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지상을 향해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제 그만 사라져라.”

그것이 던져지기 직전 그녀가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 1장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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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길고 길었던(2년..) 1장이 끝을 맺었습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1장의 에필로그 분량이 남아있지요.^-^......(이건또 얼마나 갈까..)
에필로그 후 한달 정도 쉬고. 2장 나가도록 하겠습니다.(한달은 원래 연재텀이잖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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