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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완전히 반칙이잖아!"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가 침묵을 고수하던 방 안에 울려퍼진다.

"리퀴드(액체), 진정해. 신성한 '게임'에 난동을 부리면 쓰나."

이어서 젊은 남자가 나무라듯 말한다. 처음에 말한 이는 10세 전후의 소년, 대답한 이는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전자는 귀엽다라는 인상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 머리는 군데군데 보라빛이 감도는 연갈색 머리카락이며,
두 눈 모두 육식동물을 연상케하는 섬뜩한 붉은 빛을 띠었다. 그러나 작은 몸집에 비해 전체적인 모습에서,
어딘가 노련한 관록을 풍기는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젊은 남자는 목을 반쯤 덮는 정도의 웨이브 섞인 단정한 흑발에 청회색 눈동자와 더불어,
서양식 예복을 입어 다소 오만한 귀족 특유의 기품과 품격이 느껴지는 느긋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 위치한 호텔의 어느 방이다.
유렵의 성을 연상시키는 널찍한 배치와 억대를 호가하는 그림들로 이 호텔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에베레스트 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문 가까이 놓인 정사각형 테이블에 앉아 있었으며
테이블 위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허나 보통의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적, 녹, 청, 금이
추가된 6인용 체스였다. 금과 녹, 청은 변동이 없고, 적(赤)이 백(白)과 흑(黑)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 그래도…."

리퀴드라 불린 소년은 변명하듯이 무언가를 말해보려 했지만,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죽음의 신」이 꽤 분발하고 있긴 해도, 역시「아카식 레코드(모든 별들의 기록)」에는 안되네."

갑자기 뒤에서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심으로 위로하는 듯 안타까움이 묻어있었지만, 리퀴드에게는 조소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어조이다.

"당신의 동정 따윈 필요 없어. 두고 봐, 이번에야 말로 이겨줄테니까!"

리퀴드는 훽하니 시선을 돌린다. 시야에는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고 있는 적발의 여성이 비친다.
척 보기에도 우아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도무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인간의 외모 따윈 단순한 가면밖에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광기마저 느껴지는 모습. 말하자면 외모의 문제가 아닌 존재 그 자체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 것.

"후후. 분발하라고. 뭐, 그래봐야 100만 광년은 이를테지만."
"……!"
"나참, 가시 돋친 어투잖나, 리리스(밤의 여왕). 사람 화딱지 오르게 하는 성격 좀 고쳐.
꼬맹이를 놀릴 여유가 있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정도는 파악해두라고."

리퀴드가 여성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청년이 끼어들어 말린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잖아?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아카식 레코드」를 이길 수 없으니까."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한다.

"자신만만한건 좋지만 확률이 100%란 보장도 없지."
"그래서─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뫼비우스(무한의 힘). 지금이라도 바꾸기엔 늦지 않았어."

리리스는 청년의 말을 무시하고 창틀을 등진 채 팔짱을 낀 남자에게 말한다.

"이대로 간다."

짧지만 완고하면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어조였다.
남자는 전신에서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며, 특히 사자를 연상시키는 금안이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점은 시대착오적인 중세시대의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고,
등 뒤에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검으로 보이긴 하나 검이라기엔 너무나 조잡하고 또한 거대했다.

"흐응, 당신의 완고한 점은 알아줘야겠네. 그 점이 또 매력적이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게임'이었다. 세계라는 이름의 판을 건 파멸의 게임.
거기에서 얼마 만큼의 희생이 나오더라도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말'이 이기느냐 마느냐일 뿐. 그 대가로 설령 세계를 멸망시킬지라도.

최초의 '게임'은 자그마치 1만년 이상 율법에 얽매여 스스로 우주로 나가길 거부하고 지구에 안주한
현실을 따분하다고 여긴 '잊혀진 자(언노운 맨)'로부터 비롯되었다.

"지금의 인류는 썩었다. 너무나도 지겨워. 전쟁 다운 전쟁도 없지. 이들을 건드려봐야 재미도 없을 터.
그렇다면─우리들만의 전쟁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나? 세계라는 이름의 판에서 시작하는 전쟁을."

향상심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자극해본들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쯤 되면 정지된 세계가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모든 평행 세계(미러 월드)의 멸망 같은 야심찬 목적은 없다.
'게임'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사치스러운 '여흥거리'에 불과하므로.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서 공통점이라곤 없었다. 나이도, 성별도, 인종도, 국가도, 모두 제각각.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전원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절대자(무제약자)이자, '선신(엘더 갓)'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로보로스(자기 꼬리를 먹는 자)는 어디에 있어?"

리퀴드는 항상 있던 노인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리리스는 말 없이 눈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검은 로브를 두른 백발의 노인은 방 구석에서 좌상을 한 채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넋을 놓고 멍하니 보고 있을 뿐.
마치 그 만이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저 영감, 또 저러고 있군. '게임'을 할 마음이 있는 거야? 아니,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했던 것 같은데."

청년은 빈정거리듯이 말하고는, 담배를 물고 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내버려 둬. 또 아웃 프라임(외해)에 정신을 분리시켜 놨겠지."

리리스는 신경쓸 것 없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하고는, 체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은 자신의 적(赤)을 제외하면 상대방은 모두 킹 밖에 남지 않은 압도적인 상황.
백의 죽음의 신과 흑의 어둠의 황제. 그 중 죽음의 신은 함락 직전에 몰렸으니 남은 것은 어둠의 제왕뿐.

'그럼─움직이지 않는「어둠의 황제」은 과연 어떤 비기를 보여줄까? 후후후.'


시바의 중추에 압도적인 충격이 가해지자 카이토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크헉!"

대량의 피를 내뱉으며 일순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증스러운 '적'에게 한 방 먹여주었다는 일말의 기쁨이었으리라.
자신이 비록 이곳에서 죽게 된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안…해요.

시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담았다.
이렇게 되버릴 줄 알았으면서도 그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책망인 걸까.
생환의 가능성은 0%.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몸으로 전투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슬퍼하지마…, 사람은 누구나 죽어. 나라 해서 예외는 아니야."

거의 꺼져들어갈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사명을 완수한 것에 대한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흐윽.
"시아…."

괴로운 것은 자신인데도 끝까지 타인을 염려한 그의 배려는 오히려 그녀에게 독이 되었다.
말 몇마디로 쉽게 납득하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바로 옆의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일터. 그것이 부질없어 보일 지라도 무가치하진 않다.

〔…수고했어, 카이토. 너의 노고는 잊지 않겠다.〕

곧이어 류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 이제 큰 거 한 방 먹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적'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적'에게 해줘야 할 말이 남았다. 이 말을 한다면 적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미 늦었어, 앙그라 마이뉴."

─────쿠아앙-!

그 순간,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에너지가 온 우주를 광할하게 뒤덮었다.
류크의 비기가 성공한 모양이로군. 그는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렇게 되뇌였다.

"그러나 이런 공격으로는.. 그도 무사하진 못해. 그것까지 각오한 건가... 그 남자는."

어딘가 부러운 듯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이것이 자신과 그의 차이.
저런 각오는 자신으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테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온 자신은 목숨을 걸 용기도 없으니까.
친 여동생마저 죽이면서까지 살아남고자 했는데 다른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웃기는 노릇이었다. 죽는 것이 두려운 주제에 미끼 노릇을 수락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짐이 되는 게 싫어서? 그건 거짓말이다. 타인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저질러왔던 죄의 댓가를 치루기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낌없이 육체를 상처입게 내버려둔 것일까. 시아에게 슬픔을 안겨주면서까지?
아니, 이런 걸로 속죄가 될 리 없다는 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역시 알 수 없다. 자신을 움직이게 한 힘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죽음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하지. 이것으로 작별이다, 앙그라 마이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사형을 선고하는 간수의 목소리와 단발마의 비명. 그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이것으로 이 세상 모든 악(앙그라 마이뉴)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는 스스로 판단할 일.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만물의 조화를 자신의 뜻대로 조율하려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다.
자신의 가치관을 정의라 믿고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주입하려 했지만, 그 시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될 수 없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당해서는 안된다. 신념은 자유이다.
자신을 내세우는 신은 신이라 할 수 없다. 신이라는 이름을 쓴 미치광이에 불과할 뿐.

결국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생물에게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생을 부여받은 자, 마땅히 죽음을 맞이해야 겠지만 처음부터 무(無)였던 앙그라 마이뉴에게는,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처럼.

'응…?'

눈앞에서 튄 스파크가 그를 감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적을 동정하다니 나 답지 않군. 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시바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탈출할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이미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없고, 대부분의 시스템은 동결되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육체가 여기까지 견디다니 꽤나 튼실했던 모양인가 보다.
본래대로라면 5분 전에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다.

'…흡혈종의 피가 나를 지탱해 준건가? 시아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않되겠군.'

수십년간 묵묵히 자신을 따라온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 그녀와 계약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됬을텐데.
그녀에게 많은 것들을 받았으면서 제대로 된 보답조차 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너까지… 휘말려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는 진심을 담아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메인 시스템도 파손된 모양이었다. 그녀와 최후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니, 어차피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다.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심장을 자극하는 이 통증은 그칠 줄 몰랐다. 억누르려 하면 할 수록 더 강하게 죄어온다.
사람은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비로서 그것이 소중한 것임을 깨닫지만 그 때는 늦은 뒤다.
다시 한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이윽고 조종석을 에워싸고 있던 보호막이 부서지고,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가 카이토를 덮쳤다.
뜨겁다. 화산에서 뿜어진 마그마가 그대로 자신을 삼켜버린 느낌이다.
주변은 온통 하얀색이다.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빛이 회전하고 있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자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여동생과 함께 별을 바라본 광경, 선홍빛으로 물든 교실에서 시아와 처음 만났을 때, 새벽의 거리에서 그림자에 지배된 친구와의 전투, 폐쇠된 공장안에서 만난 여동생과의 재회, 그후 '헤븐'에게 붙잡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아를 상처입힌 기억, 세라핌, 시간의 초침의 파편, 이 손으로 여동생을 죽였다, 각성, 혼돈, 전이, 잊을 수 없는 원수 파우스트, 새로운 세게, …망자의 신전, 시바, 오버 드라이브, 7개의 신(세븐즈 갓)중 하나인 마신 디아블로, 앙그라 마이뉴. 그리고 망가진 TV 화면 마냥 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기억이 두절된다.

육체는 이제 목 밖에 남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감싸주고 있는 것 같은….
그 때, 눈 앞의 광경이 일그러지며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아가 유령처럼 반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아? 진짜 시아야?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행이야. 네가 곁에 있어줘서. 적어도 외톨이는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시아가 가까이 다가와 그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서투른 키스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께요…. 영원토록….

소멸되기 직전,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려온 것 같았다.


시바의 공격을 모두 방어해낸 앙그라 마이뉴였으나 이것으로 끝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으로 자신을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러고 보니─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다크 엠페러는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이미 늦었어, 앙그라 마이뉴."

숨이 끊어졌어야 할 카이토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이 뼈아픈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
곧이어 좌표 축에 이변이 발생하고, 다크 엠페러 주위의 시공간이 눈에 띠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시간의 초침」이 사용되었다는 증거. 하지만 그래봐야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재현할 수 있으므로. '단 하나'를 제외하면.

"그렇다. 이것 만은 네가 방어해낼 수 없는 공격이지.「초침의 붕괴(타임 오브 브로큰)」발동!"
「네 이놈-!」

앙그라 마이뉴는 그 순간─생애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공간의 일그러짐은 점차 가속화되고, 그것은 이내 주변 일대를 모조리 사멸시키는 거대한 태풍으로 화했다.
그것을 설명할 단어는 한 가지. 빅뱅(Big bang)이다. 우주를 창조하는 동시에 멸망시키는 절대적인 법(法).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시전한 것이 아니다. 시전한 이까지 말려드는 금지된 비기.
류크는「시간의 초침」에 과부화를 걸어 폭주시킨 다음, 마스터 코드를 입력하여 이것을 이끌어낸 것이다.
물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기에 시바가 미끼가 되어 적의 주위를 끌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이래서야 둘도 같이 말려드는 꼴이다.

앙그라 마이뉴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시공을 원상태로 되돌리려 했으나, 그것조차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혼만 깍여나갈 뿐이다.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 앙그라 마이뉴는 거대한 절망이 자신을 뒤덮은 것을 느꼈다.

'나'라는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두렵다. 이대로 사라지기는 싫다. 사라지기 싫어.
무섭다. 이것이 유기생명체가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인가. 빠른 속도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혼들이 삭제된다.
하나 하나 없어져 갈 수록 텅 빈 공허함만이 남는다.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다.

무언가, 무언가 방도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곧 진리, 아카식 레코드(모든 별들의 기억)이니까.
그래, 류크라는 인간이「시간의 초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흡수하면 내가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자, 녀석은 어디 있지? 빼앗아라, 흡수해라.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다!

"포기해라, 앙그라 마이뉴.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지. 너도 그것을 피해갈 순 없다.
너무나도 추하구나!"

섬뜩하리 만큼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은 류크였다.
절대적인 복원력을 자랑하는 다크 엠페러조차「초침의 붕괴」에 휘말려 부서져가고 있었다.
2기의 축퇴로중 1기는 이미 파손되었으니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 또한 없게 되었다.

「내가 이대로 순순히 소멸을 허락할 것 같나, 이대로 사라질 순 없다!」
"너는 자신의 힘에 맹신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벽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너의 한계가 되었지."

류크의 말대로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앙그라 마이뉴에겐 패인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의심이 도가 지나치면 패가망신한다는 격일까.

「…이런 짓을 하면 다른 생명체들도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것은 앙그라 마이뉴의 말 대로였기에 류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일이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휘말린 이들은 억울할테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의 행위는 분명 악이다. 그러나 자신은 정의의 용사 따위가 아니다.

순수함 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순 없다. 전장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은 확실한 방법으로 숨통을 끊는다. 그것이 비인도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위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나는 너를 없애고 싶을 뿐이다. 그 이외의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어."

류크는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한다.

「자신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란 건가. 그대의 행동 방식은 선이라기보다 악에 가깝군.」

빈정거리는 투로 앙그라 마이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인간과 흡사했다.
그런 식의 감정 표출은 인간 밖에 하지 못하니까. 아니, 누구보다도 인간과 가까웠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자신과 처음으로 접촉한 것도 바로 인간이었으므로.

"선이건, 악이건, '정의'는 있다. 거기다 애초에 그것들을 분류한 것은 인간이지.
내가 굳이 그런 것에 구애될 이유가 있나?"

그것은 확고한 신념을 지닌 자만이 가능한 말. 오만해보일 지도 모르나, 거기에 주저는 없었다.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앙그라 마이뉴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선에도, 악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길을 걷는 이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뭐, 그 판단이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역시나… 그런 마음 가짐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로군….」

이윽고, 무언가를 납득한 듯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한다.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었기에 류크도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앙그라 마이뉴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의를 멋대로 내린 것에 대해 불쾌해졌다.

"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너에게 그런 소릴 들을 이유는 없어."
「…좋다. 그럼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지.
그대, 그대가 태어나기 전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나?」

앙그라 마이뉴는 갑자기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도가 돌변한 것에 의심을 할 만 했건만, 류크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해를 가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리 없고, 먼저 소멸될 쪽은 저쪽이다. 거기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아니지만─의 말은 착하다는 옛 말도 있었기에 일단 상대나 해주자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아.
어찌할 수 없는 일은 잊을 수 밖에 없어.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현재는 현재, 과거는 과거. 흘러가버린 것에 집착해봐야 좋을 것은 없다는 것처럼.
그는 오로지 '지금'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과 같은 질문은 의미가 전혀 없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잠시 동안의 침묵. 앙그라 마이뉴로서는 류크의 대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심문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자신의 의문에 답을 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사실 류크에게 있어 이런 문답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거절해야 될 이유도 없었다.
적당히 시간이나 벌어보자는 속셈이 깔려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전에 그렇게 묻는 너는, 신을 어떻게 생각하지?"
「신이라는 존재를 미치도록 저주한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 말에 담긴 뿌리깊은 증오심에서 그는 앙그라 마이뉴가 신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질투(Envy)하고 있다고 해야될 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시기, 그런 존재로부터 육신을 부여받지 못한 것에 대한 증오.
하지만 너무나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류크는 생각했다. 결국은 놈도 힘에 의지했으니까.
그 어떤 숭고한 이상도 폭력을 등에 엎은 이상 그것은 악으로 변질된다.
하물며 처음부터 자신을 악이라 표명한 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오만과 독선과 아집의 결정체.
자신만이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관만이 정의라 믿는 어리석은 자.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더할나위없이 썩고, 추하고, 역겹기 짝이 없는 이물(異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건 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라….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다.
그에게 있어 신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초월자(超越者)였다.
그런 존재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자 누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증명될 존재도 아니다.
…답은 이미 나왔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대의 답이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답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답(答).
그렇다면 이 답을 앙그라 마이뉴에게 내던지자. 자신의 답만이 진리라고 믿는 어리석은 자에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답은 심플하지. 대답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밖에 할 수 없어. 신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상상력과 모든 감각의 인식에서 무한히 초월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모습을 알 수도 없고, 우리에게 대한 신의 태도도 인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족의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앙그라 마이뉴, 지성으로서 신을 알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릴 순 없지. 누군가에 의해 증명되는 신은 그 시점에서 신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앙그라 마이뉴는 불쾌하다는 듯, 짜증 섞인 반문을 해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 나오는군.
류크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남들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자만하여 지적인 고치를 만들어 뒤집어쓰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공격을 비웃으며 강고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자들의 최대 약점은, 어떤 상반된
견해가 그들의 두껍기 짝이 없는 껍질을 뚫었을 때,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보장이 있나?
너는 단지─인류가 상상한 신을 그대로 믿고 있을 뿐이지 않나."
「잘도 그런 소리를…! 내가 곧 진리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너무나 자신이 예상하던 패턴대로 흘러가자 류크는 맥이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다른 반응을 보였으면 당황했겠지만, 이것 역시 앙그라 마이뉴가 인간에 가깝다는 증거.
예를 들어 악마라면, 그의 말을 비웃으며 은근슬쩍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켰을 것이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너는 역시 '악'이다. 그것도─'최악'이야. 그 이름 그대로."

그는 한숨 섞인 대답을 하며,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겠다고 판단했다.

「그대가…! 그대가 뭘 안다는 거냐! 필멸자인 그대가, 수천억년 동안 겪은 나의 고통을 아냔 말이다!
나는 신을 증오한다! 그 자는 나에게 아무 것도 내리지 않았어! 혼도, 육체도, 그리고 의지마저도…!
나라는 존재를 '부정' 하듯이! 허나, 나는 자신의 의지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단 말이다-!」

앙그라 마이뉴는 저주를 퍼붓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의를 담아 그에게 내뱉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온 고독. 그 절망의 깊이는 인간으로는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영혼(靈魂)이 없고, 육신(肉身)조차 없는 존재. 전 시공을 포함하더라도 이와 같은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앙그라 마이뉴는 더욱 고독과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신에 대한 증오는 짙어지고,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이 적으로 보였고,
세계를 다시 재구성하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당연히 모르지.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 밖에 몰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 될 이유 따윈 나에게는 없다."

그것은 앙그라 마이뉴에게 있어 너무나도 잔혹한 말이었다.
돌려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너는 우리들과 다른 존재라고 선언한 것었으므로.
허나 앙그라 마이뉴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또한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말이었음을.

「이기적이군! 너무나도 이기적이야…! 인간이란 생물은 역시 자기 밖에 모른단 말인가!」
"죽음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하지. 이것으로 작별이다, 앙그라 마이뉴!"

경의와 경멸, 그리고 강적을 해치웠다는 후련함을 담아 이별의 말을 전한다.

「반드시 그대에게 어울리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한 절규와 함께 거대한 해골이 나타나며, 앙그라 마이뉴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죽음.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내려진 절대불가항력의 법칙.
그 어떤 존재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앙그라 마이뉴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0에서 시작해 0에서 끝나는, 생을 부여받지 못한 가련한 존재.

"…나는 결코 지옥을 볼 수 없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오래 살테니까."

동정은 하지 않았다. 그건 적도 바라지 않을 테고, 그렇게 해야 될 이유도 그에게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 될 판이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시간의 초침」을 다시 한번 작동 시킬 것인지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놈과 같이 소멸하는 것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물론 카이토의 경우 휘말린 꼴이긴 하지만─글쎄, 알아서 탈출할테지. '그런 것'까지 신경쓸 여유는 없다.
그런 자기중심적 성격이 류크라는 남자의 본모습이다. 카이토와는 우연히 목적이 일치해서 같이 싸웠을 뿐,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기준으로 적이라 판단되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죽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경우지만.

'기체의 절반 이상이 파손되었다. 하지만 시공전이를 감행하기엔 무리가 없지.'

그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중국식 의자에서 내려 기체 내부의 블랙박스를 향해 '빨려가듯이' 걸어갔다.
잠시후 그는 5평 정도 되는 방처럼 보이는 공간에 와있었다. 주변은 동양식 고대문자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으며, 특히 태극 문양이 새겨진 부적이 사방에 붙여져 있었다. 마치 핵병기를 보관하는 장소처럼
엄중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으나, '이것'은 핵보다 수십, 아니 수백배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기계공학에 빠삭한 이라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인류의 이해를 뛰어넘은 상식 밖의 아티팩트(Artifact).

"…정비이외의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게…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군. 어차피 이번을 끝으로 올 일도 없겠지만."

짧은 감상을 흘리고 그의 위치에서 바로 아래의 바닥에 손을 '집어 넣어'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자 주변이 풍경이 급속도로 일그러지며 자그마한 소우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끝 없이 펼쳐진 암흑,
그것을 수놓은 별, 그리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 순서대로 나타타며,
그 중심에 회중시계 같은 것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회중시계가 아니라 회중시계 같은 것이라 말한 까닭은
그것이 시계라 하기엔 너무나 초침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행성들은 그와 회중시계 같은 것의 주위를
통상의 3배 속도로 공전하기 시작한다. 기묘하다면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그는 자연스럽게 회중시계 같은 것을 손으로 낚아챈 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주위를 돌던 행성들이 움직임이 일제히 멈춰섰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은 엉망이다. 용케 기능이 정지하지 않았군. 그러나 한번 시도해볼만 하겠어.'

회중시게를 뒤로 돌려 뚜껑을 연다. 일반적인 회중시계라면 테엽과 톱니바퀴들이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겠지만 이것의 속은 노트북을 방불케 하는 집적회로, 두꺼비집의 계기판과 비슷한 표시기,
그리고 공학용 계산기 같은 버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공전이 기능이 4번이었나…. 좌표는… 에라 모르겠다. (X27, Y46). 이것으로 세팅 끝."

손으로 일일이 좌표를 지정한 다음,「시간의 초침」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한차례 우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순간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한 것이기에….

"젠장! 역시 안되나…. 이런 곳에서 죽어야 된다니, 이것도 업보라면 업보로군."

한탄과도 같은 어조였다. 직후 외벽이 갈라지며 폭발음과 함께, 크레인으로 건물을 내려치는 듯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그가 눈을 뜨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방금전까지 있던 우주 공간은 온데간데 없이
화산에서 분출된 듯한 고열의 화염과 기괴하게 일그러진 철근, 검은색의 벽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왼팔은 이미 움직일 수 없다. 두 다리는 부러진 것 같다. 시야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졸도했을 고통을 견디며 흐릿해져 가는 의식속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기었다.
손을 뻗어 시간의 초침을 붙잡는다.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운을… 믿는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직후 갈라진 틈 사이로 뿜어진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이거 꽤 의외의 결말이군. 사실 '누구말따나' 나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던 양복을 입은 청년이 감탄한 듯이 휘파람을 섞어가며 말한다.
뒤의 말은 그 '누군가'를 겨냥하고 던진 일종의 조롱이지만.
그러나 정말 순수하게 승패가 난 것을 즐기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누가 이기는 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화제였지만,
승부를 통해 인간이라는 종의 가능성을 다시끔 재확인 시켜주는 계기로는 충분했다.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존재가 어디까지 가느냐를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기에.

"…1217전 559승 110무 548패.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나. 나의 패배야. 내가 졌어."

리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띠며 자신의 패배를 선언한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으나, 자신의 승리가 99% 확정된 '게임'에서,
자신이 졌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충격이 서려있었다. 기적이나 다름없는 확률로 자신이 졌으므로.
허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어떤 식으로던지 간에 결과가 난 '게임'을 무산시킬 수는 없다.
그것이 설령 자신들과 상관없이 세계(시스템)의 억지력에 의해 강제로 종료되더라도.

"이겼다! 드디어 내가 이겼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리퀴드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승리를 과신한다.
그나마 이 중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찬 이일 것이다.

"…그나저나「죽음의 신」의 오퍼레이터로 있던 여자아이. 네 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리리스?"

청년이 지금 막 생각이 난 것처럼, 미심쩍은 얼굴로 리리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의 딸을 죽게 내버려둔 처사가 조금 못마땅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공과 사를 구별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게임의「말」로 이용할 줄은 몰랐다.
설사 이용하더라도 최저한의 간섭조차 안했다는 것 또한 리리스가 얼마나 냉혹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네. 집 나간 딸이 어디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연관될 줄이야…."
"잔혹한 어머니로군. 후회는 없어?"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기가 막히다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전적인 눈빛을 내보냈다.

"물론. 그 아이가 선택한 길인걸. 그 아이가 그걸로 만족했다면 어머니로서 바랄 게 없지."

리리스는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으로 자못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속마음이야 어찌하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선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로서는 딱히 뭐라 해줄 말은 없군."

아직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다는 표정이었지만, 청년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한다.
어차피 그녀가 그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남의 가족사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나는 이만 실례하지."

그 때, 그들의 대화를 묵묵하게 듣고 있던 뫼비우스가 낮은 어조로 말하며 문으로 걸어나간다.
그것을 청년이 그의 앞에 서서 가로막았다. 뫼비우스는 무기질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본다.
아니, 청년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뒤에 있는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의 시야에서 청년은 단순한 장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청년은 그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아메바나 짚신벌레와 같은 하등생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는데, 장승처럼 멀뚱히 서 있다가 멋대로 가는 거냐?"

청년은 두 눈에 살기를 띤 채, 도발적인 말투로 뫼비우스에게 쏘아 붙인다.

"미안하다. 아스트랄 계에 심어둔「판도라의 상자(블랙박스)」에 이변이 발생했다.
프레데터(포식자)나 레이더스(약탈자)가 그것을 노릴 가능성이 있어 내가 가봐야 한다."

뫼비우스는 묵묵히, 그리고 간결하게 청년의 물음에 답하였다. 그래도 청년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다 싶은 리리스가 끼어들어 청년에게 말한다.

"그런 이유라면 할 수 없잖아? 솔리드(고체). 당신은 겉보기와 달리 꽤 신경질적이라니까.
역시 형제는 형제네. 둘이 안닮은 듯 하면서 묘하게 닮았어."
"미안하군, 신경질적이라. …됐어, 네 갈길 가봐."

못마땅한 표정으로 청년─솔리드가 대꾸하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뫼비우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한 마디 던진다.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오겠다."
"아예 오지마라."

아직 분이 덜 풀린 듯, 솔리드는 퉁명스레 내뱉는다.
리리스는 철부지 아들을 보는 듯한 눈길로 솔리드를 힐끗 쳐다보고는 싱긋 웃는다.

"솔리드의 말은 신경쓰지마. 말은 저렇게 해도 진심은 아니니까."
"누가 진심이 아니라는 거야? 저런 녀석 없어도 별로 상관없잖…켁! 갑자기 남의 구두는 왜 밟아!"
"그럼 행운을 빌게, 뫼비우스."

리리스의 말에 오른손을 들어 화답한다. 그리고는 문 앞에 멈춰서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천으로
싸인 거대한 '무언가'를 집어들어, 창을 내리꽂듯 힘차게 그것을 바닥에 꽂는다.
이내 방 안에 엄청난 소음이 울려퍼졌으나, 바닥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인간의 귀로 인식할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자, 이윽고 그의 전신이 육망성에 휩싸인다.

"『전송』"

그렇게 말한 동시에 그는 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이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으나… 곧이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온 우주를 뒤덮었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무언가에 빨려들어가듯 축소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크기는 점점 줄어들어 육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로 줄어든 뒤 이내 사라진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분명히 소멸한 혹성이 원형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한 우주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소한 소행성 하나 하나 마저 완벽하게 구현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모든 것이「초침의 붕괴」가 발생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그것'은 처음부터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표현할 단어는「눈」이라 해야될 것이다. 달 정도 크기의 거대한 눈.
그러나─격전에 관계한 이들은 그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그것'의 주위에 처진 프로텍터(결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그들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은 거대한 안구를 굴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안된다. 이상(異常)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시바와 다크 엠페러, 앙그라 마이뉴는 복원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격전에 관계한 이들만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착오가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역시「마스터(관리자)」가 관여한 것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시간의 역행 현상이 발생한 점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제물로 삼는 대신 그 어떤 것도 무로 되돌리는 궁극의 공격은 성공했지만,
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0이 될 뻔한 세계를 멸망하기 전으로 되돌렸다'일 터.

세계의 구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
단순히 과거로 이동하는 것조차 예상 밖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허다하다.
하물며 세계를 부서지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시간의 권능을 다루는 신이라 해도 권한 밖의 일.

따라서 이런 복잡한 수행을 할 수 있는 이는─「마스터」밖에 없었다.
빅뱅 급의 에너지 방출 사태는 평행 세계(미러 월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위대한 옛것들(그레이트 올드 원)'을 자극시키는 요소이므로 성가시게 되기 전에 처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기에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겠지만.

'「놈」이 내 계획을 눈치챘을 지도 모르겠군. 허나 세계를 복구시킬 이유는 전혀 없지. …음?
저것은…「시간의 초침」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남은 잔해인가.'

「눈」이 주시한 곳은 거대한 에너지가 사라진 바로 그 장소였다.
그곳에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양의 잔해가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우연히'「시간의 초침」의 기능 중 하나인 타임 리프가 발생한 것이라면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운 수치. 이것을 우연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그 인간, 아카츠키 류크라 했지.「7개의 신(세븐즈 갓)」중 하나인 디아블로(분노의 제왕)를
비록 40% 밖에 현신하지 않았다해도 대등하게 싸우고,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줄이야….
시공 전이가 성공했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지도 모른다.
…앙그라 마이뉴라는 존재의 가치가 예상 외로 높았군.'

「눈」은 자신이 끌어들인 2명의 인간중 한 명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바로 그가 자신이 찾던 인재가 아닐까 하는 기대심. 그러나 살아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 또한 없다. 이만한 운을 지닌 이가 그리 쉽사리 죽을 리가 없으니까.
혹여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만한 성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실패작'에 불과하겠지만.

'소재지가 파악될 때까지 보류해두고, 다음 대상자를 찾아야겠군.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다.'

「눈」은 더이상 이 세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 분산된 의식을 본체로 부상시킨다.
'어리석은 혼돈이자 만유의 창조자'의 직계 후손인 그에게 있어 세계간의 이동은 어려울 것도 없는 일.
「눈」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고 그 모습을 감췄다.

Game Over

and that all…?
그래서 이것으로 끝…?
-----------------------------------------------------------------------------
늦게 연재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무려 5주(...)만에 찾아뵙는 백작(K. A. Y.)입니다.
양도 상편에 비해 많지만, 1~2주 정도 몸 살에 시달려 작업을 못했습니다.
기다리시던 분들에게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편에 이어 하편에서는 절대자와「눈」이 등장, 본편과의 연관성은 7% 정도.
평소 이런 캐릭터들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몇몇분들에겐 '이 단어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라는 생각이 드셨을겁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러브 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와 약간 크로스 오버되었습니다.
선신(엘더 갓), 위대한 옛것들(그레이트 올드 원), 어리석은 혼돈이자 만유의 창조자
가 바로 그것이긴 한데, 직접적으로 드러날 일은 없을겁니다.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이라;

결국 결말은 적, 아군 할 것 없이 몰살 엔딩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만, 반드시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눈」이 예측한 대로 다른 세계로 전이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죠?
그럼, 이번주 일요일에 진정한 프롤로그 및 1화로 찾아뵙겠습니다.


보너스(?) 조보크 분들에게 의뢰한 시바와 다크 엠페러, 기타 매드 아이콘.



시바의 3가지 형태중 피의 천사(Blood Angel)와 카오스(Chaos) 모드.


설정상으로는 최강이지만, 작중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못한 다크 엠페러.


이름만 거론된 7개의 신(세븐즈 갓)중 하나인 디아블로(분노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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