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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허공에 손을 뻗자, 손바닥은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듯, 미친듯이 내리는 빗방울. 그 빗방울은 너무나도 요란스럽게 내가 들고있는 우산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장 할아버지한테… 전화했어?”
“응… 할아버지댁에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지니까 이장님댁 전화번호가 있었어. 민아가 위치를 가르쳐주니 대충 아신다면서 금방 간다고 하셨어.”

내가 영민이에게 묻자, 영민이는 내게 시선 하나 보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도 그럴게… 얼굴같은걸 봐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빗줄기속…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데 옆에있는 사람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있는지는… 더욱 모를 지경이였다.
바지와 신발은 이미 흠뻑 젖었다. 자신의 신발은 방수가 된다며 비오는날에 첨벙첨벙 잘도 뛰어놀던 영민의 그 자랑스런 신발도… 이미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질퍽질퍽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방수라는것도 이런 빗줄기 속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것인가 보다.

보라, 희서, 여진을 숙소에 남겨두고… 우리는 민아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현장을 확인해야겠다고 말한 것은 영민이였다. 그것이 흥미위주에서 온 말인지… 아니면 할아버지를 정말로 걱정해서 나온 말인지… 그것은 알길이 없었다. 그저 나는, 영민이 따라오는대로 따라갈 뿐이다.
그리고, 시끄러운 빗물소리를 헤엄쳐… 비옷을 입고 앞서 걷고있던 민아가 말했다.

“119에는… 신고했어?”
“했어. 근데 이 마을은 빗줄기가 세서 못온데. 거기다… 낙석 때문에 길까지 막혀버렸으니”
“…경찰에는?”
“똑 같은 말을해. 다음에 예량마을 파출소에 연결해봤는데… 아무도 받지않아.”

빗줄기에 막혀 기어 들어갈듯한 목소리로 두사람은 대화를 하고있었다. 나같으면 몇번이고 되물엇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두사람의 실루엣을 보고있자, 어느샌가 민아는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었다.

“여기… 야.”

민아는 그저 어디론가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아 옆으로 가 그녀가 가리키는곳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묘하게──
──이 세계와는 맞지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허수아비라도… 쓰러져있는듯한 느낌이였다. 그야, 바람도 많이 부니까. 정말 허수아비라면 상관 없겠지만───

“이진아. 잠시 와봐.”

영민은 조심스레… 어디론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길 복판에는… 도랑인가? 시멘트로 말끔하게 만들어진 도랑. 영민은 그것을 넘어… 질퍽거리는 흙탕물에 발을 들였다. 그곳은 밭이였다. 하지만… 이미 발등까지 차오른 물은 그곳이 밭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영민의 뒤를 따르다, 등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노란색 비옷… 민아가 그저 서있었다.

“민아야─! 안와?”
“…아니. 됐어. 여기 있을래.”

들릴듯말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를 혼자 놔두는 것이 꽤 걱정되지만… 그런다고 영민을 혼자 놔둘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그쪽으로 갈게! 조금만 기다려!”

그말만을 하고 다시 흙탕물에서 발을 빼 도랑을 넘어온다. 질퍽질퍽한 신발의 느낌.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도로로 올라오자, 그녀가 말했다.

“영민이는?”
“하숙집 할아버지… 보고온데.”
“…그래서. 영민이한테 한마디도 안하고 여기로 올라왔어?”

아차…
잊고있었다…
민아의 말대로라면 할아버지는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적어도 자연사는 아니라는 것. 자의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 이건…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영민아!!”

빗줄기를 뚫고 그렇게 외쳐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왜? 어째서? 설마?
대답은… 빗소리만이 하고있었다.

“유이진… 너…”

등 뒤에서… 질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민이에게 무슨일 생기면 나한테 죽을줄 알아.”

더 이상 아무말도 필요없다는듯이… 그녀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정말일까? 영민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저… 시끄러운 빗소리만이 귓속을 맴돌 뿐이였다.

“대답해봐! 영민아!”

목에 핏줄이 설정도로 큰 목소리로… 녀석이 사라진 밭쪽으로 소리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빗소리만이 더욱 더 크게들려올 뿐이였다. 등뒤에선… 그저 화내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가느다란 실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답답해! 그냥 내가 찾아갈게!”
“아! 야! 김민아!”

터벅터벅 도랑으로 내려가려는 민아의 어깨를 잡는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온몸으로 뿌리쳤다. 그리고 도랑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 위험하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고 하질 않았다.
마음속 어딘가에선… 괜찮겠지, 괜찮겠지 라고… 악마가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등뒤가 막 빗줄기에 사라질무렵…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그만하게 들리는 대화소리.

“…왜이렇게 시끄러워.”

신경질스런 목소리.
영민이였다. 영민이는 민아의 팔을 이끌고, 흙탕물을 뛰어넘어 도랑을 올라 도로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야… 최영민. 괘, 괜찮냐?”
“…왜? 내가 무슨일 있었으면 좋겠냐?”

언제나처럼 비꼬는듯한 말투로 대답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깨의 힘이 풀려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일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도로위에 주저앉고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야아… 최영민. 이제부턴 혼자 다니지마. 걱정되잖아?”
“어어? 내 걱정 했냐? 난 분명 이진이한테 따라오라했는데… 풉. 이진이는 결국 여자를 선택했다 이건가?”
“야 야… 지금 그거 이야기할때가 아니잖아.”

내가 당황해 그렇게 대답하자… 영민이는 그저 킥킥거리며 웃을 뿐이였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듯한 느낌이였다.

“비 언제 그칠려나…”

자조섞인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젠 더 이상 우산은 머리정도 까지밖에 막아내지 못했다. 바람이불면 가슴팎까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에 어깨마저 젖어버린 지금… 우산의 능력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오는것 같은데.”

영민이가 중얼거렸다.
발소리는 한사람이 아니였다. 여러 사람… 적어도 두사람. 세사람. 그리고… 빗속에서 세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걸어오는 세사람의 남자.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세사람 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너희들이 이장님댁에 전화한 애들이니?”
“아, 네. 혹시…”
“우린 이장님댁에서 온 사람들이야. 김영감님의 시신이…”

걸걸한 목소리는 동네 아저씨를 연상케했다. 빗줄기속에 보이는 그 모습도… 분명 아저씨의 모습이였지만.
가운데서 걸어오시던 아저씨가 묻자, 영민은 그저 조용히 할아버지의 시신이 있다는 밭을 가리켰다.

“…그래, 고맙다. 너희들은 할아버지댁에 가서 기다리렴. 아님… 이장님댁에 있을래?”
“아, 아뇨. 저희말고 또 다른 일행이 숙소에 있어서… 그쪽으로 가봐야합니다.”

영민의 대답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도랑을 내려갔다. 도로위에 남겨진 것은 우리 셋. 그중에서 먼저 발걸음을 옮긴 것은 민아였다. 민아는… 우리들의 숙소가 있는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뒤따르는 영민이의 옆으로 다가가서──

“…최영민.”
“왜?”
“…정말로 할아버지… 맞더냐?”
“그럼… 아니냐? 빗물에 조금 불어있었지만… 분명 어젯밤에 본 할아버지 얼굴이셨어.”

그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정도인가? 난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민아와 영민이는, 분명 봤겠지. 죽어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근데 넌 안보길 잘했다… 나니까 그렇게 용케 봤지. 너까지 봐놓고 놀라 기절까지 하면 누가 데리고가냐?”
“야… 누가 기절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정도로───”

『푹─!』

…잘못들었나?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푸욱─! 찌이이이익──』

이 소리는… 뭐지?
마치 갯뻘에 발을 담그는듯한… 그리고 이건──, 종이를 찢는소리? 아냐. 그것보다 더 질긴 무언가를──

『푹! 푸욱! 푸슉!』

“…무슨소리, 안들려?”
“아니, 안들리는데…?”

옆에서 걷고있는 영민에게 묻자, 영민은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굉장히 기분나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

『푹! 하아… 푹! 푹! 하아…』

숨소리… 들려오는 숨소리. 무언가를 미친듯이 찌르는 소리. 푹, 푹푹푹. 마치… 어릴때 가지고 놀던 찰흑을 송곳으로 마구 찌르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흐른다.
그것은 마치… 포도주처럼 진한──

“…시끄러워!”
“…왜그래 유이진?”

귀를 막는다.
우산을 내동댕이 친다.
목덜미를 따라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는다. 하지만 그것은 머릿속을 떠돌며 사라지질 않는다. 이 소리… 들어본적 있다. 정육점에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자르는 소리.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정육점에서 들은… 고깃살을 잘라내는 소리.
싹둑. 푸욱. 싹둑 싹둑. 끊임없이 들려온다──

머리를 세게 흔든다. 떨쳐낼수 없다. 소리는 머릿속을 맴돌아, 귀를 뚫고 뇌의 신경속에 기록된다. 기록되어져간다. 잊혀지지 않는다. 그… 눈앞에서 들리는 선명한 소리가. 절대로 잊혀질수 없는 선명한 소리가───
──그리고, 피범벅이가 된 고깃덩어리는 보였다.

“───아!!”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모두 뱉어내지도 못하고.
내 뺨은 차가운 바닥을 쓰다듬었다.




- 7 -

눈꺼풀이 무거웠다.
지금의 나는… 누워있나?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분명… 난 영민이와 돌아오다가──
…그곳에서부터 기억이 없는듯 하다.

몸에는 꽤 두꺼운 담요가 덮혀있었다. 여름인데… 이렇게 두꺼운 담요를.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을 고쳐갔다. 하지만, 눈꺼풀은 띄워지지 않았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 나무로된 조그만한 장지문의 소리다. 그러니까… 이곳은 숙소인가? 돌아온건가? 어느새에? 언제? …나도 모르게?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조심스레 다가오는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한사람… 하지만. 곧 나는 방 안에있는 사람이 나와 방금 들어온 사람 이외에… 한명이 더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일이세요? 희서선배님…”

희서…?
방금 들어온 사람은 희서란 말인가? 그리고 이 목소리는… 보라?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가까이에서 들렸다. 근처에 앉아있는가… 잠시만. 애초에 내가 누워있는 이유가──

“이진이는… 쫌 괜찮아?”
“…열은 내렸어요.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는……”

그렇게 보라는 말끝을 흐렸다. 대화는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주위에 기척… 아마도 희서가 곁에 앉은것인지, 부스럭 하고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이마를 만졌다.

“확실히… 열은 많이 내렸네. 안심해도 되겠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이마에서 손을 뗐다.
심장이 외친다. 조금만 더… 대고있어 달라고. 하지만 그 외침은 몸 안에서 빙글빙글 돌 뿐이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아무 이유도 없다. 그러니… 이런생각조차 하는것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민 선배님은…요?”
“영민이는… 지금쯤 민아랑 같이 있을거야. TV라도 보고있겠지.”

희서… 영민…
머릿속에 동시에 두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되살아나는 어제밤의 기억. 난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쥐었다고 생각한다.

“선배님.”
“아… 응? 왜그래?”

보라의 말에 무심코 내가 답해버릴뻔 했지만…
희서의 선답에 입술은 그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진선배님… 아니. 유이진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라의 한마디에,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한다. 얼굴이 뜨겁다. 설마… 얼굴이 빨개지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분명 깨어있다는게 탄로날테니까.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것만 같다. 온몸이 들썩거려, 튕겨 오를것만 같다. 그래. 차라리 다시 잠들자. 다시 잠들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당황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좋아해”

뭐?

“조금은 소심하고.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인기도 별로없고… 그렇게 재밌는 아이도 아니지만. 좋아해. 그냥…”

잠시만…

“때론 귀엽기도 하고… 나랑 이야기할 때는 당황하는게 재밌어서… 그런 모습을 계속 보다보니, 어느샌가… 뭐랄까──, 하하. 이렇게 말하니 잘 모르겠는걸?”

분명…
난 지금 얼굴이 새빨개졌을거다. 하지만… 두사람은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른곳을 보고있는건가? 내얘기를 하면서… 나를 안보고?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만.
어찌됐든… 일단 눈꺼풀을 띄우고───

“영민 선배님은요?”
“…응?”

수줍게 웃고있던,
희서의 목소리가 멈췄다.

“어제 다봤어요. 밤에… 선배님이… 영민선배님과 같이있는거.”

보라의 말에… 희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였다.

“이럼 안되는거… 아시죠? 희서 선배님? 유이진이라는 사람을 좋아한다구요? 그럼… 어제밤의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건데요?”
“그건……”
“변명 하시려구요? 사실은 영민선배가 억지로 시켰다는… 그런 뻔한 변명?”
“그게 아니라…”
“…집어 치우세요. 선배님…”

목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
질책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쏟아졌다.

“저. 이진선배님이랑 했다구요. 어제… 선배님이 영민선배님과 했던것처럼.”

부스럭,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유이진은 내거에요. 당신 같은 여자가… 사창가에가면 넘치도록 많은 당신 같은 여자가 선배님을───”

아…
라는 탄성을 남기고,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있었다.

“그만해… 보라야.”
“선배님…”

무거운 눈꺼풀을 뜬다.
눈부시다. 눈이 부시다. 하지만 눈동자는 곧… 주위에 적응하게 되었고, 두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놀란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고있는 소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또 다른 소녀. 그녀들의 마음속엔… 각자의 의사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희서의 눈과… 마주쳤다.

덜컹!
그와 동시… 그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을 뛰쳐나갔다.
분해서일까? 아니면 슬퍼서일까? 그것을 내가 알길은 없지만… 그녀에겐 꽤, 상처가 된 일인건 확실하다.

“…언제부터 들었어요? 선배님…”
“…희서가, 올때부터.”

그걸로… 대화는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희서에게 한 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내게 들킨게 부끄러워서인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의 한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그녀의 손을 잡고있었다.

“보라야… 그런말 하면 안돼.”
“하지만! 봤잖아요 선배님… 어제밤까지만해도, 어제밤 까지만해도 그남자 품에 안겨서 좋아했던 주제에!”

뭘까…
가슴속에 스며드는 이 기분은.
그녀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혔다.

“보라야… 잠시만. 이쪽으로 와봐.”
“…네?”
“…그러니까, 귀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의도를 알았는지 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난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어?”

내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자마자, 그녀는 놀란듯이 온몸이 튀어올랐다. 왠지… 당황한 표정.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커다란 눈으로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저, 저저저저저… 저어… 선배님?”
“벌이야. 다음부터 누구한테든… 그런말 하면 안돼.”
“아…”

그녀는 이제 목 언저리까지 빨개진 상태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눈동자까지 빙글빙글 돌것 같은 얼굴이였지만… 억지로 참는듯 하기도 보였다.

“왜그래…? 보라야. 정신차려.”
“아… 아. 네…”

냉정을 되찾았는지, 그녀의 눈동자는 똑바로 날 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얼굴은 빨개지진 않았지만, 뺨의 홍조는 그대로였다.
…그러고보니, 의문이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기억이 없다. 분명… 난 볼일을 모두 보고 숙소로 돌아오고 있을었을텐데… 그 후로의 기억이──

“…보라야. 나 어쩌다가 여기 누워있는거지?”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되묻는 보라.

“그러니까… 나, 기억이 없어. 여기까지 온 기억이…”
“아! 선배님… 영민선배님이 업고 왔었어요.”
“업고… 왔다고?”
“네. 오는 도중에… 선배. 갑자기 쓰러졌었데요. 영민 선배말로는 열이 엄청 많이 났었고… 그래서 급히 여기로 와서 눕힌거에요.”

갑자기… 쓰러졌다?
난 그런 기억조차도 없는데…

“선배님.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기억을 되짚어 본다.
사체확인. 이장님 댁에서 오셨던 세명의 남자. 그리고 돌아가는 영민과, 민아와, 나. 쏟아지는 빗줄기. 들리지 않는 목소리. 흐릿한… 기억. 머리속은 마치 검은 커튼을 쳐놓은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와서… 영민이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
“선배… 잘 돌봐달랬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밖에 나가지 말랬어요. 그게… 위험하니까.”

그런가…
확실히, 그건 그럴것이다.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무엇이든, 할아버지는 분명 타살된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더 이상 이 아무것도 안보이는 빗속을 거니는건 위험할 것이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이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장지문을 쳐다본다.
그녀가 뛰쳐나간 문은… 어째서인지 꼭 닫혀있었다. 그녀는… 그런것까지 일일히 신경써준것인가? 왠지 마음이 쓸쓸해지는 기분이 들어,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배님… 잘거에요?”
“응? 아니아니… 생각할게 있어서──”
“희서선배님이로군요…”

그녀는 슬픈듯한 눈을 하고선, 방 구석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신경 안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네”

쓸쓸하게 들려오는 대답.
그것뿐이였다. 그걸로, 나와 그녀의 대화는 끊겼다. 서먹서먹한 관계… 예전에는 이런 관계가 아니였을텐데… 언제부터일까? 보라와 나의 관계가… 이렇게 서먹서먹해진건.

“선배님…”
“…응? 아─”

그녀가 누워있는 나의 목덜미를 가는 팔로 끌어 안았다. 시선은 이미 그녀의 가슴팎. 비냄새와 함께 물씬 풍겨져오는 그녀의 향기는… 굉장히 매력적이였다.

“희서선배님… 아직도 좋아해요?”
“…잘, 모르겠어.”

그것은 사실이다.
무엇때문일까? 나와 희서의 사이에 보라가 찾아왔기 때문일까? 이유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건… 희서에대한 나의 마음이, 갈길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 흔들린 마음이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님…”

그녀는.
내 목을 좀더 끌어안았다.

“선배님은 제거에요… 나, 강희서라는 사람한테 지지않을거에요.”
“…그 이야기는 어젯밤에도 했었어.”
“에헤… 그런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 역시 두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좋아… 지금은 이 순간만을 생각하자. 돌아오지 않을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떨쳐버리자. 이제부터 내가 걸어가야 할곳은… 눈앞의 길이다.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보라야…”
“네?”
“나 보라를… 좋아해도 될까?”

조심히 입밖에 낸 프로포즈.
답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이죠. 선배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머리카락에서 귓볼, 턱선을 타고 입가에 닿았다.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끈적한 느낌. 첫느낌은 분명 멀지 않은데, 이미 익숙해진 느낌이다.

“아, 앙… 선배… 님…”

뜨거운 목소리.
그녀는 천천히 나의 웃옷을 벗겼다. 맞닿은 살결. 엉키는 팔 다리. 끈적한 음성. 음란한 눈빛. 그리고… 그치지 않는 빗소리.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대로… 희서의 대신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녀의 몸을 탐하면서도, 그녀가 나의 몸을 원하면서도… 난 끊임없는 의문을 떨칠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한 고백은… 정녕 진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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