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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Pot . 가끔은 라면 맛이 나는 변태의 키스도 당하고만 있어야 할 때가 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고, 곧 완성된 라면은 식탁으로 옮겨져 내 뱃속으로 안착하실 운명이다. 가스 폭발이 일어나거나, 냄비를 떨어뜨려 화상을 입거나, 갑자기 라면이 발광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도 없다. 자취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째. 그동안 돈을 아끼느라 상당량의 식사를 라면으로 때웠는데, 이제 라면 끓이는 솜씨는 초 일류급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랭크를 매긴다면 공부는 B랭크 정도, 라면 끓이기는 A+정도랄까. 그런 느낌이다.

“읏챠.”

냄비가 허공을 유려하게 가르며 식탁으로 착륙했다. 이 냄비를 옮길 때 내 코를 지나는 향기, 이거야말로 라면을 끓이는 행복감을 절실히 맛보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먹을 때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아 정말 좋다.

“라~!”

라? 부엌 창문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내다봤는데, 허공으로 새가 한 마리 날고 있을 뿐. 별다른 것은 포착되지 않았다.

‘아니, 새치고는 좀 큰가…….’

조금 큰 새가 날아다니는 건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라면을 먹어야지. 역시 때 아닌 조류관찰 보다는 식사가 중요하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그 새 미묘하게 빛나고 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 라면 불어터질라. 새 한 마리가 참 머릿속을 꺼림칙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프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어터진 라면을 먹는 건 사양이다.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라면을 한가득 집어서 입속으로 직행. 소화기관으로 직행코스를 타는 면발들의 기분은 어떨까.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지만,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진흙을 온몸에 치덕치덕 바르고는 고무장갑을 전신에 뒤집어쓰는 느낌이겠지.”

‘음. 그런 느낌인건가. 아니, 나는 말한 적 없는데 누구 목소리지?’

집에는 나밖에 없고, 가끔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관리인 아주머니뿐인데 나 이외의 남자 목소리가 이곳에서 난다면, 결론으로 집어낼 수 있는 건 하나. 도둑이 들었군. 요새 도둑은 집주인이 라면을 먹는데 옆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도 지껄이는가보다. 아니 그보다 최근에 도둑에게 독심술이 필수라도 된 건가? 나 혼자 머릿속으로 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다니. 이거 도둑이 아니라 귀신이라도 나타났나보군.

‘귀신이라면 계속 먹어도 괜찮겠지.’

다시 라면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역시 내가 끓인 라면은 맛있어.

“그거 나도 좀 주라.”

무시하자.

“어이 듣고는 있는 거냐? 그거 그 라면 나도 좀 달라고.”

아무도 없는데 계속 시끄럽다.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리다니 내가 미친 건가? 그런 건가? 아냐 배가 고파서 그럴 거다. 어서 라면을 먹자. 배를 채우면 이 요상한 소리도 사라지겠지.

“말 좀 들어라. 응? 나도 라면 좀 달라고. 저기요? 라면 좀만 주세요.”

젠장.

“야 이 씨발 잡스런 목소린 뭐냐고! 귀신이냐? 그런 거냐? 아니면 내가 미친 거냐? 아니면 도둑놈이냐? 나와 썅. 여기 나와서 지껄여봐 좀!”

영락없는 미친놈 등극. 아 축하할 일이로구나. 특급 라면 조리사인 이 몸이 이렇게 미쳐버리는구나. 당연하게도 내 지랄 맞으신 발성연습에 반응하는 물체는 집구석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이걸로 목소리는 사라져주세요.

“이……. 이 노무 시키가 왜 성질내고 난리야! 라면 조금 얻어먹겠다는데.”

음.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라면 먹고 있는데 헛소리가 들려서 성질부렸더니 날개달린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어. 게다가 미묘하게 빛이 나고 있어. 머리가 길고, 흑발이고, 눈동자도 새까맣고 왠지 고귀하다고 광고하는 것만 같은 상판이 전라인 몸뚱이와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당장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의 이 상황에 내 뇌는 연산 초과를 일으키는 듯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에서 오류가 발발했다. 내용물이 수용범위를 초과한 것도 아닌데 씹고 있던 라면이 입 밖으로 도망을 나가면서 어느새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서 나를 보고 있던 그 고귀하신 노출광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변…….”

어느새 내 입이 아직 연산처리도 끝나지 않은 단어를 내뱉고 있었다. 오류난 입이 뱉어낼 라면이 모자라서 생체법칙까지 무시해가며 무언가 지껄여야 하는 모양이다.

“변태다.”

오, 빛나는 면상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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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드고어모드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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