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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14 -

2006.07.07 20:24

히이로 조회 수:431

갑자기 들려오는 한 남자의 쉰 목소리. 분명히 그것은 웃음소리였지만…웃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섬뜩한 광기가 그 속에 베여있었다. 상퀼로트는 물론 네르바를 비롯한 기사들까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만큼 남자의 웃음소리는 함부로 행동조차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날카로움이 묻어있었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경계하던 네르바는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기 있는 기사들 중 생존한 여성은 네르바 혼자뿐이었다. 결국 상대가 지목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쳐 웃지만 말고 쌍판을 공개 하는 게 어떠냐 잡놈아!”

“큭큭큭큭, 확실하구나. 그 말투! 분명히 네 년이다!”

“대체 어떤 놈이…….”

사방을 둘러보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소리를 지르는 네르바.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 정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네르바는 약이 오를 만큼 올라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 말은 중도에 끊기고 말았다. 순식간에 한 물체가 그녀의 뒤를 급습했던 것이다.

“이, 이놈이!”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네르바였지만 빗맞은 왼 팔 부근이 욱신거렸다. 제대로 허용했더라면, 아무리 검술훈련으로 단련된 그녀의 팔뚝이라도 깨끗하게 부러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공격이다. 그녀를 습격한 물체는 상퀼로트, 그 중에서도 남자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상대는 무기를 가지고 네르바를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방금 전 네르바에게 준 충격은 순수한 상대의 근력이라는 뜻이다.

“큭큭,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기야 무리도 아니지. 그 당시 난 네 눈으로 보기엔 날파리 같은 존재였을 테니 말이야. 자 어떠냐?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상대에게, 비참하게 쓰러질 네 모습을 생각해보니 말이야. 큭큭큭, 넌 이제 여기서 죽는 거다.”

라펜드는 여전히 사냥감을 포위한 맹수처럼 살기가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발을 놀려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네르바로써는 항상 기사들끼리의 대련만 했던 터라, 말을 하던 중간 중간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여 검을 휘둘러보는 그녀였지만 집요한 라펜드 앞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펜드의 건틀릿이 네르바의 검을 튕겨내고 급속도로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네르바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짐과 동시에 라펜드의 광소가 절정에 달했던 때. 적당한 체중이 실린 라펜드의 오른 손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하고 만다.

“으헉!”

상당한 충격이었다. 네르바의 고통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더불어 그대로 바닥에 쳐 박히는 그녀의 몸. 어느새 입가는 붉은 핏물이 흘러나와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더욱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펜드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네르바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그녀였다. 험한 기사과정을 모두 거친 네르바였으나, 실전에서, 그것도 이렇게 강한 공격을 허용한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고통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몸은, 현재 네르바를 전투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일어나라.”

“아악!”

라펜드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린 직후, 투구를 쓴 그녀의 흰 얼굴에 라펜드의 군화가 작렬했다.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구르는 네르바의 힘없는 모습. 동료기사들은 상대에게 농락당하는 그녀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라펜드에게 얻어맞은 뺨 부위를 움켜잡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네르바. 하지만 라펜드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흥! 그때의 오만하던 기세는 어디로 간 거지? 네 년 때문에 하마터면 이 좋은 세상을 두고 떠날 뻔 했지. 등에 생긴 검상을 치료하는 동안 난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기억이 안나나! 그렇다면 기억하게 해주지! 작센 침공전! 그때 네게 당했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그럼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네 년을 짓밟는 수밖에!”

쓰러진 네르바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들어 올리는 라펜드의 눈에는 분노와 환희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 스스로도 상대방을 쉽게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는지 건틀릿을 사용하지 않은 채, 다른 신체부위로 그녀를 폭행하고 있었다. 멱살을 잡은 상태에서 무릎으로 이미 당한 복부를 가격한 후, 거칠게 투구를 벗겨낸 다음, 이마로 그녀의 머리를 들이받는 라펜드.

“으흑! 흑! 꺄악!”

  복부가 가격 당하는 순간 입가에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는 네르바. 그러나 그 고통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이마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뽀얀 그녀의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는 그녀의 이마가 깨졌음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는 울음과 비명이 뒤섞인 채 울려 퍼지는 네르바의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 하지만 라펜드에게서 동정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말을 타고 싸울때는 이렇지 않았잖아. 운다면 내가 마음이 약해져 놓아줄거라 생각했나? 큭큭, 이거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것 같은데 기사양반. 그나저나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군. 이봐! 아무거나 좋으니 말 한 마리 좀 끌고와라!”

“예! 라펜드님.”

네르바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라펜드가 소리치자, 상퀼로트 한명이 재빨리 말을 찾기 위해 달려간다. 머리채를 잡혀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서는 네르바를 향해 라펜드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남은 한손으로 거칠게 그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퍽! 퍽! 퍽!

무쇠로 이루어진 라펜드의 건틀릿이 그녀의 피부와 부딪치면서 묵직한 소음을 냈다. 뺨을 때리는 행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둔기로 뺨을 맞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라펜드는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이 휘둘러질 때마다 짧은 비명을 간간히 지르는 네르바. 이미 그녀의 얼굴은 평상시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 퉁퉁 부어오른 것도 모자라 피부가 터져 얼굴 곳곳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독하군.”

헬무트는 라펜드의 광기어린 행동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의 마르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일방적인 폭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퀼로트의 본대라 할 수 있는 헬무트의 부대가 이미 협곡 내부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원과 협곡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치른 전투의 영향이 컸는지, 대부분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라펜드 녀석은 힘이 넘치는군, 하기야…복수를 할 수 있어서 그런가. 어찌되든 빨리 처리했으면 하는데 녀석 성격상 그럴 것도 같지 않고……. 좋아, 지금부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면 괜찮을 것 같군. 부관.”

“예 헬무트님. 병사들은 들으라! 지금부터 당분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겠다! 다시한 번 말한다! 지금부터…….”

헬무트의 명령을 받은 부관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각자 편한 자세로 주저앉은 상퀼로트들은 이제 라펜드와 네르바의 모습이 즐거운 여흥거리라도 되는 듯, 저마다 낄낄대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한 술 더 떠 소리까지 지르는 자도 있었다. 네르바의 아버지인 클레이 백작이 보았다면, 분을 이기지 못해 말한 자를 죽이려 달려드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음담패설들이었다.

“대장! 좀 더 화끈하게 데리고 놀아봐요!”

“크흐흐, 난 다른건 상관없는데 죽이지만 마쇼! 재미 좀 봅시다!”

“이봐! 내가 먼저 찍어놓았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머리카락을 잡힌 채 여전히 질질 끌려 다니며 맞은 네르바의 귀에도 아들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이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는 죽어도 싫었다.
적 병사들이 원하는 대로 농락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하는 네르바였다. 이제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며, 자신을 끌고 다니는 라펜드에게 말하는 그녀. 힘이 없어서인지 평상시의 날카로운 음성이 아닌, 착 가라앉은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여라…….”

“뭐라고?”

“죽여…….”

“호오, 죽여달라? 지금 네가 그렇게 말할 처지가 되었던가?”

라펜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는 거친 손길로 그녀의 갑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 라펜드가 이런 행동을 시작하자 상퀼로트는 갑자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네르바도 알 수 있었다.
라펜드의 행동과 상퀼로트의 함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녀의 가치관으로써는 죽는 것보다 굴욕적이고, 두려운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려 하는 것이었다.

“기사 놈들은 뭘 이렇게 많이 껴입고 다녀!”

“안…안돼…윽!”

그녀의 갑옷을 벗겨내며 욕을 내뱉는 라펜드. 네르바 역시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려 했지만, 복부를 다시 가격 당하고는 축 늘어져버리고 만다. 네르바가 이런 상황에 처하자 포위되어있던 남은 기사들이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결국 전원이 창에 꿰인 꼬치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주변에서 네르바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크하하핫!”

라펜드의 건틀릿이 끝내 그녀의 상의를 모두 찢어버리고 말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시녀나 어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특히 어느 남성에게도 맨가슴과 배를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네르바가 수천의 상퀼로트 앞에서 비참하게 희롱당한 것이다. 라펜드의 손에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며 굴욕적인 자세로 병사들의 눈요기가 되던 네르바. 어느새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선, 정신자간 사람처럼 멍하기 라펜드의 행동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라펜드님.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라펜드가 그녀의 하의에까지 손을 데려는 순간, 상퀼로트 하나가 말 한 마리를 끌고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그녀를 말 위에 던지는 라펜드. 병사들 쪽에서 아쉬움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지만, 당사자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거친 말투와 행동과는 달리 그는 여자를 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남들에겐 말 못할 일이지만 바르디아에서의 노예시절, 그와 관계가 있던 여자들, 어머니나 이웃집 누나가 귀족 같은 힘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학대받았는지를 어린 시절의 두 눈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라펜드였다. 이런 기억들은 그가 성장해가면서 이런 것들을 혐오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지금, 이 여기사만큼은 예외였다. 자신을 조롱하고 죽을 뻔하게 까지 만들었던 자다. 은연중 라펜드의 귀족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네르바에게로 모두 응축되어 향해있었던 것이다. 또한 여자들, 특히 귀족년들이 이런 걸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혐오하면서도 이런 행위로 네르바를 희롱한 것이었다.

“내가 달리기 시작하면 말을 달리게 해. 가지고 놀만큼 가지고 놀았다. 이제 끝을 보겠어.”

“예!”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그는 천천히 네르바를 없애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상대는 상의하나 찢어진 정도에 벌써 모든 걸 상실하고 폐인처럼 변해있다. 치욕을 줄 만큼 주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가지고 놀아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아온 생리로 알게 된 라펜드. 이제는 끝을 봐도 괜찮겠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솔직히 굳이 더러운 귀족 놈들처럼 온 몸을 발가벗겨 희롱하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이 네르바의 몸에서 손을 떼게 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하앗! 이제 끝이다!”

라펜드가 고함을 지르며 말을 향해 달리자, 병사가 말의 엉덩이를 후려친다.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는 말. 네르바는 말 위에 엎어진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에서는 아직도 눈물이 흘러내려, 말갈기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을 떨구는 있는 네르바를 태운 말이 서서히 라펜드에게로 접근한다. 라펜드도 속력을 더 올리면서 일격에 끝내겠다는 듯,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유감이구나! 죽을 때, 자신이 왜 죽는지 정도는 알아야 덜 억울할텐데 말이다!”

네르바의 귀로 라펜드의 고함이 흘러들어온다. 그것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네르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라펜드 쪽을 바라보았다. 달리는 말이라 계속 들썩거려 똑바로 바라보진 못했으나, 한사람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또 자신역시 상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디선가 겪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주변의 병사들, 머리를 심하게 흩날리도록 할 정도로 빠른 말의 속력, 그리고 익숙한 상대의 모습…….

‘그, 그놈이구나. 귀족과 피난민을 기습했던 부대에 있던 녀석…….’

“이제 그만 이 세상에서 없어지거라!”

뒤이어 들리는 라펜드의 고함을 한 귀로 흘리며, 네르바는 몇 년 전에 한번 부딪쳤던, 그와의 일을 기억해내고 만다. 그 당시는 정말 손쉬운 상대였었던 남자. 하지만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네르바 자신은 그에게 굴욕까지 당한 채, 자신이 승리했던 때와 같은 상황에서 놈의 손에 목숨을 마감하게 될 상황에 놓였다.
허무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은 이제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헛웃음이라도 크게 터트리고 싶었으나, 부어버린 얼굴과 심하게 터진 입술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아빠…엄마…….”

이제는 주름살이 확연히 나타나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 네르바. 힘겹게,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발음했을 두 단어를 되 뇌이며, 눈물을 쏟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돌아가, 다시는 그 손들을 놓지 않은 채 살고 싶었다.
걱정 없이 재미있고 신기한 일만 가득했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많은 친구들…지금은 필로스 후작님과 성에서 최후를 함께 했다고 알려진 미첼 오빠, 항상 함께 어울렸던 크리스, 알리사. 심지어는 최근까지도 티격태격했던 찌질이 필립까지 떠올랐다.

“필립…이 등신아. 대체…어디로 간거야…저번어도 조금만 빨리 움직이니 뭐니 하더니…지금도…늦잖아…나쁜 놈 같으니라구…….”

“크아압!”

네르바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라펜드의 기합이 울려퍼진다. 무방비 상태인 네르바를 향해 날아가는 그의 검붉은 건틀릿. 수많은 기사의 피가 그것을 적셨지만, 뾰족하게 돌출한 스파이크까지 무디게 만들 수는 없었다.
네르바의 피부를 때리는 강한 풍압, 그리고 온 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은 몽롱한 느낌이 든다. 마침내, 온 몸 전체가 둔기에 후려 맞은듯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그것을 끝으로 네르바는 눈을 감았다.

“네르바! 네르바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아버지 필로스 후작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울부짖었을 때의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는 필립의 비참한 울부짖음. 어느새 나타나 그녀를 껴안고 상퀼로트 사이에 둘러쌓인 필립이었다. 평상시의 도도한 아름다움이 풍기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시뻘건 그녀의 얼굴, 머리에서 배꼽까지 드러난 하얀 속살, 그 중에서도 얼마나 맞았는지 배 부분에 생긴 상처와 생채기들이 필립의 심장을 후벼 파는듯한 고통을 주었다.

“이 바보야!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렇게 사람 속을 긁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겠구나 싶었는데 왜!”

필립의 붉은 눈에서 뜨거운 액체들이 사정없이, 안고 있는 네르바의 몸으로 떨어진다. 그들 주위로는 한쪽 다리가 잘린 채 쓰러져서 일어날 줄 모르는, 네르바를 태웠던 말과, 역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라펜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네르바와는 달리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개 같은 새끼. 내 복수를 방해해! 제대로 죽여버리겠어!”

어느새 일어선 라펜드는 네르바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필립을 바라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머리에 충격을 받았는지 연신 머리를 문지르면서 말이다. 사실은 라펜드가 네르바의 숨통을 끊기 직전, 필립이 난입해 마르니에로 말의 앞발을 절단해 버렸다.
갑자기 무게중심을 잃은 말은, 쓰러지면서 공교롭게도 라펜드 쪽으로 돌진하는 꼴이 되었고, 그로 인해 공중에 떠버린 네르바를 필립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도약하여 끌어안고 떨어졌던 것이다.
네르바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았던 필립은 왼쪽 팔부터 땅에 떨어져 버렸고, 라펜드는 격투가 특유의 유연함으로 말을 피하려 했지만, 한계를 넘지 못해 말과 충돌하고 말았다. 그리고 쓰러지면서 머리 쪽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썅년은 아직 안 죽었을 걸! 핫, 뭐 상관없어! 두놈다 여기서 뒈지게 해줄테니까!”

라펜드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필립을 향해 욕을 지껄인다. 라펜드의 말을 듣는 순간, 필립은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그녀의 왼쪽 가슴에다 귀를 갖다 붙였다. 평소라면 한참을 망설이다 못해, 얼굴까지 새빨개져 어쩔 줄 몰라 했을 필립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런 것들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필립의 귀가 그녀의 살과 닿는 순간, 아직 따뜻한 네르바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그녀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르바!”

좀 더 확실히 증명하고 싶었는지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녀의 목 부근에 가져다 놓고 맥박이 뛰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얼굴을 그녀의 코 가까이에 들이대어 호흡을 하는지 확인한다. 그녀는 살아있었다. 미약하긴 하였으나, 숨도 쉬고, 맥박도 여전히 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던 필립의 얼굴에는 이제 기쁨이 한가득 머물러있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의 감정.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이 구원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을 때도 이런 기분을 아닐 것이라 필립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이 더러운 기사새끼!”

“…더러워?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인가?”

라펜드의 발작과도 같은 외침에 필립이 반문한다. 네르바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자 필립 주위는 어느새 음울하면서도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는 분위기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 쓰러져있는 상퀼로트의 시신 한 구에서 망토를 찢어내는 필립. 그는 네르바를 조심스레 찢은 망토에 내려놓은 후, 남은 부분으로 그녀의 상체를 가려준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라펜드를 마주보았다. 물론 그 전에, 네르바의 흉측한 얼굴에 조심스레 입맞춤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 필립이었다.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그것도 여자인 기사를, 이런 저급한 방법으로 모욕한 네놈에게서 그따위 말이 나와?”

“큭!”

필립의 낮은 억양의 말투. 마치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정적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필립의 말에 매끄러운 답변을 못하는 라펜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다. 그러나, 곧바로 라펜드의 표정은 더욱더 찌그러져 버렸다. 이번 것은 단순히 대답을 못해 일그러지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당황함과 두려움이었다.
이런 라펜드에게, 필립이 남긴 한마디가 그의 귀를 통해 육중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뭔지 느껴 보거라 애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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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입니다.

에구에구, 슬슬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있군요. 이번 챕터;;
아놔, 이거 예상보다 대체 몇 배나 분량이 늘어나 버린 거야 삐질;;

뭐 그런 겁니다.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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