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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13 -

2006.06.30 20:10

히이로 조회 수:193

“무, 무슨 소리냐! 날 우롱하지마라!”

“우롱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자꾸 헤이딕경께서 제 검을 사양하시길래 약간의 충격 요법을 쓴 것 뿐입니다만.”

“이, 이자식!”

“어찌되었든, 올바른 선택이십니다. 헤이딕경.”

“…빌어먹을 놈.”

분위기가 360도 확 바뀌어버린 필립의 태도에 당황했던 헤이딕이었으나 곧 사태를 파악하고 만다.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는 필립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였으나, 그 속에 증오나 미움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한편, 여전히 그들 주위에 있는 기사들은 둘 사이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필립과 헤이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어쨌튼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헤이딕경은 기사들을 이끌고 뒤로 후퇴하십시오. 가시면 제 부관이 기사들을 추슬러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과 합류 후, 적당한 휴식을 취한 뒤, 적을 향해 돌격해주십시오. 상퀼로트의 숫자는 많으니 지금 같은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놈들을 협곡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자네는?”

필립의 말에 헤이딕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필립의 말 속에서 그가 자신들과 같이 이동하지 않을 것이라 감지한 헤이딕은 필립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여전히 필립의 붉은 눈이 적응되지 않았는지 굉장히 어색해하면서 말이다.
이런 헤이딕의 질문을 받은 필립은 주저할 것도 없이 바로 답변을 내뱉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의지가 그의 대답 속에 숨겨져 있었다.

“전 앞으로 나갑니다. 아직 소수의 기사들은 상퀼로트 진형 안에 있을 겁니다.”

“가면 죽을걸세.”

“안죽습니다.”

헤이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말렸으나 필립은 듣지 않는다. 망토를 이용해 피 묻은 마르니에를 닦고는 서둘러 이동하려는 필립. 이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헤이딕이 필립의 한쪽 어깨를 잡는다. 그리고 특유의 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결국 필립은 그에게 어깨를 잡힌 채로 따가운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네는 총지휘관일세! 이런 무모한 개인행동을 할 단계가 아니지 않은가! 자네의 말과 행동에 따라 기사단 전원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단 말일세!”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헤이딕경.”

쩌렁쩌렁 울리는 헤이딕의 괄괄한 목소리를 들으며 필립은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말과는 반대로 그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헤이딕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필립은 생각했다. 지금쯤 적에 둘러 쌓여 고전하고 있을 누군가를…….
단순히 그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하이만경이 목숨을 걸면서 자신에게 맡긴 젊은 기사들의 생명. 자신도 새파랗게 젊은 축에 끼긴 하지만 일단 총지휘관으로써, 그가 해야할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동자로 헤이딕을 쳐다보는 필립.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이만경에게 기사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이것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닙니다.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대장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장이라는 작자가 뒤로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전 그들의 목숨을 위해 제 몸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기사로써의 제 신념이기도 합니다. 헤이딕경! 어서가십시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끌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필립경…….”

“만약 제가 죽는다면 지휘권은 헤이딕경과 제 부관에게 넘기겠습니다. 뭐 죽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하도 걱정을 해서 말이죠. 조금 있으면 지원군도 도착합니다. 그 전에 발사로크 놈들을 협곡 밖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헤이딕은 이제 아무 말 없이 필립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기사의 신념이라는 것은 기사 자신의 목숨만큼 귀한 것. 이것이 필립의 결심이라면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헤이딕은 필립의 설명에서 의문을 느꼈다. 그의 말이 어딘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지원군이 도착하는데 굳이 희생을 해가며 협곡 내부에서 적을 몰아낼 이유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따져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필립경. 지원군이 도착하는데 굳이 적을 요격해야할 필요가 있겠소?”

필립의 말을 끊고 질문을 하는 헤이딕. 필립은 그때가 되서야 숨겨진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과 하이만경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헤이딕을 비롯한 기사들이 알고 있는 지원군 젤리크 나이츠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적’이다. 자신들이 패할 경우 뒤처리를 담당하기 위해 온 기사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에 적을 협곡으로 몰아내고 기세를 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젤리크 나이츠도 사태를 관망해야 하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필립의 생각이었다.

“헤이딕경. 귀 좀 빌려주시지요.”

헤이딕에게 다가가 속삭이는 필립. 헤이딕은 그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중대한 할 말이 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승낙의 표시였다. 헤이딕이 긍정의 빛을 보이자 필립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자신의 입을 헤이딕의 귓가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어떤 사실을 들어도 놀라지 않고 담담함을 유지하십시오. 기사들의 사기는 물론, 이번 전쟁의 승패와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네.”

“그럼 시작하지요.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지원군이 젤리크 나이츠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어찌 보면 적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유는 묻지 마십시오. 전쟁이 끝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상황에서 말하기엔 시간도 부족하구요. 여하튼, 만약 전투에서 패해 젤리크 나이츠 쪽으로 퇴각하는 실수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게 된다면 모두 죽습니다. 그들은 패전기사들의 처리를 위해 오는 것이니까요.”

헤이딕의 눈에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는 곧 필립의 당부를 기억했고, 최대한 감정의 기복이 없는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로써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노장의 연륜이 있어서일까. 하이만에게 이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의 필립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침착하게 그는 서 있었다. 서서히 헤이딕이 안정을 되찾자, 필립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전투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인 싸움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세요. 그럼 이제 제가 협곡 밖으로 적을 밀어내야 한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말하겠습니다. 저 역시 처음 이 사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승마기술이 가장 뛰어난 기사 하나를 뽑아 제게 힘이 되어줄 사람에게서 서신을 전달케 했습니다. 답장을 받진 못했지만 전 확신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그 사람이 누군가?”

“사리크 폰 이디레온경.”

조심스럽게 묻는 헤이딕에게 필립은 지체 없이 대답한다. 다시 한번 놀라는 헤이딕의 얼굴. 하지만 이전의 놀라움과는 달리, 이번에는 희망의 빛이 함께 스며들어 있었다. 필립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알 사람은 다 알만한 유명인사. 그가 직접적으로 이 전투에 개입한다면 전세는 바르디아 쪽으로 기울지도 모르는 일.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강했던 것이다.
  
“나인발트 나이츠 본대가 오는건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기존 주둔지를 고려해 보았을 때, 우회해서 다넨평원 쪽으로 전진하겠지요. 그러니 그 전에 협곡 내부의 적을 몰아내야 좀 더 수월하게 전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평원으로 적이 내몰리면 기병인 기사가 유리해진다 이거로군.”

헤이딕의 말에 필립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랭스성에 주둔하고 있는 나인발트 나이츠까지 서신이 가는 시간과, 그들이 이곳까지 진군해오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6시간 이내에 사리크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마디로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상당히 지친상태에서 적을 몰아내야하는 지금 이시간이 최후의 고비였다. 이곳에서 밀린다면 앞에서는 상퀼로트에게, 뒤에서는 젤리크 나이츠에게 공격을 당해 궤멸한 것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 때문인지 자연히 필립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헤이딕이 입을 연다.

“필립경. 자네…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기사들의 목숨을 위한 일입니다. 무모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헤이딕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도 깨달았던 것이다. 비록 필립의 걱정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일이지만 말이다. 헤이딕은 더 이상 필립을 말릴 수 없었다. 필립은 이번전투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신변을 보장받기 어려웠다. 제 아무리 군의 총지휘관이라 해도 마음대로 지원군을 요청할 수 없는 것이 바르디아 제국의 군사제도.
설령 요청한다 해도 상부의 승인을 얻어내야만 한다. 허나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은 단시간내에 나인발트 나이츠가 지원군으로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황실 기사단 젤리크 나이츠가 패전 처리를 위해 진군하고 있었으니, 증원군을 요청한다 해도 위에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 아이는 이 전투에 모든 걸 걸었구나.’

필립을 바라보며 헤이딕은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보통의 지휘관, 자신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승리를 위해 전략, 전술을 짜기는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건 상태에서의 전술 같은 것은 짜지도, 짠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필립은 달랐다. 물론, 상황이 특수하기는 했지만 필승을 위해, 살기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군법을 어긴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길을 마련해 준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버텨내야만 했다. 헤이딕은 양쪽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은 압력을 느끼면서 필립에게 말했다.

“꼭 살아서 만나길 기대하겠소. 필립경. 모두,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친 후, 필립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서둘러 기사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헤이딕. 필립은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헤이딕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지극히 의례적인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헤이딕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불연 듯 피식 헛웃음을 흘리는 필립.

“참나, 나이만 많지 부끄럼타는 건 10대 소녀 같군. 헤이딕경.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뭐 그래도…일단 걱정해주니 고맙군요. 자, 그럼 나도 어서 가보실까.”

필립은 투구를 한 번 가볍게 친 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은, 수없이 그를 치고 지나가며, 희미한 피 냄새와 비명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그 느낌이 현실이 되어, 갑자기 진한 피냄새가 느껴지자 서서히 필립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르바가 지금 어떠한 상화에 처해있는지를.

“제기랄! 너무 시간을 잡았나!”

순식간에 다급해진 표정을 지은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진하는 동안 봐온 익시드 나이츠 속에 네르바는 없었다. 결론은 아직도 적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뜻.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만큼 그의 초조함도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피 냄새의 주인이 제발 네르바가 아니길 간절히 속으로 바라는 필립이었다.

“비켜! 비켜라!”

얼마를 달렸을까. 이마와 온 몸이 땀으로 가득한 필립의 눈에 상퀼로트가 들어왔다. 멈출 생각을 하지도 않고, 발검을 한 상태에서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는 필립의 모습. 덕분에 상퀼로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필립을 바라볼 뿐이었다. 상대는 한사람. 처리는 식은 죽 먹기였다.

“저놈 미친거 아냐?”

“포위된 기사라도 구하러 오셨나? 뜻은 가상한데 현실파악이 안되는 녀석이군.”

“비키라고 난 분명히 말했다! 내 말을 무시했으니 이제는 죽는 법이나 배우거라!”

자신을 비웃는 그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필립은, 그대로 상대의 무리 속으로 달려 들어가 마르니에를 휘둘렀다. 달리면서 붙은 가속도와 눈이 붉어진 이후 한층 강해진 근력은 같은 검으로 응수해 오는 상대를 무기 째로 베어 넘긴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퀼로트 한 명이 쓰러지는 순간, 이미 뒤쪽의 다른 상퀼로트도 붉은 피를 허공에 흩뿌리며 고꾸라지고 있었다. 필립의 돌격은 그만큼 빨랐고,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퀼로트들은 얼떨결에 길을 내주거나 그의 검. 마르니에의 희생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잡것들아!”

여전히 속력을 늦추지 않으면서 필립은 고함을 지른다. 사방이 전부 퀼트 복장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도 이젠 자신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직적으로 자신에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네르바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상퀼로트의 손에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따위…공격 가지고…날…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의 둔기에 당해, 흉부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필립은 마르니에를 멈추지 않았다. 몇배로 갚아주겠다는 듯, 자신을 공격한 적은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았다. 치명상이 아닌 부위를 베거나 찔러 공격을 차단한 후, 상대가 한없이 고통스러워 할 때에 급소를 노려 처리하는 그의 검술. 의도적이기 보다는,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필립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상퀼로트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 대체뭐냐 저 놈은!”

“힉! 피, 핏빛 눈이다!”

어느새 필립을 기준으로 포위망을 형성한 상퀼로트.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그들의 무기 덕에 필립은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방금까지 그가 보여준 무위와 붉은 눈 때문인지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 상퀼로트였다. 그러나, 수적 우위가 확보되고, 상대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주저 없이 사방에서 필립을 공격해 들어왔다.

“이런 치사한 자식들! 우아아아앗!”

앞뒤에서 무기를 꼬나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퀼로트를 바라보면서, 필립은 상대를 비난함과 동시에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측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아슬아슬하게 창끝을 피하거나 쳐내면서 달려간 필립은 힘껏 발을 굴러 바위를 딛고 도약했다. 자신이 있던 자리를 찌르면서 나는 쇠붙이의 마찰음을 생생히 느끼면서, 그는 공중제비를 돌며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의 등 뒤에 착지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상퀼로트에게 찐득한 미소와 마르니에의 춤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선사해 주었다.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필립 때문에 우왕좌왕하다가, 자지러지는 병사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필립을 잡기위해 달려들었던 상퀼로트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가슴부근을 움켜잡으며 쓰러지는 동료 3명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온 몸을 피로 떡칠한 기사 하나가 유유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고회로가 갑작스럽게 정지한 듯, 멍하니 서 있는 상퀼로트 일동을 향해 필립은 붉어진 눈으로 윙크를 한다.

“바이~ 바이.”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전력질주를 시작한 필립. 그의 모습이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서야 상퀼로트는 상황을 파악하고 만다. 하지만 부대를 지휘할 지휘관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또다시 당분간 우왕좌왕하는 말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결국,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최고참 병사가 그들에게 추격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자 엄청난 속도로 필립을 추격하는 상퀼로트. 하지만 이미 그는 따라잡기엔 너무나 거리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르이란느! 정신 차려!”

“으으…으……커헉!”

한 기사의 품에 안겨있던 기사가 피를 토하면서 축 늘어진다.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를 안고 있는 기사 주위로 4명의 기사가 온전치 못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상퀼로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려보는 눈빛과는 다르게 제멋대로 떨리는, 검을 잡은 기사들의 손.
생애 첫 전투경험을 쌓을 장소로써 이곳 카세리네 협곡은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다. 말 그대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 그 중에서도 전투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이 젊은 기사들에게 비춰지는 잔인함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노련한 기사나 대장이 보았을 때, 아직까지도 그들이 검을 붙들고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크아악!”

상퀼로트의 창끝에 갑옷 채로 관통당한 기사의 비명이 무겁게 울려 퍼진다. 창끝이 몸을 빠져나가자, 터진 물주머니처럼 피를 쏟으며 허무하게 무너지는 기사. 또 다른 동료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남은 생존자들은 보고 싶지 않은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내 뒤를 엄호해…길은 내가 뚫어볼테니.”

“네르바!”

“그 떨리는 손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난 이미 한번 경험이 있어. 그러니 너희들은 내 등 뒤나 잘 지켜줘!”

손수 죽은 기사들의 투구를 벗겨 눈을 감겨준 후, 일어선 네르바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를 내며 기사들의 선봉에 선다. 확실히, 작센 방어전을 피부로 직접 느낀 그녀였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담담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투구로도 다 가릴 수 없었던 긴 웨이브 진 금발 머리카락은 붉은 물감으로 염색을 했는지, 이곳저곳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또한, 투구 사이로 드러난 큰 눈동자에는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견디다 못해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아아앗!”

특유의 높은 기합소리와 함께 네르바가 돌진한다. 그러자 용감한 상퀼로트 한명이 달려 나와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하려고, 왼쪽 어깨 쪽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간다. 하지만 네르바는 찔러 들어오는 상대의 검을, 자신의 검과 절묘하게 겹쳐, 갈고리 같이 잡아끌어 상대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역공을 펼쳐 상대의 몸통을 대각선 방향으로 거칠게 그어버렸다. 옷감과 살이 동시에 갈라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꾸라지는 상퀼로트의 몸. 그러자 포위만 하고 있던 상퀼로트까지 공세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쳇, 일대일로 붙으면 쪽도 못쓸 쓰레기들이!”

거칠게 상대의 공격에 응수하며 불리한 상황을 탓하는 네르바의 짜증 섞인 음성.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을 탄탄한 기본검술로 훌륭하게 제압하는 그녀였다. 그렇게 온 힘을 쏟아 부으며 살아남은 동료들과 포위망을 뚫으며 전진하는 그녀였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못한 채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그녀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크하하하하하하! 찾았다! 찾았다고! 이런 곳에서 네년을 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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