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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기검

2006.06.18 14:43

히이로 조회 수:225

중국의 한 작은 도시에 가면, 그 곳에서도 먼지가 끼고 거미줄이 무성한 다 쓰러져가는 골동품점을 찾아오시면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절 찾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여러 물건들을 옮기고, 먼지를 털어내며 세심한 눈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저를 찾아내셨다고 해도, 당신의 기대와는 상반된 제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시겠지요. 당신의 관심에 덩달아 기대에 부풀어 도움을 준 늙은 중국인 주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거친 사투리 욕도 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정도로 저는 형편없을지 모릅니다. 다 썩어들어간 종이 위에 그려진 조악한 소년 병사의 모습. 같은 시대의 미술품들과 비교 했을 때 저의 가치는 추락하겠지요.
그래도…제 존재를 알고 이곳까지 찾아와 주신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그것도 타국인이 아닌, 저의 후예. 고려의 후예가 찾아와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림 속의 소년 병사는 저 자신입니다. 거란의 화가가 절 그렸지요.
만약 괜찮다면…길고 재미 없는 이야기가 될 지 모르지만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제가 살았던 시대는 태조께서 나라를 건설 하신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그 당시 고려는 북쪽 오랑캐 거란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죠. 실제로 거란이 침입을 해 온적도 있습니다만, 첫 침입은 서희장군님께서 협상을 벌여 물러가게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또다시 쳐들어 올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전체적으로 불안감이 만연하던 때였습니다.

"이곳은 집과는 틀리다. 경박한 행동을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예 아버님."

10살이던 제가 궁에 처음 입궐하던 날. 아버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저희 가문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전, 고위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를 곪을 걱정은 안하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군인 가문이지요.
아버님은 감문위 소속의 별장이셨습니다. 항상 군에 출입 하시면서 고관 대작이나 왕족 분들을 호위하셨지요. 어머님은 아버님의 상관인 중랑장, 제 외할아버님의 셋째 딸로 외할아버님의 권유로 아버님과 혼인을 맺으셨다고 합니다. 이 두 분사이에서 저를 비롯한 삼남매가 태어났는데,큰 형님은 벌써 신호위의 대정이 되어 서경으로 부임하셨습니다. 둘째는 저이고, 셋째는…누이동생이었는데 제가 궁으로 입궐하기 2주전 급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아버님이 저를 데리고 궁에 가시는 이유도, 상심한 제게 기분전환을 시켜주려 하셨음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별장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지나가시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아버님께 인사를 한 문지기 2명이 저를 보고 말끝을 흐립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버님의 대답에 의혹을 풀고, 온정이 서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10살이었던 저는 서슬이 퍼런 창을 든 거구의 그들이 무서워 아버지 뒤에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죠.
아버님도 이런 제 마음을 하셨는지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시고는 문을 통과해 궁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와…아버님, 정말 대단합니다!"

"녀석."

귀 빠지고 처음으로 궁궐의 내부를 본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외할아버님 댁, 물론 이곳도 으리으리했지만 폐하께서 계신다는 궁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 색깔이 다른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분주히 돌아 다니는 모습, 아름다운 의복으로 저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궁녀들, 또한 아버님처럼 무장을 한 장군님에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병사들의 늠름한 모습까지. 활기와 위엄이 공존하는 이 장소는 제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버님은 궁궐의 장관에 넔을 빼앗긴 절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다가, 제 손목을 붙잡고 오늘 가야할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답니다.

"잘 듣거라. 누차 말해왔다만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느니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어느 궁 앞에 도착한 아버님은 염려스런 얼굴로 다시 한 번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저 역시,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는 하나, 아버님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희 부자는 궁의 내부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처음으로 뵙게 되었죠.

"별장께서 드셨사옵니다 마마."

"들라하시게."

내관의 말 뒤로 들리는 자애로운 음성. 저에게 말씀하실 때의 어머님의 음성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리고 아버님과 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화려한 장신구와 여러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아진 비단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분이, 품에 무언가를 안고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전 그 분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고맙네 별장."

"경하드리옵니다."

아버님이 인사를 올리자 마마는 가볍게 답례를 하십니다. 저도 얼떨결에 말을 내뱉었지만, 그 분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마마의 품 속에 있는 것이 아기라는 것을 알았고, 경하드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되었지요.

"경의 아들인가?"

"그러하옵니다."

"총명하구나."

"황공하옵니다. 마마."

마마의 총명하다는 말에 저는 미리 배운대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마마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마마는 궁녀를 시켜 다과까지 내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그것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 그러자 마마께서는 친히 하나를 들어 제게 건네셨답니다.

"맛있단다. 들어보거라."

"마마……."

"괜찮으니 어서 들어보거라."

저는 어쩔 줄을 몰라 아버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버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죠. 저는 그제서야 공손히 다과를 받은 후,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궁궐의 다과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집에서도 가끔씩 어머니가 내주시는 것을 먹어본 적이 있으나 궁궐의 것과는 차이가 났지요. 전 지금도 그때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제가 다과를 오물거리며 먹는 동안 아버님과 마마는 저는 잘 알아듣지 못할 환담을 나누셨습니다.
시간히 약간 흐른 후, 아버님과 제가 하직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마마께서 제게 대뜸 이렇게 물으셨지요.
아아, 이것이 저와 아기씨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마는 친히 제 앞까지 걸어오셔서 요에 둘러쌓인 아기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아기씨는 주무시지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제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옹알이를 하시는 겁니다. 그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저를 보고 무언가를 계속 말씀하시는데, 저는 제 죽은 누이동생의 어린시절이 생각나 한 편으로는 슬프면서도, 다시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것에 대해 기뻤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죠.

"늠름하신 것이 큰 장군이 될 것 같습니다. 마마."

"늠름한 장군?…호호호호호!"

제 말이 끝나자마자 마마께서는 큰 웃음을 터트리셨습니다. 주변의 궁녀와 내관, 심지어는 아버님까지도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제 눈에 들어오자 저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답니다.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러나 마마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저를 배려해서였는지 제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답니다.

"사내대장부가 이까짓 일에 눈물을 보여서 쓰겠느냐. 이 아이는 여자아이란다. 내가 보기엔 네가 늠름한 장수가 될 것 같구나. 그렇게 되면 이 아이를 지켜다오. 알겠느냐?"

"훌쩍…네…마마. 명심하겠습니다. 훌쩍, 아기씨.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호호호. 죽을 죄라니. 이거 별장이 들어오기 전에 교육을 너무 단단히 시킨 것 아닌가."

"황공하옵니다 마마."


그날 이후, 전 마마의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마마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아버님으로부터 무술을 배웠죠. 정말,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열심히 했답니다. 아버님조차 무리하면 몸이 상한다고 쉬엄쉬엄하라 말씀하실 정도 였으니까요.
그렇게 전 창, 검, 수박등을 배우면서 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제가 아기시를 지킬 자격이 있을 리가 없었죠. 은연 중에 그걸 깨닫는 순간, 전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의기소침한 채 어느순간부터 의미없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열정과 의지만으로도 할 수 없는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그래서 전 다시 예전의 평번했던 감문위 별장의 차남으로 되돌아가려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행운은 항상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찾아오는 듯. 제게로 날아들었습니다.
저를 입궐시키라는 마마의 분부가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마마께서 네가 궁으로 들어오길 원하신다."

퇴궐하신 아버님께 이 말을 들었을 때, 전 무슨 말씀인지 몰라 멍청하게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 의미를 깨닫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요. 마마의 곁에서 아기씨를 모신다. 으리으리하고 신기한 것들이 많은 궁궐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일은,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인 제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하겠다고, 마마와 아기씨를 곁에서 모시겠다고 말하려 하는 순간, 아버님의 말씀이 있으셨지요.

"들뜨지마라. 마마께는 어떻게든 내가 잘 말씀드려서 거절하도록 하겠다."

"아버님!"

"시끄럽다. 그렇게 알고 물러가도록 하거라."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아버님의 분부였습니다.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님의 목소리에는 제가 감히 따지고 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위엄이 서려있어, 전 하릴없이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태어나서 아버님에게 한없이 야속한 감정을 느끼며 저는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궁에 입궐하는게 어째서 안되는지 여쭈고 싶었습니다. 궁에 입궐하는 것은 폐하에 대한 충을 더욱 가까이서 실현하는 것이라 믿었던 당시의 저는 아버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죠.
아버님이 마마의 이 분부에 반대하신 이유를 알게된 건 나중으 일이었습니다. 제가 마침내 감문위 소속 한명의 병사로써 입궐하기전, 손수 어머님께서 제게 갑주를 입혀주시면서 말씀하셨지요.

"이 애미는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궁 생활은 겉으로 보기보다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니까요."

"어머님……."

"아마 예전에 마마가 내린 명령을 아버님이 거절하신 것에 대해 많이 야속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님도 다 아들을 생각해서 그런 거에요. 그때 궁으로 들어갔다면 아드님은 아마 내관이 되셨을 겁니다. 아버님은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이 고생하면서도, 멸시, 천대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에요. 당당히 아기씨를 곁에서 호위할 군인으로써 궁에 들어가길 원하셨던 겁니다."
어머님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습니다. 한때나마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마마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심하면 죽음에 이를수도 있을만큼 무서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버님의 관등은 하급군인인 정7품 별장. 그것도 문신이 아닌 무신. 마마의 입장에서 괘씸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아버님은 죽음을 피하실 수 없으셨을 겁니다. 그런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의 미래를 위해 마마의 분부를 거역한 아버님을 전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떻게 해서라도 입궐하길 원하고 있었죠. 아버님의 신변은 뒷전으로 미루고 아버님의 거절이 취소되어 궁으로 들어가길 원한겁니다. 정말 불효막심한 녀석이었지요. 저의 이 불효막심한 바람이 통했는지 마마는 쉽게 절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그때의 제 인상이 강렬했나봐요.
여하튼, 아버님은 마마의 심기를 살피며 정중히 거절하시기를 몇 번이나 시도하셨으나, 마마의 뜻이 너무 완고했답니다. 끝내 아버님도 승낙을 하실 수 밖에 없었죠. 대신 마마께 청을 올려 내관이 아닌 감무위의 호위병사로써 입궐하도록 한다는 허락을 받아내셨습니다.
드디어 제 소망이 이루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전 입궁하기 전 3개월간 검술등 무술훈련을 비롯한 병사로써의 궁중 예법을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충실히 배웠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궐의 날이 왔죠.

"넌 10살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해야한다."

"명심하겠습니다."

"10살 때 난 놀기 좋아하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넌 이렇듯 네 일을 찾아냈구나.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아버님…그동안…정말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몇 달전, 문지기 2명 앞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던 제가 병사의 복장을 하고 당당히 앞에 섰을 때 아버님이 제가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전, 어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기에 참고있던 눈물을 터트리며 아버지께 감사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때,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상 궁에 들어가려고 하자 제가 진심으로 공경하고…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코를 훌쩍이며 병사의 모습으로 우는 저를 아버님은 말없이 안아주셨습니다.
특유의 익숙한 체취가 제 코를 통해 느껴지자 전 더욱 감정이 북받쳐 서럽게 울었지요. 그렇게 제가 품 속에서 울음을 그칠때까지 기다리신 아버님은 품 속에서 조용히 작은 검을 꺼내서 제 허리춤에 손수 묶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상하게 말씀하셨죠.

"네 어미가 네 힘에는 맞지도 않는 검을 들면서 고생할까 염려해 형에게 서신을 보내 그 쪽에서 유명한 장인에게 이것을 만들게 하셨다. 일개 병졸 따위에게 만들어 줄, 장난감 같은 검은 없다는 장인의 말에 네 형이 어린 너를 생각하는 마음에 3일밤낮으로 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빌어 얻어온 검이니라. 어머니와 형께 감사하거라. 또한 정말로 집이 그리울 땐 이 검을 보거라. 이 검은 너에 대한 어머니와 형의 마음이니…항상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무신이라 말주변이 없고 조용한 성품의 아버님. 전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속으로, 이 검속에는 아버님도 함께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집은 검게 칠해져 있었으나 재질은 나무였습니다. 분명 형님이 보내온 이 아기검, 보통검과 모양이 같지만 크기가 작은 이 검을 보게된 순간 전 이것을 아기검이라고 부르기고 생각했었답니다. 여튼, 이 아기검은 원래 검집도 철로 만들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님, 형님 만큼이나 저를 걱정하고 아껴주시는 아버님이…손수 나무를 깎아 저를 위해 검집을 만들어주신 겁니다.
조금이라도 덜 무거우라고 말입니다……. 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형님과 제가 칼싸움놀이를 할 때 아버님께서 손수 목검과 검집을 나무를 깎아 만들어주셨지요. 이 검집은 틀림없는 아버님의 작품입니다. 이것을 느낀순간 전 다시한 번 아버님께 안겨서 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에…….

"아버님. 그럼 소자 입궁하겠사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님께, 이제는 상관이기도 한 나의 아버님께 힘차게 하직인사를 한 후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저의 궁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우∼! 아∼아∼꺄앗!"

아기씨의 옹알이 소리가 커져갈수록 저의 감문위 생활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병졸생활은 고되고 힘듭니다. 하지만 마마와 아기씨의 웃음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올 땐, 보초를 서던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아기씨의 옹알이와 웃음, 심지어는 울음소리까지 제겐 힘이되고 활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가 병사일을 한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저를 배려해 주었답니다.
아버님은 이틀에 한번 꼴로 저를 보러 오셨고, 마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저를 불러다 다과를 주시며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자연히 저는 아기씨에게 안부인사를 올릴 수 있었고, 어쩌다 저를 보고 아기씨가 웃음을 지으시는 날이면 온 세상이 날아가는 것 같은 즐거운 기분도 느낄 수 있었죠. 동료 병사…솔직히 동료라기 보단 큰 형님에서 아버지 뻘 되는 분들이지만, 고된 훈련과 임무에도 불구하고 저를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는 쑥쑥 커야한다면서 불침번도 면제해 주셨죠.

"도련님. 마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유."

"수고했어 꺽쇠야. 너도 먹고가렴."

"헤헤 도련님. 감사해유."

어머님은 가끔씩 순박한 노비 꺽쇠를 시켜 간식거리도 보내주셨습니다. 항상 넉넉하게 보내주셨기에 저는 감사하는 의미에서 동료병사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들이 제가 미움받지 않고 병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전 힘들다고 하면 힘들다 할 수 있고, 보람차다 하면 보람차다고도 할 수 있는 병사 노릇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기씨도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갔지요.

"이녀석. 키가 많이 큰 것 같구나."

아버님이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신 날, 제게는 잊지 못할 또다른 작은 사건이 있었답니다. 아기씨가 탄생하신지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궁 주변에 자리를 잡고 보초를 서는데 마마의 놀란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병사들은 순간 긴장을 했고, 자연히 손이 검으로 옮겨진 상태였지요.
하지만 곧 이어져나오는 목소리는 저희의 긴장을 너무나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아우아∼어마마마…어마마마…아우."

"아가! 그래요…애미에요. 애미야……."

아기씨가, 아기씨가 드디어 말을 하신 겁니다. 감격에 젖은 마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전 제 자신의 일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습니다. 미천한 병졸인 제가 이런데 아기씨의 어머님이신 마마의 심정은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요?
그날, 마마가 계시는 궁에서는 작은 잔치가 열렸답니다. 마마에서부터 병사들까지 아기씨의 말이 트인 것을 축하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죠. 너무나 행복했었습니다.

"어마마마 이것! 힝! 좋아!"

한번 입을 연 아기씨는 빠른 속도로 말을 배워나가셨죠. 그리고 마침내, 저에게도 호칭을 주셨습니다. 아기씨에게서 그 말을 듣는순간, 제 심정은 기뻤지만…솔직히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어머님 생각도 났구요. 그 날도 마마가 저를 부르셔서 마마께 문안인사를 올린 직후였지요.

"아가. 오라버니가 오셨네. 인사해야지."

"마마. 오라버니라니요. 황공하옵니다."

"그럴 것 없다. 아가보다 나이가 많으니 오라버니가 아니더냐."

"하지만……."

마마는 제 말을 막으시고는 아기씨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아기씨는 이제 일어나셔서 제법 걸음도 잘 걸으시는 상태였지요. 아장아장 걷는 아기씨의 모습은…죽은 누이동생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연상시켰습니다. 그때도 누이동생을 생각하며 아기씨를 바라보던 저의 눈이 아기씨의 순진한 눈동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기씨의 말에 꿈을 꾸는 듯한 착각을 느꼈지요.

"오나…버…니."

"아, 아기씨……."

꿈이 아니었습니다. 아기씨가 제게 오라버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는…누이동생이 했던 것 처럼 제 앞까지 걸어와 안아달라는 시늉을 하시는 겁니다. 저는 황망히 마마를 바라보았죠.

"안아주거라. 별장에게 이야기는 다 들었느니라. 누이동생의 일. 네 누이라 생각하고 아껴다오."

처음 뵈었을때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마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아기씨를 안았답니다. 아기씨의 옥체에선 싱그러운 꽃 향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또한 제가 안아드리자 기분이 좋았는지 얼굴에 한껏 미소를 머금으셨죠. 이후로 아기씨와 전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답니다.

"오라버니. 소녀와 놀자아!"

아기씨는 항상 제 앞에와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날씨가 풀리고 능숙하게 걸을 수 있게된 아기씨는 밖에서 뛰어노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이곳저곳을 뛰어 다니는 아기씨의 모습. 또 그것을 행여나 옥체에 해가 되는 일이 없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황급히 뒤쫓는 시녀들의 모습은 보는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그렇게 뛰노는 것이 재미가 없거나 지치셨을 때, 아기씨는 항상 같은 장소에서 보초를 서던 제게 달려와 말씀도 하고 장난도 치셨습니다. 아마 제가 가장 체구도 작고 아이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어디서 얻으셨는지 긴 풀잎을 가지고 와 까치발로 발돋움까지 하며 제 코를 간지르거나, 눈이 오는 날은 고사리 같은 하이얀 손이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눈을 뭉쳐 제 얼굴에 던지셨죠. 그리고 간지러움이나 차가움을 참기위해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제 얼굴을 보며 꽃처럼 웃으셨습니다. 아기씨의 이런 해맑은 웃음을 보며 직무상 대꾸도, 웃을수도 없는 저였지만 속마음은 정말 기뻤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기씨 자신에겐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죠. 신분의 차이로 감히 아기씨에게 말도 할 수 없는 무뚝뚝한 어린 병사에게 말을 걸어야 할 만큼…아기씨는 외로우셨던 겁니다.
제가 14살이 되던 해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씨와 마마에 관한 말씀이셨죠.

"네가 모시는 마마는 폐하의 성은을 입기 전까진 한낱 궁녀에 불과하셨다."

"그, 그렇습니까."

"마마께서는 단 하루, 폐하의 성은을 입은 후 아기씨를 가지셨다.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로 상당히 노하셨지. 지금까지도 황후마마는 마마와 아기씨를 하인 같이 천대시 하신다. 만약 아기씨가 사내아이였다면…두 분의 생명까지 위태로웠을지도 모르겠구나."

전 모르고 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후마마는 소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낱 궁녀였던 마마께서 폐하의 아이를 가졌으니 분노가 크셨겠지요. 혹시, 마마께서 왕자님을 출산하신다면 황후마마의 입지가 좁아져 버릴테니 자연히 마마를 미워하시게 된 겁니다.
아기씨는 딸이긴 하지만, 마마께서 해산 전에는 자객까지 동원해 마마를 해하려 하시려고도 했다는 겁니다. 이때 아버님이 별장의 신분으로 마마를 위험에서 구해 가까워지셨다고 하더군요.
마마께서 궁성 수비를 담당하는 고작 정7품 무신에 불과한 아버님을 궁으로 부르고, 심지어는 제게 친히 다과를 집어주시던 것 등의 일도 말입니다. 궁인 출신인 마마는 격식 같은걸 다른 마마들처럼 심하게 따지지 않으셨죠. 그러나 그만큼 권력이 있는 고관나리들과는 인연이 없어 일개 하급무사에 불과한 아버님같은 분께 마마 자신과 아기씨의 신변을 부탁하셨던 겁니다. 그만큼 마마는 힘이 없으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마마와 아기씨를 제 손으로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는 어린 제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전 마마와 아기씨가 좋았습니다. 아기씨를 보면 죽은 누이동생이 환생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요, 아기씨는 누이동생이 아닙니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행동도 많이 틀리지요. 하지만 마마의 말씀대로 전 아기씨보다 나이가 많으니 오라버니입니다. 아기씨를 누이동생처럼 생각하고, 그 분이 항상 해맑은 미소를 잃지않고 사시기를 전 바랬습니다.

"네 생일이라고 들었다. 들어보거라."

15살 생일. 아기씨가 제 앞까지와서 다과를 손에 쥐어주고는 쪼르르르 궁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아기씨의 나이도 벌써 5살. 말투도 많이 어른스러워 지셨습니다. 주위의 이목을 생각한 마마의 분부 덕에 이제는 절 오라버니라고 부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도 전 행복했습니다. 아기씨는 여전히 제게 다가오셔서 장난을 치셨고, 마마의 분부 덕에 전 제한적이지만 아기씨와 말동무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생일 때 아기씨가 손수 들고 제게 주신 다과 한 조각. 전 그것을 먹지않고 한동안 무슨 보물인양 고이고이 품속에 간직했답니다.

"으아아아아앙!"

아기씨는 많이 웃기도 하셨지만 그만큼 많이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마마의 지엄한 꾸중이나, 놀아달라고 하는데 제가 직무상 대꾸도 안하고 있으면 속상해서 우셨지요. 그때마다 전 슬펐습니다. 아기씨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놀아주고 대화를 나눌 말동무, 친구였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왕자, 공주님들은 아기씨를 따돌렸지요. 그 분들이 아기씨를 싫어했다기 보다는 황후마마를 비롯한 다른 마마의 분부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때마다 전 속이 상했지요.
그리고 아기씨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제게 더욱더 의존하시게 되었습니다.

"너희 어마마마. 이제 없어?"

아기씨가 야속할 때도 있었습니다. 15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전 급히 아버님을 따라 집을 향해 달렸습니다. 저와 어버님, 외할아버님은 군인이기에 집을 비워두셨고 형님은 변방수비를 담당하시고 계실 때입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하나 없이…쓸쓸히 임종을 맞으셨습니다.
어머님의 장례가 치뤄지는 동안 전 내내 울었습니다. 못난 제 자신이, 부모님의 임종도 보지 못하는 제 자신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걱정해 형님을 시켜 얻어온 아기검을 볼 때마다 제 눈물은 마르지 않은 채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렸습니다.
마침내 어머님의 장례식이 끝나고 궁에 복귀하기 전, 저는 그때까지도 허리춤에 묶고 다니던 아기검을 풀어 품 속에 집어넣었답니다. 아기검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님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어머님의 사랑. 그 마음을 간직한 채로 잊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약해지면 혹시나 아기씨와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가지고 다니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죠.
실제로 14살이후부터 아기검은 상징적인 검이었습니다. 저도 힘이 많이 붙어 보통 크기의 검과 창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말해보거라."

"……."

"정말 어마마마 없어?"

마마가 알려주셨는지 야속하게도 아기씨는 계속 제게 물으셨지요. 저는 같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하지만 어느새 제 얼굴은 일그러진 채 소리없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죠.
이런 제 모습을 보셨는지 마마가 황급히 달려와, 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기씨를 안아드셨습니다.

"마마, 아기씨를 꾸중하지 말아주십쇼."

저도 놀랄만큼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높으신 분이 말하기 전에 말을 할 수 없는데…자칫하면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무엄한 일이었지만, 마마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는지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아기씨를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후 저는 한없이 그 자세로 소리죽여 울었답니다.
아기씨가 밉지는 않았습니다. 아기씨는 어립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잊어보고자 노력했는데…아기씨가 야속했습니다. 갑자기 어머님이 그리워졌었지요.

"거란이 다시 침공했다고 한다."

"또다시 말입니까 아버님?"

"그래."

16살이 가까워질 무렵의 쌀쌀한 초겨울. 아버님이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아직 상황을 두고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불안했습니다.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이번엔 거란의 황제가 친히 군을 이끌고 남하했다고 합니다. 더 극단적인 소문은 벌써 서경이 함락되고 수도 개경으로 오랑캐가 움직였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저는 서경에 계시는 큰 형님이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아버님도 마찬가지셨답니다.

"걱정말거라. 이번에도 좋게 끝날 것이다."

당시 전 아버님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승전을 하시던 강조장군님이 적에게 사로잡혀 처형되고, 서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입니다. 형님, 우리 큰 형님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저는 불안했습니다.
이제 거란군은 개경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궁궐 분위기도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항복을 거부하시고 피난을 가더라도 항전을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셨나봅니다. 짐을 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제 눈에도 들어왔으니까요.
저는 아기씨와 마마가 걱정되었습니다. 올 겨울들어 마마는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셔 병석에 누워만 계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아기씨는 건강하시다는 겁니다. 전 마마와 아기씨도 폐하를 따라 피난길에 오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단순한 제 소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마가 궁에 남겠다고 하셨다구요!"

"그렇단다. 병에 걸린 자신은 방해만 된다고…폐하께 말씀을 올리셨나보다."

"아기씨는요!"

"마마께서도 아기씨는 피난길에 오르길 원하신단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은 저는 나름대로 아기씨를 위해 피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불어 그때의 대화를 듣고는, 전 아기씨가 정말 5살이 맞나하는 의문도 들었답니다. 15살이 되면서 마마의 분부로 아침마다 마마를 문안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죠. 그날 아침도 마마를 뵙고, 주제 넘지만 피난을 권유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씨와 마마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가, 지금 폐하와 왕족들은 피난을 떠나기 위해 궁을 출발하셨단다. 아가도 어서 가야지."

"어마마마. 싫습니다."

"아가, 고집부리면 안되요. 어서 피난을 가도록 해야…쿨럭쿨럭! 지요."

마마의 목소리는 이제 예전의 자애로움을 찾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힘이 없으셨죠. 마마의 이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은 한없이 아팠답니다.

"아가! 어미의 말을 듣도록 하세요!"

아기씨가 계속해서 싫다고 하시자 마마의 노기섞인 음성이 흘러나옵니다. 전 아기씨가 울면서 마마의 말을 따를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아기씨는 울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어마마마. 소녀는 아바마마가, 황후마마가, 공주, 왕자님들이 싫습니다. 무섭습니다. 아무도 절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마마마께서 제가 이런 연유로 울면서 들어오자 제게 말씀하셨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마마마만은 소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소녀도 어마마마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마마마는 소녀를 내치려 하십니까. 어마마마…소녀는…어마마마와 함께 있고 싶사옵니다. 소녀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어마마마…소녀에겐 어마마마 밖엔 없사옵니다……."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흐느끼는 아기씨의 목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눈을 박차고 두 분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눈에서도 이미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무례한 짓거리로 받는 형벌, 설령 죽는다해도 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마께 간청했지요.

"마마, 소인을 죽이시더라도 이 말만은 들어주시옵소서. 아기씨와 함께 피난을 가셔야 하옵니다. 아기씨는 이렇게 마마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마!"

제 말에 아기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저를 보았습니다. 마마도 흐느끼면서 시녀의 부축을 받아 병상에서 일어나셨지요. 그리고 힘겹게 걸어오시더니. 수척해진 옥수로 제 손을 힘껏 붙잡으셨습니다.

"너로구나.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이렇게 어린 아이가…네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않겠느냐…그러니 이제 그만해도 좋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라도 어서 궁을 떠나거라. 우리 모녀는 생사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단다."

"마마! 소인은 감문위 낭장의 아들이며 감문위 소속의 병사입니다! 폐하가 감문위에 내리신 명은 거란을 상대로 궁성을 수비하라셨사옵니다! 소인은…소인은! 소인의 책무와 함께 목숨을 걸고 아기씨와 마마를 지키겠나이다!"

"미안하구나…정말 미안하구나……."

그때 마마가 계신 궁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전 마마, 아기씨와 함께 궁궐에 남기로 했습니다. 죽음 같은 건 두렵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기씨와 마마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제 마음을 지그시 눌렀지요.
그날, 저는 마마께 청을 올려 아기씨와 단 둘이 궁궐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기씨는 사시는 궁 밖에서 다른 궁으로 가보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을 올렸지요. 어쩌면 저도, 아기씨도 다시는 보지 못할 이 궁궐을 구경함으로써 잠시동안이라도 아기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와 궁궐 정말 넓구나!"

아기씨는 제 옆에 꼭 달라붙어서 감탄사를 연발하셨습니다. 마치 처음 입궐했을때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지요. 그렇게 저와 아기씨는 고려의 궁궐을 샅샅히 돌아다녔습니다.

"어마마마도 이런 곳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황후마마가 계시던 궁의 연못과 아름다운 건물들의 모습에 아기씨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가 계시던 궁 앞에선 뚫어지게 건물만을 쳐다보셨습니다.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그것도 폐하에게 알 수 없는 증오심을 느꼈답니다.
아무리 궁인의 자식이라도, 원하지 않는 아이였더라도, 아기씨는 폐하의 아이입니다. 어찌 자신의 혈육에게 그리 매정하게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기씨 힘드시죠. 제 등에 업히십시오."

돌아오는 길은 아기씨를 제가 업고 돌아왔습니다. 제 목을 꼭 끌어안는 작은 두 손에서 처음 아기씨를 안았을 때와 같은 향내음이 풍겼지요. 그리고 어린시절 누이동생을 업고 집 밖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졌습니다. 그때 아기씨가 말씀하셨습니다.

"오라버니. 그때…오라버니 어마마마가 돌아가셨을때의 일. 미안해."

전 아무말 없이 걸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눈물을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저를 아직도 오라버니라 불러주는 아기씨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힘겹게 괜찮습니다 아기씨 라고 말하고는 속으로 아기씨와 마마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었답니다.

"난 폐하의 궁궐과, 너를 지키겠다. 넌 아기씨와 마마를 몸을 바쳐 지키거라."

"아버님."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 아버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감문위의 낭장으로 승급하신 아버님. 붉게 충혈된 두 눈은 서경에 계신 큰 형님의 전사소식과 저에대한 걱정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시다니…….어렴풋하게 기억나는 형님은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다니……. 아버님은 얼마나 상심하셨을까요.
아버님께 남은 자식이라곤 이제 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버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전 폐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기씨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전 얼마나 복받은 놈인가를 생각했지요. 아버지를 말없이 안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길 믿고, 웃으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알겠다. 너도 너의 책무를 다하거라."

이것이 아버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외성부터 거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지요.

"아기씨 이걸 받으세요."

"어, 이건……."

"아시죠. 이름은 아기검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전에 아기씨가 이거 달라고 조르다가 마마께 꾸중들은 일이 계시죠?"

"그때는 안주려하지 않았느냐."

"지금 드리려고 그런 것입니다."

"헤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과 비명소리. 저는 물론이지만 아기씨는 무서우신지 계속 몸을 떨고 계셨습니다. 마마께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기에 항상 아기씨는 제 곁에 계셨죠. 아기씨의 옷깃을 여매준 후, 소피를 보고 오려고 일어서는데 아기씨가 따라오시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아기씨의 마음은 이해하지만…이건 좀 아니라 생각한 저는 미리 드리기로 결심하고 있던 아기검을 품 속에서 꺼내 아기씨에게 내밀었습니다.

"아기씨 이 검은 제 마음입니다. 제가 없어도 이 아기검이 지켜줄 것이여요. 무서운 일이 닥치면 주저없이 아기검을 뽑으세요. 제 마음이 아기씨를 지켜줄 겁니다. 허나, 함부로 뽑으시면 절대 안됩니다. 무섭거나 위험한 순간에만 뽑으셔야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아기씨."

저는 아기씨에게 아버님이 이 검을 제게 주실 때 한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님의 걱정. 동생을 위한 형이 버린 자존심, 손수 가벼운 검집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응축된 이 아기검에다 아기씨의 무사와 장수를 기원하는 제 마음까지 넣어 드렸습니다.
제가 죽더라도…아기검이 아기씨를 지켜줄 거라 믿구요. 아기씨가 천수를 누리시는 동안, 솔직히 아기검이 뽑히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아기검이 뽑힌다는 건 아기씨에게 생명의 위협이 닥쳤다는 뜻이니까요. 전 아기씨가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사시는 것. 그것만을 바랬습니다.
그때, 궁 문이 박살나면서 거란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제 이별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아기씨! 어서 마마께!"

저를 비롯한 마마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마마가 계시는 궁 출입문을 거점으로 방어진을 쳤습니다. 거란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려군, 그 중에서도 지켜야할 것이 뚜렷한 우리 감문위 역시 그들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숫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죠. 차례로 동료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갑니다. 여기까지 거란군이 왔다는 건 아버님도 전사하셨단 뜻이겠지요.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며 저는 적을 맞아 싸웠습니다. 나중에 주변을 둘러보니 남아있는 고려군 병사는 저 밖에 없더군요.
적의 수에 밀리고 밀린 저는…아기씨와 마마, 궁녀들이 있는 내부까지 들어오고 말았죠. 그때 거란 쪽에서 장수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화려한 갑옷이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었죠. 아마 상대는 제게 말없이 일대일 승부를 요청한 듯 합니다.

"으아아아아!"

아버지에게 배운대로, 전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그것이 장수의 어깨에 밖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변성기도, 수염도 나지 않은 조그만한 15살 소년인 저의 힘은 약했죠. 밖는데는 성공했지만 검을 빼지 못한채 장수의 움직임에 끌려다닐 뿐이었습니다.
그 장수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검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제 오른 팔을, 무썰 듯 가볍게 잘라냈으니까요.

"꺄아아앗!"

궁녀를 비롯한 아기ㅏ씨가 비명을 지릅니다. 전 중심을 잃고 피를 흩뿌리며 쓰러집니다. 정신이 몽롱했어요. 저 멀리…제 몸에서 떨어져나온 팔이 보입니다. 아픔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ㅏ 아랫도리가 흥건하게 젖어있었어요.
제 팔을 자른 장수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에 적의는 없는 듯 했습니다.

"오라버니이!"

아기씨가 울면서 쓰러진 제게 달려와 품 속으로 파고 듭니다. 전 움직이는 한팔로 아기씨를 끌어안았어요. 제 피가 아기씨의 고운 옷을 적셨습니다. 아기씨에게 죄송했어요. 지켜주겠다고 했는데…정말로 지켜주고 싶었는데……. 누이동생은 병마가 뺏어갔지만 아기씨는 제가 살리겠다고 그리도 다짐을 했건만…….

"으으으……."

몽롱해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집중하며 전 기다시피해서 떨어진 제 검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적 장수의 눈을 바라보았죠. 적이 제 의도를 알아주길 바랬습니다. 검을 힘겹게 움켜진 저는 제게 안겨있는 아기씨의 등에다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죠.
몇번이나…몇번이나 이 동작을 되풀이했는지 모릅니다. 혹자가 보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나 그것이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전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수의 눈은 여전히 고요합니다.
난 온 힘을 다해 다시 한 번 그 동작을 반복한 후 젖먹던 힘까지 짜내 소리쳤습니다.

"아가씨와 마마를 살려다오!"

이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쿡쿡 쑤시는 통증과 졸음이 밀려오는 느낌. 그때, 낯설긴 하지만 제 귀에 익숙한 고려말이 들려왔습니다.

"폐하께서 어리지만 너의 그 충절과 용맹에 감동받으셨다. 아이와 부인등 모든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 이제 편안히 눈을 감거라."

장수가 제게 걸어옵니다. 그리고는 아기씨를 안아 자신이 두르고 있던 가죽을 덮어주고 궁녀한테 넘겨줍니다. 그리고는 제 옆에 앉아 저를 안아들고는 저와 눈을 다시한 번, 마지막으로 맞춥니다.

-이제 편안히 눈을 감거라 아이야-

전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약간 피냄새가 나는 따뜻한 그의 손이 제 눈을 천천히 덮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전 정말…진심으로 거란의 황제에게 감사를 느꼈습니다. 아기씨와 마마는 이제 사실 수 있습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아도 되겠지요…….









이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그 후 전 구천을 떠도는 혼백이 되었죠. 아기씨에 대한 걱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기씨가 무사히 계시다는 것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요. 아기씨의 행복을…….

그러나 전 아기씨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그건 먼 훗날의 일이었지요. 아기씨가 제 나이만큼 나이를 먹어 아름답게 장성하셨을 때… 거란의 황제가 저를 기려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거란에 끌려온 아기씨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아기씨가 그 그림을…저의 모습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제 혼백은 그 그림이 되어 아기씨의 옥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아기씨가 돌아가실때까지 전 아기씨의 그림이 되어 아기씨를 지켜보았죠.


아기검 말입니다. 아기씨는 제가 한 말을 잘 지켜주셨습니다. 아기씨가 아기검을 뽑은 것은 단 한번이었죠. 임종 직전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이 한없이 무섭고 두려웠는지 아기씨는 한 손에 아기검을 들고 그것을 뽑으셨지요. 그때 검날과 함께 제가 넣어둔 빛바랜 흰 천도 같이 딸려나왔답니다. 아기씨는 제가 죽은 후 아기검을 한번도 뽑지 않으신 거에요.
그리고 전 그때, 아기씨가 일생을 무사하게 지내셨다는 것을 확인했고 모든 것이 보상받는 듯한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후, 세월이 흐르는동안 이 그림은 이곳저곳을 흘러다녔고 마침내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부탁이 있습니다. 제 혼이 깃든 이 그림을…나와 아기씨의 나라. 고려가 있던 땅으로 가져가 주세요. 그 어느곳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아기검을…아기검을 찾아주세요. 너무나 막연한 부탁일지 모릅니다만…부탁드리겠습니다.
  비록 일생을 무사하게 보내신 아기씨지만 타인의 땅에 묻혀계십니다. 아기씨의 아기검을 들고 고려의 땅을 돌아가 아기씨에게 다시 돌아왔다고, 편히 눈을 감으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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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고 써보았던 글입니다.

취미로 하던 연재에서

전지적 작가시점의 판타지만 쓰다가

아이의 친근한 시선이 담긴

1인칭 시점을 써보고 싶었구요.



한국인으로써 한국인의 정서에 알맞는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관심을 가지던 해외에 나가있는 문화재 환수에 관한

일도 이 글을 쓰는데 큰 동기로 작용했구요.



읽어보시고

어린시절, 혹은 최근에라도 좋으니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꼈던 때가 떠올라

잠시나마 코 끝이 아린 느낌이 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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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위:고려 중앙군 2군 6위의 하나 -직책은 궁성수비
신호위:이하동문   -직책은 변방수비
별장:정7품 무관관직
낭장:정6품 무관관직
중랑장:정5품 무관관직
대정: 종9품 무관관직
수박: 무술이름
옹알이: 말을 배우지 못한 아기가 떠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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