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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12 -

2006.06.16 21:32

히이로 조회 수:172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무미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필립은 마르니에를 검 집에 집어넣고는 떨어져있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된 상태였는데, 전체가 진홍빛을 띄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흑갈색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어야할 위치에도 이제는 붉은 빛깔이 자리 잡고 있다. 거울이 없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필립은 몰랐으나, 남들이 보았다면 경악할만한 모습이었다.
초점 없이 눈 전체가 붉게 물든 모습과 얼굴 전체를 적시는 비릿한 검붉은 액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옛날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한 악마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필립경! 무사 하신 겁니까!”

“이 목소리는…….”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필립의 고개가 저절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인다. 대 여섯 명의 기사들이 자신을 향해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원이 나인발트 나이츠 소속인 그들은 필립의 직속 수하기사들 이었던 것이다. 달려오는 기사 대부분의 갑옷이 기존의 회색에서 검붉은 빛으로 떡칠이 된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상당한 격전을 치뤘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필립이 말없이 응시하는 사이, 기사들이 그의 앞까지 도착한 후 걸음을 멈추었다.

“필립님…눈이…….”
  
얼굴이 피범벅이 된 것도 모자라 초점 없는 붉은 눈을 본 기사들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러나 상황을 알 리가 없었던 필립은 투구를 벗으면서 태연하게 기사들에게 말한다. 일부러 미소까지 짓는 그였으나, 기사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가뜩이나 살벌한 그의 얼굴이 더욱 살벌하게 보였기 때문.

“음? 내 눈이 뭐가 어때서? 잘만 보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건 그렇고 이 중에서 지혈을 가장 잘하는 사람. 내 머리 상처 좀 지혈해 줄 수 있겠나?”

“아, 옛! 알겠습니다!”

필립의 붉은 눈에 잠시 얼어붙었던 그들은, 평상시와 같은 말투와 행동에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가 투구를 벗자 나타난 심한 출혈 덕에 정신이 그쪽으로 쏠려버려 언제부턴가 아무도 그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필립의 상처는 중상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강한 충격이었는지 투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뒤통수에는 거대한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 주변의 머리카락들은 피에 물들어 이리저리 뒤엉켜있어, 보는 이의 입가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몰골이었다.

“필립경.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상처를 보다 못한 부관이 나선다. 저 정도의 출혈과 상처라면 고통이 극심할 뿐만 아니라, 과다출혈에 의한 경계를 늦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너무나 태연해 보였고 그것이 부관을 걱정스럽게 만들었던 것. 깊은 걱정이 짙게 우려내는 듯한 그의 말에 필립은 별다른 반응 없이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정말 죽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견딜 만 하니 걱정 마시게.”

“예.”

너무나 또렷한 그의 목소리에 부관은 안심하고 물러난다. 서둘러 필립의 기사망토를 찢어, 그의 출혈부위에 조심스럽게 두르는 기사의 정성어린 손길을 느끼면서 필립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참혹하게 쓰러트린 상퀼로트를 포함해 상당수의 기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여전히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지 간간히 고함소리가 바람에 묻혀 그의 귀를 간질여댔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지혈에 관한 조치가 끝날 무렵쯤, 필립은 부관의 말과 함께, 방금 전 그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대체 아까의 일은 무엇이었을까.’

일을 직접 겪은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분명 그 당시 자신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원칙대로라면 상퀼로트의 손에 죽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 살아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필립, 그 자신이었다. 그때의 꿈과 같은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생전 얼굴한번 보지도 못한 어머니가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녀의 피가 자신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힘이 솟아나왔다. 그 뒤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아지경으로 적을 상대했을 뿐이다. 또한 정신을 차린 후, 그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부상까지도 눈에 띌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엔 뭔가 문제가 많은 일들…….

‘지금은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일단 상퀼로트를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필립은 마음을 고쳐, 일단은 눈앞의 상황에 온 힘을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일어나 상처부위의 지혈이 잘 되었는지 가볍게 확인한 그는 조심스럽게 투구를 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호기롭게 명령했다.

“쉬고 있을 틈이 없다. 조금 있으면 상퀼로트 본대가 들이닥칠 것이니 서둘러 전열을 정비해야해. 부관! 여기 있는 기사들을 이끌고 길을 되돌아간다. 가는 도중 분산된 기사들을 모아 대열을 정비시키도록. 난 앞쪽으로 나가 싸우고 있는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오겠다. 알겠나.”

“하, 하지만 필립경 위험합니다! 더욱이 부상까지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부관이 그의 말을 막으며 소리친다. 그러나 필립은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그와 눈을 맞춘다. 아직도 초점이 잡히지 않는 필립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그 순간, 부관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라는 것을. 자신이 말린다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총지휘관이 되어 가지고 최전방에서 그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우는 그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 죽음을 각오했는데 막상 그걸 강요한 사람이 몸을 사리면 전쟁 끝나고 나 밟혀죽는다. 부상에 관한 걱정은 하지마라. 이제 괜찮으니까. 그러니 어서 가도록! 만약, 만에 하나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휘권은 헤이딕경과 자네에게 맡기겠다. 그럼 조금 있다 보자구!”

부관과 기사 몇 명을 남겨두고는 필립은 다넨 평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나가면 나아갈수록 퀼트 복장의 병사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그때마다 필립의 검이 피를 머금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적을 맞아 싸우는 필립.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몸놀림과 검 끝의 예리함은 쓰러지기 이전보다 더욱 성숙한 모습이었다. 스스로도, 더욱 가벼워진 몸과 맑은 정신상태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필립은 전진하였다.








“망할! 갈수록 줄어들지는 않고 수가 많아지고 있잖나! 기사들이여 더 이상 전진은 무리다! 뒤로 퇴각하면서 적을 요격한다!”

상퀼로트 한명의 배에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내자, 병 속의 포도주를 투명한 잔에 따르듯 따스한 피가 줄줄줄 흘러나와 헤이딕의 손을 적신다. 허나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가볍게 병사를 밀치고는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기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헤이딕 폰 서머릿. 익시드 나이츠 부기사단장이자 지금은 필립 다음의 서열로 전투를 이끌고 있었다. 그가 선두 지휘하는 익시드 나이츠의 일부는 협곡의 최전방에서 교전중이다. 다시 말해서, 다넨 평원에 있는 상퀼로트 본대가 진입 했을 때 가장 먼저 맞부딪치게 되는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일ㄹ이 현실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라 어서!”

인상만큼이나 강렬한 헤이딕의 목소리가 협곡 내부를 울렸지만, 기사들은 그의 뜻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이 상퀼로트인 상황에서 명령을 따르기 이전에,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 알면서도 한 귀고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헤이딕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말로는 뒤로 물러나라고 하면서도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비켜라 애송이들!”

남들보다 더 두껍고 긴 검신을 가진 칼을 거칠게 휘두르며 그가 소리쳤다. 동작 자체에 예리함은 없었지만 가벼운 방어구나 무기는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서린 헤이딕의 검술. 적의 방어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그의 방식이었다.

“이 늙은이가!”

헤이딕보다 월등히 큰 체구에다 투핸드소드를 잡은 상퀼로트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동료들의 희생을 보고 적잖이 분노했는지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상퀼로트의 기세에 처음에는 당황하는 헤이딕이었으나 곧 진정을 하고는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힘과 힘이 충돌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음색을 뿜어내는 두 사람의 무기. 한차례의 충돌 후 무기를 거둔 채 재빨리 거리를 벌리는 두 사람.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온 힘을 다해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정한 주기로 울려 퍼지기를 반복하는 두 남자의 무기. 그 음색이 너무나 강렬했는지 전투를 하던 기사나 상퀼로트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무른다. 기교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힘의 대결.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근력과 검의 내구력이었다. 그렇게 약 10번 정도의 경합이 발생한 후, 승부는 결정이 났다.

쨍그랑!

“이, 이런!”

부러져버린 칼날을 바라보며, 흘러나오는 헤이딕의 당황한 목소리. 결과가 확인되자 상퀼로트 쪽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자신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헤이딕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앞날을 떠올렸지만 쉽게 당할 수는 없다는 듯, 부러진 검을 붙잡고는 전투자세를 취한다. 그의 휘하에 있는 익시드 나이츠 소속의 기사들은 상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사방을 가로막고 서 있는 상퀼로트의 때문에 그에게로 가지 못하는 상황. 그들의 눈에는 서서히 절망이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었다.

“으랴아앗!”

헤이딕의 기합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다시 한 번 굉음을 내며 어울린다. 다행이 상퀼로트의 공격을 막은 그였으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헤이딕의 부러진 검은 또다시 부러져버려 검 손잡이만 남은 상황에 이르렀다. 검이 부러지는 순간, 재빨리 뒤로 후퇴한 헤이딕은 무사했으나 검이 지나간 갑옷 부근은 함몰되어 있어 보는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제 헤이딕을 상대한 병사는 여유만만, 혀를 낼름거리며 천천히 그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미련은 없겠지?”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내던진 병사는 일격에 헤이딕의 몸을 박살내겠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그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치려고 한다. 헤이딕은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느꼈는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허망한 눈으로 병사의 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하늘 위로 솟은 병사의 검이 아래로 강하하는 순간, 주인을 모르는 검이 엄청난 회전을 하며 병사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히익!”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상퀼로트는 헤이딕을 향해 내려치려던 검의 진로를 바꿔 날아오는 검을 향해 휘두른다. 경쾌한 철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나가는 검. 그러나 튕겨나가는 와중에도 살짝 상대를 베었는지, 상대의 뺨에는 미세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떤 놈이냐앗!”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는 녀석이냐. 여기다!”

볼에 생긴 상처는 보잘것없었지만 의외의 기습에 격분한 병사는 협곡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즉각 들려오는 답변. 모든 이의 시선이 검을 집어던진 자에게로 향한다. 반 이상이 찢겨진 너덜너덜한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기사. 투구사이로 보이는 홍색의 빛은 모두에게 호기심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서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런 호기심을 접어야 했다.

“네놈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우오오옷!”

“응.”

짐승처럼 포효하는 상퀼로트의 말을 짧게 받아주며 필립은 말 그대로 그에게 돌진한다. 일격에 그를 쓰러트릴 생각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있는 헤이딕을 지나쳐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걸음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거리가 좁혀지는 두 사람.
마침내 상퀼로트 병사가 가진 검의 간격 내부로 필립이 들어왔다. 그의 몸을 이등분 시키겠다는 듯, 큰 동작으로 횡 베기를 시도하는 병사. 그러나 그가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가른 채, 바람 가르는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이 개자식!”

병사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필립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을지 모르나, 정작 당사자인 필립은 죽기 직전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립이 간격으로 들어오자마자 휘두른 검을, 재빨리 백스텝을 이용해 다시 검의 사정거리 밖으로 도망친 것이다. 상퀼로트의 검이 자신을 베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공중에서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마르니에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몇 걸음을 내달려, 아직 자세가 불안정한 상대의 왼쪽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촤악―!

뼈가 잘리는 소리와 동시에 사방으로 피가 튄다. 왼쪽 어깨를 일부 포함한 상대의 왼팔 전체가 마르니에로 인해 몸통과 깨끗하게 분리된 순간. 병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튼실한 체구가 힘없이 허물어지는 모습. 일개 병사에 불과했지만 이 장면으로 기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치솟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함을 지르며, 각자 상퀼로트의 포위망을 뚫기 시작하는 기사들.
상퀼로트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한순간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아군의 모습에서 넋을 빼놓고 있다 습격을 받자, 오합지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거물급 지휘관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혼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결국 상퀼로트는 수적위치에도 불구한 채 기사들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증원군이 올 때 까지 시간을 끌 속셈이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자신들도 피곤했기 때문에 바르디아군도 추격을 할 생각을 하진 않았다.

“필립경…….”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힘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헤이딕을 무시한 채 필립은 아까 던졌던 검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생각이상으로 손상이 없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필립은, 그것을 들고는 천천히 헤이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불쑥 그에게 그것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쓰시던 검보단 가볍다는 느낌이 들지 모르나, 일단 이것을 쓰십시오. 나름대로 쓸만한 검입니다. 그리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초점 없는 붉은 눈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와는 달리 따뜻한 그의 말에 헤이딕은 긴장을 푼다. 하지만 그는 필립이 내민 검을 받으려고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친 기색과 자신감을 잃은 얼굴. 체념한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평소의 기백과는 정반대인 힘없는 목소리로 헤이딕이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늙은이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군. 명색이 부기사단장이 되어가지고 일반병사 하나도 제대로 못했지 않은가. 자네에게 큰 빚을 졌기도 하고…역시, 이제 나도 슬슬 물러나야 할 것 같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기사가 되어 남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자존심인 검까지 꺾이고 자네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필립경. 치워주시게.”

상퀼로트의 포위를 뚫고 나온 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헤이딕과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필립 역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헤이딕의 뜻을 존중해준다면 기사들의 사기는, 특히 익시드 나이츠 소속의 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것은 확신을 넘어 사실에 가까웠다. 또한 필립 역시 헤이딕을 다시 일어서게 하고 싶었다.
비록 첫인상은 안좋았을지 몰라도 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였다.

“진심입니까.”

“그렇다네.”

“그럼 할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필립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변해다.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상대의 뜻을 들어준 필립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기사들을 무시하면서 헤이딕만을 정명으로 응시하고 이어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노인네는 별 수 없는 건가…아니면 서머릿가의 혈통이 원래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건가.”

헤이딕 앞에 검을 내려놓고 돌아서면서 중얼거리는 필립. 본인만 들을 수 이도록 음량을 낮추었기에 다른 기사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헤이딕만이 똑똑히 그의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그였기에 그냥 넘겨버리려고 생각했었지만, 자신의 가문까지 들먹이는 필립을 그대로 놔둘 순 없었는지 그가 입을 연다.

“필립경. 지금의 발언.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어이쿠, 들으셨습니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십쇼. 훗.”

사과는커녕 여전히 빈정대면서 미소를 짓는 필립. 올라간 입 꼬리에 붉은 빛 눈. 영락없이 헤이딕을 비웃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같은 헤이딕의 성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바닥에 놓여 있는 필립의 검을 거칠게 낚아채듯이 잡는 헤이딕.
필립의 등에 검을 겨룬 채, 특유의 고함으로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놈! 죽고 싶은 것이냐!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나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까진 아니다! 검을 뽑아라!”

갑작스런 헤이딕의 고함에 기사들이 깜짝 놀란다. 하지만 필립은 여전히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려 헤이딕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이 헤이딕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전까지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말했다.

“드디어 결단을 내리셨군요. 헤이딕경. 기사들을 지휘해주시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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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특별히 할 말은 없구요.

필립이 병사를 죽이는 장면. 뭐, 영화 트로이의 아킬레스의 기술을 모티브로하여
약간 변형했습니다 [퍼억!] 그걸 떠올리면 장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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