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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싸구려 용사 전설

2006.05.15 23:42

느와르 조회 수:232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른다.
그를 기다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른다.

동료들을 모두 희생시킨 지금. 그림자는 죄의 무게로 천근같다.
부하들이 모두 죽어버린 지금. 몸뚱이에 밴 피 냄새가 지독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저 문을 열면, 녀석과.
저 문이 열리면, 그와.

싸울 수 있으니까.


싸구려 용사 전설


  성은 팩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조각들로 장식된 육중한 성문은 활짝 열린 채, 지키는 자조차 하나 없었
다. 날카로운 바람이 성문 너머의 뻥 뚫린 공간으로 스며들어가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팩트는 조용히 손을 들어서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던졌다.
  그 아래에 드러난 것은 흡사 갑옷 같은 생김새의 방탄 재킷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니, 그것은 말 그대로 갑옷이었다. 그가 전사(戰士)임을 증명하는 갑옷. 재킷의 등에는
그 증거인 불사조의 문장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
끝도 없는 어둠을 해치고 나와 세상의 평화를 부활시킬 단 하나의 존재. 허리춤에 매달
려있는 홀스터에서 자신의 ‘성검’을 뽑아든 팩트는 주저 없이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성안에 장식된 불빛은 모두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추하게 벌어진 턱뼈 안에서 타들어
가는 촛불들이 삭막하고 어두운 성안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촛불을 다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성 안에 충만한 어둠을 모두 밝히기는 불가능 할 것이다. 팩트는
손에 성검 한 자루만을 쥔 채 그런 성안을 걷고 있었다.
  가야할 곳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느껴지는 무언
가에 의지해 그저 성안을 헤맬 뿐이었다. 할 일은 단 하나. 찾을 것도 단 하나. 발걸음
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에 휩싸인 성안에 울리는 것은 구두소리뿐. 그 구두소리가 멈추
었을 무렵. 팩트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팩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너머에 자신이 싸워야할 상대가 있다는 것을.

  끼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옥좌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라우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루비처럼 영롱한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성의 천장. 괴물과 망령들이 한데 엉켜있는 악
취미 같은 천장화를 바라보던 라우드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거대한 기둥들이 일렬
로 늘어선 복도 끝. 문을 열고 들어온 방탄 재킷의 남자를 보며, 라우드는 기쁜 듯이 입
을 열었다.

  “팩트팩트팩트. 위대한 ‘용사’님. 드디어 왔군.”
  “이런 악취미한 성에는 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복도를 걸어오며 중얼거리는 팩트의 모습에, 라우드는 몸에 덮고 있던 망토를 치우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에서 덜컥거리는 두 자루의 ‘마검’. 한 박자 늦게 흘러
내린 긴 머리칼이 그 자루를 덮었다.

  “그렇다면 이 몸을 만나고저 굳이 이곳에 와주었다는 건가? 기쁜 일이로군.”
  “나에게도 기쁜 일이다. 네 심장을 박살내는 일은.”
  “하하하하하하, 피차 서로에게 기쁜 일이라는 건가!”

  거만한 목소리로 외치며 허리에서 마검을 뽑아내는 라우드. 팩트는 그보다 한발 먼저
발을 내딛으며 성검을 들어올렸다. 앞으로 달려 나가며 성검의 방아쇠를 당기는 팩트.
요정들이 만든 대구경 권총이 굉음을 내며 총알을 내뱉는다. 라우드가 앉아있던 옥좌
가 성검의 탄환에 맞아 부서져 나간다. 그보다 먼저 몸을 피한 라우드는 숨어 있던 기
둥 뒤에서 뛰쳐나가면 양손의 마검을 발사했다.
  악마의 대장장이들이 특수하게 만들어 낸 마검의 탄환은 발사의 고통에 마치 찢어지
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피해 기둥 뒤로 뛰어든 용사는 고개만 내민 채 계속
해서 성검의 방아쇠를 당겼다. 무서운 위력을 지닌 성검의 탄환이 벽과 기둥을 부수어
댄다. 라우드는 그 탄환들을 피해 달리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빌어먹게 최고다, 팩트! 그대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뛰는군!”
  “힘들 테니 곧 멈추게 해주지!”

  숨어 있던 기둥에서 뛰쳐나가며 성검의 방아쇠를 당기는 팩트. 라우드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양손의 마검을 교차시켰다. 얼굴을 노리고 쏘아진 성검의 탄환은, 그대로
마검의 몸을 때리고 튕겨나가며 라우드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발이 공중에 뜬 채 날
아가는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라우드는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발사했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탄환이 팩트의 몸을 강타한다. 팩트의 몸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기둥에 부딪치며 쓰러졌다.
  박살난 파편들 사이를 감도는 두 병기의 화약연기. 메아리를 남기며 기둥사이를 맴돌
던 마검의 비명소리가 잦아들 쯤에 라우드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죽을 것 같아. 그대 때문에 죽을 것 같아.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될 것 같다고!”
  “조바심 내지마라, 곧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기둥을 짚고 일어서는 팩트의 눈동자에 마치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일어서는 라우드의 모습이 비쳤다. 목이 아픈 듯이 고개를 조금 내저은
라우드는 마검에 상처는 나지 않았는지 살피며 팩트에게 말했다.

  “내 마검을 견디다니 튼튼하군. 그 갑옷도. 그때도 그걸 입고 있었나?”
  “리즈가 마지막으로 만든 거니까. 이것 덕분에 나는 지옥의 재를 뒤집어쓴 채 부활했
다. 마왕.”

  방탄 재킷에 박힌 총알을 뽑아내며 증오에 찬 목소리로 뇌까리는 팩트. 그의 잿빛 머
리칼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던 라우드는 돌연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불사조처럼 부활했지. 리즈를 위해 나를 죽이려고.”
  “리즈뿐만이 아니다. 너에게 죽은 모두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그대는 늘 그랬다. 언제나 남들이 먼저였지. 나 같은 건 바라보지도 않았다.”
  
  늘어트렸던 손을 들어 올려 흘러내려온 긴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긴 라우드는 다
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들어올렸다. 광기에 물든 눈동자로 팩트의 모습을
하나 가득 담은 채 방아쇠를 당기는 라우드.

  “하지만, 지금의 그대는 오직 나만 바라봐주고 있다!”
  “네가 나에게서 다른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라우드!”

  거칠게 외치며 총구를 들어 올려 응사하는 팩트. 성검의 굉음이 마검의 비명을 지우
며 라우드의 긴 머리칼을 한 움큼 끊어냈다. 마검의 탄환은 성검의 궤도에 말려 진저리
치면서도 팩트의 뺨에 긴 상처를 남겼다.

  “지금의 나는 너를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옆의 기둥으로 몸을 피하며 성검의 탄창을 교환하는 팩트.

  “내가 만들었다! 내가 그대를 그렇게 만들었어! 이 ‘마왕’이!”
  탄창이 비어버린 마검을 집어 던져버리고 등허리에서 또 다른 마검을 뽑는 라우드.
  팩트가 기둥에서 뛰쳐나오는 동시에 라우드는 그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격정에 휩싸
여 겨냥도 뭣도 없이 그저 서로에게 난사하는 둘. 탄피가 바닥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
와 비명과 섞인 총성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검에 다리를 관통 당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성검을 발사하는 팩트.
  성검에 어깨를 맞아 팽이처럼 회전하며 그 자리에 처박히고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
으키는 라우드.
  탄환이 서로의 몸에 마구잡이로 상처를 입히고, 선혈을 사방으로 튕겨낸다. 배, 가슴,
어깨. 빗맞아도 위험할 장소들을 거침없이 헤집어대는 마검과 성검. 하지만 피를 토하
고, 무릎을 꿇고, 신음을 내지르면서도 둘은 정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파괴
적인 눈동자를 한 채 서로의 병기를 휘두를 뿐.


그리고 어느 순간 총성이 멎었다. 애초에 총성이 울린 것은 긴 시간조차 아니었다.

  엉망진창이 된 라우드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들이밀었다. 둘 사이의 거리
는 이미 지척. 너덜거리는 갑옷 아래로 피투성이가 된 팩트 역시 라우드의 미간에 성검
을 겨누었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서로의 얼굴에 서로의 무기를 들이 댄 채 멈추어
버린 라우드와 팩트.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반쪽만 짧은 라우드의 머리칼이 천천히 어깨
에 내려앉는 순간이, 팩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턱에 와서 멈추는 순간이.
서로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대를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은 나였다. 하지만 그대는 그대를 사랑하지도 않은 리즈
를 사랑했지.”

  라우드의 목소리가 이마에 닿은 마검을 통해 전해져오는 것만 같은 느낌. 팩트는 흐려
지는 눈을 크게 뜨며 라우드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를 죽였어야 했어. 네 동생을 죽일 필요 따위는 없……”
  “용서할 수가 없었어! 네 곁에 있다는 게! 그 애가 너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 난 리즈
가 동생으로조차 보이지 않았어!”

  팩트의 말을 끊으며 터져 나온 라우드의 목소리는 더 이상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의 것
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상처 입은 여자일 뿐. 눈가에 흐르는 새빨간 액체
에 눈물을 섞는 그녀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팩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어째서. 내 앞에서 그걸 말해주지 않은 거야. 라우드.”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했을 것 같아? 네 마음이 나에게 와주었겠냐고!”

  눈물을 흩뿌리며 외치는 라우드 앞에서 팩트는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친것
같은 목소리로, 쓰디쓴 추억을 곰씹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가 그날 리즈를 몰래 만난 건 네가 좋아하는 꽃을 물어보기 위해서였어.”
  “그게 무슨 헛소리…….”

  라우드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팩트가 꺼낸 것은 한 쌍의 결혼반지. 그 반지에 붙어있
는 것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수선화였다. 그는 말을 잊은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보
는 라우드에게 재미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꽃을 좋아하기는.”
  “거, 거짓말. 그럼 난 왜 그 애를. 왜 동료들을. 왜 당신을.”
  “엇갈렸어, 오해했지. 그게 다야. 너는 나한테 말하지 못했고, 나는 네 마음을 알아차
리지 못했어.”

  떨리는 손을 뻗어 팩트의 손안에 놓인 반지를 매만지는 라우드. 그녀는 피투성이 손으
로 그의 손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팩트는 그런 라우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
의 마검을 이마에 내리눌렀다.
  
  “모두가 죽은 건 우리 둘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끝내는 수밖에 없어.”
  “팩트,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는 없겠지?”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조용히 중얼거리는 라우드. 팩트는 고개를 들어 그런 그녀에게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무리야. 내 몸에 밴 피 냄새는 이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해.”
  “그렇구나. 내가 지은 죄의 무게는 이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우니까.”

  흘러내렸던 손가락을 다시 들어 방아쇠에 거는 라우드. 그녀는 자신의 미간에 닿아 있
는 팩트의 성검에 눈길을 주었다. 그 몸에 새겨진 것은 요정들이 새긴 룬문자. 그녀는
가만히 입술을 움직여 그 문장을 읽었다.

  “재앙 또한……합당한 재앙에 의해 종국을 맞을지어다.”
  “이제 종국을 맞을 시간이야. 마왕.”

  여전히 웃는 얼굴. 핏기 가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팩트를 향해,
라우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끝낼 시간이네. 용사.”

  마주잡은 두 손사이로 느껴지는 반지의 감촉을 느끼며 두 사람은 조용히 눈꺼풀을 닫
았다. 서로의 이마에 겨누어진 총구의 감촉. 죽어가는 몸에 마지막 남은 힘으로 할 수
있는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 총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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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용사와 마왕 전문 글장이가 되어가는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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