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07 -

2006.04.30 10:46

히이로 조회 수:174

필립은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생애 첫 지휘, 자신의 손에 몇백명의 기사들의 생명이 달려있다. 기사들에게 갖은 원망을 들어오며 아끼던 식량을 오늘 모두 풀어 든든히 배를 채웠지만, 긴장으로 인한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적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선두에 케클론 중기병단이 서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이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작전의 절반은 이미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끄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헤이딕이 긴장된 표정으로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기사단 전체가 얼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상퀼로트의 숫자와, 질서정연하게 사열해 있는 케클론 중기병단의 모습.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들의 사기는 절반가량이 꺾인 상황이었다.

"필립경. 이게 도대체 어찌된 상황이오! 생각보다 수가 훨씬 많지 않소! 제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저정도 숫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헤이딕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냉담하게 답변하는 필립의 모습. 말을 끊긴 것도 모자라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에 헤이딕 부기사단장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언제라도 검을 뽑아 그를 찌를 기세였다. 필립은 이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익시드나이츠는 물론 나인발트 나이츠까지 전멸시킬 생각인가! 설마 적과 내통한 것이냐!"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말했겠습니까?"

"이, 이놈이!"

고함을 지르던 헤이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 앞을 가로막는 날카로운 검끝. 이런 모습에 두 기사단의 분위기는 더욱더 긴박해져만 갔다. 여전히 헤이딕의 얼굴에 마르니에를 들이댄 채 필립이 말한다.
그가 짓고 있는 표정만큼 살벌한 발언이었다.

"비전투시는 어른으로의 예의를 갖추겠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지위를 무시하고 날뛴다면 본보기로 자네의 얼굴을 날려버리겠다. 헤이딕 폰 서머릿경. 알겠는가?

"크윽……."

"대답이 없군."

"아, 알겠습니다…필립경."

분노로 인해 얼굴을 파르르르 떠는 헤이딕을 바라보며 그제야 검을 치우는 필립.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사열해 있는 기사들을 한번 훑어본다.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로 교전이 일어나면 십중팔구 궤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부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필립.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표정들을 보니 많이 두렵나보군. 안 그런가 제군들?"

투구를 벗은 필립은 기사들을 향해 묻는다. 몇몇 기사들은 정곡을 찔리자 부끄러웠는지 황급히 필립과는 정반대로 투구를 썼다. 기사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자 긴장이 약간은 풀어졌는지 필립은 이전보다 얼굴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사열해 있는 기사들 중 네르바가 어디 있을지 은근슬쩍 시선을 움직이는 그였지만, 대부분이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금방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필립은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많이 당황하고 있다는 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몇일 간 이에 대한 대비작업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금부터는 제군들의 실력과 용맹이 승부를 확정짓는 순간이다. 두려움을 버려라! 왜 기사가 되려 했는지 과거를 생각해보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몇번이나 많은 훈련과 수련, 공부를 했는지 기억해 보는 것이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필립의 목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보통, 지휘관이 이런 연설을 한다는 것은 개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 막연하던 단어가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자 기사들 개개인은 저마다 격정적으로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필립은 여전히 연설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던 사실들을 밝히려고 한다. 적의 총병력은 우리가 알고 있던 숫자와는 달리 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 중에는 발사로크 최고의 정예부대라고 하는 케클론 중기병단도 다수가 섞여있으며 에르겔 마법병단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만약, 지금까지라도 방심하고 있었던 기사가 있다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 밖에 없을 것이다!"

술렁이기 시작하는 익시드, 나인바르 나이츠 소속의 기사들. 막연히 육안으로 보이는 적의 군세를 보며 생각보다 많다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구체적인 수치, 자신들의 총병력보다 약 3배가량 많다는 정보는 접하게 되자 겉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예부대인 상퀼로트를 비롯한, 명성이 자자한 케클론 중기병단과 에르겔 마법병단이 가세했다는 소식은 제아무리 기사라지만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처, 천명! 필립경! 이 상태론 이길 수 없소! 어서 철군을 해야하오!"

헤이딕을 비롯한 고위기사들이 필립에게 달려온다. 살짝 인상을 쓰며 연설을 멈추고는 그들을 바라보는 필립. 헤이딕은 지가 무슨 카멜레온인 마냥 어느새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있었고 다른 지휘관들도 심하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필립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군을 하면? 이 협곡을 저들에게 내주자는 생각인가 헤이딕경?"

"그, 그런 뜻은 아니오! 하지만 이런 병력차이로 맞붙는다는 것은 잠시 협곡을 포기하고 후에 탈환하는 것 보다 멍청한 짓이오! 250명의 기사들을 이곳에서 모조리 잃느니 차라리 나중을 도모하는 것이 더 좋지 않소."

"소관들도 헤이딕경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런 상태론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맡은 바 소임이 중하다 해도 기사들을 개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타탕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휘관까지 헤이딕을 두둔하고 나서자 필립은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노려본다. 날카로움에 가득찬 그의 눈빛을 본 기사들은 저마다 움찔거렸지만, 부하들을 살린다는 뜻을 굽히겠다는 의사는 어느누구에게도 있지 않았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필립은 저절로 지어지려는 미소를 억누른 채 묵묵히 말 위에 앉아있었다.

'하이만경, 그대의 부하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나 그대의 지나친 걱정을 받을만큼 나약한 기사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전투, 충분히 해볼만 할 것 같군요!'

"필립경! 어서 결단을!"

기다리다 못한 헤이딕이 소리를 질렀다. 필립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된다. 좀 전의 불미스러운 사건때문인지 필립을 바라보는 헤이딕의 눈동자에는 불안함과 두려움, 분노가 뒤엉켜있었다.
하지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에 가득찬 눈빛 역시 선명했다. 장점보단 단점이 많은 인간이고, 선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순간만큼 필립은 확신했다.
헤이딕 폰 서머릿경은 명실공히 익시드 나이츠의 부기사단장이며 기사들을 지휘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기사들이 동요하고 있소. 그대들의 뜻은 분명히 알았으니 우선 경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기사들을 진정시켜주시오. 그대들의 의견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연설 속에 있을 것이니."

조용하지만 힘이 서려있는 필립의 목소리. 헤이딕을 비롯한 다른 지휘기사들도 아군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제 위치로 되돌아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기사들의 웅성거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필립은 목청을 다시한 번 가다듬고는 기사들을 향해 연설을 재개했다.

"모두 말은 안하고 있지만, 겁이나서 오줌이라도 싸고 싶은 심정인가보군."

그의 말에 몇몇 기사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말 속에서 자신들을 비아냥 거리는 필립의 생각을 읽고 수치스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필립 역시 이런 분위기를 모를리 없었지만 가볍게 무시한 채, 하던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었다.
중저음이지만 깊게 울리는 목소리 였다.

"겁이 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가지고 질책할 생각은 없다. 난,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제군들을 질책하려는 것이다. 전투 이전부터 적의 수가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에서 예상보다 증가한 수일 뿐인데, 이렇게 금방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실망했다. 그대들은 단순히 이기기 위한 전투, 공을 세우기 위한 전투만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인가, 이곳 카세리네 협곡을 기사된 자로써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 온 것인가!"

서서히 격양되는 필립의 목소리가 기사들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필립의 말을 들은 헤이딕과 지휘관들도 느끼는 것이 있었는지 표정이 밝지는 못했다. 명색이 지휘관이라는 자신들조차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단 전체를 궤멸로 몰고갈 수 있는 이번 전투는 여전히 반대였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기사들은 따로 있는데 왜 그대들이 몸을 사리는가! 하이만 기사단장과 그 휘하 100명의 기사들을 잊었는가! 하이만경이 이런 정보를 알면서도 왜 매복을 자처했는지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다면 생각이라도 해 보았는가! 젊은 그대들을 위해 전사 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적에게 달려들기로 결심한 이들의 결의를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들의 대한 걱정은커녕, 자신들의 몸만 사리기에 바쁘다니!"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미처 생각치 못하고 있던 하이만 기사단장과 중년의 나이가 대부분인 별동대. 백명 밖에 안되는 이들이 적에게 기습을 가한다는 것은 몸에 기름을 붓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게 없었다.
분명 필립이 알고있다는 정보를 총 지휘관인 하이만 기사단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제는 기사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간간히 비탄에 잠긴 신음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매복한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에르겔 마법병단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대들이라면 충분히 케클론 중기병단이나 상퀼로트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하이만경이 자네들을 과대평가한 것인가? 나인발트 나이츠! 자네들도 그러한가!"

"아닙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렁찬 고함소리가 협곡을 뒤덮었다. 기사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듯, 결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필립은 이 모습을 보고는 그제서야 웃음을 짓는다. 헤이딕경을 비롯한 다른 지휘기사들도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눈에 띄게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감정만큼이나 고조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전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우선 나를 비롯한 나인발트 나이츠가 협곡 입구에서 적을 유인한 것이다. 추격해온 적이 만들어 놓은 장애물과 함정에 걸려 분산되는 순간! 대기하던 익시드 나이츠와 연계해 적을 궤멸시킨다! 그 후, 따라 들어오지 못한 적을 요격할 것이다! 물론, 잔존 부대를 요격하는 작전은 지원군인 '젤리크 나이츠'와 함께 할 것이다!"

"젤리크 나이츠?!"

"황실 직속 기사단이 지원군으로 오는건가!"

  또 한번, 놀라움이 뒤섞어 기사단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전의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놀라움이 아닌,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에서의 기분좋은 소식. 이런 기사들의 밝은 모습을 보면서 필립은 마음 한 구석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라도 사기를 올려 전투를 치뤄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 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다. 아군에게 힘 없이 처단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순간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낫지. 그리고…이기면 되는 거잖아!'

스스로 마음을 다 잡으며 결심을 하는 필립. 전투에서 패할 경우 자신들의 뒷처리를 담당한 젤리크 나이츠를 지원군이라고 속인 그는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는, 자신감이 충만한 표정으로 익시드 나이츠와 나인발트 나이츠를 바라보았다.
후퇴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전투였다. 적을 패퇴시키지 않는 이상 이들에게 오는 것은 죽음 뿐인 전투. 하지만 기사단장의 희생을 봐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한없이 필립의 어깨를 짓누른다. 헤이딕 부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거짓말을 듣고 자신감에 가득찬 그가 눈이 마주치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자신의 검과 수하들을 믿어야 할 차례. 마침내 검집에서 때를 기다리던 필립의 검이 굉음을 내며 밖으로 뽑혀져 나왔다.

"전군! 각자 위치로! 개전이다!"





          *          *          *





발사로크 군 선봉에 선 케클론 중기병단. 그들의 시야에는 협곡 입구에 서 있는 50여기의 나인발트 나이츠 소속의 기사들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 누구도 밖으로 표출하진 않았지만 속 마음은 일치했다. 저 시건방진 기사녀석들을 짓뭉개버리자고.

"이런 식으로 우롱당하다니!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돌격 명령을!"

"발사로크는 물론 건국 시조이신 볼츠 장군까지 모욕하다니. 상대편 지휘관은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몰상식한 놈입니다! 그런 놈은 두개골을 부숴트리기 전까진 자신의 잘못을 모를 겁니다!"

헬무트를 중심으로 상퀼로트, 케클론 중기병단의 지휘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물론 적의 도발일지도 모르니 신경쓰지 않는게 좋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강경파에 밀려 수그러든지 오래. 헬무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손에 들린 서신은 그걸 어렵게 하고 있었다.


-서로 상대방의 피를 보기 위해 환장한 놈들끼리 가식어린 인사 따윌 주고받는다는 건, 대장 속에 있는 오물까지 입으로 밀려 올라올 것 같아 생략하겠다. 흔히 생각하는 부드럽고 유려한, 예의를 지킨 문체를 기대한다면 이걸 읽는 순간 포기해라. 물론 네놈들이 그런 양식의 글을 이해할만한 교육수준이 안된다는 것을 배려해서 한 것이니 감사하거라.
공화국 운운하면서 천민끼리 뭉친, 네놈들의 나라가 우릴 두려워 한다는 건 이 세상의 모든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니 50명을 상대로 천명을 끌고오는 상식에 어긋난 또라이 짓을 하는 것이겠지. 뭐 그만큼 우리 나인발트 나이츠가 강하다는 뜻일테니 흐뭇한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겠다만.
'쫄았냐?'
대가리 수는 많은데 왜 꽁 밖혀 있을까나? 그럼 아예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호랑이가 새끼를 낳으면 호랑이가 아닌 개라는 말이 있더군. 강아지 급인 너희의 시조 볼츠의 후손이란 네놈들의 수준이야 안봐도 뻔하다. 꼬우면 당장 공격해 보던가, 그게 아니라면 냉큼 꼬리말고 꺼져라.

                         바르디아제국 나인발트 기사단장 필립 폰 에르네오경  -



"…전군 공격준비. 케클론 중기병단이 선봉을 맡는다. 나머지 부대도 이들 뒤를 최대한 쫓아가 순식간에 적을 제압하도록 하겠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미세하게 떨리는 헬무트의 목소리.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국가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공식적인 서신에서 이런 문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깔보는 것을 넘어 명백히 자신들을 도발하는 행위였다.
만일의 사태를 생각해 다각도로 일을 생각해보았지만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함정이 있다고 해야 50여기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지원군이 있다는 소식 같은 건 없었다. 상대측에서도 지원군이 있다면 합류에서 방어를 펼쳤을 것이지 50여기로 수비를 하진 않을 것이라 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헬무트는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렸다.
하나를 간과했다면, 편지를 보낸이의 이름에 신경을 안썼다는 것 뿐…….

'어떤 녀석인지 몰라도 사로잡히는 순간 곱게 죽지는 못할 줄 알아라.'



마침내 발사로크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과를 떠나 전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더니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대열을 맞춘다. 마침내, 거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사정없이 주변으로 울려퍼지는 순간, 선두의 케클론 중기병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다! 모두 철저히 준비해!"

자신의 옆에서 기사들을 독려하는 부관의 외침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필립은 적의 대열을 주시했다. 편지의 효과 덕분인지 전군이 일제히 협곡 쪽으로 밀려들어오는 모습. 계획대로 된 것에 대한 안도감과, 적의 기세에 대한 긴장감이 뒤엉켜, 온 몸에 알 수 없는 짜릿한 느낌만이 전해져 왔다.
케클론 중기병단이 점점 속력을 올리자 상퀼로트와의 거기가 벌어지기 시작하는게 눈에 띄었다. 더불어 상퀼로트 사이에서도 발이 빠른 부대와 그렇지 못한 부대사이의 거리차가 나면서 자연히 진형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빈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만경. 당신을 믿겠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나직이 중얼거린 필립은 케클론 중기병단의 앞 머리와 거리차가 200미터 이내로 좁혀지자, 냅따 말의 배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나인발트 기사단! 후퇴한다!"

미리 대기를 하고 있었던 터라,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선두의 케클론 중기병단은 더욱 기세가 올라가고 있었다.
유인작전 이라는 인식은, 기껏해야 50기로 뭘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대체 되었고, 오만불손한 서선을 날린 적의 기사단장을 사로잡아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들의 채찍질은 더욱 거세어져 갔고, 본대라 할 수 있는 상퀼로트와는 이제 상당한 거리 차를 두고 있었다.

"케클론 중기병단을 최대한 따라서 진격한다! 속도를 높여라!"

"모두 속력을 올려라! 있는 힘껏 달려라!"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상퀼로트 쪽에서도 이런 사실을 감지한 헬무트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다넨 평원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찌를듯한 기세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병과 기병의 거리는 늘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미 케클론 중기병단의 최선봉은 카세리네 협곡 내부로 이미 진입한 상태였던 것이다.

"속력을 최대한 높여라! 어서!"

케클론 중기병단의 지휘관이 사정없이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휘갈기며 외친다. 나인발트 기사단과의 거리는 불과 200미터 이내. 자연히 랜스를 움켜잡은 그의 손엔 힘이 들어갔다. 주변은 흙먼지로 인해 뿌연 연기만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케클론과 나인발트 나이츠 사이의 아슬아슬한 추격전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서라! 기사란 자들이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자는 것들이 50명을 상대로 20배나 넘는 병력을 끌고오냐! 네놈 같으면 잘도 서겠다! 이 개념없는 놈아!"

지휘관의 외침에 곧바로 상대측의 한 기사가 재빨리 응수한다. 오히려 당했다는 수치감에 투구 속 얼굴빛이 붉게 변한 케클론 중기병단의 지휘관. 속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잘근잘근 씹어 먹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죄없는 말에게만 화풀이를 하듯 거세게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추격전이 한창일 무렵, 마르텔 산 쪽에서는 한무리의 군마가 조금씩 조금씩 표적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08 [몽환록]1장-사망전이-(1-0) [3] 울프맨 2006.05.17 156
607 [the Cruise]Bright Fire ; 근원 - 0˚ Prelude [4] Lunate_S 2006.05.16 270
606 싸구려 용사 전설 [4] 느와르 2006.05.15 232
605 realize 11화 - 스쿨 라이프 [등교 직전] - [4] 연향 2006.05.15 155
604 [몽환록].현세의 장.0(-사냥-) [3] 울프맨 2006.05.15 160
603 [단편][完]마지막 전사~이름 모를 카나키나스~(로딩시간쀍) [4] 고쿠 더 히트 2006.05.13 178
602 realize 10화 - 연애강의 휴강, 그리고 선생님의 휴가 - [4] 연향 2006.05.10 166
601 [단편]<마지막 전사> ~ 이름 모를 카나키나스 ~ The first part [6] 고쿠 더 히트 2006.05.08 166
600 Antares[0.5막] - Follow me 08 - [5] 히이로 2006.05.07 183
599 [사일런스] - Silence 2 [ 꼬맹이 구출작전 - 1 ] [3] 리오 2006.05.06 164
598 Realize 9화 - 강의. [3] 연향 2006.05.02 143
597 [사일런스] - Silence 1 [ 빛, 어둠, 혼돈, 그리고 침묵 ] [3] Rio 2006.05.01 157
596 한자루 칼을들고, [2] -춤추는음악가- 2006.05.01 172
» Antares[0.5막] - Follow me 07 - [3] 히이로 2006.04.30 174
594 [단편]하늘의 마녀 [8] -Notorious-G君 2006.04.25 305
593 雜談. Trenail [7] Lunate_S 2006.04.25 156
592 한자루 칼을들고, [3] -춤추는음악가- 2006.04.24 158
591 realize 8화 - 삼위일체 신검합일 동봉조극 - [3] 연향 2006.04.22 175
590 realize 7화 - 재등장 - [2] 연향 2006.04.20 144
589 Antares[0.5막] - Follow me 06 - [4] 히이로 2006.04.15 199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