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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06 -

2006.04.15 11:44

히이로 조회 수:199

네르바로 인해 시작된 사건은 필립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식단 문제는 이미 꼬리를 감추어 버린지 오래. 익시드 나이츠의 기사들은 제대로 정체가 드러난 군의 총지휘관 필립 폰 에르네오에게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기사단장 자리를 꿰찬 것은 아까 보여준 악랄한 성격 덕이었다 라던가, 예상과는 다르게 준수한 외모를 소유했다는 사실은 여기사들을 환상의 도가니로 몰어넣는 등의 무수한 부작용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다른 기사들의 입에 가지각색으로 씹히던 필립이 고대하던 밤이 찾아왔다.

"…왜 이러지."

초조한지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는 필립의 그림자.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가 더 지난 상황이지만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혹시, 생각보다 상처가 심해 못나오는 것일까 라는 생각까지 들자 필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네르바!"

어느 새 등 뒤에는 그 말고도 다른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빛이 없었기에 어렴풋한 형상만을 볼 수 있었지만 필립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얼굴에 감긴 붕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

한동안 이어지는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 서로 마주한 채 선 두 사람 모두,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차이점이라면 안절부절하는게 눈에 보이는 필립인 반면,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는 네르바의 모습정도 일 것이다.
그러던 와중, 용기를 내 먼저 입을 연 쪽은 필립이었다.

"…상처는 좀 어때? 미안하다."

"별거 아니다. 네가 미안해 할 일이 뭐가 있어. 오히려 날 도와준 사람은 너잖아. 아! 이런 실례를 범했군요. 나인발트 기사단장님. 예의도 모르는 이 무식한 기사를 벌하여 주십시오."

네르바의 답변을 듣는 순간, 필립은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선 꽤나 고생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적어도 오늘 일에 관해서는 상대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이지만, 그 전날의 일이 있었기에 그는 마음을 굳히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일부러 숨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냥 네가…불편해 할 것 같아서 그랬어. 전처럼 편하게 대하는게 좋으니까. 다른 기사들의 시선도 신경쓰였고. 그리고……."

"그리고?"

"예전, 밤에 내가 네게 한 행동에 대해 사과할게. 그때 일은 정말 미안했다. 오늘 일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네 얼굴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어물거리다 그렇게 된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다."

한동안 말이 없는 네르바. 필립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 일단 진심을 담아서 사과를 했으니 용서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남자인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단 훨씬 복잡한 것이었나보다.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에는, 아직 쌀쌀함이 서려있었다.

"상관없다니까. 뭐 내가 한번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테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시죠. 짜증이 밀려옵니다. 기.사.단.장.님."

"절대로! 그 따위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

"웃기지마세요. 제게 감정이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날 밤 일도 그렇고."

네르바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필립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생각보다 그때의 일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은 네르바. 하지만 분명 발단은 그녀가 계속 자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잘못은 생각도 안하면서 그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는 모습에 필립도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니냐."

다시한 번 필립은 사과를 했다. 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한다는 사실이 불쾌하긴 했지만 잘못은 잘못이니까. 또한 지난 번 처럼 감정적인 반응으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필립의 마음을 가볍게 무시하듯, 그녀는 아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보통 귀족 자제들이라면 어느정도 마음이 풀렸다는 것을 알고 2번정도 사과를 시도를 했겠지만 둔하면 둔하다 할 수 있는 시골 귀족 출신의 기사인 필립은 더 이상 그녀를 달랠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서히 표출되는 분노를 최대한 자제하는 필립.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면 내 얼굴을 보는 것도 곤욕이겠지.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이만 사라질테니 치료를 잘 받으면서 푹 쉬도록 하시오 네르바경."

딱딱하게 굳어진 필립의 말투. 그리고는 몸을 돌려 네르바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는 그녀 쪽에서 적잖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번 튕긴거 가지고 저렇게 미련없이 돌아서는 필립을 보며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네르바.
사실 화해를 절실히 원하는 건 그녀 쪽이었다. 선배 기사와 시비가 붙었을 때 도와준 것에대해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습관이 된 필립을 깔보는 버릇과, 상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언사등 나쁜 버릇이 이번 일을 그르쳐 버리려 하고 있었다.

"저…저기."

얼떨결에 필립을 부른 그녀. 그 소리를 듣고 우뚝 멈춰서는 필립.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우선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는 네르바였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그녀를 한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와 불쾌감을 준 것에 대해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터이니 지나간 일은 빨리 잊고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해주길 부탁하오. 무운을 빌겠소이다. 네르바 드 비슈로프경."

말을 마친 후 미련없이 뒤로 돌아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 그 후 네르바는 그의 말 처럼 한동안 필립을 볼 수 없었다.




        *        *        *




다넨 평원 초입부. 상당한 무리의 군마가 천천히, 밋밋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리쬐는 안타레스의 빛에 의해 번쩍 거리는 흑색 기마병들의 갑옷, 그 뒤를 따르는 퀼트무늬 복장의 병사들. 그런 그들 사이에는 가지각색의 복장을 한 10여명의 사람들이 침묵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슬슬 이쯤에서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저희야 아직 무리가 없지만 상퀼로트나 마법병단 쪽에서는 한계가 오는 것 같군요. 헬무트님은 이번 지휘의 총 책임을 맡지 않으셨습니까. 전 상관마시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병사들에게 알려라. 휴식이다."

100명의 흑색 기마병,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의 동의를 얻어낸 헬무트는 부관에게 휴식 명령을 내린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고함을 치는 소리와 함께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긴 행렬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단한 심신을 쉴 목적이었는지 대부분의 병사가 하늘을 향해 큰 대자로 몸을 뻗은 채 벌렁 드러눕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느새 말들도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파릇파릇 자라나는 풀들을 마음 껏 뜯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병사들 사이로 헬무트를 비롯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휴식을 뒤로 미룬 채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급물자는 충분합니다. 후방의 안전도 확실히 확보된 상황입니다."

"다넨평원은 현재의 진군속도라면 오늘이 가기 전에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우선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움지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합니다만."

보급물자와 지형을 담당한 참모들의 보고를 들으며 헬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깎지 못했는지 그의 턱주변에는 수염이 의외로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군해 왔지만 병사들의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에서, 이대로 강행군을 할 경우 탈락자가 속출할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협곡을 지키는 기사의 수가 50명밖에 안된다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목적은 협곡을 최대한 빨리 장악해 황도 아플래톤까지의 루트를 확보하는 것.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소수의 병력따위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아군의 사기와 체력상태 뿐.

"그럼 이곳에서 야영을 하도록 하지.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부대원에 대해 철저히 신경을 쓰도록. 적과 마주보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상!"

"넷, 알겠습니다!"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지휘관들을 보며 헬무트는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다넨 평원을 한번 바라본다. 공화국 발사로크가 제국 바르디아를 압박해 들어가는 현재의 우세한 전세라해도 아직까지 이런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바르디아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피부로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잠시 이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상퀼로트 지휘관의 복장을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지 놀라는 기색없이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말을 건네는 헬무트.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봐라 라펜드."

그의 말에 라펜드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소리없이 웃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악의가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런 모습에 덩달아 헬무트까지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강하게 서로를 한번 끌어안는 두 남자.

"자식, 오랜만이다."

"그렇지. 작센 침공전 이후 처음인가."

일개 소부대를 지휘하는 자와 군 전체를 통솔하는 자. 계급의 차이로 보면 이런 대화는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 그러나 서로를 잘 알고 있었는지 두 사람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펜드가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등짝을 한 대 후려갈기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식, 못보던 사이에 많이 출세했네. 더럽기로 소문난 그 성질머리도 많이 죽인 것 같고 말이야. 총사령관 티가 나긴 나는구나."

"큭, 아프잖아. 뭐 그러는 너는 여전히 미친 놈 처럼 날뛰는 성격은 여전한 것 같구나. 킥킥, 네가 1년여간 요양하고 있을 때 나야 계속 참전했으니까. 너와 함께 있던 작센전투에서 결과적으로 필로스 후작의 숨통을 끊은 건 나니까…이렇게 되는건 당연하잖아. 자, 사령관님이라고 불러봐라."

"지랄을 해라. 어쨌튼 축하한다. 아 진짜 부러워서 미칠 지경이네. 난 백작하나 배에 구멍을 내주고 자작도 한놈 처리했는데 그때마다 꼭 지는 전투라서 말이지. 더군다나 어떤 죽일 년한테 등을 베여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네. 퉤!"

"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군에 복귀하지 못한 거잖아."

약 3년가량 못 본 친구에게 서로의 생활을 즐겁게 물어보는 두 남자. 같은 부대 소속으로 전우였던 헬무트와 라펜드. 3년이란 시간동안 두 사람 모두 한층 성숙한 외모와 그에 걸맞은 지휘를 가지고 있었다. 헬무트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필로스 후작을 죽인 공으로 그 누구보다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던 반면, 라펜드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았다.
그 이유에는 작센성을 도망쳐나와 피난하는 귀족과 민간인들을 기습했을 당시, 적의 지원군으로 온 나인발트 기사단 소속 견습 여기사에게 치명적인 검상을 입은 것도 큰 몫을 했다. 그 상처 덕분에 라펜드는 근 10개월 가량을 병실 침대에게 뒹굴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헬무트는 그의 말처럼 계속 되는 소규모 전투에 참전했고,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근데, 네가 내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왜 몰랐지? 진군 이전에 모든 지휘관과 면담을 했었는데."

"아아, 난 중간에 합류했다. 에르겔 마법병단을 호위한 상퀼로트 부대가 내가 지휘하는 부대야. 성에게 전투준비를 하던 너희들고 달리 난 수도에서 상퀼로트 임관식을 치르고 마법병단과 함께 이동해서 합류한 거니까."

"아! 그래서 그랬군."

라펜드의 말에 손뼉을 치며 알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헬무트. 에르겔 마법병단의 경우 타부대에 비해 소수의 인원이었고, 주둔지가 수도 볼츠그라드였기 때문에 합류하기 위해선 도중까지 호위가 필요했다. 이 일을 라펜드가 맡은 것이다.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쪽을 돌려지게 되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헬무트였다.

"마법사들의 상태는 어때? 이런 긴 행군은 체력이 달리는 그들로써는 힘들텐데……."

"확실히 처음보다 지친기색이 역력하지만 문제삼을 정도는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 휴식을 취한다고 하니 많이 회복되겠지."

"음, 그런가."

"그럼 나도 내 부대를 통솔해야하니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드디어 보통 정규군에서 정예군 상퀼로트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는데 첫 임무부터 소홀할 수는 없잖아 하하핫, 그럼 나중에 보자구."

말을 마친 라펜드가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고 사라질 때까지 헬무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안색이 차츰차츰 어두워져 갔다. 라펜드로 인해 다시 회상하게 된 그때의 일.
작센성을 점령한 이후부터 생겨나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의문과 착잡한 심정. 헬무트는 답답했다. 분명 필로스 후작을 없앤 건 본인.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반대로 자신의 목이 후작의 검에 의해 바닥을 나 뒹굴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때의 마법진은 누가 설치한거지? 그 이상한 형체의 짐승과 빛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일생일대 가장 죽음과 근접해 있었을 때의 일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가르려는 후작의 검과 자세, 그러나 그 상태로 멈춰만 있던 후작의 몸과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난 눈빛, 그 이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본능적으로 후작의 목을 부러진 배틀엑스로 베어버린 자신.
그러자 갑자기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순간적으로 그의 시야에 들어온, 날개를 가진 이상한 짐승의 형체. 빛이 가신 후 머리만 남고 사라진 후작의 시신.

"지금 이 자리는 내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헬무트는 중얼거렸다. 그때의 경험이 자신을 변하게 했다. 자신감과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성격이 겸손하다 못해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한 것. 항상 자신은 그 날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고 이전처럼 동료들의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경험한지가 벌써 3년이 지났다.

"……이번전투,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구나."

예상되는 결과는 완벽할 정도로 발사로크 군에게 승기가 기울어진 상태였지만 그의 가슴 한 구석은 미묘한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헬무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런 불안감을 날려버리려는 듯 심호흡을 크게한다. 또한 피곤했는지 그 역시 다른 병사들처럼 벌렁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아, 라펜드님. 회의가 끝났나보군요."

"하핫, 뭐 그런 셈이지요. 총지휘관인 녀석이 같은 부대소속이런 전우라 이야기 좀 하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에르겔 마법병산 소속 마법병을 위해 급조된 천막 내부로 들어가가 싱그러운 물냄새가 라펜드의 코 끝을 간질였다. 내부에는 마법병 전원이 각자 휴식을 위해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는 중이었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마법사가 그를 맞았다.
노을 빛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 지적으로도 보였지만 그보단 선량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풍길법한 인상이었다. 부드러운 눈매는 거친 성격의 라펜드조차 그 앞에서는 순하게 만들 정도로 위력이 있었고, 칠흑의 눈동자는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행군하는데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총지휘관도 제게 이걸 부탁했습니다."

"상퀼로트나 케클론 중기병단에 비하면 저희는 너무나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펜드님."

부드럽고 공손한 어조로 정중히 사양하는 마법사. 라펜드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마르셀 그란덴발트'라고 하는 이 사람은 다넨 평원에서도 가까운, 마르텔 산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 고향이라고 했다. 자신처럼 제국이 싫어 공화국으로 탈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라펜드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마르셀은 평민 출신이지만 라펜드는 천민 출신이라는 점. 그러나 바르디아 제국 내에서는 똑같이 귀족에게 수탈당하는 입장이었기에 거부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또 목욕을 하셨나 보군요."

마르셀 주위에서 느껴지는 좋은 향기를 맡으며 라펜드가 뭍는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웃음을 짓는 마르셀.

"병사들이 물을 길어다줘서 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만…저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할 뿐입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을. 마르셀님께서는 물계통의 마법을 쓰시는 분이니 호위하는 사람으로써 당연히 그 정도 배려는 해드려야지요. 마르셀님 덕에 저희 부대 병사들도 다른 부대보다 시원하고, 편안하게 행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물과 얼음 계열의 정령을 부리는 마법사는 항상 물과 가까이 있어야하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본연의 마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진군시 가장 고생을 하는 계열도 이 쪽 계열이다. 목욕을 할 정도의 많은 물을 구하기가 행군 중에는 쉽지 않기 때문.
라펜드는 이런 마르셀을 배려하고 있었다. 또한 마르셀 역시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시원한 물을 생성해 병사들의 갈증을 덜어주었던 것이다.

"이쪽 방면이 마르셀님의 고향이 아닌가요?"

"네, 모두 익숙한 풍경들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누구보다도 기쁘시겠군요."

"예, 그렇지요. 정말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이번 전투가 끝나면 퇴역할 생각이랍니다."

약간 감상적으로 변한 마르셀의 표정, 청색과 짙은 보라색이 어우러진 로브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라펜드는 퇴역하겠다는 그의 말에 약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본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라펜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전투를 끝으로 연인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제 고향이 발사로크의 영토가 된다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기로 말이죠."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마법병단에 남으시는 것이 사회적 지위나 생활에는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에르겔 마법병단에 남기 위해선 수도에 계속 남아있어야 해서…마법사가 살기에 수도는 그리 좋은 곳이 아니지요. 자연이 아닌 인위적인 면이 강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군에 몸을 담은 건, 제국에서 억압받던 저에게 발사로크가 준 평등이라는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공화국 발사로크가 부강해지는데 제 힘을 보태고 싶어서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며 조용하게 살 생각이랍니다."

라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같이 철면피가 아닌이상 보통사람, 마법사가 이런 생활을 오래하는 건 힘든 일이다 .배운 것과 가진 것이 없는 그가 발사로크에 와서 출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군인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마르셀은 달랐다. 분명 그 역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지식을 쌓아 마법사가 되었다.
충분히 평화롭게 여생을 보낸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이라면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겁니다."

"감사합니다. 라펜드님 역시 발사로크에 꼭 필요한 분이 되겠지요. 피곤해서…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마르셀은 읽던 책을 덮고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긴 채 천천히 눈을 감는다. 라펜드는 그 모습을 모고는 조용히 밖을 나왔다. 어느덧 시간도 슬슬 일몰이 일어나기 직전. 취사를 담당한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위로 올라가겠어."






다음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발사로크 군은 협곡 입구로 진군을 시작. 그날 오후 쯤에는 바르디아의 두 기사단과 육안으로 마주 할 수 있는 거리까지 이동한다. 특별한 도발없이 하루를 소비한 양쪽 군대는 다음날, 흐릿하고 습도가 높아 언제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상황에서 첫 교전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카세리네 협곡 침공전(제국 측에서는 방어전이라 부른다). 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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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써놓은건 2주전에 써놓고 시간이 없어서 지금에야 올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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