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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외전] - Follow me 04 -

2006.03.17 21:38

히이로 조회 수:151

"……."

"어이,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네르바. 아니, 네르바경."

"너…설마?"

익숙한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 역시 예상외의 일인 듯,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몇 마디를 제외하곤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이만은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글을 쓰며 종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네르바는 하이만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상대에게 잇달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야! 필립.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거야! 그리고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이곳은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님이 머무르시는 곳이다. 잘못 들어온 거 아냐?"

필립은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마치 자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마냥 일을 하고 있는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특별한 감정같은 건 느낄 수 없는, 네르바를 바라보기 껄끄러워서 마지못해 하이만을 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한 필립의 행위.
예전 새벽에 겪은 일 이후 또 말을 무시당하자 네르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성이 평상시처럼 앙칼지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하이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르바경. 이 무슨 몰상식한 행동인가. 자네는 견습기사 시절에 습득한 예법을 그새 다 잊어버린 건가."

냉랭한 하이만 기사단장의 말에 움찔하는 네르바.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필립을 노려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상당히 거북했는지 곧바로 눈을 돌리는 필립.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순식간에 멱살을 잡고 흔들거나, 주먹을 날리던 네르바가 잘 훈련된 개 마냥 가만히 서 있자 그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쿡."

애써 노력했지만 필립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웃음은 유감스럽게도 네르바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말았다.

'저, 저자식이 날 비웃고 있어!'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한 후 필립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네르바. 저런 과거에 소위 '찌질이' 같이 살아온 녀석에게 비웃음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니…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녀였다.

"필립경, 정찰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예상대로 입니다. 협곡 도입부로 갈수록 절벽이 험해 매복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고 아직 협곡 이후에 위치한 다넨 평원에도 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음…자, 들었는가 네르바경? 이것으로 궁금증은 풀어졌겠지? 나가보게."

"기사단장님!"

"나.가.주.시.게 네르바경."

"…예 알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무섭도록 또박또박 발음하며 노려보는 하이만을 보자, 더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는 경례를 한 후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필립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행동으로 '보복 하겠다'라는 의사를 표현한 의지를 필립에게 확실히 확인시킨 이후였지만…….
쓴 웃음을 지으며 그는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아 있는 하이만을 바라보았다.

"나인발트 기사단장. 이곳에 앉으시오."

한 손으로 의자를 가리키는 하이만. 필립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한 뒤 자리에 앉는다. 한동안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필립은 하이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하이만 역시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빛을 띤 하이만의 눈동자를 보며 필립 역시 네르바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기사단장이라 하기엔 존재감이 미약한 사람.
물론 통솔력, 전술능력, 용맹, 인덕 등을 전부 고려해야 하지만 부하들에게 느껴지는 상관의 존재감, 인상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이만은 그것이 부족했다. 누군가가 익시드 나이츠의 기사단장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기사들은 하이만 드 칸타빌레라고 대답은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휘관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세부 적인 것들을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자연스럽게 대답할 기사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수하가 저지른 무례했던 행동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소이다. 너그럽게 헤이딕경을 용서해 주었으면 하오.”

부하인 부기사단장에 대한 사과로 말문을 여는 하이만, 진실 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 지극히 의례적이 말이다. 필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슬슬 용건으로 들어가겠군.’

그의 생각대로 하이만은 잠시동안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더니 그에게 둘둘 말려있는 서신을 한 장 건넸다. 필립은 그것을 공손하게 받으면서 하이만을 향해 질문을 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이만경.”

“우선 읽어본 후 답변 하는 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소. 나인발트 기사단장.”

“알겠습니다.”

하이만의 말에 대답을 한 필립은 천천히 종이를 풀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양피지에는 상부에서 내려온 일종의 명령과 적의 정보에 관해 상세히 기록되어있었다. 하이만은 여전히 필립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당사자는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입을 꽉 다문 후 최대한 동요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준다면 종이가 흉하게 구겨질 정도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필립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자료가 사실입니까 하이만경?”

“사실이겠지. 문제가 많은 상층부라고 해도 이런 군사정보를 조작해서 아군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만들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다네 필립경.”

“절 부르신 이유를 알겠군요.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님.”

“…….”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또박또박 말하는 필립. 하이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필립을 똑바로 바라봤다. 필립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 상태로 전투에 임하면 단순히 고전이나 패배가 아닌 ‘전멸’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인 상퀼로트 500명은 너무나 낙관적인 수치였다. 실제 진군하는 병력은 상퀼로트 700명에다 에르겔 마법병단 소속 마법사 10여명, 심지어는 발사로크 최정예 기병대라 일컬어지는 케클론 중기병단 100여기가 가세한 것이다. 아군의 경우 마법사는 단 한명도 없다. 그들의 위력 자체는 미약하지만 마법으로 대열을 흐트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적보다 수가 적은 상황에서 진형이 무너지면 그대로 상대에게 궤멸 당하는 길 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걸 숨기고 허위정보를 흘린겁니까 하이만경!”

“……나도  최근에야 안 사실이네. 우리가 이곳으로 행군을 시작하기 전날 밤, 이 서신을 들고 밀사가 왔었네. 나도 그때 알게 된 것이야.”

“그렇다면 행군을 중단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철군을 한 후 병력을 보충하던지 지원을 요청해야…….”

“죽는다.”

“예?”

단호한 하이만의 한마디에 필립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의 말 속에는 필립도 어찌할 수 없는 무거움이 깔려있었다. 침울한 표정을 지은 하이만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괴로움을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필립은 조용히 경청할 뿐이다.
분명 자신도 모르는 속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룬트슈테트 대전으로 성을 잃은 귀족들이 황도 아플래톤에 거주하는 귀족 전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나?”

“…대충 들어서 알고 있긴 합니다.”

“현재 제국의 암울한 상황을 자네라면 잘 알걸세. 물건 하자가 귀한 가운데에 근거지가 없는 귀족들을 언제까지 놀고먹으며 살도록 중앙의 귀족들이 지원을 해줄 것 같은가?”

“그것이 현 상황과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하이만경?”

“…익시드 나이츠는 룬트슈테트 전쟁으로 영지를 잃은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기사단.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이 기사단에 들어온 것이네. 조금이라도 영토를 회복해 보고자 밤낮으로 전투만을 치렀지만 얻은 건 하나도 없었지. 오히려 두 아들과 동생을 적에게 잃었다.”

“그런 일이…….”

본의 아니게 하이만의 과거를 듣게 된 필립은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그의 경험을 들으며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의 가족을 잃는 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필립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만은 그런 필립의 모습을 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는지 깊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초창기 일정기간은 영지를 유지하고 있는 귀족들도 전폭적으로 몰락귀족들을 지원해주었네. 한순간의 패전일 뿐, 곧 다시 수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근거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지. 현재의 상황을 보게나. 자네 아버지 에르네오(필로스) 후작이나 그 외 수많은 귀족들이 처절한 방어전을 펼쳤어도 지켜낸 성이나 영지는 단 한군데도 없었네. 그런 식으로 세월이 지나갔어. 몰락귀족들은 더욱 늘어났고 그럴 때마다 영지가 남아있는 귀족들의 지출도 늘어갔지. 슬슬 가진 자의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한거야.”

“그래서 이번 전투로…….”

“이해가 되었나보군. 몰락귀족의 수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네 필립경. 바로 적의 손을 빌려서. 전멸당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고 ,만에 하나 승리한다면 우린 상당한 실력을 갖춘 기사단. 흥 용병단이지. 그래 용병단……. 귀족들의 사병으로 전락하겠지 아마도.”

냉소적인 웃음을 짓는 하이만의 모습. 필립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경우 나인발트 나이츠 소속으로 국경지방에만 있었기에 수도에 머물 기회가 드물었고, 상황이 이런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나인발트 기사단도 처음 설립된 목적이 지금은 발사로크의 영토로 전락한 남부지방의 회복을 위해 몰락 귀족들이 만든 기사단이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승리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변질되고 변질되어 최종적으로 국경주둔이라는 목표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익시드 나이츠와 나인발트 나이츠는 제국 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흔히 말하는 엘리트 기사단이지.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지금의 명예와 영광은 이미 전쟁에서 죽어간 몰락 귀족들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네. 초창기,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자네 나이만할 때라도 기사단이라는 호칭만 있었지 실제 장비는 민병대 보다 더 못했었지. 그런 상태로 누구보다 악착 같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을 베었고, 그만큼 그들도 그렇게 죽어갔지. 그때 얻은 공적으로 지금과 같은 지원을 받게 되었고 모습을 갖추게 되었네. 내가 기사단장이 된 건 특출 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닐세. 내 나이또래의 인물, 그러니까 젊은 시절 내 동료들이 모두 전사하는 바람에 연장자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일세.”

“………….”

목에 무리가 왔는지 하이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에 놓여있던 작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신다. 필립은 조용히 앉아 그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만에 대한 분노나 이질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 하이만 드 칸타빌레경이 자신의 먼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서글픔이 그의 감정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숨을 골랐는지 다시 하이만경은 자리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귀족 수뇌부들은 이런 이유로 응전 명령을 내렸네. 문서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밀사의 입을 통해 또 다른 명령도 내려왔지. -후퇴할 경우 동족의 손에 불명예스런 최후를 맞을 것이다- 황실 직속 기사단 ‘젤리크 나이츠’가 카세리네 협곡, 우리가 주둔했던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네. 패잔병은 보이는 대로 처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거야.”

“어, 어떻게 그런 명령을…….”

필립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젤리크 나이츠. 바르디아 제국인 이라면 살면서 최소 10번 정도는 듣게 되는 제국 황실 기사단. 실제로 젤리크 나이츠가 전투 전방에 나서면 발사로크 군도 잔뜩 긴장하여 케클론 중기병단 전원과 에르겔 마법병단 전체를 동원시킬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황실 직속 기사단이었기에 주로 황도 아플래톤, 그것도 황궁에 머물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교전 경험은 타 기사단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하지만 한번 전투를 치리면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기사단이 젤리크 나이츠였다.
그 기사단이 이제 자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필립에게는 충격을 넘어 일종의 공포로 다가왔던 것이다.

“도망쳐도 결과는 하나, 그래서 내가 이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네. 괜히 기사들을 동요시켰다간 위험해지니까. 자네에게 부탁할 것도 몇가지 있으니까 말일세.”

“제게 부탁하실 것 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이만경.”

“33세 이하 익시드 나이츠의 기사들도 자네기사단과 같은 위치에서 적을 맡아 싸우도록 해주게. 물론 그들에 대한 지휘권은 자네에게 넘기겠네. 자네는 첫 인상부터 왠지 모르게 신뢰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하이만의 말이 끝나자 필립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노려본다. 분노나 증오로 인해 노려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필립 나름대로 의지가 담긴 결의에 가득 찬 눈빛. 하이만 역시 결심을 굳힌 듯 필립의 앳된 얼굴을 바라바고 있었다.

“시간을 버실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미 저희는 퇴로도 차단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나를 따라 끝을 함께 할 기사들은 정해졌다네.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야. 그리고 자네의 말뜻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단지, 나와 같은 몰락귀족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젊은 사람들을 이곳에서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젤리크 나이츠라면……한번 쯤 도박을 해봐도 괜찮을 것이야.”

“도박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지시는 황제 폐하의 명이 아닌 ‘바르키엘 공작’을 주축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이 내린 것이네. 젤리크 나이츠는 황실 직속 기사단이고, 폐하의 어명이 아닌 이상 기사단장은 작전수행에 있어 독자적인 판단을 할 권한이 있다고 들었네. 만약 자네가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모두 살 수 있을것일세. 필립경.”

하이만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필립.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침착하고 특유의 낮은 목소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강한 결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이만경의 뜻에 따르도록 하지요. 잠시나마 오해를 한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님. 하지만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인발트 나이츠나 익시드 나이츠나 분명 창설 목적은 몰락귀족에 관한 것이지만 지금은 보통귀족들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굳이 이런 흉계를 꾸미는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하이만경.”

조심스런 필립의 질문에 하이만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양 손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다. 약간 고민이 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하이만. 그들 사이를 밝혀주던 양초도 어느 새 거의 녹아내려 위태위태한 상태로 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해주어야겠군. 하지만 그 전에 조건이 있네.”

“무엇입니까.”

“절대로 이 이야기를 남에게 해서는 안된다네. 그 누구에게도,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자네의 목숨은 분명 온전히 유지하지 못할 걸세.”

“알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필립의 대답. 그 자신감과 호기에 불만을 느꼈던 것일까. 하이만 익시드 나이츠 기사단장은 여전히 주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극비정보라네. 제국 기밀로 상위에 속하는 것이지. 부디 내 걱정을 흘려들어 비극을 스스로 부르진 말게나. 나인발트 나이츠의 경우 해당사항이 없네만……익시드 나이츠의 경우 이번 임무를 부여받기 직전에 갑자기 약 300명가량의 기사들이 탈퇴를 선언했다네.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중앙……아직 세력 기반이 건제한 귀족들, 혹은 그들의 자제들 인겁니까?”

갈라지는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필립이 물었다. 하이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불꽃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 하이만의 얼굴은 침통함을 넘어서 일종의 체념 비슷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필립의 눈에 들어온 하이만경의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나이를 먹은 듯한 모습. 불빛 때문인지 몰라도 유달리 그의 얼굴에 선을 형성하고 있는 주름살이 깊어 보였다.

“단순히 익시드 나이츠만이 아니라네. 전쟁을 치르게 될 다른 여러 기사단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고 있어.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권세 있는 자나, 그런 귀족과 연줄이 닿아있는 놈들뿐이지. 지금 익시드 나이츠에 남아있는 기사들은 전부 평민 출신이네. 귀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나와 같은 몰락 귀족이거나 힘없는 약소 귀족들뿐일세. 자네와 사이가 안 좋은 헤이딕 경의 경우 예외지만……. 그를 너무 미워하진 말게나. 헤이딕경 역시 희생자라네. 서머릿 백작가에서는 그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느낀 거야.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차남인 그가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지니 미리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지.”

“그런겁니까…….”

“내일 헤이딕경도 남겨두고 떠날 걸세. 분명 문제가 있는 자 이지만 나름대로 실력은 출중하다네. 분명 도움이 될 걸세. 시간이 많이 늦었군. 그만 가보시게나 필립경. 기사들의 목숨을 부탁하네.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볼테니…….”

“…………기사단장님의 희생.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제 아버지를 걸고, 제 가문을 걸어서라도.”




                    *                   *                   *



네르바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 가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필립 같은 녀석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은 그녀 인생 23년 중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라 여길 정도로 그녀는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기사단장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필립에게 비웃음까지 당했으니, 자존심 높은 그녀가 이렇게 방방 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망할 자식이!”

막사에서 필립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네르바는 실로 평소의 3배 이상의 속도를 내며 그에게 돌진했다. 필립은 그녀의 접근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 나인발트 나이츠의 야영장 방면으로 걷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 넌 오늘 나한테 죽어보자!”

재빨리  필립의 앞을 가로막고는 거칠게 멱살을 잡는 네르바. 분노가 충만했는지 평균 남성의 몸무게를 유지하는 필립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필립은 아무런 말없이 살짝 들어올려진 상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또 무시 하는 거냐……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얼굴에 힘줄이 있는 대로 돋은 그녀가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따귀를 때리려는 순간, 필립의 손이 그녀의 손을 막아낸다.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그녀는 순간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시드 나이츠 소속 기사 네르바 드 비슈로프. 좋은 말로 할 때 놓아라.”

“뭐, 뭐 이, 이자식이!”

“놓으라고 했다. 너와 장난 따위 칠 기분이 아니다.”

짐짓 살벌한 그의 목소리에 당황하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자신도 언성을 높여가면서 필립에게 맞서는 네르바. 계속 붙들고 있기는 체력의 한계가 있었는지 슬그머니 멱살 잡은 손을 풀어준다.

“너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거냐. 남을 비웃지를 않나! 너 내가 익시드 나이츠의 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직도 파악 못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고 있겠지? 자, 너그럽게 용서해 줄 테니 어서 잘못했다고 빌면 내가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따귀 한대로 넘어가주마.”

“…….”

“어쭈.”

“꽃이라고? 네가?”

“그, 그래! 뭐, 불만이라도 있냐. 하기야 너 같은 겁쟁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겠지.”

갑작스런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하는 네르바를 필립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여전히 땅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가슴 속에 담아있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였을까, 네르바를 향해 얼굴을 치켜들고 냅다 고함을 버럭 질러 버리고 말았다.

“꽃! 너같이 이기적에다 사람 괴롭히는 것밖에 즐길 줄 모르는 게 꽃이라고! 웃기지 마라. 지금까지 네 아버지를 봐서 참아왔지만 더 이상은 안되겠다. 더 이상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목숨을 걸고 결투할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다 네르바 드 비슈로프! 네가 익시드 나이츠의 꽃이던 나발이던 내 알바 아니다! 하지만! 네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땅이 너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땅의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금세 꺾여서 죽어 버리는 거야! 알고 있나!!”

미처 그녀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네르바를 거칠게 떠밀고는 사라져가는 필립의 뒷모습. 네르바는 충격이 컸는지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한 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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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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