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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창공

2006.02.04 14:06

느와르 조회 수:217

-창공


  장대 끝에 달아둔 종은 조금도 울리지 않고, 언덕 가득히 박아놓은 바람개비는 단 하나도 돌지 않는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마치 그림으로 그려 액자 안에 가둔 것 같은 평원의 모습. 남자는 장대 옆에 선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어다주는 바람이 전혀 없기 때문에, 평원위의 하늘에는 구름이 없다. 아주 가끔 부는 바람은 발목을 스칠 뿐, 흙먼지조차 일으키지 못한다.
  그런 곳에서, 남자는 피곤한 눈동자로 하염없이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하늘만 보고 있네. 비행사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남자는 그곳에 요 일주일간 눈에 익은 양치기 처녀의 얼굴이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매고 양들을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양은 두고 와. 바람개비 뜯어먹으면 다시 만들기 귀찮으니까.”
  “어차피 돌지도 않는 거, 좀 뜯어먹으면 어떻담.”

  남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언덕을 걸어 올라온 여인은 그의 곁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바람의 결이라는 거 보여?”
  “전혀.”
  “역시 그렇겠지. 여기 바람이 불 리가 없으니까.”

  무뚝뚝한 남자의 대답에 한숨처럼 수긍한 여인은 낡은 작업복 바지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평원은 완전히 멈춘 채 어떤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는다. 메마른 사막처럼, 광막한 황야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없다. 바람조차 멈춘 평원에 단지 둘만 남아있는 남 과 여.
  여인은 바람개비를 뜯어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양들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윈드브레이커. 바람이 멎은 평원.”
  “멎은 게 아냐. 막혀있는 것뿐이다.”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동쪽을 가리켰다.

  “검은 산맥의 에텔스트림 때문에 이 평원 위는 바람이 지나가지 못해. 하지만 그렇다고 길을 돌아갈 융통성 같은 건 바람에게는 없지. 결국에는 갈 길을 막힌 채 에텔스트림에 갇혀서 몇 십 년을 보내는 동안 난폭해진 바람은 폭풍이 돼서…….”
  “그 얘기는 질리도록 들었어. 하지만 폭풍이란 게 정말 온 적은 한 번 도 없었잖아.”
  “바람은 반드시 온다. 조금 늦는 것뿐이야.”
  “그래그래, 또 몇 백 년쯤 늦겠지. 당신은 평생 여기서 하늘만 바라보다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겠고.”  

  지루하다는 듯이 길게 하품하며 중얼거린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바람개비를 뜯어먹는 양들을 말리기 위해 언덕을 내려가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린다.

  “올 리 없는 바람은 그만 쳐다 봐. 아무리 애써도 여기선 날수 없다고.”

  양들을 데리고 평원 쪽으로 사라지는 여인.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장대 끝에 매달린 종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울리지 않는 종을.


  언덕 아래 지어진 판자투성이 가건물. 있으나 마나한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엉성한 지붕사이로 비어져 들어온 햇살이 비추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벼워 보이는 뼈대와 질겨 보이는 천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글라이더. 아무런 동력도 없이 단지 바람만을 이용해 날수 있게 만들어진 그것이 그들 같은 비행사들의 유일한 날개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바람이 없지.”

  쓴웃음을 지은 채 중얼거린 날개 꺾인 비행사는 한숨을 내쉬며 글라이더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날아 본적 없는 글라이더는, 주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끼익하고 뒤틀린 소리를 낸다.

  “그 하늘걷기도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네. 정말.”

  갑자기 문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한손에 바구니를 든 채 문틀에 기대듯이 서 있는 여인의 모습에는 눈길도 주저 않은 채, 손에 힘을 주어 늘어진 날개 끝을 들어 올려 고정하는 남자. 여인은 별말 없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펴기 시작했고, 남자는 몸을 실을 부분을 점검하며 입을 열었다.      

  “하늘걷기는 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얼마나 많이 나냐는 중요하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바구니 안의 음식들을 꺼내놓는 여인. 효모만 들어간 커다란 빵이나, 양젖으로 만든 치즈 같은 게 자리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남자는 그제야 여인이 여기서 식사를 할 참이란 걸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먹을 건가? 양들은 어쩌고?”
  “여기선 사람이 길을 잃지, 양은 괜찮아. 어서 내려오기나 해.”

  재촉하는 여인의 목소리에, 남자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글라이더에서 몸을 내렸다. 커다란 빵을 쭉쭉 찢어 남자에게 건네고, 양젖을 따른 커다란 컵을 밀어주는 여인. 남자는 그것을 손에 받아든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고맙군.”
  “고마울 것 없어. 사람을 대접하는 건 양치기에겐 취미야.”

  치즈를 빵에 구겨 넣듯이 바르고 한 움큼을 크게 베어 무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는 별말 없이 빵을 베어 물었다.

  “언제 떠날 거야?”

  빵을 씹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둘의 시선은 모두 다른 곳을 향한 채 마주치지는 않았다. 질문을 건넨 여자가 한 번 더 빵을 베어 물때 쯤. 남자는 양젖으로 목을 축이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말했을 텐데. 난 여기서 비행할거라고.”
  “당신, 여기에 일주일이나 있으면서도 포기를 못한 거야? 여긴 바람이 불지 않아. 마법사가 아니면 날수 없다고.”
  “비행사는 바람이 부는 곳에서 비행하는 게 아냐. 비행사가 날기로 마음먹은 곳에 바람이 부는 거지.”

  늘 피곤해 보이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 남자는, 들고 있던 빵을 한 번에 몽땅 씹어 삼키고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비행사는 바람이 선택하는 거니까.”
  “그,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바람이 불 때 까지 언제까지고?”
  “그래.”

  양젖으로 목을 축이며 선선히 대답하는 그 눈동자는 다시 평소의 피곤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있었다. 그 옆얼굴을 바라보던 여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래준다면 나도…….”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냐! 아, 그렇지 빵 더 줄게. 자아!”
  “아니, 이제 괜찮은데. 비행사는 몸이 가벼운 편이…….”
  “바람이 올 때 얘기잖아! 됐으니까 어서 먹어!”

  왠지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거리며 손에 집힌 커다란 빵을 대뜸 내미는 여인. 엉겁결에 족히 자신의 얼굴만 해 보이는 투박한 밀가루 덩어리를 받아든 남자는 언제나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겨우 입을 열었다.

  “……늘 이렇게 대접받다간 배가 불러서 날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그날 밤도 남자는 장대 옆에 서있었다. 바람이 없기에는 밤이나 낮이나 매 한가지라, 구름 없는 밤하늘은 별빛만이 밝았다. 여전히 바람개비는 돌지 않고, 종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자는 별 불만 없이 하늘을 보고 서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일부러 들으라는 듯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온 여인은 양모로 만든 모포를 휘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질리지도 않고 하늘만 보는구나.”
  “날 때는 보기 싫어도 땅을 봐야하니까.”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대답. 하지만 여인은 여느 때처럼 비아냥거리거나 비웃지 않고 조용히 그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바라보는 하늘을 같이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여는 여인.

  “있지. 비행사씨. 왜 여기서 날고 싶어 하는 거야? 다른 곳도 좋은 곳이 많잖아.”
  “간단해. 여기서 비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럼, 여기서 맨 처음 날아서 이름이라도 떨치려는 거야?”

  여인의 말에 남자는 고개만 조금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난 그저 이곳의 바람은 어떤 바람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당신 머릿속에는 온통 바람 생각뿐이구나.”

  쓸쓸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여인. 그 목소리를 의아하게 여겨 고개를 내린 남자의 시선이 문득 언덕아래의 한 점에 못 박혔다. 표정을 굳힌 채 미간의 주름을 잡고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는 남자. 하지만 그런 남자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 한 여자는 그대로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있지. 바람을 기다리는 거에 대해선 이제 아무 말 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가끔은 눈에 닿는 곳에 있는 것에게도 신경써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드디어.”
  “응?”

  마치 신음처럼 튀어나온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여자는, 처음 보는 남자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잊어버렸던 장난감을 장롱 속에서 찾아낸 어린아이나,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아니, 차라리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표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태양의 빛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느라 늘 게슴츠레하던 눈매를 날카롭게 뜨고, 얼굴에 존재하는 근육은 웃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 같이 만면으로 웃는다. 여자는 그 표정에서 놀람을 넘어선 불안함을 느꼈다.
  남자가 뻗은 손을 따라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린 그녀는 언덕아래에 박힌 바람개비를 바라보았다. 양들이 뜯어먹어 귀퉁이가 뜯어져버린 붉은 바람개비. 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에서는 평야에 박힌 집착이나 다름없는 오브제일 뿐 이었던 그것은.
  
  “드디어 왔다.”

  아주 천천히, 날개를 비틀거리며 돌고 있었다.


  땡그랑 거리는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진다. 거의 꺾일 듯이 휘어진 장대 끝에 달린 종이 마치 학질환자처럼 발광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가르며 발악하듯 울려대는 찢어지는 종소리.
  언덕위에 존재하는 것은 눈이 돌아 버릴 것 같은 바람개비들의 윤무. 작은 것도, 큰 것도, 양이 뜯어먹어버린 것도, 비로소 자신의 본분을 깨달은 것처럼 쉬지 않고 회전한다. 깊숙이 박혀있지 않던 것은 그대로 뽑혀 공중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 이유는 하나 뿐. 몇 백년간 바람이 불지 않았던 평원에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바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계절의 낙엽이 산맥을 만들 정도의 시간동안 자신을 가두고 있던 에텔스트림을 찢고 나온 그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받았던 대기의 분노였다.

  “말도 안 돼……난, 이런 거 본적도 없어.”

  여인이 두려움에 떠는 양들을 새벽녘에 억지로 동굴에 밀어 넣자마자 찾아온 바람은 평원에 존재하는 풀을 하나도 남김없이 뽑아 버릴 것 같은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흡사 해일과도 같은. 양치기가 아니라 선원들에게 더 익숙할 만한 광경이 평방 1미터의 우물을 제외하고는 물이라고는 없는 평원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를 부딪치며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그 휘날리는 바람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단지 흙먼지인 줄 알았던 그것은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광막한 평원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그녀를 제외하면 단 한명 뿐.

  “이봐!”

  코앞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여인. 바람을 헤치고 다가온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으며 재차 외쳤다.

  “이봐! 내말 잘 들어!”
  “바, 바람이, 진짜로, 진짜로…….”
  “그래, 이 녀석은 진짜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난폭한 녀석 일거다! 그러니 동굴에서 나오지 마! 바람이 멎을 때까지 가만히 있어!”
  “다, 당신은? 당신은 어쩌려고!”

  공포에 질려 외치는 여인.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난밤처럼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헤어밴드나 다름없던 고글을 내려 쓴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하늘로 간다! 이 바람을 타고!”
  “마, 말도 안 돼! 이런 바람에서 어떻게 난다는 거야!”

  자신을 놓아주는 남자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내젓는 여인. 하지만 남자는 만면에 머금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에게 대꾸했다.

  “날 수 있지. 아니, 날아야만 한다! 나는 이 녀석을 지금까지 계속 기다려 왔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나는! 나는!”

  공포를 넘어서는 불안감에 남자의 손을 더욱더 힘껏 움켜쥐는 여인. 당장이라도 바람 속으로 뛰어나갈 채비만 하고 있던 그는, 그 목소리에 담긴 절실함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맺힌 여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고, 손을 떼어냈다.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녀의 눈은 눈물에, 그의 눈은 고글에 막혀있었다. 한동안 여인의 눈을 바라보던 그는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짧은 한마디.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등졌다. 여자의 눈에는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천천히만 보였다. 그 옆얼굴이, 그 어깨가, 그 등이 보여주는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는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남겨둔 채.


  가뜩이나 조악한 판잣집은 이미 박살나버린 지 오래, 땅에 묶어 놓은 남자의 글라이더는 휘말려나가는 바람의 손톱에 찢기지 않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바람의 기세는 이제 최고조. 밧줄 따위로는 글라이더를 더 이상 잡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남자 또한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 바람을 기다리며 일주일간을 기다려왔던 그다. 자신에게 기대려했던 여자조차 뿌리치며 왔다. 남자는 고글을 힘껏 내려누르고, 글라이더에 뛰어올랐다. 언제나처럼 끼익하는 소리를 내는 글라이더. 하지만 그 소리가 지금까지처럼 지루함이 아닌 기다림의 소리라는 것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그래! 너와 내가 갈 곳은 하늘뿐이다! 바람을……타자!”

  글라이더를 묶고 있던 마지막 밧줄을 끊어 버리며 외치는 남자. 대지와의 마지막 줄이 끊어진 글라이더는 휘날리는 바람개비들 사이로 돌풍처럼 날아올랐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 같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동굴입구에 서있던 여인은,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치솟는 남자의 글라이더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상승기류에 휘말려 낙엽처럼 엉망진창으로 치솟은 글라이더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글라이더가 날개를 폈다.

  거칠게 쳐올린 바람의 힘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바람이 매의 발톱처럼 글라이더를 붙잡는다. 남자는 그것에 맞춰 글라이더의 날개를 펴고, 몸을 뒤틀어 역풍을 배로 받았다.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충격이 글라이더 전체를 덮친다. 바람사이에 끼여 위로 튕겨 오르는 글라이더. 남자는 이를 악물고 날개와 통하는 밧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무리한 움직임에 글라이더 전체가 뒤틀린다. 팽이처럼 회전하며 폭풍의 노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글라이더. 전후좌우에서 마구 밀려드는 바람의 칼날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글라이더의 상태 또한 말이 아니었다. 한껏 당겨진 날개의 가죽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낸다, 남자로서는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한계.
  호호호호호호.
  순간, 섬뜩한 웃음소리가 남자의 귀에 들려왔다. 분명 질감을 가지고 등골을 쑤시는 그 웃음소리는 환청 따위가 아니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던 남자는,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듯 고개를 들어 글라이더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거친 바람은 하늘걷기를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늘걷기를 보며 마녀처럼 웃는 거다. 절대로 하늘걷기를 그 웃음소리에 지게하지 마라.”

  언젠가 그의 스승이 가르쳐 준대로, 바람에 시달려 찢긴 글라이더의 날개를 통과하는 바람이 마치 여자가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거친 바람이 마녀처럼 웃는 소리. 남자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토해내듯이 외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웃음보다, 양치기의 비웃음소리를 더 좋아해서 말이지!”

  사납게 웃은 남자는 양쪽 날개의 조종타를 잡아당겨 마치 신천옹의 비행처럼 글라이더를 위로 들어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곳에서도 바람의 결, 즉 기류를 찾는 것이 비행사들의 눈이다. 이런 폭풍에서 비행을 유지하기 위한 결을 찾는 것쯤, 남자에게는 비둘기 무리에서 까마귀를 찾는 것보다 쉽다. 조종간을 있는 힘껏 비틀고 체중을 실어 글라이더를 선회시킨다. 아슬아슬하게 왼쪽날개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발톱. 남자는 팽팽하게 당겼던 날개를 풀고, 쳐올리는 바람의 곁을 깎아내듯이 올라탔다. 미끄러지듯이, 하지만 방향은 아래가 아닌 위로. 가볍게 상승하는 글라이더에게 마녀의 입김이 정면에서 닥쳐왔다.

  “큿!”

  밀어 올리는 바람과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바람 때문에 균형을 잃고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글라이더. 날개가 한계까지 뒤로 꺾여 남자의 힘으로도 제어하기는 무리다. 뜯겨져나갈 것 같은 날개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글라이더를 겨우겨우 억누르던 남자는 결국 혀를 차고는 될 대로 되라 같은 심정으로 조종간을 놓아버렸다.
  고삐가 풀린 채로 폭풍에 던져진 글라이더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잡아 늘이려는 바람과 찌부러트리려는 바람이 동시에 닥쳐온다. 미칠 듯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마녀의 웃음소리. 하지만 남자는 글라이더의 비명에도, 마녀의 웃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화경같이 돌아가는 시계 속에서 찾는 것은 단 하나의 결. 폭풍을 가로지를 수 있는 단하나의 결.
  그것을 찾기 위해 남자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평원의 하늘을 눈에 익혔다.

  “걱정하지 마! 절대로 잡아먹히지 않으니까!”

  울부짖는 글라이더에게 들려주듯, 폐부를 찢어내는 외침을 토해내며 조종간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는 남자. 글라이더는 닥쳐오는 맹금의 발톱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제비처럼 폭풍의 발톱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것이 남자가 찾아낸 바람. 폭풍을 가로지를 수 있는 길. 폭풍의 발톱을 떨쳐낸 글라이더는 기형적으로 꺾였던 날개를 다시 곧게 폈고, 남자는 겨우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너덜거리는 날개를 최대한 바람에서 지키며, 사나운 폭풍 속을 가로지르는 글라이더. 가끔 발톱들이 스쳐가긴 하여도 크나큰 위험은 없다. 이대로라면 폭풍의 노심을 가로지르는 것은 순조로울 터, 더 이상 마녀의 웃음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것조차 왠지 불안했다. 하지만 기류가 안전한 이상 더 큰 문제는 없으리라. 눈앞에 보이는  폭풍의 노심을 넘어서면 하늘이다. 남자는 글라이더의 날개를 크게 날갯짓 시키며 단박에 치솟아 올랐다.

  호, 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

  순간,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찢어질 것 같은 마녀의 웃음. 남자는 경악에 숨을 삼켰고, 글라이더는 심상치 않은 바람을 느껴 울었다. 서둘러 조종간을 뒤트는 남자.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태풍의 중심에서 남자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마녀는 교만하게 웃으며 글라이더를 발톱으로 힘껏 후려쳤다.
    
  눈을 뜨고 있기조차 거센 바람이 동굴의 입구를 때린다. 양들을 껴안은 채 눈앞도 분간하기 힘든 바람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쿠웅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채 땅바닥에 처박힌 커다란 나무 조각. 비행사라면 아무리 풋내기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행사가 아닌 양치기인 그녀도 그것이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여인은 한때 남자가 모는 하늘걷기의 꼬리날개였던 나무 파편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추락. 꼬리날개가 박살난 글라이더는 미친 듯이 회전하며 속절없이 추락해간다. 통제를 잃고 떨리는 조종간을 잡은 손은 손바닥의 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 비행기의 부서진 파편이 박힌 허리에서 피가 배어나와 몸을 붉게 물들인다. 깨진 고글사이로 거센 바람이 들어와 눈을 똑바로 뜨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 손은 아직 조종간을 놓지 않고, 그 몸은 아직 글라이더에 묶여있으며, 그 눈은 아직 바람의 결을 찾고 있다. 몸이 하늘에 있는 이상 비행사는 절대로 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 날수 있겠냐.”
  끼이익.
  “그래.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야.”
  끼이이.
  “그래도 떨어질 수는 없지. 안 그러냐!”
  
  남자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있는 힘껏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마녀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귀에 이명을 남기고, 꼬리날개와 함께 방향타가 뜯겨져 나간 글라이더는 바람이 휘두르는 대로 비행할 수 밖 에 없다. 하지만, 남자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날카로운 바람은 그 날개를 찢어발기고, 마녀의 웃음은 점점 새되어져 마치 비명같이 들린다. 글라이더를 지탱하는 손에는 이미 감각이 없고, 상처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고글에 묻은 물방울과 거친 바람 때문에 시야도 제로. 이미 그 몸에는 난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다. 하지만 그 몸은 분명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와중에도 남자가 느끼는 것은 단 하나. 몸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었다. 바람과 싸우면서도 바람을 미워하지 않는 비행사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 어느새 마녀의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시야는 하얗게 물든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 남자. 그 웃음이 결국 마녀의 폭풍 치는 심장을 녹여버린 것일까. 엉망진창으로 휘둘린 글라이더는 결국 마녀의 손을 통과했다.  

  폭풍의 노심을 통과해 치솟은 남자의 앞에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시끄럽게 울리던 종소리가 멎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양들을 껴안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은 갑자기 찾아든 평온에 조용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불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평원은 고요하다. 그나마 남은 폭풍의 잔재가 드러누운 풀들을 쓸고 지나가며 구슬픈 소리를 낼 뿐. 앞으로 또 몇 백 년 동안, 이 평원에 바람이 찾아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여인에게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그녀는 천천히 바람개비가 꽂혀있던 언덕으로 향했다.
  남자의 판잣집은 완전히 부서져 그 뿌리만이 남아있고, 종이 달려있는 장대는 반으로 꺾여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바람개비는 모두 부러지거나 뽑혀 나가 제대로 도는 것은커녕,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조차 없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언덕 위에 서있던 여인의 눈앞으로 부러진 바람개비가 떨어져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든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걷혀 드러난 짙푸른 하늘. 그곳에는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글라이더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천천히 추락하는 그 궤적을 눈으로 쫒던 여인은 곧 추락하는 글라이더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뛰는 통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면서도 글라이더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만신창이 글라이더는 결국 땅에 미끄러지듯이 내려앉았고,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여인은 숨을 고르며 바닥에 처박힌 글라이더에게 다가갔다. 글라이더를 확인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지는 것도 잠시, 곧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표정만은 언제나 남자에게 보여주던 구제불능이라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 바보 멍청이. 결국엔 하늘로 가버린 거구나. 기다리는 사람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글라이더는 완전히 박살난 채, 남자가 타고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낡은 바람개비만이 마지막 남은 바람을 휘감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푸르고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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