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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큭……."

"……으흐흑!"

에르드 남작이 적진 가운데로 뛰어든 것과 동시였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클레이 백작과 듀자크 자작은 마음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최대한 참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두 귀족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따금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더욱 절망적인 분위기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들 주위에 포진한 병사들과 민간인 모두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듯 힘없는 눈빛이다. 묵묵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발사로크의 군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듀자크 자작, 에르드 남작이 가지고 있던 궁수들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감정을 추스른 백작이 방금 전까지 에르드 남작이 지휘하던 궁병들의 지휘권을 듀자크 자작에게 넘겨준다. 자작은 대답대신 힘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조용히 대열을 정돈하는 자작.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침묵으로 얼마 없는 병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발사로크 진형에 시선을 떼지 않던 자작. 천천한 걸음걸이로 백작에게 다가가 보고를 한다.

"백작님, 발사로크 군의 움직임이 에르드 남작이 뛰어든 이후부터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대열이 흩어지기 시작하고…헉! 백작님! 정, 정면의 언덕을, 아니 발사로크 군의 후방을 자세히 보십시오!"

"언덕? 이런…설마 적의 지원군이 온 건가? 이럴수가……."

"아니, 아니요. 지원군이라면 적들이 저렇게 갈피를 못 잡고 흐트러지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아군인가?"

말을 마친 자작은 언덕 위에 나타난 기병들에게 시선을 최대한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들어온 청색 바탕에 바이슨이 포효하는 모습이 그려진 깃발. 이들은 바르디아 제국 소속의 국경 주둔 기사단 중 하나인 '나인발트 나이츠'이었던 것이다.

"나인발트 기사단!"

클레이 백작도 정체를 알았는지 기사단의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지른다. 그의 고함소리는 바르디아 군 전역에 퍼졌고, 한순간 절망적이던 분위기는 열렬한 함성 속에 파묻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후방에 있던 민간인들도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귀족인 백작과 자작까지 기품이고 뭐고 전부다 집어던진 채 서로를 껴안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알맞은 때에 왔군! 이제 살았어!"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궁수들에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를 단단히 시켜놓도록 하게 자작."

예기치 못한 지원군에 자작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주위를 주는 백작.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말을 하는 백작의 얼굴 표정에도 희색이 만연했다.

"네르바와 필립이 잘해주었군. 정말 자랑스럽구나 내 딸아! 그리고 필립도!"

이런 이들의 희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인발트 나이츠의 기사단장은 최대한 냉정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지원군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수는 30여명 남짓이다. 아무리 훈련받은 정예의 기사들이라 해도 몇 배에 가까운 발사로크 군을 상대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적들 내부에 문제가 생겼거나 우리를 보고 동요하는 것이 분명하다. 전군 5열 횡대로 포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적진 한가운데를 뚫어 전의를 상실하게 한다. 필립, 네르바! 견습기사인 너희들에게 이런 실전은 처음일 테니 무리하지 말고 내 뒤를 따라오면서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해라!"

결심이 섰는지 기사단장은 기사단에게 돌격 명령을 내린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창을 사용하는 기사들이 선두로 이동하였다. 그들을 기준으로 신속히 대열을 이루는 기사들. 모두가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눈빛만큼은 다가온 전투에 대비해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필립과 네르바 역시 준비를 끝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바로 자기자신들과 같은 성의 주민들과 귀족들. 저들 사이에 분명 네르바의 가족이나 필립의 아버지가 있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욱 비장한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지고 있었다.

"전군! 전진하라!"

다시 한 번 말발굽 소리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대열을 정확히 맞춘 상태에서도 느리지 않은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그들의 진격.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속이 꽉 찬 직사각형 모양의 대열로 돌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발사로크 군은 더욱 거대한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런 망할! 간신히 전공을 세웠는데 뒤로 내빼야 하다니! 이봐, 지휘관은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죽었어 살았어?"

"왼쪽 가슴에 단검을 맞았지만 심장은 비켜 지나간 것 같다고 하던데. 목숨은 건졌지만 중상인가봐."

"으이구 등신 같은 놈. 그러니까 적을 지 앞까지 끌어들여서 그 모양이 된거 아냐!"

"이봐 라펜드, 말이 좀 심하지 않아? 명색이 그래도 지휘관인데……."

린스트 남작을 쓰러트린 라펜드라는 병사 역시 혼란의 상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다급하게 동료 병사와 주변을 살피며 대화를 하는 라펜드.
적의 지원으로 기사단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오자마자 라펜드의 머릿속은 서둘러 퇴각해야 한다. 라는 생각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이전에 세운 그의 공이 아까워서였다. 귀족 사살의 경우 승진은 당연한 것.
그것도 일개 기사가 아닌 남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자 이었기에 망설임이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공성전때 클레이 백작인가 뭔가 하는 놈의 배에 구멍을 뚫어놓고도 퇴각하는 바람에 보상하나 받지 못했는데 지금도 똑같잖아!"

분노에 가득 찬 소리를 한번 지른다. 그 후, 그는 망설임 없이 도망가는 병사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인발트 기사단은 진형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발사로크 군 살육전이 시작된 것이다.

"진형 변경! 적을 모두 쓸어버려라!"

"우오오오오!"

라펜드가 갈등을 하고 있을 당시, 나인발트 기사단은 이미 코앞에서 전형적인 돌격 위주의 진형으로 대열을 재편하고 있었다.
선두 중에서도 가운데에 선 기사를 제외하고 양 측면의 가사들이 속력을 조금씩 늦추면서 자연히 날카로운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진형이 생겨났다. 그리고 창을 몸과 직각으로 세우고는 전력질주.
속력이 붙은 기마와 날카로운 창끝을 피해 적의 병사들이 흐트러지면 뒤에 있는 검이나 철퇴를 쓰는 기사들이 마무리하는 형태였다.

"으아압!"

"커헉! 쿨럭, 쿨럭……."

순식간에 기합과 비명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기사들의 피묻은 검은, 빛을 받아 더욱더 붉게 빛났다. 칼날 전체가 흡사 광물 속에서 빛을 발하는 루비로 이루어진 듯 한껏 진홍의 광채를 뽐내고 있었다.
필립과 네르바 역시 온 힘을 다해 그들의 검을 휘두른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검과 얼굴, 갑옷은 검붉은 빛으로 서서히 칠해져 갔다. 150여명에 달하는 발사로크 군이었지만 지휘관의 부재 앞에서 그들은 한낮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이다.

"컥! 이런 제기랄!"

라펜드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방금 전에 그가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기사의 창.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기회도 주지 않는다. 후방의 기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금발의 머리를 휘날리는 여기사의 검 끝은 표적을 이미 정하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맹수의 발톱처럼 라펜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압! 내 검을 받아보거라."

"계집애면 얌전히 집구석에나 쳐 박혀 있을 것이지 왜 이곳에서 발광이냐!"

"쥐새끼 같이 도망 다니는 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뭐, 뭐라고! 그 주둥아리를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해주지. 으아압!"

금발의 여 견습기사, 네르바의 쥐새끼라는 말에 발끈한 라펜드는 양 주먹에 힘을 집중시키며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네르바 역시 라펜드의 조롱에 열이 올랐는지 정면으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에서 내리치는 네르바의 검과 라펜드의 건틀렛이 격돌하려는 찰나, 갑자기 검을 들어올려 그의 주먹과의 접촉을 피하는 네르바.
그녀가 탄 달리고 있는 말의 속도 때문에 당황한 라펜드는 몸을 비틀어 그녀의 말을 피했고, 이 둘이 교차해서 지나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네르바의 검이 라펜드의 등을 대각선 방향으로 긋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악!"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빛의 액체가 비릿한 내음과 함께 주변으로 흩뿌려진다. 라펜드는 땅에 쓰러져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처가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아직까지 느껴지는 살을 벤 감촉을 느끼며 말을 모는 와중에 뒤를 돌아 그의 모습을 보는 네르바의 아름다운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자존심 강한 그녀의 성격상 일격에 끝장내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있음이랴.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놈의 숨통을 끊을 만한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적은 수의 병사로 다수의 적을 유린시킨다는 것 자체도 항상 육체적 훈련과 날카롭게 다듬어진 정신 교육을 받은 기사들이 아니고서는 성공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
이겼다는 조그만 승리감만을 간진학 채 아쉬운 듯이 고개를 돌려 다른 적을 소탕하는 금발의 소녀. 네르바였다.

"발사로크 놈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전부 가만 놔두지 않겠다!"

필립 역시 네르바 못지 않게 전장에서 온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주위의 친구들에게 놀림이나 받던 나약한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자였다면, 한 명의 견습기사로써 두려움 없이 적의 몸을 후려치고 토막내는 그의 모습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화려한 장식의 블레이드가 공중에서 선회할 때마다 검붉은 빛의 비릿한 적포도주가 사방으로 튄다. 한 명 한 명을 죽이는데 온 힘을 다하는 필립.
반드시 죽여야 했다. 부상자는 시간이 흘러 상처가 회복되면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였기에 한순간의 검 놀림에도 일격의 힘을 실어 휘두르는 그였던 것이다.

"필로스 후작의 아들 필립 폰 에르네오가 여기에 왔다!"

"제, 제발 살려주…우욱∼!"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구나. 잘 가라."

살려달라고 무기까지 던진 병사의 목을 베며 차갑게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서 살벌한 위엄까지 느껴진다. 이젠 피 냄새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눈에 적이 들어오면 기계적으로 달려가 검을 휘두를 뿐…자신의 나라, 아버지의 성, 그곳의 주민들에게 위해가 되는 자는 가차없이 없애버리겠다고 맹세한 그의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나약했던 기억은 이 순간에는 잊어버린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해 왔던 한 소년. 이제 그 권위를 세우고 귀족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잔인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기사단! 대열을 정돈한다! 적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지금부터는 작센 성의 피난민과 귀족 분들의 호위로 임무를 변경한다!"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정돈했다. 발사로크 군의 병사들은 궤멸되다시피 하여 뿔뿔이 변으로 흩어져 도망을 치고 있는 모습이 간간이 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성을 떠난 작센 성의 주민들에게 가해진 발사로크 군의 기습은 두 명의 남작과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지켜지게 되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규모 국지전에 불과한 발사로크 군의 기습공격.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작센 성의 피난민들은 당초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발목이 잡힌 채 멈춰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귀부인과 여성, 아이들을 배려하여 시체를 정리하는데 시간을 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속속 드러나자 관련된 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데 또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족들의 희망에 따라 조촐한 무덤과 장례식까지 거행하느라고, 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는 오후 4시정도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오전, 그것도 아침 무렵 시작된 전투였기에 근 몇 시간 가량을 같은 장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셈이었다.

"으흐흑…흑흑……."

여기저기서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유족들의 흐느낌 소리가 사정없이 백작의 마음을 후려쳤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자작과 기사단장의 충고에 따라 그는 강제로 이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려놓았던 을 들고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이동을 시작하려는 주민들. 에르드 남작의 부인은 지나친 오열과 정신적 충격에 기절을 하는 바람에 나인발트 기사단 중 한 명이 그녀를 말에 태우고 이동하는 작은 사건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명령은 한 청년 때문에 중도에 저지되어 또 다른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그는 그들과 같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전 작센 성으로 가야합니다. 아버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필립……."

백작은 그제 서야 가장 중요한 일 한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은 필로스 후작의 아들 필립 폰 에르네오의 설득.
필립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나인발트 기사단에 보낸 진정한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사실을 말해 줬다간 필립이 나인발트 기사단을 따라가기는커녕 고집을 부려 성에 남겠다고 버틸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에 후작이 먼저 선수를 쳐, 거짓말로 아들을 전쟁의 위협에서 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것이다.

"아버지께서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해 1차적으로 피난민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 즉시 성으로 달려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는데 전부다 퇴각을 하다니요? 백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

"시간이 없습니다. 단장님, 어서 서둘러 성으로 떠나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에 남은 제 아버지와 병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필립의 말이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내막을 알고있는 주변 귀족들은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귀족들의 모습에 필립 또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당연히 이행하기로 약속된 일들을 미적미적 처리하려는 듯한 그들의 모습을 그 역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
한참동안 말이 없던 나인발트 기사단장이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립. 잠자코 백작님의 말씀을 따르거라. 작센 성은 이미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 그리고 이건 내 독단이 아니라 네 아버지인 후작님도 동의하신 일이란다."

"분명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필립."

기사단장과 클레이 백작이 조용히 타이르는 목소리로 그를 달랜다. 백작의 압에서 나온 성이 이미 함락되었을 것이란 말. 이 말에 필립은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선 채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필립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럼, 여, 여러분들은 성에 아버지…그러니까 후작님과 소수의 병사들을 남겨두고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겁니까?"

"…네 아버지의 뜻이었단다."

"말도 안돼…아무리 아버지의 뜻이라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들어 여기 까지 도망쳐 온 겁니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요! 아버지를 모시고 왔어야 지요!!!"

"나는 후작님의 명으로 피난민들의 안전을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네 기분은 이해한다. 하지만! 감정적인 생각으로 이성을 흐리지는 말도록 하거라 필립."

백작의 냉정한 말에 필립은 흥분을 삭이지 못한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명을 담보로 이곳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의 의도조차 간파하지 못하고 성을 떠나 기사단을 이끌고 온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나인발트 기사단장은 이런 필립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필립의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위로하는 것 뿐. 그리고 그는 필립에게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건……,"

"읽어봐라. 네 아버지가 너를 통해 나에게 보낸 서찰. 안에는 네게 전해주라고 한 편지도 들어있단다."

천천히 기사단장에게 받은 편지를 펼치는 필립. 구겨져 주름이 생긴 종이 위에 그의 눈에 익은 익숙한 글씨체가 들어왔다. 서둘러 내용을 읽어나가는 필립.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를 잡은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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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나인발트 기사단의 단장 사리크 이디레온에게

자네의 얼굴을 못 본지 5년이 넘은 것 같군. 이렇게 편지로밖에 안부를 물을 수 없는 나의 게으름을 용서하게나.
틀에 박힌 말들은 빼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 갈 테니 이해해주게. 지금 내가 다스리는 작센 성은 함락직전의 위기 상황이라네.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인 상태지. 그래서 나는 나와 극소수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의 백성들을 모두 안전지대까지 이동시킬 생각이라네. 자네의 도움, 자네가 이끌고 있는 나인발트 기사단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네.
물론 자네가 맡고 있는 전선도 힘에 겹다는 건 잘 알지만…50여명 가량만 차출해서 2백여명의 피난민을 안전한 장소까지 호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간절히 부탁하겠네. 수도에서 온다는 지원군은 며칠이 지나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믿을 사람은 오랜 친구인 자네밖에 없네. 수많은 제국민의 생명이 자네의 결단에 달려있다네. 부디 기사들을 이끌고 피난민들의 힘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다네. 꼭 부탁하겠네.
지금 자네에게 편지를 전달한 두 견습기사 중 남자는 내 아들 필립. 레이디는 자네도 잘 알고있는 클레이 백작의 영애 네르바 폰 비슈로프 양이라네. 만약 기사들을 이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때가 늦었다면…두 가문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아이들을 자네에게 맡길 테니 잘 보살펴 주었으면 하네. 한가지 덧붙이자면 편지를 전한 두 아이들은 피난민을 구한 다음 성으로 지원을 간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에 자네가 잘 타일러서 피난민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게 해주게나.
하지만 내 아들 필립의 경우 보기보다 성질이 있어서 혼자서라도 내가 있는 곳, 작센 성으로 오려 할 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해 주었으면 하네. 혹시 모를 일이 대비해 그 애에게 줄 편지까지 이곳에 넣어보내니 자네가 생각하기에 알맞은 시간일 때 그 아이에게 보여주게나.
이 편지가 자네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편지가 될 것 같군. 알고 지내던 시절부터 신세만 졌는데 마지막까지 도와주진 못할망정 이런 꼴을 보여서 정말 미안하네. 필립을 부탁하네. 자네라면 안심이 되니 죽음이 가까워져도 두렵지가 않는구먼.
잘 있게 친구. 오래 살게나. 벽에 똥칠하는 일이 있어도 질기게 살길 기원하겠네.
항상 자네에게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메이나 3237년 9월 28일 새벽
                                                서늘한 가을 바람을 느끼며
                                                   필로스 폰 에르네오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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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은 필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안에서 힘없이 일그러지는 종이 뭉치. 아직 자신에게 보낸 아버지의 편지도 읽지 않은 상황에서 필립은 돌발적으로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백작과 자작, 기사단장, 심지어 그의 친구인 네르바까지 어쩌지 못한 상황에서 거칠게 말의 배를 걷어찬 후 작센 성 방면으로 달리는 필립.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아들을 엿먹이는 애비가 어딨어! 반드시 살아있어야 해! 가서 죽도록 때려줄 테니까 버티고 있으라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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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뮤니티 꿈꾸는 사람들 www.thedreams.wo.to   필명- 히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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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www.ujoa.com          필명- 데스데모네                                
           http://yard.joara.com/tktlsdlfu -설정 및 세계관 수록.. 최근 개장


소설 커뮤니티 마루닷컴    http://maru.ibbun.com 필명- 히이로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읽었으면 답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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