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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서막]- 비 속의 불꽃 03 -

2006.01.03 12:22

히이로 조회 수:201

"제길! 제길! 제기라알! 이런 좆같은 상황이 어디 있어! 궁수가 30명이 있으면 뭐해! 아군이 죽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는데!"

까만 얼굴에 긴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남자. 에르드 남작이 참다못해 있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동료를 적진 속에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사기가 걱정된 백작은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에르드 남작. 자네 기분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중하게. 병사들에게 혼란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귀족으로써의 체면도 생각해야지. 안 그런가?"

"……알겠습니다. 백작님."

머리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에르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지 다시 이를 갈기 시작한다.
클레이 백작은 이런 남작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창 교전 중인 장소로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크윽! 이 잡놈들이 감히 누구 몸에 손대는 거냐!"

왼쪽 어깨가 적의 창에 관통 당한 린스트 남작은 얼굴을 구겼다. 재빠른 동작으로 자신을 공격한 병사의 얼굴 정 중앙에 샤벨의 검 날을 밖아 넣었다. 붉은 피와 함께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
그 모습에 린스트 남작 주변에서 그를 공격한 기회를 노리던 발사로크 군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이런 병사들을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특유의 미소를 짓는 남작. 얼굴과 머리전체가 피로 뒤범벅된 지금의 상황. 그의 모습은 흡사 살인귀를 보는 듯 했다.

"이런 망할……나 혼자만 포위 된 건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린스트. 사방이 발사로크 군 천지였다.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작센 무기점제 자칭 '최고급 절라 좋은 샤벨'은 화려한 명칭과는 정반대로 피가 엉겨붙어 사용이 곤란한 상태였다. 또한 방패 삼아 들고 다니던 적의 시체는 벌집이 되어 피와 체액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샤벨은 그렇다 치고 방패 정도는 교체해 줘야지. 발사로크 병사제 방패는 조금만 사용해도 이 모양이니……쯧쯧, 더럽게 후지군."

들고있던 시체를 내던진다. 곧바로 다른 시체를 집어드는 린스트. 육중한 거구에다 거침없이 시원스런 대머리. 무섭게 생긴 인상에 저런 행동까지 겹쳐지자 발사로크 군은 이제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그에게 덤빌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나가자 문 열 듯 길을 비켜주는 발사로크 병사들. 이런 모습들을 보며 린스트는 미소와 비웃음이 뒤섞인 표정을 지은 채 그들 사이를 유유히 헤치고 나갔다. 비록 열 발자국도 안돼서 걸음이 끊기고 말았지만.

"어이, 죽고 싶은거냐,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돌아버린 거냐? 길을 비키는 게 어때 병사 양반."

린스트의 앞에는 발사로크 군복을 입은 병사 하나가 서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기는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달린 철제 건틀릿을 장착한 것으로 보아 근접의 격투기를 사용하는 병사 같았다.
비키라는 린스트 남작의 말을 들은 병사. 대꾸도 없이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뻣뻣하게 쳐든다. 게다가 린스트의 예민한 부분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시끄럽다 대머리. 계집애처럼 검이 그게 뭐냐. 전쟁터가 장난인 줄 아나보네. 덩치는 산만한 새끼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렇게 쪼개고 있으면 병신 같아 보인다는 것쯤은 알고서 하는 짓이지?"

"……이봐,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한 번 지껄여줄 순 없을까?"

"아, 정말 생긴 것하고는 킥킥. 귀는 장식이냐?"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묻겠다. 뭐라고 했나?"

"어디서 개가 짖나보네, 이런 곳에도 개가 있었나?"

린스트 남작의 이마에 힘줄이 꿈틀거린다. '대머리에 생긴 것과 다르게 논다.' 육중한 체구와 남성스런 인상과는 달리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린스트.
그의 최대 콤플렉스 2개를 그것도 발사로크의 일개 병사 하나가 뒤집어 놓다 못해 썰어서 쌈까지 싸먹은 것이다.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병사를 향해 달려드는 린스트 남작. 그의 검 끝이 정확히 병사의 입술이 위치한 곳으로 움직였다. 방금 말한 입을 찢어버리겠다는 발언. 그대로 지켜주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린스트 남작의 성질을 건드린 병사는 남작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검 끝이 얼굴 가까이 까지 근접해서야 비로소 몸을 비틀어 그의 공격을 피하는 병사. 순간의 틈을 이용해 남작을 공격하겠다 라는 의사가 다분히 엿보였다.
체술을 무기로 삼는 자라 그런지 몸놀림이 상당히 유연했다. 가볍게 남작의 샤벨을 피하고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스파이크가 달린 건틀릿을 휘두르려는 찰나,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날 공격하기엔 10년은 부족하다 개자식아!"

"크윽!"

믿을 수 없는 속도와 유연함으로 검의 방향을 돌려 병사를 공격하는 린스트 남작의 얼굴이 기세 등등하다. 반면 병사의 얼굴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저 거구인 남작이 샤벨을 이렇게 빠르고 유연하게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기 때문이리라.
유연한 몸놀림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정 안될 경우, 건틀릿으로 쳐내며 막아보는 그였지만, 그럴 때마다 남작의 샤벨은 집요하게 그의 얼굴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으아악!"

병사의 왼쪽 뺨에 짙은 선혈이 그어진다. 꽤나 깊숙이 베였는지 제법 많은 양의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병사의 모습을 보며 남작은 거만한 웃음을 띄운 채 공격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병사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이리저리 생겨나기 시작했다. 초반의 기세 등등했던 병사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이게 그곳에는 피와 땀이 뒤범벅인체 생과 사를 넘나들며 고전하는 모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발사로크의 들개 녀석아. 네놈 같은 평민이나 노예는 죽어도 나 같은 분을 따라갈 수 없다. 끝마무리는 화려하게 해주지. 내 퍼포먼스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하아압!"

어느새 검에 엉긴 피를 닦아내고는 번뜩이는 칼날을 병사 쪽으로 향하게 하는 린스트 남작. 머리 숫자만을 믿고 여유롭게 싸우던 모습만을 구경하던 발사로크 군 전체가 얼음이 된 마냥 싸늘한 분위기였다.
생각 이상의 검술 실력. 결코 방심해서는 안될 자였다.

'녀석은 생각보다 잘 다듬어진 검술을 구사하고 있다……이렇게 되면 위험하다. 어떻게든 선공을 펼쳐 끝장을 내야만 해.'

흘러내리는 피가 거추장스러웠는지 상처가 난 뺨을 거칠게 닦아낸다. 시선을 올려 빛에 비쳐 은은한 남작의 검을 바라보는 병사. 어느 새 남작은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로 순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훗, 보기보다 실력은 있는 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면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평민."

"네놈이야말로 그 잘났다는 신분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다 피눈물을 쏟을 날이 언젠간 반드시 올 것이다. 뭐 내가보기엔 지금인 것 같지만."

"그게 지금 일어난다고? 큭,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이 비겁한 놈!"

"비겁해? 이게 비겁하다고? 나한테 말려 들어간 네놈의 잘못을 탓할 것이지 이유를 가져다 붙이시나 귀족 나으리!"

남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향해 돌진하는 병사.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던 자가 예상치도 못하게 역으로 선공을 시작하니, 남작은 적잖게 당황한 듯 하였다.
재빨리 병사를 향해 샤벨을 내질러보는 린스트였다. 하지만 당황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휘두른 것이었기에 평소의 날카로움 같은 것은 없었다. 한 손으로 린스트의 샤벨을 움켜잡는다. 그의 움직임을 봉쇄한 후 품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병사.
병사의 손에 잡힌 칼날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인상을 쓰며 잡은 손에 힘을 더하자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하고 잠잠해 졌다. 경악한 표정의 남작. 그리고 그의 눈이 병사의 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죽고 죽이는 건 전쟁의 기본적인 법칙. 나를 너무 원망하진 말라고. 너는 편안한 저승으로 갈 테고 난 일개 병사에서 귀족을 잡은 공으로 지휘관으로 승진 할 테니 말이야 큭큭.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검 실력에 비해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은 상당히 딸리는군 남작 나으리.
내가 아는 어느 녀석은 이 정도로 엉망이지는 않았거든. 그 놈에게 빚이 있는 내가 이런 곳에서 네놈 따위에게 죽을 수는 없다 이거지. 그럼 나도 답례로 약간의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여줘야겠지? 으아아압!"

남작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조용히 중얼거린 병사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려 남작과 약간 떨어진다. 린스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두르려고 하였으나, 병사의 건틀릿이 그의 복부를 강타하는 것이 더 빨랐다.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린스트 남작의 배를 후려치는 병사의 양 손. 처음에는 쇠와 쇠가 부딪칠 때 나는 날카로운 음색만이 울려 퍼졌다. 다만, 얼마 안 가서 육중한 파육음……고기가 터지는 소리만이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챙그랑∼!

린스트 남작의 손에서 들고있던 샤벨이 힘없이 땅을 떨어진다. 차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피로 이루어진 거품까지 만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병사의 주먹을 허용한 복부의 브레스트 플레이트는 처참하게 일그러져 버린 지 오래. 그리고 그 사이에서는 쉴 새없이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고 심지어는 내부의 장기들까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주먹질을 멈추는 병사. 고개를 올려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듯 입 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내가 말했지. 신분만으로 세상을 살다간 언젠 간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거라고, 너를 비롯한 귀족 모두에게 이런 응징을 내려 줄 테니 너무 원망하면 곤란하다 대머리. 그냥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지옥에 떨어진다 생각하면 되는 거야 크하하핫!"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남작의 떨어트린 샤벨을 집어 목에다 밖아 넣는 병사. 린스트는 이미 생명을 다한 상태. 다시 한 번 붉은 빛의 비릿한 액체가 흘러나와 남작의 온 몸을 서서히 적셔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치켜 뜬 상태로 숨이 멎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짜증났는지, 거칠게 발로 차 그를 쓰러트리는 병사의 모습. 남작의 죽음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배불리 먹고, 사사로운 것이나 따지는 귀족의 격식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통용된다고 생각했느냐 이 멍청아. 나 '라펜드 더 고쿠'는 그런 놈들을 제일 혐오하지. 미안하지만 지옥에서 너를 비롯한 귀족 놈들이 나 같은 평민과 노예들에게 벌인 그 잘날 짓거리들을 반성해라. 그 잘난 신분만을 중시하다 이 지경까지 온 네 놈의 어리석음을."

피가 뒤섞여 있는 침을 쓰러진 남작의 얼굴에 뱉고는 몸을 돌리는 라펜드. 잠시동안 라펜드의 뒷모습과 남작의 시신을 번갈아 쳐다보던 발사로크 군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동시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초조하게 상태를 지켜보던 바르디아 군의 얼굴 표정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군의 총 지휘를 맡고 있는 클레이 백작조차 좋지 않게 얼굴 색이 변하고 있었다.
저렇게 함성을 지를 정도라면 아군의 지휘관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을 경우였기에……린스트 남작과 듀자크 자작 중 한 명, 혹은 두 명 모두에게 문제가 발생했나 하는 생각에 남몰래 속을 태우고 있는 백작이었다.

"백, 백작님! 저기 한 무리의 병사가 이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아군인 듯 합니다!"

"궁수 전원 앞으로 5보 전진! 아군을 엄호한다! 언제든지 화살을 쏠 수 있도록 준비를 취하라! 어서!"

병사의 보고에 에르드 남작은 백작이 뭐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궁병을 움직였다. 신속하게 앞으로 전진하여 전투대형을 갖추는 바르디아 군의 궁병들. 표정 하나하나 마다 긴장감과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대지를 뒤흔드는 병사들의 다급한 이동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에르드 남작 역시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올려 준비를 알리는 에르드 남작의 모습.
아군 병사들이 화살의 범위 내에 들어온 상황.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위를 재는 궁병들. 달려오는 선두의 병사들이 같은 바르디아 군이라는 걸 확인한다. 꽤나 근접한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을 때, 남작의 오른 손이 시원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쏴라! 온 힘을 다해서 최대한 멀리!"

남작의 고함소리와 함께 맑았던 하늘에 잠시동안 한 무리의 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비명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듀자크 자작과 병사들의 뒤를 쫓느라 주변 상황을 살펴보지 않은 나머지 화살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발사로크 군 추격대였던 것이다.

"쉬지 말고 화살을 날려라! 쏴라!"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궁병들을 독려하는 에르드 남작의 힘찬 고함소리. 남작의 바램에 부응이라도 하듯 숫자는 적었지만 끊임없이 발사로크 군 머리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완강한 저항에 발사로크 군의 지휘관은 일시적으로 병사들을 후퇴시켜 거리를 두고 바르디아 제국군과 대치를 하기 시작했다.

"듀자크 자작! 무사했구려!"

온 몸이 피로 얼룩진 노귀족과 9명의 병사들……생존자의 전부였다. 주변을 감싸는 침울한 분위기. 에르드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듀자크 자작을 향해 소리쳤다. 애써 눈에 비친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울부짖음이었다.

"린스트 남작이 후위를 맡았었네……."

듀자크 자작은 이 한마디만을 간신히 내뱉고는 침묵하고 있었다. 말없이 그의 죽음을 용인한 자작. 절망적인 확률로 그가 살아있다 가정해도 그를 구할 길은 없었다. 클레이 백작역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먼 곳만을 한없이 응시하는 백작의 뒷모습.
에르드는 동료의 전사가 충격적이었을까. 일순간 다리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사태의 긴박감은 절망감에 젖은 이들에게 한치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에르드 남작, 일어나라. 적이 다가오고 있다."

클레이 백작의 건조한 목소리가 반 강제로 에르드 남작을 일으켜 세운다. 긴장하는 바르디아 측의 인물들. 150여명의 보병을 상대할 전력 따윈 없다. 그러나 저항도 하지 않고 적의 손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민간인들을 진정 시키면서도 없는 병력으로 간신히 진형을 정돈하는 세 명의 귀족. 어두운 미래가 벌써부터 그들의 얼굴에 깃들여져 있는 듯 했다.

"오 이럴수가! 저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어떻게 저런……놈들은 정말 제정신인건가!!!"

듀자크 자작과 클레이 백작이 동시에 충격과 분노가 고스란히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에르드 남작. 그의 눈에 린스트 남작의 처참한 몰골이 들어온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발사로크 군을 향해 말을 몰고 있었다.
갑작스런 돌발적인 상황에 당황한 백작과 자작이었으나 그를 저지하기엔 거리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는 상황이었다.

"이 잡것들!"

에르드 남작의 고함소리가 양측 군사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린다. 황급히 창을 집어들고 달려오는 남작을 막으려는 발사로크 군의 병사들. 하지만 에르드의 눈에는 6토막이 난 채로 각기 다른 창에 꽂혀 하늘 높이 올려져 있는 동료. 린스트 남작의 시신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그의 시체. 이 모습에 에르드 남작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 개같은 새끼들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다! 린스트가 당한 만큼 너희들의 사지도 갈기갈기 찢어주마!"

"길을 열어줘라, 귀족은 확실히 없애야지."

단신으로 롱소드를 뽑아들며 돌진하는 에르드. 그의 모습에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발사로크 군의 총 지휘자로 보이는 작자는 뚜렷이 드러나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에르드를 위해 길을 열어주듯 병사들이 신속히 비켜선다. 린스트 남작의 시체를 꽂은 창들은 지휘관의 주변으로 옮겨져 에르드 남작이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도록 도발하였다.
에르드 남작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클레이 백작과 듀자크 자작.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평소의 남작이었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린스트 남작과 달리 에르드 남작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매사를 냉정하게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는 인물로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
친구의 죽음에 그가 이성을 잃고 돌격하는 모습은 그들로써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르드……제발 정신을 차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말고삐를 간신히 잡은 채 백작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필로스 후작과 이별을 하며 피난민들과 그 누구도 죽지 않게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한없이 나약한 중년 남성의 모습만을 내비치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르드 남작은 백작의 이 소망 마저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으아아아앗!"

"모두 준비해라! 내가 신호를 하기 전까지 함부로 움직여선 안돼! 알겠느냐!"

남작의 말은 이미 발사로크 군 진형 속에 발을 내딛은 상태였다. 사전에 길을 열어주는 병사들 덕에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언제 어느 때라도 사방의 적들이 그를 죽일 수 있는 위치. 그렇게 그는 적의 총 지휘관이 있는 중앙의 심장부로 홀로 진격해 들어갔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조금만 더 가면!! 린스트, 곧 뒤따라 갈테니 조금만 더!'

겉모습과는 달리 에르드의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양옆에서 길을 비켜주는 병사들의 있을 수 없는 행동. 감성이 짓눌리고 냉철한 이성이 다시 눈을 떴던 것이다.
짧은 순간동안 적의 지휘관을 없애겠다고 마음을 먹은 에르드. 이 일만이 백작과 자작, 피난민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약 100M가량인가……30M!……30M까지만 날 살아있을 수 있도록 도와다오 린스트!'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말 위에서 에르드는 어렴풋이 보이는 발사로크 군의 지휘관을 죽여버릴 듯 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시간이 갈수록 거리는 줄어들었고 에르드의 심장 박동 수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에르드에게는 지금 이 짧은 순간 순간이 몇 분인 마냥 길고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명한 인상만큼 그가 해내야만 할 일에 대해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번영을! 적의 손에 희생당한 제국 귀족과 병사들의 원수를!"

"지금이다. 없애."

에르드의 고함과 얼음같이 차가운 지휘관의 목소리가 말 그대로 동시에 터져 나온다. 앞, 뒤, 측면에서 헤아리기가 힘든 수의 창이 남작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에르드 남작의 품속에 감추어져 있던 조그만 단검이 그의 손에서 떠나간다.
남작의 몸을 연쇄적으로 관통하고 지나가는 창의 음색과 차가운 촉감을 느끼면서 그는 동시에 쓰러지는 적 지휘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사방으로 솟구치는 남작의 뜨거운 피.
다급하게 지휘관을 둘러싸는 발사로크 군 병사들.
환호성과 다급한 고함이 뒤섞인 말 그대로 혼돈의 상황.

삶의 마지막 순간 에르드 남작은 똑똑히 보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눈동자 사이에 들어온, 쓰러진 지휘관과 병사들이 있는 뒤편 언덕에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기병, 아니, 기사들을.

"큭……이거……지휘관 제거……라는…… 전공 제일의 공을 세웠는데……이렇게 가는 건가……백작님, 그리고 기사단장……내 몫……까지……반드시 살아남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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