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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서막]-비 속의 불꽃 01-

2005.12.15 16:33

히이로 조회 수:204

메이나력 3237년, 사로크력 247년. 바람이 제법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초가을에 생긴 이야기.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다 할 지라도 단 한사람. 그 사람만큼은 남아있는 생의 불꽃이 꺼지기 전까지 잊지 못한 체 가슴속에 담아두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 날의 기억들. 하늘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절망이란 아마도 그 날 같은 때를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었을까?

                    *                    *                    *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수십 마리의 말이 평야를 질주한다. 그런 말들의 위에 올라탄 무장한 기사들. 말의 속력이 느려질 때마다 가차없이 배를 걷어차며 재촉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진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서서 말을 모는 한 쌍 남녀의 표정은 불안감과 초조함이 얼굴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말이나 사람 모두 땀에 절은 모습. 그러나 행군속도를 늦추거나 휴식을 취하는 한가로운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길고 웨이브진 흑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필립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살아있어 달라고. 자신이 돌아가기 전까지 무사히 남아있어 달라고…….

"………………."

남자의 초조한 표정, 필립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의 옆에서 말을 모는 여자의 얼굴빛도 썩 좋지는 못했다. 그녀라고 해서 필립이라는 남자와 상황이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속에서 품고 있는 불안한 심리를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필립이 지나칠 정도로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탁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둘은 같은 신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함께 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소꿉 친구였다. 말이 좋아 소꿉친구지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관계. 어찌 보면 주종관계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지만. 여자는 요 며칠 사이 필립이라는 남자가 정신적으로 상당히 성숙했음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10대 후반인 지금까지 이 둘의 생활방식은 거의 비슷했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부모들의 재력이나 권력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동등한 위치였다. 둘 다 기사를 지망 할 정도로 추구하고자 하는 길도 같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별과 가정환경. 특히 후자의 영향이 컸다. 필립의 경우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 이것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그녀와 필립의 가장 큰 차이점.
귀족의 영애로써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녀는 활기가 넘쳤고 적극적인 성격을 형성해 갔다. 반면 그는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혼자만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것 듯한 생활.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그는 최근까지도 그녀를 비롯한 동급생, 심지어는 나이가 어린 동생들에게까지 보이지 않는 무시를 당해왔다. 말하자면 하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왔던 것이다.

"너무 걱정하진 마라, 모두다 무사할 테니까."

필립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여자. 필립은 말을 몰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움츠러들면서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필립.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기억들을 떨치긴 어려웠나보다. 하지만 그의 답변을 그녀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 네르바……."

두 사람의 대화는 말발굽 소리에 묻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30여기의 말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휴식한 번 취하지 않고 6시간 가량을 강행군 해왔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친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시간싸움. 1분 1초가 지금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했다.
무의식적으로 선두에 선 필립과 네르바의 채찍질이 더욱 심해진다. 자연히 뒤따라오는 기사들의 속력도 높아져 간다. 이런 모습에 조용히 동참하면서도 현재 달리고 있는 기사들을 총 지휘하는 사리크 이디레온. 기사단장은 착잡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들이 목적지로 정한 작센성은 지금쯤이면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아직까지 남아 항전을 계속 한다해도 승산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보는 확실했다. 이러한 정보를 제공한 자는 다름 아닌 작센성의 후작이자,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필립이라는 남자의 아버지 필로스 후작이었으니.
2천명에 육박하는 발사로크 군을 상대로 30여기의 기사가 지원을 간다는 것. 그 자체가 몸에 기름을 붓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미친 짓이었다.
이런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그가 기사들을 지휘하여 움직인 이유는, 자신의 옛 친구이자 성의 책임자인 필로스 후작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들과 성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친필로 쓰여진 편지. 편지 속의 내용도 모른 체 아버지의 명령이라 얼굴이 땀 투성이가 되어 막사 안으로 뛰어든 필립의 지친 얼굴.
자신이 지휘하는 나인발트 나이츠 역시 격전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근접한 곳에 위치한 성의 절박한 도움요청을 거절할 만큼 모질지는 못한 성격이었기 때문일까? 덕분에 병력의 극히 일부를 빼내어 진군할 수 있었던 것.
작센성을 향해 달리고는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걱정으로 뒤죽박죽이 된 지 오래였다.

'하아……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 지. 앞이 깜깜하구나…….'

기사단장의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차가운 밤 공기를 가르며 질주하는 30여마리의 말들과 기사들. 그들이 지나치는 주변은 힘찬 말발굽소리. 쇠와 쇠가 맞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음색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서서히 문이 움직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약간은 서늘한 밤의 공기. 문을 여는 병사들의 손놀림은 그 어느 때 보다 조심스러웠다. 예상치 못했던 소리가 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주변은 이따금씩 문이 열리면서 나는 녹슨 철의 마찰음을 제외하면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하기에 더 불안한 분위기라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는 것 같다고 필로스 후작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문은 별 문제 없이 열린 것 같구먼. 앞으로는 자네들의 운과 신의 은총이 따르기를 빌겠네. 자, 클레이 백작, 어서 말에 오르시게. 이번 일의 총 책임자는 자네가 아닌가. 어서 출발을 해야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네."

느린 구름이 지나가는 듯, 보일 듯 말 듯하게 열리는 성문이 잘 내려다보이는 망루. 그곳에서 중년의 귀족 2명이 말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문이 절반 가량 열리자 한 명의 귀족이 다른 귀족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근엄함과 굳센 의지 역시 함께 포함된 말투로 조용히 말을 건넨다. 가벼운 소리를 내며 불꽃을 꽃피우고 있는 횃불 아래로 비친 그의 모습은 거만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을 당당함이 느껴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던 클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작님 저도 남겠습니다. 제게도 이 성과 생의 마지막을 빛낼 기회를 주십시오."

짙은 갈색 수염이 보기 좋게 자라 턱과 코 아래를 덮은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작. 그가 간곡한 목소리로 부탁한다. 불빛 아래로 이따금씩 보이는 백작의 얼굴 역시, 후작 못지 않은 위엄과 연륜이 서려있었다. 말없이 클레이 백작을 응시하는 후작. 날카로운 그의 눈동자였지만 속에는 바라보는 상대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았다.
백작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째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이 이런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인품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민을 위해 항상 헌신하고 귀 기울여 왔던 후작이었다. 고작 제국의 중심에 자리잡은 썩은 귀족들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쟁 때문에, 몇 안 되는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 귀족이라고 칭할만한 사람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함께 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자 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후작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은 체 그의 진심 어린 충고와 부탁들을 거절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후작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평소처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친애하는 나의 부하이자 믿음직한 벗인 클레이 백작이여. 자네가 내 밑에서 일 한지도 벌써 32년째인가?"

"그렇습니다 후작님."

"자네가 지금의 신분, 그러니까 우리 둘 다 후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칭호를 달기 전에 내 선친의 명령으로 이 작센성 병사들을 얼마간 훈련시켰던 일이 기억 나나?"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지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리는 클레이 백작. 그 모습을 보고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그의 생애가 묻어나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는 후작.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때, 그러니까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자네가 손수 규율을 만들어서 병사들 앞에서 선서를 했었지. 만약 기억 난다면, 지금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그때의 그것을 말해줄 수 있겠나."

잠시 말이 없는 백작. 후작이 말하는 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듯 하다. 후작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주변의 풍경을 응시하면서 백작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조용한 침묵을 깨트렸다.

"……혹시라도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십시오. 으흠! 우리 작센성 병사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다름과 같은 규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첫째, 우리는 전쟁 발생 시 그 누구보다 성의 주민과 국가의 위상을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적과 싸울 것이다. 둘째, 명령이나 직무 수행 중, 음주나 놀이 등의 불건전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영지민들의 물건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부상당한 동료가 있을 경우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그 동료의 몫까지 용감히 싸울 것이다. 다섯째, 언제나 복장을 단정히 하여 타의 모범이 되도록……."

후작은 그를 보며 미소짓는다. 백작은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모습이다. 할 말도 잊은 채 서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제 서야 입을 열기 시작하는 후작.
횃불의 불꽃이 그의 얼굴을 잠깐 비추는 순간, 후작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졌다. 그리고 특유의 단호한 표정이 서려있는 것을 클레이 백작은 순간적이었지만 볼 수 있었다.

"클레이 드 비슈로프 백작. 지금 자네가 읊은 문장은 나의 아버지 안슈트 백작이 이 성을 통치하실 때 자네가 명령을 받고 만든 것들 중 하나지. 그리고 그것들은 성을 물려받은 나 '필로스 폰 에르네오'에 이르러서도 역시 변함없는 규율이라네. 자네는 부상자가 아닌가. 내가 자네 몫까지 이 성을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하겠네. 물론 클레이 백작. 자네가 가는 길이 안전한 길이 아니라는 것.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패배가 확정되었다 볼 수 있는 이 성에 남아 죽음을 재촉하느니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피난길에 자네를 보내고 싶군."

얼굴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목소리를 단호했다. 명령이 아닌 명령. 그것도 필로스 후작이 자신에게 내리는 생전의 마지막 명령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자 클레이 백작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느꼈다.
이미 그의 시야가 뿌옇게 변해버렸다. 앞을 잘 식별할 수 없게 된 건 오래 전 이었다. 행여나 후작이 불빛 사이로 자신의 이런 추한 모습을 볼까 두려웠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는 백작. 거칠어졌던 호흡을 간신히 정리하고 나서야 백작은 입을 연다. 목이 메인 목소리였다.

"……후작님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가는 것을! 후작님께서도 이 성이 함락 당할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아서 싸운다는 것은 명예를 드높이는 일일지 모르나 개죽음입니다!"

절규에 가까울 정도로 부르짖는 백작. 하지만 목이 메인 상태라 그랬을까. 목소리 자체의 음량은 작았다. 필로스 후작은 이런 백작의 얼굴을 보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몸을 돌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성문이 이미 열려있었다.
지금은 발 빠른 병사 몇 명이 주변에 정찰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매복해 있을 발사로크 군대를 탐색하고 있으리라. 후작은 슬슬 백작을 떠나보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클레이 자네 말대로 분명 개죽음일지도 몰라. 하지만 개죽음이라고 해서 내가 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과연 이 성을 통치할 자격을 부여받은 후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도망친다 하더라도, 성을 점령한 발사로크 군이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놓아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추격대를 분명 보내 올 걸세. 난 지금까지……부족한 영주였지만 날 따라주었던 많은 귀족들과 영지민들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네. 이미 몇 차례에 걸친 방어전으로 많은 병사들과 귀족들이 죽었어. 남은 유족들 마저 그들 곁으로 보내야 한다면 난 도대체 죽은 자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는가. 클레이 백작! 더 이상의 발언은 용납하지 않겠네. 어서 떠나게! 내가 그대들을 위해 벌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4시간! 그나마 적이 이 사실을 눈치채서 군대를 분산시킨다면 1시간도 체 안될 수 있네. 영지민들은 자네 손에 달려있어……더 이상 내 마음을 약하게 하지 말고 떠나주시게……나라고 왜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본능 이전에 내게 주어진 임무가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후작의 말에 백작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감정에 치우쳐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설득시키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한다. 후작의 말대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성안에 남아서 항전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쓸데없는 죽음으로 만들어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작님의 아들인 필립군은 제가 책임지고 돌볼테니 아무런 걱정없이 전투에 임하시길. 바르디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영지민과 귀족들을 부탁하네 백작."

체념한 듯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백작. 후작은 그의 말에 가볍게 답례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의 눈을 응시한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빛으로 무언의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무언의 인사가 끝난 후, 백작은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후작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 망루를 내려가기 시작한다. 농성전 중 적의 공격에 당한 복부에 생긴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는지, 클레이 백작의 힘든 걸음걸이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필로스 후작. 어느새 후작의 눈 주위는 촉촉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잘 가게, 클레이. 그대가 가는 길에 신의 은총이 충만하기를……그리고 내 아들을 부탁하겠네. 물론 자네라면 잘 돌봐줄 것이라고 믿네……."

눈가를 적신 액체가 흘러내리려 한다.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후작이었다. 살아서 보는 마지막 밤하늘이라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필로스 후작은 꽤 오랜 시간을 똑같은 자세로 서 있으며 하염없이 짙은 보라빛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염없이…….

필로스 후작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계단. 내려오는 내내 백작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수척한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있는 힘을 다해 짓누르는 백작. 그러는 사이 그는 어느 새 성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백작님 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지휘관을 본체 만체 하며 지나간다. 백작은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 병사가 들고있던 자신의 헬름을 빼앗듯이 뒤집어쓴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없이 갑옷과 무기를 착용했다.
모든 무장이 끝나고 나서야 주변의 병사들과 피난길에 오를 마을사람들을 둘러보는 백작. 다시 한 번 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병사와 민간인,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만큼 모두가 초라하고 초췌한 모습들이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어미의 등에 업혀있는 아이. 그걸 업고있는 어머니도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갓난아기가 혹시라도 행군도중 울까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두려운 눈빛으로 백작을 바라보는 아낙……몇 날 며칠 동안 신분고하는 모두가 망각했다. 실질적인 전투가 가능한 성인 남녀는 물론이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노인까지 농성전에 가담했었다.
교전이 시작된 이래 다섯배 가량이나 많은 적군을 상대해왔다. 제대로 된 휴식은커녕 끼니와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전투를 벌였으니……이런 모습들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는 백작은 마음 한 구석이 더욱 무거워졌다.
백작은 이들을 이끌고 무사히 안전한 지역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동시에, 이들이 행군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 지에 대한 두려움이 불어났다. 이것들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자신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두가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비밀리에 행군해야 하는 여건 상 본의 아니게 주위를 소란스럽게 하거나 명령을 불이행하는 자는 내 손으로 즉결처분을 할 것이다. 민간인들은 중앙의 본진 에서 행군할 것이며 양쪽은 기병이 일정한 대형으로 간격을 둔 채 호위할 것이다. 후방은 나를 비롯한 린트스 남작, 에르드 남작이 보명 30명과 궁병 전원을 데리고 뒤따라 갈 것이며 선두는 듀자크 자작이 보명 20명을 이끌고 진군할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는 자는 똑같이 즉별 처분을 내릴 것이다. 명심하기 바란다.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주시려 하는 후작님과 남은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자. 자, 이동을 시작한다!"

백작의 비장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연설이 끝난다.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이동을 시작한다. 삶의 터전을 남겨두고 떠나는 슬픔. 전쟁으로 전사한 남편과 자식, 아들의 유골을 두고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는 이 성에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슬픔 때문이었을까. 노인과 아녀자들 사이에서는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백작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을 감추질 못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귀족들과 영지민은 야심한 밤 시간을 이용해, 발사로크 군대의 눈을 피하여 이동을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듯, 필로스 후작은 여전히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거친 그의 갈색 피부를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 그것을 제외하고는…….


동시 연재 사이트


소설 커뮤니티 꿈꾸는 사람들 www.thedreams.wo.to   필명- 히이로

애니메이션 및 동인의 저택 노나메  www.no-name.wo.ro    필명- 히이로

조아라     www.ujoa.com          필명- 데스데모네                                
           http://yard.joara.com/tktlsdlfu -설정 및 세계관 수록.. 최근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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