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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And Gold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 산처럼 쌓인 문서의 산을 바라보던 오렘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경을 벗었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기지개를 편 그는 손가락을 까닥여 다 식어버린 티 포트를 끌어당겼다. 책상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온 티 포트는 오렘이 내미는 찻잔에 빛깔이 짙은 홍차를 따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 식어버린 홍차를 입에 머금고 한숨을 내쉰 오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곤할 정도의 봄기운이 아지랑이와 함께 눈을 어지럽힌다.

  “……에보니.”

  “피앙새가 그리우신가. 수석마법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찻잔을 깰 뻔 한 오렘은 탁자 아래로 추락한 찻잔이 땅에 닫기 전에 겨우 찻잔을 붙잡았다. 결과적으로는 소매가 굉장히 젖어버렸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혀를 찼다.

  “차가 식었던 게 다행이군.”

  “아, 예.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스승님. 언제 오신 겁니까?”

  허둥지둥 젖어버린 소맷자락을 털어내며 묻는 오렘.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에게 대답했다.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자네 요즘은 더 정도가 심하군. 그제는 배수로에 빠지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들었네만.”

  “아, 그게 그제 일이었군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금발의 마법사.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선 온화한 얼굴의 마법사는 자신의 수제자이자 이름을 물려준 단 한명의 마법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평생 책이랑 마법밖에 모를 것 같던 녀석을 저렇게까지 만들다니 고약하도다. 사랑이여.
  오렘은 결국 소매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은 포기하고 로브를 벗어버렸다. 그의 스승은 근처에 놓인 의자 중에 책이 쌓여있지 않은 것을 끌어와 창가에 앉았고, 오렘은 벗어든 로브를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그 짧은 동작을 하면서도 발에 걸리는 책을 넘어트리고 손에 걸린 두루마기를 무너트린 탓에 원래 너저분한 방은 더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의 스승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평소에 정리를 잘 안하는 터라…….”

  “정리를 잘하는 마법사는 재능이 없는 마법사던가 가짜 마법사라지만, 연구실도 아니고 집무실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건 너무하군. 제발 정리 좀 하게.”

  “예.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이런.”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다가 또다시 책무더기를 엎어버린 오렘을 보며 스승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고, 오렘은 붉어진 얼굴로 무릎을 꿇고 책을 주워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한번 본적이 있네만.”

  머리위에서 들려온 스승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오렘은 그가 노곤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고개를 숙여 책을 집어 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이더군. 자네의 수호기사는.”

  “예. 감사합니다.”

  “왜 자네가 감사한지는 잘 모르겠군, 이 노부도 사랑이란 건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일세.”

  오렘은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스승은 고개를 돌리지는 않은 채 손만 들어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아직 늦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소릴 할 거라면 제발 그만두게. 이 노부는 이미 왕국의 혼인법을 벗어난 나이일세. 늙어 주책도 정도가 있지.”

  “사랑에는 법도 국경도 없다고, 크레미노프 렘센이 말했습니다.”

  “그 독설가도 평생 독신이었다는 건 알고 있나?”

  오렘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고, 덕분에 품에 모았던 책을 한권 떨어트렸다. 오렘은 턱으로 책의 산을 누른 채 손을 뻗었고, 스승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말이 새긴 했지만, 나는 자네한테 여색에 빠지지는 말라고 충고하러 왔네.”

  오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말을 잘못 꺼냈거나,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걸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스승은 무자비할 정도로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빠진 마법사는 미친 용보다도 위험하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스승님. 제가 요즘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건 에보니 탓이 아닙니다.”

  “남자를 홀리게 하는 것 중에 가장 자각하기 힘든 건 권력과 여자라더군.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단지 그녀에게 홀린 것인지는 알 수 없네.”

  존경하는 스승에게 화난 표정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오렘은 팍 소리가 날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성난 목소리는 별다른 여과 없이 스승에게 전해졌다.

  “저는 에보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확신합니다.”

  “무언가에 확신을 가진 마법사라니. 기가 찰 노릇이군.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네의 수호기사는 상상외로군 그래.”

  오렘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책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오렘의 분노를 부추겼다.

  “폭언은 그만두십시오!”

  따귀라도 쳐서 오렘의 정신을 돌려놓으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스승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흑발의 여기사를 발견했다. 방금 돌아왔는지 먼지투성이의 갑옷과 구겨진 망토를 입은 채의 여기사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들게 입을 뗐다.

  “저기…….”

  “자네의 피앙새가 오셨군. 수석마법사.”

  그의 스승은 창틀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으로 걸어왔다. 에보니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고, 오렘의 스승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심하게, 클로버링경. 뜨거운 사랑은 붉은 북극성을 부르는 법이니까.”

  “스승님!”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외치는 오렘. 그의 스승은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왕이 나온다면 이 노부의 생명을 위탁하는 것이 좋겠군. 아직 하고 싶은 연구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하하하하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와 오렘을 번갈아 바라보던 에보니는 구겨진 망토를 대충 걷어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오렘에게 다가갔다.

  “저, 저어. 오렘님…….”

  그대로 돌아서서 에보니를 껴안는 오렘. 갑옷으로 감싸여 평소보다 투박한 그녀의 몸을 껴안은 채 오렘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보니, 나의 에보니…….”

  어떡해,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갑옷, 더러운데. 땀 냄새 날지도 모르는데. 일주일이나 전장에 있어서 피 냄새가 날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껴안긴 탓에 대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에보니는 자신을 부르는 오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필사적일 정도로 자신을 껴안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오렘. 에보니는 조심스럽게 건틀릿을 벗고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오렘님. 돌아왔어요.”

  “응. 응. 에보니. 잘 돌아왔어. 보고 싶었어.”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에보니는 조용히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그렇게 그녀의 손에 머리칼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오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보니. 다친 곳은 없어? 낫지 않은 상처는 없어?”
  
  “예. 오렘님. 여신님의 가호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어요.”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잘됐다고 되뇌는 오렘. 에보니는 미소 지은 채 그의 금발에 얼굴을 댔다. 전장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후원의 꽃냄새가 그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것만 같았다. 향긋하다. 향긋…….
  에보니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오렘의 몸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렘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수그리며 말했다.

  “저기, 그게, 저,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씨, 씻지를 못해서, 그, 내, 냄새…….”

  “냄새? 아아…….”
  
  오렘은 조용히 에보니를 바라보았다. 갑옷은 흙투성이에 상처투성이. 얼굴은 아주 좋게 봐줘서 개구진 남자아이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오렘은 쿡,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

  “죄송해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에보니. 오렘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에보니. 그대가 지옥의 삼두견같은 유황냄새를 풍긴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단호한 목소리 때문일까. 에보니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망설임의 끝에서 에보니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오렘은 그녀도 자신의 스승이 사라진 곳도 아닌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렘님?”

  “사랑 할 수 있으니까."

  단호하게, 어떤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되뇐다. 에보니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불사조 기사단 수석 기사. 에비누스 클로버링입니다.”

  불사조기사단에는 기사단장이 없다. 그들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장의 여신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불사조 기사단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전장의 여신은 이름그대로 전장에서만 그들의 길을 제시해주는 존재. 싸움을 하지 않을 때의 그들을 인솔하는 것이 바로 수석기사이다.
  2/3 이상의 병력을 잃고 후퇴하는 마군들을 바라보던 용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여기사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여신의 문양이 새겨진 불사조 기사단 수석기사의 갑옷. 용사는 아직 그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을 때의 에비누스를 망연히 생각하다가 피곤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수석기사 에비누스경.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데……”

  말에서 내려 도열해 있는 불사조기사단의 기사들을 주욱 둘러본 그녀는, 어째서인지 긴장해 있는 에비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줄었군요?”

  “잦은 전투에 하나둘씩 전우를 잃은 탓에……죄송합니다. 용사님.”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에비누스를 본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잦은 전투에 휘말려 피곤해 보이는 모습들이긴 했지만, 결코 전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전우의 죽음이, 괴로움에 짓눌린 왕국의 사람들이, 그들을 계속해서 승전이 불가능한 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겠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싸움. 전장에 나서는 순간부터 배수진을 쳐야만 하는 지독한 환경이 그녀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왕국 유일이자 최강의 여기사들. 단 하나 남은 투쟁의 불꽃. 용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다.

  “고마워요.”

  “언……아니, 용사님?”

  울먹임이 섞인 용사의 목소리에 황급히 곁으로 다가오는 에비누스. 용사는 당황하는 에비누스의 손에 어깨를 맡긴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여신님의 목소리를 잃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싸워줘서 고마워요. 도망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죽지 않고 살아주어서……정말 고마워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기사들. 용사는 눈물을 흘리는 채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그녀는 불사조기사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내가 보답 할게요. 내가 잃어버린 승리를 되찾아 줄게요. 죽어버린 전우들을 살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바랬던 세상을 되돌려 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나를 따라줘요! 내 깃발아래에서! 나를 위해 싸워줘요!”

  “요, 용사님…….”
  
  용사는 사자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정오의 태양빛조차 그 서슬 퍼런 칼날에 반으로 갈라진다.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의 갑옷. 불사조 기사단 전원은 그 황금의 빛 무리 속에서 자신들의 여신의 모습을 찾아내고 놀랐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여신이 용사의 곁에 있다. 에비누스는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고, 나머지 기사들은 모두 그녀의 행동을 따랐다. 가슴이 벅차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니, 해야 할 말조차 없었다. 그들의 여신이 함께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에비누스는 그대로 땅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자신의 권위를 내던지고 불사조기사단임을 포기하는 외침을.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싸울 것임을 맹세하는 외침을.  

  “모든 검은 용사님을 위해! 모든 전투는 용사님을 위해!”
  
  “용사님을 위해!”

  일제히 터져 나오는 기사들의 외침. 용사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공의 패자의 권위조차 가르고 있는 사자검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이 검으로! 흑암의 마왕을 쓰러트린다! 이 검으로! 흑암의 마왕을 쓰러트린다! 이검으로 흑암의 마왕을 쓰-러-트-린-다-아-! 반-드-시-이-!”

  절규하는 것 같은 용사의 목소리가 사자검의 도움으로 어디까지고 퍼져나간다. 대셔의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흑암의 성으로 돌아가던 골드는 힘들게 손을 뻗었다. 공중에 날아가는 목소리의 파편을 붙잡는다.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는 그 말(言)의 조각을 붙잡은 골드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것을 뭉개버렸다. 그것이 최후의 힘이었던 듯, 골드는 팔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처음부터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에비누스 클로버링. 하나뿐인 언니가 사람이 아니게 된 이상, 클로버링 가문의 수장은 그녀였다. 아무것도 지킬 것 없는 가문이었지만 자신이 짊어져야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없는 에비누스는 겸허하게 고용인 한명조차 남아 있지 않은 가문을 받아들였다. 재건하면 돼.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언니랑 같이 다시 클로버링가를 일으키면 돼.

  “에비누스. 마왕이 사라지고 나면 뭘 할 거니?”
  
  “예? 아, 그러니까…….”

  평소 생각이 입으로 잘나오지 않는다. 용사이며 기사단장이 되어버린 그녀의 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언니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차분하고 기품 있으며 믿기지 않게도 위엄까지 내비친다. 처음으로 언니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며 감동한 탓에 에비누스는 용사의 말을 조금 잘라먹고 말았다.

  “……니까 존댓말은 그만두렴.”

  “예……?"

  “그렇잖니. 나이차이도 한 살뿐인 자매끼리 존댓말이라니. 나, 용사긴 하지만 그전에 에비누스의 언니니까.”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에게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낸 에비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그녀 곁에 앉았다. 달빛은 그다지 밝지 않았지만 용사가 입고 있는 황금의 갑옷 덕에 주위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에비누스는 조금 그녀에게로 다가가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문을 다시 세울 거야. 아버님 어머님도, 가신들도, 고용인들도 모두 사라진 가문이지만, 아직 두 명은 남아있으니까.”

  황금의 갑옷 탓에 있으나 마나한 밝기의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말하는 에비누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용사는 잠시 후 놀란 표정으로 에비누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언니가 맞구나. 저렇게 얼굴전체로 놀라는 표정이라니.

  “에비누스. 벌써 약혼자가 생긴 거니?”

  “에에? 무슨 소리야, 언니랑 나. 그렇게 둘을 말하는 거라고.”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에비누스. 용사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고, 곧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언니?”

  “불침번 내가 설게. 에비누스. 들어가서 좀 자렴.”

  조용히 말하는 용사의 목소리에 에비누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천막 쪽으로 사라지는 에비누스를 바라보던 용사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미처 자신의 동생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뒤늦게 흘러나왔다.

  “그건 불가능해. 에비누스.”

  모닥불이 사그라진다. 하지만 용사의 황금갑옷은 무엇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가난한 농노의 딸로 태어난 소녀였다. 누가 보면 귀족이라 의심할 정도로 색이 밝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지만, 낮이면 거름더미와 씨름하고 밤이면 여덟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는 자그마한 농노의 계집아이에게 블론드의 머리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길어지면 그녀는 그것을 잘라 팔아서 주린 동생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그 통에 철없는 동생들은 누나의 머리칼이 자라나는 것만 하염없이 기다리고는 했다.
  배는 언제나 고프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생활이었다. 적어도 그날 붉은 북극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골드.”

  자신을 부르는 조용한 목소리에 눈을 뜬 골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왕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옆구리를 덮치는 끔찍한 고통이 없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녀는 옆구리를 붙잡고 신음했고, 마왕은 반쯤 일어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내리눌러 눕히며 입을 열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 누워 있거라.”

  “하, 하지만 제가 감히 마왕전하 앞에서…….”

  “하나뿐인 친위군단장의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권위를 내새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대로 있거라.”

  재차 일어서려는 골드의 몸을 조용히 내리누르며 일어난 마왕은 해가 저물어 아무런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은 골드의 것과 같이 선명한 블론드. 새까만 밤하늘에는 마왕이 죽기 전에는 지지 않을 붉은 북극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골드, 나를 증오하나?”

  “예?”

  골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묻는 마왕의 질문에, 그녀는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은 밤하늘의 별빛을 모두 지우며 떠있는 붉은 북극성을 생기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동생들도 잃지 않고, 심장을 잃어 내가 죽지 않으면 맘대로 죽지 못하는 몸이 되지도 않았을 테지.”

  “마왕전하가 안 계셨다면 동생들이 제 검이 되는 일도, 제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몸이 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골드는 새까만 흑암성의 천장을 침대에 누운 채로 바라보며 마왕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원망하는 기색은 없고, 질책하는 기색은 더더욱 없었다. 골드는 그저 조용한 말투로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그게 문제되지는 않았어요. 일이 힘들었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어요. 불행하지 않았어요. 행복했어요. 아, 심장도 두근거리고 있었고요.”

  아무런 두근거림도 느껴지지 않는 가슴에 손을 대고 빙긋이 웃으며 말하던 골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옆구리의 고통을 잠시 참아내던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어요. 동생들은 칼이 되어 버렸고, 심장은 어딘가에 던져졌어요. 붉은 북극성이 뜨기 전까지는 제가 이 손으로 밀이나 보리가 아닌 사람을 베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는 마왕을 마주 바라보며 골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박살난 심장대신 황금의 심장을 주신 것도 마왕전하시고, 형체도 안남은 동생들의 뼈를 모아 검으로 다시 만들어 주신 것도 마왕전하에요. 제게 책임감을 느껴서라고 말씀을 해주셨지요.”

  “지금은 그대가 내 안전을 책임지고 있지만 말이다.”

  자조하는 듯이 중얼거리는 마왕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골드는 옆구리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아야……역시 아직은 좀 아프네.

  “이 싸움은 마왕전하께서 일으킨 게 아니에요. 물론 용사님이 일으킨 것도 아니고요. 실버님이나, 블루님이나, 화이트가 일으킨 것도 아니에요. 물론 수많은 마군들이나 저 불쌍한 마수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대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이 대지에 떠도는 모든 증오가 향해 있는 나조차도?”

  “네.”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골드의 목소리에 마왕은 말문이 막힌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골드는 남자치고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왕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한 표정에 조금은 피곤한 것 같은 미소를 되돌려주며 말을 맺었다.

  “이 싸움이 마왕전하를 불렀을 뿐, 마왕전하께서 싸움을 부른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용사님도 증오하지 않아요. 단지 이 싸움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자다. 골드. 만약 용사가 구해주었다면 그대는 용사와 함께 싸웠을지도 모르겠군.”

  “에! 그건 아니에요! 분명 용사님은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멋지긴 하지만. 저는 역시 미남이신 마왕전하께서 더 좋…….”

  갑작스러운 마왕의 말에 당황해 변명하려던 골드는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았다. 피가 돌지 않는 몸인데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멍하니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마왕은 곧 낮게 웃기 시작했다.

  “훗, 후후후……하하하하.”

  낮은 웃음은 곧 즐거운 폭소로 바뀌어 성을 울린다. 그리고 골드 또한, 그런 마왕의 모습에 입가를 가린 손 아래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흑암의 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누운 채로 손을 뻗어서 침대위에 흩어진 아름다운 금발을 매만진다. 길고 매끄러운 금실 같은 머리카락은 그만큼이나 긴 새까만 머리칼과 섞여 침대 위에 어지러운 모양을 만들고 있다. 에보니는 고개를 조금 돌려서 자신의 곁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가볍게 감은 눈꺼풀. 가볍게 벌어진 입술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에보니는 조용히 손가락을 뻗어 오렘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음…….”

  이마에 닿는 손가락의 감촉에 조용히 눈을 뜬 오렘은 눈앞에 있는 에보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보니…….”

  아직 잠에 취한 오렘의 달콤한 목소리에 빙긋이 웃으며, 에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뻗어온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는다. 오렘은 아직 홍조가 머물고 잇는 에보니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보니, 아름다워…….”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일까요?”

  뺨을 쓰다듬는 오렘의 손에 손을 겹치며 농담처럼 중얼거리는 에보니. 오렘은 그녀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곧 쿡하고 짧게 웃었다. 조금 몸을 움직여 오렘에게 몸을 붙인 에보니는 옆으로 누운 그와 이마를 맞댄 채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 아래의 검은 눈동자. 여자인 자신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그녀의 마법사. 몸을 덮은 침대의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오렘의 손을 잡은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드럽네요. 오렘님의 손은.”

  “따듯하네. 에보니의 손은.”

  “오렘님을 생각하면 따듯해져요.”

  “에보니 덕분에 부드러운 거야.”

  잠시 말이 멈춘다. 손을 맞잡은 채로, 이마를 맞댄 채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곧 수줍은 듯이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붉은 입술이 서로의 몸을 부빈다. 메마른 결을 적시는 감미로운 타액. 내쉬는 숨결은 감미로운 열락. 물러날 곳도 나아갈 곳도 없이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는 갈구.
  긴 듯 짧았던 연인의 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에보니와 오렘은 서로에게서 입술을 떼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렘님.”

  “응?”

  “조금……추우실 것 같아요. 에취.”

  아무것도 입지 않은 오렘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재채기를 해버리는 에보니의 모습에 오렘은 조용히 웃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석양조차 저물어 창가로 스며들어오는 것은 어슴프레한 밤. 오렘은 침대 밑에 흩어진 자신의 옷을 대충 걸쳐 입고는, 저 멀리에 던져진 에보니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늘 입고 다니던 붉은 색의 기사단복이 아닌 흰색의 드레스,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느라 고생했을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옷을 집어 들던 오렘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창가에 처음 보는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기에, 시선이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얼룩은 너무나도 새빨갛고 선명한 모습으로 오렘의 눈을 사로잡았다. 물감이나, 피가 묻은 것처럼 퍼지는 것이 아닌 모양을 유지한 채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은 얼룩이 시작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든 오렘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렘님?”

  시트를 휘감은 채 의아한 눈으로 그를 부르는 에보니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붉은 얼룩에 홀린 것 같은 눈동자로 자리에서 일어난 오렘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얼룩에 손을 가져다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얼룩이 손바닥에 맺힌다. 손에 담긴 얼룩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새까만 밤하늘의 꼭대기에서 이글대는 증오를 담고 빛나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새빨간 별.

  “붉은……북극성…….”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연인들의 앞에 나타난다는 저주의 북극성. 용사와 마왕의 전쟁을 예고하는 멸망의 전도사. 그리고 그것을 가장 처음 본 자를……마왕으로 만드는 증오의 전달자.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오렘님? 왜 그러세요?”

  “왜, 왜 나에게……어째서 우리에게?”

  핏기를 잃은 얼굴로 뒷걸음치며 에보니를 돌아보는 오렘. 그녀는 그의 그런 표정에 놀라 침대에서 내려왔고, 오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밀어진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고, 어느 샌가 오렘의 손안에서 머물고 있던 붉은 얼룩이 순간 엄청난 빛을 뿜어내 방안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오렘님!”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시뻘건 빛이 온통 시야를 채우는 가운데 오렘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미는 에보니. 바로 코앞에 있는 데도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오렘의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신창이의 붉은 갑옷을 입은 붉은 머리칼의 소년. 입을 꾹 다문 채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오렘을 쳐다보던 소년은 온통 피투성이인 손을 들어 오렘을 겨누었다.

  [운명을 증오하십시오.]

  소년의 입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목소리만이 머릿속으로 전해져온다. 오렘과 에보니는 심하게 갈라지고 쉬어 터져 도저히 그 또래 소년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었다.

  [벗어날 길도,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이 멈추지 않을 굴레를 계속 굴려 나가는 자들일 뿐입니다.]

  “무슨 소리를…….”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오렘의 목소리에 소년은 무언가를 바라보듯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울었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무너져 가는 그 성안에서 혼자 미친 듯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주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듯, 위로 시선을 향한 채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년의 눈가에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이 쉬어터지도록 울어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동자에 맺히는 붉은 액체. 소년은 피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것이 운명. 비극만이 존재하는 길 끝에 놓인 피할 수조차 없는 절망. 당신들도 결국은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분명 최초의……!”

  소년을 휘감은 붉은 빛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외치던 에보니의 목소리는 들어 올린 소년의 팔에 막혔다. 피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 소년의 피투성이 몸을 더욱 더 붉게 물들인다.

  [그렇기에 하는 겁니다. 용사가 될 여인이여. 그리고 마왕이 될 남자여.]

  “무슨……!”

  경악한 오렘의 목소리. 동시에 소년을 휘감고 있던 붉은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날카롭게 휘둘러진 소년의 왼팔이 오렘을 겨냥한다.

  [당신은 마왕! 서로 다른 색을 지닌 4명의 권속을 모아 세계를 남김없이 불태우는 절멸군세(絶滅軍勢)의 수장!]

  호를 그리며 떨어진 소년의 오른팔이 에보니를 겨냥한다.

  [당신은 용사! 붉은 노을의 파편으로 만든 12성좌의 검으로 남김없이 마를 부수는 천만파마(千萬破魔)의 검사!]

  늘어트렸던 양팔을 머리위로 들어 올리고 피눈물을 흩날리며 외치는 절규와도 같은 단말마의 선언.

  [이것은 나의 저주! 절망을 양분삼아 피어난 천억의 저주! 서로의 몸을 찌르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종말의 저주!]

  붉은 북극성의 빛이 밤하늘을 가득 메운다. 새까맣던 하늘은 온통 붉은 빛. 붉게 물드는 하늘에서 쫓겨난 검은 색의 어둠은 대지를 물들인다. 못 박혀 있어야만 했던 그림자가 일어서, 달빛이 그들을 물들인다. 악몽 속에 잠들어 있어야만 했던 끔찍한 짐승들이 안개를 헤치고, 그들의 숨결이 다시 안개를 물들인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되살아난 것들이 외친다. 우리에게 우두머리를 달라고. 그리고 오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렘의 손에 자리 잡고 있던 붉은 얼룩이 무서운 속도로 팔을 타고 올라가 목으로 스며든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참기 힘든 충동에 오렘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라리히라라힐라이라
  하일라히라히라히라
  힐리라이라라힐라리
  무섭도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창가를 타고 흘러, 붉은 하늘과 어두운 대지를 적신다. 그 목소리에 생명을 얻어 대지를 박차고 일어서는 새까만 마군의 무리. 17개의 머리를 가진 끔찍하게 거대한 뱀이 계절의 잊은 후원을 유린한다. 기이한 노래 소리에 홀려 무심코 밖으로 나온 자들을 살육하는 무자비한 마군의 칼날. 오렘은 그 아비규환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보고, 귀로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를 멈출 수는 없다. 도저히 남성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의 얼굴 또한 더욱 아름답게 바뀌어 가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목숨을 잃는다. 그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홀리지 않는 것은 단 하나.

  “그만둬요! 오렘님! 오렘님!”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에보니의 목소리에도 오렘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피눈물을 흘린 채 서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소년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져 온다.

  [이제 노래하는 마왕을 멈추는 방법은 죽이는 방법뿐입니다. 당신은 용사.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왕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짓, 할 수 없어!”

  [의지는 버리십시오. 운명은 이미 돌기 시작했으니까.]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바닥이 흔들린다. 아직도 둘의 옷가지가 어지럽게 흩어진 채인 바닥을 박살내며 머리를 내미는 마수. 극심한 진동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에보니의 손은 오렘의 바로 앞에서 허공을 긁는다. 그것이 마지막, 무아지경에 빠져 노래를 부르는 오렘과, 붉은 빛을 휘날리며 사라져가는 소년의 모습을 망막에 가득 담은 채.
  에보니는 추락했다.

  “오렘니이이이임!”


  
  “……!”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을 내뱉으며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마왕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거칠게 주위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찾던 마왕은, 곧 자신이 꿈을 꾸었음을 깨닫고 무너지듯이 옥좌에 주저앉았다. 멍하니 눈앞으로 들어 올린 손을 바라보는 마왕. 늘 자신을 곁을 지켜주기로 약속한 기사 덕분에 작은 흉터조차 없는 부드러운 손을 바라보던 마왕은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으윽…….”

  어떤 미녀라도 비교를 두려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진다. 입술을 짓씹어 후회에 찬 신음이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은 채, 마왕은 더욱더 손에 힘을 주어 눈가를 내리 눌렀다.

  [무엇을 슬퍼하고 계십니까.]

  문득 귓가를 때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마왕은 텅 빈 눈구멍에서 형형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실버의 모습을 발견했다. 마왕은 눈가를 덮었던 눈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슬퍼하고 있소.”

  [설령 돌아온다 해도 그 결과를 바꿀 수 없을 시간을 슬퍼하고 계십니까.]

  실버의 목소리에 마왕의 얼굴이 거칠게 들렸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실버를 바라보며 그는 끊어내는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꿀 수 없다고 했나?”

  분명 사라졌을 호흡이 멈추는 것 같은 착각에 짓눌리면서 실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압도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눈동자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실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왕전하의 운명은 절대적인 것. 설령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여도 마왕전하께서는…….]

  “아니, 실버.”

  단호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든 실버는 다시 한 번 마왕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밤보다도 깊은 검은 눈동자는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감정만을 담고 있었다. 실버는 슬픔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감정 모두를 나타내고 있는 마왕의 눈동자에 놀랐다. 그리고 마왕은 그 슬픈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하여도 좋소. 나는 단지 그 손을 잡아주고 싶을 뿐이니까……. 피곤하군. 나가보시오.”

  옥좌에 몸을 누이며 손을 내저어 보이는 마왕의 모습에 실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 뒤에서 피곤한 듯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말이 맞았소. 실버.”

  [무슨 말씀이십니까.]

  “뜨거운 사랑은 붉은 북극성을 부르는 법이더군.”

  그 말투에 분노나 살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용히 뒤를 돌아본 실버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마왕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용사는 손을 감싸고 있는 황금색의 건틀릿을 벗고 새벽의 어스름 사이로 손을 뻗었다. 안개가 섞인 쌀쌀함이 손가락을 간질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감촉이 살아난다. 손가락 사이에 감기던 머리칼의 감촉, 가슴에 와 닿던 부드러운 손의 감촉. 맞닿았던 이마와 아름다웠던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용사님.”

  등 뒤에서 들리는 에비누스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뜬 용사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용사는 손을 거둬들이고 건틀릿을 낀 후에, 방금 전에 내밀었던 손을 옆으로 들어올렸다. 일사불란하게 울려 퍼지는 갑옷의 절걱거림과 말의 투레질, 부하들을 다그치는 백인장들의 목소리. 한때는 그리워했던 그 전장의 소란스러움이 지금은 무겁게 용사의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이들을 이끌고 누구를 죽이려 하는 걸까. 가장 사랑했던,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걸까.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데, 지금도 보고 싶은데, 그를 죽여야만 하는 걸까. 아니, 이런 생각도 아무런 소용없어. 그만두자.
  그녀는 이를 악물어 자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사자검을 뽑아들어 안개를 가른다. 그녀는 그대로 말을 돌려 자신의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마군들을 격멸하고, 마왕의 성을 함락할 왕국 최후의 기사단. 용사는 사자검을 하늘로 들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는 이게 마지막 싸움입니다.”

  조용한 용사의 목소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사는 단 한명도 없다. 용사는 그런 그들을 둘러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죽어버린 전우들과 구하지 못한 생명들, 목숨을 걸어도 살아남을 수 없었던 수많은 전장들. 이제 그 모든 것에 마무리를 지을 때가 왔습니다. 이 싸움이 끝나게 되면 모든 것이 결정 되겠지요. 모두 살아남을지도, 모두 죽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용사는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후퇴하지 않아도 될 것 입니다.”

  깃발이 펄럭인다. 불사조의 문양에 겹치듯 새겨져 있는 사자의 문양. 자신의 기사단이 밤새 고쳐 만든 그 깃발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용사는 곧 말머리를 돌렸다. 걷혀가는 안개 사이로 대지를 물들이며 포진해 있는 검은 마군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비누스에게 명령을 전했다.

  “거창 준비.”

  “거창 준비!”

  거창 준비를 알리는 목소리 병사들 사이로 퍼진다. 거창을 들어 올리고 말들을 진정 시키는 기사들. 용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은 색의 대군들 사이에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흑암의 성을 바라보았다. 이를 악물고 말의 옆구리를 박차로 찬다. 길게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앞발을 들어 올리는 용사의 말. 그녀는 그대로 토해내듯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

  맹렬히 달려 나가는 용사의 뒤로 함성이 대기를 울린다. 돌진을 시작한 기사단의 말발굽이 대지를 두드린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떠오르는 날개를 편 불사조. 마군들의 투구 속 에서 붉은 빛이 빛나고, 마수들이 거친 포효를 내뱉는다. 미친 듯이 물결치며 다가오는 불사조를 집어삼키려는 검은 해일. 그 첨단이 부딪칠 때 전장은 개전의 뿔피리를 분다.

  “에보니…….”
  흑암의 성에서 그 전장을 지켜보는 마왕과.

  “우회기동!”
  기사단을 이끄는 용사와.

  [싸우십시오. 그리고 운명을 저주하며 죽어 가십시오.]
  먼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피투성이의 소년.


  그것이 이 전쟁의 개전(開戰)이었다.



  -Never Ending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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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cter Data

황금의 용사 - 에보니 클로버링(Sword Of Gold - Ebony Cloverring)
23세. 왕국군 여기사. 검은 머리칼에 황금색 눈동자. 165Cm. 40Kg.
천만파마(千萬破魔)의 검사이자 전전전승(全戰全勝)의 기사. 일곱 번째 성좌의 성검인 사자검 레오에게 선택받은 3번째의 용사이자, 마왕을 쓰러트린 49번째의 용사. 이름인 “황금”은 늘 입고 다니던 갑옷인 [열사의 지평선]덕에 붙여졌다.
흑암이 마왕이 나타난 지 한 달 후, 사자검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불사조기사단을 이끌고, 왕국의 외곽부터 착실하게 마군을 섬멸. 개전 다섯 달 만에 모든 마군을 완전격멸하고 흑암성에 총공격을 감행. 마왕을 쓰러트리고 흑암성 안에 남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능력치
CLASS : 인간 기사
TYPE : 근거리
STR : C (C)
INT : B (B)  
DEX : A- (A)
WIS : B (A-)
CON : C (C+)
CHA : B (A)

고유능력
[단련] : 개인능력. 랭크는 C. CON에 +를 붙인다. -인 경우는 상쇄시킨다.

직업능력
[통솔] : 군단능력. 랭크는 B. 중급 이하 규모의 군단을 이끌 경우, 병사의 랭크를 한 단계 상승시킨다.
[전술] : 군단능력. 랭크는 A. 상급 이하 규모의 군단을 이끌 경우. 군단의 랭크를 한 단계 상승시킨다.
[기승] : 개인능력. 랭크는 C. 훈련된 기승마. 혹은 훈련된 기승수에 탑승할 수 있다.
[무기수련(검)] : 전투능력(근접). 랭크는 A. 검 종류의 무기를 사용할 시에, 추가 공격기회와 추가 피해점을 얻는다.

장비
일곱 번째 성좌의 성검 [사자검 레오]
랭크는 A+. 타입은 검.
-사용자의 CHA랭크를 한 단계 상승 시킨다.
-적의 장비 방어력을 무시한다.
-능력
[포효] : 대군능력. 랭크는 A. 상대하는 군단의 랭크를 한 단계 낮춘다.
[중압] : 대군능력. 랭크는 A. 상대하는 군단의 랭크가 사용자의 CHA보다 낮을 시, 군단전체의 행동력을 둔화시킨다.
[투기] : 대인능력. 랭크는 A. 어떤 전투상황이라도, 사용자의 능력치 하락을 막는다.

황금의 갑옷[열사의 지평선]
랭크는 B. 타입은 전신갑주.
-착용자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열과 화염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는다.
-능력
[다중반감] : 전투능력(물리). 랭크는 B. 상대의 공격을 연속적으로 세 번 반감시켜, 피해를 최소화 한다.
[마력무효] : 전투능력(마법). 랭크는 B. 랭크B이하의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킨다.

질주의 팔찌 [삼두견의 문장]
랭크는 B. 타입은 장신구.
-착용자의 DEX에 붙은 추가점을 무효화한다.
-착용자의 군단에 공포로 인한 상태이상을 모두 무효화 한다.
-전력질주를 일주일간 유지하여도 지치지 않는다.

오로라의 귀걸이[뒤집어진 성좌]
랭크는 C. 타입은 장신구.
-착용자에게 향하는 모든 장거리 물리공격을 빗나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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