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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무제 - 2

2005.01.27 22:54

Harzpid 조회 수:174

  병사는 돌진한다. 그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났고 무엇이든 가능케 할 것 같았다. 어쩌다가 빗물에 미끄러지는 병사도, 그를 짓밟고 돌진해가는 병사도.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었다.

「윽!」
「으아아아악-!!!」

  하나는 복부, 하나는 눈.
  고통은 언제나 속에 감춰진 것이다. 모든 "고통"이란 것은 그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

「…용맹하다는 표현은 그다지 맞지 않을 듯 하군요.」
「예, 단지 작은 물의 흔들림일 뿐입니다.」

  그는 그 한마디를 마치고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통 정도만 가릴 가벼운 갑옷을 입고, 손에는 시사(矢射)에서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한 장갑을 끼워놓은 채, 활줄에 팽팽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손이 풀리는 순간, 누군가는 죽거나 다친다.
  그것은 이 왕의 화살이 가지는 명중률에 대한 신뢰 이전에, 저 밀려들어오는 적병의 숫자에 근거한 것. 그 적병들의 행진에서, 선두에 서있는 충각차는 상면에 덮혀진 얇은 철갑으로 화살을 막아내며 꾸준히 전진한다.

「활로는 부족하겠군요.」

  장갑 째의 손으로 검을 들었다.
  아크리안 부스터. 바람의 검. 왕의 상징.

「하아…」

  검을 잡고, 그 극(極)을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흔한 검이라면 이것으로도 손상을 입을 것이나, 이 검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어 왔고, 그만큼의 제련을 거쳐 구성된 검이리라.

「I`m a fiery of wind in the lunartic battlefield─我狂戰場風精」

  파열음.
  왕이 검을 내려치는 순간, 바람은 이에 맞춰 저들의 병기를 베어낸다.

「when the raise a sword, while blow from the skies─劍揮時始吹天」

  바람의 검무. 너무나 평온한 그것.
  그것은 기어코 피보라를 불러 일으키는 자극제로써 충분한 역할을 해낸다. 그렇게 부서져버리는 충각차는 이미 3대.
  그라우티드는 선왕(先王)을 능가하는, 이 바람의 검과의 감응에 놀랐고 그 위력에 놀랐으며, 이러한 위력이 누구 하나 마적 행위로 인해 일어난 것임을 모르도록 하는 그 능함에 놀라야만 했다.
  그때,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영차.」

  언제부터였는가. 붉은색에 가까운 머리칼이 적절한 길이를 유지하며 어깨를 살짝 덮었고, 급소가 될만한 가슴 부위만을 가볍게 가리는 흉갑인 채의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모습은 상관 없었다. 다만 언제부터 이 성벽에 올라와 아군을 베어낸 것인가. 그것은 크나큰 의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에게는 바로 옆에 지켜야 할 대상이 있었고, 저 자는 그 대상을 위험에 빠뜨리기 충분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앞으로 나선 그라우티드는 자신이 쓰던 단창(短槍) 두 자루를 휘두르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넌 누구냐.」

  화려한 황금빛 드래곤의 입으로 장식된 보호대를 가진 검이었다. 그 날(刃) 역시 날카로움으로는 어떠한 것에서 쉬이 물러나지 못할 검. 그라우티드가 휘두른 단창의 중간을 정확히 찔러 멈춘 검. 그 검의 주인이 말했다.
  이 한마디에 담겨있는 느낌에, 그라우티드는 그 몸을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정상이 아니다. 너로써는 어찌할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
  오로지 연결되지 않는 3단 논법이 무한 루프를 반복한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가 가진 의무감은 이 3단 논법을 잠시 억눌렀다.

「으아아앗!!!」
「느리다.」

  그리고 맞서는 검. 그 속도는 분명 "빠름"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정지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라우티드의 창술은 약간은 기묘했다. 하나의 창은 길게, 하나의 창은 중간으로 잡는다. 길게 잡은 창은 휘둘러지고 중간 정도로 잡은 창은 찌르기를 한다. 창은 본래 멀면 찌르고 가까우면 휘두르는 것. 그렇기에 멀리 있을 때 휘두르고 가까이 있을 때 찌른다면 도리어 함정이 된다. 강력한 덫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검은 그 함정이 움직이고 덫이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기 전에 그라우티드를 직접 노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비구름은 태양을 가렸다.

「재미없군.」

  그 움직임. 분명히 체내에 마력을 응집하고, 그 마력을 통하여 강화된 것.
  이그드라실에서 니르바나까지. 그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몸에 마력을 저장하고 이를 폭발시키는, 그러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이그드라실 조약에 어긋날 터.

「"이그드라실과 아발론 사이의 분쟁에서, 양국의 병사들은 공격 마법 사용을 금한다."… 방금 전의 그건 뭐지?」

  그라우티드는 이미 저 성벽 아래에서 참담한 신음성만 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방치한다면 목숨이 성치 않을 터.
  하지만 그라우티드가 있었다면 오히려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은 정면의 성벽에서 끝에 위치한 곳. 다른 이들이 관심 가질 수 없는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바람의 검에게 받은 힘으로 달려나간다.

「도망가봐야 소용 없다.」

  이 달림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면 그녀는 행하지 않았으리라. 단지 의미가 있기에 달리는 것이다.
  그렇게 측면의 성벽까지 달려나가, 상대를 기다린다. 정면과 후면에만 관문이 위치해있고, 현재는 정면에서 한창 방위전을 벌이고 있다. 수비대로 나간 이들을 제외하면 전부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다. 누구도 이곳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집행자.」

  모습을 드러낸 상대방의 검날에는, 이 떨어지는 비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있는 성벽 위에는, 깔려오는 어둠과 같은 집행자가 서있었다.

「넌 뭐냐.」
「멈춰라. 더 이상의 걸음은 명계(冥界)로의 길일 뿐이니.」

  상대방이 대적세(對敵勢)로 들어선다.

「그렇다면, 그 명계마저 태워주마.」

  속공(速攻)이었다. 분명 그것은 작열하여 흩날리는 화염과 함께 이루어진 것. 그것이 바로 드래곤 브레서(Dragon Breather)라는 검의 능력.
  숲을 태우고 산을 녹일 것 같은 멸겁화로 둘러쳐진 검날은 그를 향하여 내려쳐졌다.

「무한의 칠흑, 그림자를 태울 수 있겠는가.」

  그림자, 집행자는 그 화염을 집어삼켰다.
  그의 손에서 화염의 광무(狂舞)는 어린 새의 날개짓보다 떨어지는 허무의 움직임으로 변해버렸고, 곧 사라져버렸다. 나타난 것은 평범한 검. 그러나 아직 화려함은 살아있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집행자의 손에서 빠져나온 검은 다시 공격을 위한 자세로 바뀌었다.

「대적할 것인가. 기어코 명계의 문을 열 것인가.」

  다시 한번 발화(發火). 이 검은 아직 그 기세를 완벽히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양, 집행자에게 잡히기 전보다 더욱 더 맹렬한 화염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염의 궤적이 허공에 비산(飛散)한다.
  검날은 그 자신이 수십, 수백개가 된 것처럼 모습을 흐트리고 흩날리며 그림자를 향하여 쇄도해간다.

「의현(意現)의 무기.」

  그 역시, 수많은 것들을 베어온 검 아닌 것을 꺼내어 들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것을 들고 왕의 명령을 집행하였는지는 그 자신마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명령을 집행하기로 한 이상, 모든 것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것을 원활히 달성할 도구일 뿐. 내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검을 들고 있었는지에 대한 어떤 것도 없다.
  이제 그림자가 발현될 시간이 온 것이다.

「너의 이름, 그림자에 묻히리라.」

  양자는 돌진하여 그 간격을 나눈다. 그것은 간단히 "검투(劍鬪)"로써 표현될 행위였으나,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양자의 움직임은 치열했다. 아니, 정작 치열함의 극을 향해 달리고 있는 쪽은 저 화염의 검을 든 검사이리라.
  집행자의 움직임은 이전에 그의 왕과 함께 했던 그 베어냄의 동작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묻는 그림자의 움직임. 움직이는 화염은 그 거대하고도 힘찬 기세와 달리, 이 침묵하는 칠흑 속에서 해메는 듯 했다.

「어째서냐.」

  그의 검은 이제 강인한 예기(銳氣)를 품고 검의 재질인 쇠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맑은 은색을 품에 안고 있었다.

「어째서 베어지지 않는거냐.」

  은빛이 허공을 질주. 회전. 아름다운 선을 묘사한다. 검이라는 분류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그 검신(劍身)에 갖추고 그 날은 덧씌워진 기운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검기(劍氣)라는 것. 몸에 자연력을 모으고, 이것을 병장기를 통하여 부림으로써 강력한 무기로 승화시키는 수법.
  그러나 벨 수는 없었다.

「왜 벨 수 없는 거냐! 어째서!」

  통일계, 제국 당시 동방의 한 민족은 자신의 몸에 자연력을 모으고, 이를 외부로 꺼내어 싸우는 방법을 찾았고 수없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 민족은 그것을 기(氣)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병장기에 덧씌워, 똑같이 기를 씌운 병장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물질은 베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의 곳곳에 퍼져나갔고 이것은 그 민족이 멸족(滅族)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검사들이 이를 배워 사용하였으나, 그러한 방법과 접한 적 없는 제국 극서부 지역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고, 반대로 이와 인접한 극동부의 한 지역에서는 이를 배척하였으며, 그곳 출신의 검사는 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러한 방법으로 이름이 알려진 자들을 베어내며 말했다.
  我桓屬人言 劍卽殺人機 斬剛何劍用─나 한(桓)에 속한 사람이 말하니, 검은 곧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인데 굳센 것을 베는 것이 어찌 검에 쓰인단 말인가.
  많은 이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크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이 아닌 것으로 베어냄을 행할 수 있겠는가.」

  맑디 맑은 강철의 격음(擊音). 양자 사이를 매꾸는 그 소리는 더욱 더 묻혀져가고 있었다.
  왕은 이를 보며 놀라워했다. 저 자의 공격 역시 강하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저 집행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림자의 수호라는 것을 행한 그는 언제나 왕과 가까이 있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왕권을 지키기 위한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위치한 그가 보이는 이 능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

「젠장.」
「이그드라실 조약에 따라 투항하겠는가. 아발론은 이그드라실 조약의 포로처분 조약을 준수한다.」

  상황은 순간적으로 종료되었다. 앞의 사내는 횡으로 공격을 시도하였고, 집행자는 이에 그의 어깨로 그의 무기를 올려놓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 때의 거리라면 드래곤 브레서의 강렬한 화기에 이미 화상을 입었어야 했으나, 집행자는 그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이 자의 목을 겨눈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매우 느릿하게, 그 검을 검집에 넣고 검대를 풀어 집행자의 옆쪽으로 던져놓고 말했다.

「쳇, 항복한다.」
「그렇다면 지금 마력을 정지시키겠다.」
「…마법을 알고 있나?」

  집행자는 놀라워하는 상대방의 얼굴과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어깨에 얹어 그 마력을 멈춘다. 그것은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마력이라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힘이었고, 그것이 이 포로가 된 남자의 몸에서 마력이 흐르는 주요 통로에 충격을 주어 마비시킨다.

「윽, 역시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집행자는 어느새 자신의 무기를 허리춤에 돌려놓고, 그가 던져놓은 검을 집어들고는 그의 왕 앞에 내밀며 말했다.

「저 자는 현재 무력하니, 병사들을 불러 포박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검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왕은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잡으며 긍정형을 표했고, 그 의사를 받은 집행자는 햇빛에 닿아오는 그림자와 같이 사라졌다.
  이제 왕이 외칠 차례가 되었다.

「누구 없는가! 여기에 그라우티드 경이 다쳤고 포로가 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집행자는 달빛을 질주한다. 이 전장 너머 적진 뒷편에 그가 알고 있던 누군가가 있다. 그러한 생각 하나만으로 달려나간다.
  달빛은 지극히 차갑다. 차가운 것은 극한에 도달하여, 이윽고 와전된 온기로 변해버린다. 그 온기를 몸에 담고 생체적 활동을 시작하여, 더욱 더 달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아? 등장할 시기는 아닌데. 걸려버렸나.」

  분명 금속제의 양자는 충돌했지만 금속성을 내진 못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말 그대로 폭발하는 소리 자체. 집행자는 자신의 병기를 뽑음과 동시에 가로로 휘둘렀고, 이것은 분명히 뒤를 돌아보고 있던 그에게 죽음을 보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무언가"로 튕겨내었다.

「다시 만났군. 마법사.」
「마술(魔術)이라 불러달라고 했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기능공이라.」

  마법사. 피를 다루는 마법사였다. 어떠한 방법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존재했던 대지를 피로 물들였을 뿐이었다.
  낙하하는 무언가. 무너지는 인체(人體). 쌓여가는 시집묘(屍集墓). 물들이는 피. 자신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검을 놓았으나 모두는 죽었다.

「사라져라.」
「안됐지만 그 의견은 기각해두지. 나 역시 할 일이란게 있으니까 말이야.」

  그의 병기가 구름에 가려져가는 달빛의 그림자와 함께 그의 목 언저리에 도달한다. 그 궤적의 속도는 빠른 것이 아니었지만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획.
  공간은 지극히 어두워져, 양자의 모습이 그야말로 어둠에 묻혔다는 표현으로 과하지도, 족하지도 않은 상황을 보이고 있다.

「다시 봐도 그 검술은 대단해. 그곳의 병기술이란건 전부 그 정도는 된다는 건가? 언젠가 가봐야겠어.」

  그림자는 밤바람에 걷히고 달빛이 드리워진다. 잿빛이 드러난다.
  드넓은 초원. 그 땅은 너무나 푸르고 넓어, 그것이 이 회색을 지닌 자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로 밝은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 갈 시기는 아니야.」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백색.
  백색의 끝에 맺힌 은빛은 집행자의 목에 존재했다.

「환상실체계(幻想實體界)에 온걸 환영하지. 실지(實地)가 어디인지를 생각해보자면 누가 환영하고 누가 환영받아야 할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마법사는 손으로 직접 흉기를 쳐,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위험을 제거한다. 그 이후 싸움이 시작되리란 것은 심오한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백색의 검술은 회전이었다. 그리고 무광택한 흑색의 검술은 회전의 존재를 용인치 않았다. 마법사는 단지 뒤로 물러나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앉아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 전체가 회전하는, 과다한 소모가 들어가는 그러한 회전이 아니었다. 단지 검 스스로가 손 안이라는 한도를 규정하고 회전하는 것이다. 단순히 내려쳐지는 공격 뒤에는 검의 회전으로 인한 또 한번의 내려쳐짐이 존재하기도 했고, 올려베어지는 공격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것이 이 공간 내에서 존재할 수 있는 백색의 그녀가 지닌 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눈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찌르기. 여지껏 이뤄졌던 베어내는 검과 다른 방식에 그는 괴리감을 느끼고 그 공간에서의 싸움 자체를 포기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바른 선택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물러난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곳곳에서 찔러들어오는 검. 그 숫자만 수십.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눈 앞에 있기에 모순되는 이 왜곡의 검.

「나와 반대되는 세상이었군.」
「명계(冥界)를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입니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당신은 절 이길 수 없습니다.」

  ─────돌아온다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양자 사이에 전해진 그 한마디는 허공에 울리지 못했고, 양자의 또다시 이어진 충돌은 실제적인 소리보다 더욱 더 크게 울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검은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어떠한 검이든 가지고 있을, 깨끗한 철로 만들어 은빛을 발하는 검신에는 날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위(僞).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폭격 따윈 이뤄질리 없다.

「환상계통의 검으로 펼쳐진다면, 결코 물질적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것은 검으로써 간격을 나누고 합치는 검투가 아니었다.
  폭격하는 자와 요격하는 자. 피를 포식치 못한 흉기는 날카롭게 떨어져 폭발과 다름없는 반응으로 대지에 꽂힌다.

「그래도 멀었다.」

  땅에서 그림자가 그 고개를 쳐든다. 그것들은 일관성 없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모습을 하나씩 갖춘 채 이 폭격에 항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너 역시 나를 이길 수 없다.」
「됐어. 그만두지.」

  그리고 백색의 개체는 사라졌고 이 초원이라는 배경 역시 본래가 가진 평범한 길가로 돌아와있었다.
  회색의 남자는 긴장과 한층 멀어진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왕과 만나기 위해서다. 뭐… "망명" 정도로 해두지.」

  저 자가 누구이기에 감히 왕을 만나려 하는가.
  왕의 명을 행하는 자, 수호하는 자로써 그는 그의 행동에 반대의사를 표한다.

「인정 받지 못한 자는 본토로 갈 수 없다. 나를 통하려는 생각이라면 버려라.」
「그쪽과는 상관 없어. 게다가 방법이 있으니 가려고 하는게 아닐까 싶은데.」

  다시 한번 극(極)이 움직인다. 결코 빛과 같은 속도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 빛으로 인해 뻗치는 그림자의 속도와 대등하리라. 그러나 굶주린 짐승의 이빨은 그 그림자를 떨쳐낸다.

「다시 싸우고 싶나? 아직 블러디 팽(Bloody Fang)은 멀쩡하니까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는데.」

  그것은 짐승의 이빨과 같았다. 핏빛의 짧은 몸은 완만하게 휘어져 있었고, 그 날은 날카롭기만 했다. 블러디 팽. 저 마술사의 손에 역(逆)으로 잡힌 그 단검의 이름은 피에 굶주린 이빨이었다.
  공간을 점유하는 핏빛 기운.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는 거품의 형세. 생명의 상징인 피가 가지는 가장 잔혹한 모습.

「3급 원소의 피.」
「잘 알고 있군. 이건 꽤 신경 쓴 마법이라지. 피를 격발시키도록 바람과 화염을 완전합성 시킨 대형마법.」

  이 불가시(不可視)의 공간에 접촉하는 순간 온 몸의 피가 급속히 움직이며 결국에는 폭발한다. 그것이 그가 만들어낸 마법, 블러드팝 에어리어(Bloodpop Area).
  이러한 곳에서는 집행자 역시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두고, 마법사는 걸어간다.

「이건 몇 시간 지나면 풀리겠고… 다음에 본토에서 보지.」
「…역시 달라진 건 없군. 피의 마법사─하르츠피드. 그때도 그렇고,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냐.」

  그 질문에, 마법사는 걸어가려던 길을 되밟아 그의 앞에 선다. 얼굴에 서린 것은 현실을 너무나 깊숙히 인지한, 그렇기에 보일 수 있는 정도의 웃음. 그러한 웃음은 결코 짧은 시간을 살아가며 얻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는 흑색도, 백색도 아니야. 다만 전장─체스필드(Chess field)의 승정(Bishop)일 뿐.」
「그렇다면 너의 목적은 무엇이기에 왕과 만나려 하는 것이냐.」

  그렇게 아쉬워 하는 표정. 이 변동은 흔히 가질 수 있는 광기로 인해 바뀌는 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그가 가진 움직임. 흐름. 환상 그 자체.
  집행자의 머릿 속은, 이러한 표정의 변화와 그것의 근본이 되는 "무언가"에 대한 깊은 의문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통일계를 뒤집어버린 대사건의 주역. 피의 마법사. 회색의 존재. 그 이외에 모든 것이 불명인 이 하르츠피드란 자에 대한 의문으로.

「목적? 나는 여왕(Queen)에게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주려 가는 것 뿐이야.」

  그렇게 회색의 존재, 피의 마법사는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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