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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Delusion' -진월담 월희



깨어진 창문사이로 아직은 어둑어둑한 햇볕이 들어오고있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거미는 자신의 집을 잠시 버려두고 언젠가 쥐들이 뚫어놓았을 작은 구멍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피어나는 먼지구름과 함께 케케묵은 악취가 숨을 막는다.

옛날에는 분명 훌륭하게 장식되었을 17세기풍의 작은 방은,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 허름하고 더러운 작은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다.

벽지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버려 곰팡이가 피어나지 않은 곳이 없고, 유리창도 모두 깨어져버려서 이른 아침에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어두운 방의 구석구석에는 낡고 볼품없는 작은 인형들이 널 부러져있다.

어쩌면 이곳은 작은 소녀의 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려했을 인형의 방은 이제 거미들에게 훌륭한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 이 집 창고에 이런 게 있었어. 한잔 마셔보지 않을래?"
한 남자가 양손에 연한 금빛의 화이트와인을 각각 들고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그는 옷 끝이 발목 바로 위까지 오는 상아빛 긴 롱코트를 두르고 그보다 약간 짙은 색의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주 투명한 화이트와인과도 같은 밝은 금색의 장발을 가볍게 묶은 검은 머리띠와, 목 부위 전체가 가려지는 커다란 옷깃 사이로 맵시 있게 매어진 하얀 스카프가 미려한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며 약하게 휘날렸다.
그리고는 양손에 든 와인이 행여 라도 넘칠까 싶어,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 응...? 그런 게 있었어? 헤에.. 잘도 찾아냈네?"
어딘가에서 장난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방 한구석에 놓여진 작은 안락의자가, 삐걱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의자에 앉아있던 검은 소녀는 또각또각 하고 마루바닥을 짓누르는 구두소리를 내며 금발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 적어도 30년은 넘은 와인이군. 전쟁 중에 습격 받은 집 치곤 좋은 게 남아있는데?"
그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조금은 작은 와인 잔을 자신 앞에 우뚝 서있는 검은 소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건배의 제스쳐를 취한 뒤, 가볍게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호오... 화이트 와인치곤 오래 숙성 되었을 텐데.. 맛이 진하지가 않은걸...? 이건 아마..."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그라브."
대답을 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검은 소녀가 그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와인 잔을 입에서 떼어내며 말한 것이었다.


" 아아... 그래, 그라브로군. 그러고 보니 쌩떼밀리옹도 같이 있었는데 가져다줄까? 하긴 그건 침전물이 1센티 정도 차있으니 별로겠군."

" 이런 쓰레기, 가져 올 필요 없어."
차갑게 대답하고는 소녀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몸을 떨게 만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소파 뒤에서 들려왔다.


" 네가 쓰레기라면 쓰레기겠지."
남자도 똑같이 자신의 등 뒤로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던져버렸다.

떨어진 쪽이 계단 인듯,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상당히 늦게 들려왔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자, 작고 허름한 방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여기 도착한지 이틀이 지난 것 같은데, 굳이 이곳에서 지낼 필요가 있는 거니?"
그가 약간은 빈정대는 말투로 말했다.

" 응. 아직 보디가드 한명이 돌아오질 않았잖아?"
그녀가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한 말투로 대답하였다.
“녀석... 꽤나 늦는데... 분명 호출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롱코트에는 분명 그의 팔보다도 긴 소매가 달려있었지만, 코트를 걸치기만 하는 것이 취향인지, 그의 소매에는 팔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교회 녀석들을 피해서 오려면 상당히 멀리 돌아와야 할 거야.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라구.”
소녀가 허름한 소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소녀가 풀썩하고 소파에 몸을 붙이자, 소파 옆에서 누워있던 커다란 개가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이마를 소녀의 손바닥에 갖다 대었다.


“이 아이도 심심한가봐.”
소녀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하얀 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계단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녀석이 오는군.“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발을 소녀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옮겼다.


삐걱삐걱하고 들려오는 낡은 계단소리가 마치자,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17~18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계단 쪽에 서있는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검은지, 그의 머리는 칠흑 같은 어둠과 동화 되어버릴 정도로 짙은 검정색이었다.
거무칙칙한 짙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그와 비슷하게 검은 바지를 입었지만, 마치 갑옷과도 같은 검은 물체가 그의 오른발을 허벅지에서부터 감싸고 있었다.
오른손은 주머니에 집어넣어 보이지 않지만, 왼손에도 오른발과 같은 갑옷같은 물체가 팔목에서부터 감싸져있었다.


“늦었구나,”
소녀가 하얀 개의 이마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천천히 떼어내자, 자신의 앞에 서있는 검은 청년에게, 와인 잔을 깼을 때와 같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소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녀와의 거리가 단 두 걸음정도가 되자, 그제야 그의 발이 멈추었다.


“어째서 돌아오라고 했나?”
방안에 흐르는 침침한 분위기를 대변하듯,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어두웠다.

“후훗...”
소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어 내었다.

“.......”

“아아.. 미안미안. 지금 웃은 건 ‘그아이’니까 봐줘. 흐음... 널 부른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소녀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그 여자를 잡아오라고 한건 너였다. 그리고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방해한거지?”
검은 청년은 화가 났는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항의해왔다.

“걱정 마. 일은 너무나도 잘 진행되고 있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서 내 계획을 도와준 셈이랄까? 난 너의 임무가 충실히 수행되었기에 너를 다시 불러들인 것뿐이야.”

“......”

“이해했나?”
소녀가 또다시 차갑고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알았다.”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공주님?”
소파 옆에 기대어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오던 밝은 금발의 남자가 말했다.

“일이 너무나도 잘 진행되고 있어.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혹시라도 나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있다면 그때 너희들이 가서 수정하면 되는 거야.”
소녀가 커다란 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커다란 개는 기분 좋다는 듯, 그르렁 거렸다.


“그런데 엘트남의 남자가 나타난 건 예상밖의 일인걸. 그녀석이 내 계획을 망쳐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열정적인 녀석... 싫어. 짜증나게 만드는 타입이랄까...? 어쩌면 일이 귀찮게 되버릴지도 몰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래야 겠는걸. 아무튼 이번에는 굉장히 이상한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어. 몇몇 녀석들은 주체할 수 없는 흡혈 충동을 느꼈고, 너와의 계약이 무효가 되었는데도 왈라키아의 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어. 네 계획이 뒤틀려질 변수가 많아진다는 얘기야. 뭐... 일단은 두고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지... 거기다, 이 주변에서 교회 녀석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어. 조용히 빠져나가려면 꽤나 골치 아프겠군.”
금발의 사내가 귀찮다는 듯 빈정대며 말했다.

“그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너희들이 있는 거야. 잊은 건 아니겠지, 기사님들?”
소녀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

“이 블러드 스벨튼경의 검으로 산이라도 갈라내야겠지. 안 그래, 리조?”
금발의 남자가 농담의 장단을 맞추려는 듯 물었다.

“......”
리조라고 불리어진 검은머리의 청년은 금발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좋아. 리조 녀석도 동의했으니 공주님의 경호를 시작해보실까!”
제멋대로 해석해버리는 금발의 남자.

“피나와 리조는 나를 호위하고. 이 아이는 우리가 이 마을을 떠날 때 까지 미끼가 되어 줄 거야.”
소녀가 하얀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그녀의 치마를 다시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개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부탁해, 블랑쉬네즈.”

“헤에...? 블랑쉬네즈라고?”
피나라고 불리어진 금발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여긴 프랑스잖아? 그러니까 이 아이도 그에 어울리는 별명이 필요하지 않겠어? 이 아이에게 잔혹한 이름은 안 어울린다구. 그렇지, 블랑쉬네즈?”
소녀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참... 공주님께서는 그 녀석이 귀여운 애완견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피나가 질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이 아이는 하얀 눈처럼 사랑스러운 애완견이라구.”
소녀는 연신 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뭐... 상관없나...”

“...교회 녀석들의 수색이 시작됬다.”
창문너머의 망을 보던 리조가 그들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더 이상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뜻이군. 자 그럼 어서 움직이자. 곧장 리모주로 가면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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