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하고 조용했다.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사방이 갈색으로 보였고, 노이즈가 심했다. 잡음이 들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고개를 좌우로 둘러보았다. 하지만 눈은 오래된 영화를 돌리는 영상기가 된 탓에 위치가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뚫어질 듯이 이곳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 흐릿한 화면에 많은 실루엣이 나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는 빠르게, 내가 확인할 틈도 없이 지나갔고 하나는 방금 전의 존재보다는 느릿하게, 왠지 걸어가고 있는 거 같이 보였다. 나는 조금만 힘을 내면 더 선명하게 보일 거 같은 기분에 한 번 더 눈에 힘을 주었다.
‘아!’
나는 작은 탄성을 속으로 지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기는 거리라고 말이다. 분명히 확인할 틈도 없이 지나가는 실루엣은 자동차였고 또 하나의 실루엣은 사람이었다. 일단 그렇게 확신을 하자 흐릿했던 배경이 어느 정도 선명해졌다. 하지만 갈색 배경과 소리는 여전했다.
‘뭐지? 이 이질감은?’
사람들은 나를 인식하지 않고 지나치고 있었다. 아니, ‘인식’이라기 보단 아예 존재감을 못 느끼고 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미 육체가 없어졌는지 나의 몸을 통과하는 사람조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런 그들을 그저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고 있자니 난 원래부터 이곳에 속해 있으면 안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욱!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웩! 우웩!’
소리는 당연히 들리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소리를 연상하고 있었을 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난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구토했다. 하지만 지나쳐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날 보지 않았다. 그렇겠지. 이들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같은 존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아…. 아….’
절망감이 파도 치듯 밀려온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역시 노력해봤자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냐고.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껍데기는 나무랄 데 없지만 혼은 ‘그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답은 역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현기증이 나서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이곳에 있기 싫었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음이 편안해질 곳으로……. 그곳으로.
‘이곳은….’
나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고개를 들어보니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샛길처럼 보이는 언덕길이 나를 사로잡게 했다. 그리고 나를 이끌었다. 이곳으로 오라고, 보여줄 게 있다고….
나는 혼이 나간 존재처럼 이끄는 데로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 걸음, 한걸음 또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현기증과 구토증세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완전히 언덕길의 끝에 도착했을 땐, 몸이 무척 가벼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환한 웃음을 짓고는 달렸다. 벚꽃이 흩날리고 있는 그곳으로….
여전히 이곳은 아름다웠다. 앞을 바라보면 탁 트인 도시 전경이 한눈에 다 보였고 뒤에는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튼튼한 나무가 벚꽃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온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요란하진 않지만 저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한 나무 뒤에 숨어서 무슨 일인지 슬쩍 보았다.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나무에 대고 있던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눈에는, 내 눈에는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소녀는 연방 고개를 사방을 보며 떨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뺏기고 있는 거 같았다.
‘안 돼! 안 데에!!’
나는 애타게 소녀를 향해 입을 열고 소리쳤다. 소녀가 무엇을 뺏기고 있는지 난 알고 있었다. 지금 소녀가 빼앗기고 있는 건 기억이라는 것을. 내가 인간을 택함으로써 걸린 저주라는 것을. 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부짖듯이 외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명백하게 인간인 그녀와 나는 다른 존재라서 그녀 귀에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거의 실신할 지경까지 몸을 움직이며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벚꽃을 짓밟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더욱 괴로워했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나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는 그녈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의 몸은 물을 흡수한 스펀지같이 축 늘어져 있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조차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지르는 것일 뿐.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소녀의 괴로움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저앉아 가녀린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겠지.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순 없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다!! 이렇게 그녀가 괴로워할 바엔 차라리 빨리 끝내란 말이다!’
하늘을 향해 절규 섞인 간청을 하였다. 그래. 더 이상 나 때문에 괴로워할 바엔 차라리 벚꽃을 짓밟는 게 나아!
“아…….”
내 목소리가 실제로 새어나오는 동시에 갑자기 환한 빛이 이곳을 덮쳤다. 그 순간 난 구속되었던 모든 걸 되찾았다. 눈에는 갈색 배경이 아닌 시리도록 서글픈 하얀빛이 보였고, 나의 신음소리도 귀에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끝났구나.
나는 허무한 마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쳐버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을 완전히 감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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