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르시아 제 1 부 2 화 - Give & Take 3
2004.03.18 08:52
제 2 화 Give & Take - 자매 (1)
결국 첫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별달리 큰 사고없이.
수아의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을 받고 남 우석이라는 녀석의 교실을 확인했다.
1학년 6반. 바로 아랫층이다.
오늘은 별달리 그와는 접촉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녀석을 좀더 감시할 필요성이 있다나?
그러면서 수아 녀석은 지우개 조각으로 뭔가를 꼼지락 꼼지락 만들더니 그것을 내던졌다.
흔히 말하는 [지우개 똥].
던지기 직전의 모양새는 전체적으로 구형을 취한 모양새에 날개 두장, 그리고 연필로 찔러서 만든 눈 두개를 가진, 약간은 박쥐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수아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사역마로서, 당분간 남 우석을 감시하도록 날려보냈다는 것이다.
녀석이 행여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능력을 쓸 기미가 보이면 수아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되어있다는 것 같다.
마나를 느낄 수 있다면 내 눈에도 수아와 사역마와의 연결선이 '보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보일 것 같지 않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집의 현관문을 막 열려다 맞은 편의 1018호에서 뭔가 묘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을 받았지만, 아마도 오랫만에 학교에 가서 쌓인 스트레스 탓이리라 생각하며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철컹.
묵직한 철제 문이 열리자마자,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기세로 누군가가 내게 달려들어 몸통 태클을 먹였다.
그래. 이렇게 침착하게 몸통 태클을 먹였다. 라고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무의식적으로 피해버렸다는 거겠지.
조건 반사라는 건 무서운거군. 파블로프의 개실험처럼 나도 누나와의 아침인사 겸 대련에 의해 갑작스런 기습에 어느정도 반사적으로 피할 수 있는 능력이 붙은 거겠지.
아무래도 나는 왼쪽발을 뒤로 쭉 빼서 현관문에 등을 대고 붙는 것으로 그 누군가의 공격(?)을 피한 것 같다.
쾅!
그리고 나를 공격(?)한 인물은 그 기세를 못 죽이고 멋들어지게 1018호의 문에 맹렬한 기세로 처박혀버렸다.
그 인물은 마치 새하얀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새하얀 덩어리는 1018호 앞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물론 이 집에서 새하얀 녀석이라면 제 멋대로 눌러앉은 에루아라는 녀석뿐이지.
"어이. 너 뭐하냐?"
"아... 아우... 아야..."
눈물을 글썽이며 날 돌아보는 에루아.
아아.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종일 이 녀석 혼자 집을 봤던가.
정신 연령이 6세 미만이라니 누가 오면 덥석 끌어안고 싶을 만도 해.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 큰 녀석이 덮쳐드는 건 아무래도 저항이 있단 말야.
아아... 그나저나 안그래도 앞 집 사람들 민감한데 말야. 문짝을 화려하게 박아버렸으니...
응? 그러고보니 앞 집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더라?
민감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네. 생긴 것도 기억안 나고. 가족 구성이...
좀 많았지... 하지만 그것도 잘은 모르겠고...
아아. 현대사회의 슬픈 현실인가. 바로 맞은 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알지 못하다니 말야.
그보다도 어지간히도 큰 소리가 났는데 왜 아무도 안 나오지?
좀 전에 분명히 사람의 인기척같은 걸 느꼈는데...
아아. 느꼈지. 묘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뭔가 부서지는 소리 비슷한 게.
그렇게 내가 앞집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에루아는 뭔가를 관찰하듯, 앞집의 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에루아가 말했다.
"광현 오빠야. 이 집. 이상해."
"응?"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이 집이 이상한 이유를 말했다.
"이상할 수 밖에 없는걸. 죽은 사람이 일곱명이나 있는걸?"
"뭐? ...잠깐... 죽은 사람이라고?!"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사람이 죽어있다고?
"응. 입구쪽에 두명. 거실에 어른 세명, 그리고 애기 두명."
급히 인터폰을 눌러본다.
찌르르릉... 찌르르릉...
인터폰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인기척은 있다.
누군가 안에 있다.
"에루아. 이 문, 열 수 있냐?"
그녀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이내 왼손 검지로 문의 열쇠구멍을 한번 톡 건드렸다.
그에 이어 현관문의 열쇠와 보조키가 열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찰칵. 철컥.
"마법으로 잠겨 있었네에. 응. 열렸어."
그녀의 말에 따라 조심스레 문 손잡이를 잡고 그것을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는 육중한 철문을 당겨 열었다.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 역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피 비린내와 뭔가 썩은 냄새가 뒤섞인 미지근한 공기가 집안에 늘러붙어있었다.
"우... 속 뒤집혀..."
말 그대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공기. 구토감을 억누르고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에루아는 이 역겨운 공기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내 뒤를 따라온다.
신발장과 현관의 벽 전체에 검게 늘러붙은 핏자국. 검게 변색되어는 있지만 눈어림으로 보아 마른 것 같진 않다.
그야말로 썩은 피. 현관 조금 앞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두 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조각 조각,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진 시체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그것의 각 파츠를 대충 눈으로 어림잡아 두 구라는 것이다.
에루아 녀석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게 두 명의 시체라는 것을 알았을까.
"커... 콜록..."
절로 헛기침이 나면서 구토감이 목까지 타고 올라온다.
이런 건 이전의 좀비 사건때 이후로 처음이다.
더욱 더 불쾌한 것은, 분명히 더 이상 개체 생명체로서의 기능이 불가능 할 정도로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게 흐트러진 시신의 각 부분은 제멋대로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크... 설마아... 이것들... 조, 좀빈가?"
그 때도 그랬다. 분명히 머리통이 날아간 좀비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내게 손톱을 휘둘러왔었다.
온 몸을 산산조각 내지 않는 한 계속 상대를 공격하는 좀비. 눈 앞에 흩어져 있는 시신이 좀비라면, 그 때의 유라가 그랬듯, 이들을 이렇게 만든 자는 이들을 산산조각 내야만 했으리라.
그렇다면 벽에 늘러붙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악취를 풍기는 썩은 피도 설명이 간다.
목까지 올라온 구토감을 억지로 억누르고 거실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이윽고 당도한 거실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애용의 붉은 창을 지팡이 삼아 기대어 앉아 있는 크림슨 울프였다.
그의 주변에는 산산 조각난 시체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그 시체산은 마치, 박동하듯이 꿈틀 꿈틀...
"쿠... 커억...!"
결국 참지 못하고 위속에 들은 것은 토해냈다.
에루아는 그런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등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비위도 좋은 녀석. 이런 광경을 눈 앞에 두고 전혀 동요도 안하다니......
겨우겨우 속이 가라앉았을 무렵, 크림슨 울프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벌써 저녁땐가. 배가 고프군. 꽤 센 마법을 얻어맞은데다... 이것들의 상대까지 했더니... 죽을 맛... 이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쥐고 있던 창을 놓쳐,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젠장맞을 녀석. 누군 토하고 속 뒤집히고 난리 났는데 이 마당에 배가 고프다고?
크... 입안이 쓰다. 속은 지끈지끈 아프고.
그나저나 이 녀석이 자빠져 있는 모습을 다 보게 될 줄이야.
녀석이 쓰러짐과 동시에 에루아는 녀석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주위에 고여있던 핏물이 튀겨 그녀의 하얀 옷에 검붉은 얼룩을 만들어냈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곁에 다가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크림슨 울프의 등에 손을 대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안 돼... 빨간 아저씨... 이대로라면 죽어버려...!"
"...헤? ...설마. 그 녀석이 죽을리가 없잖아."
내 그 말에 에루아는 곧은 시선을 내게 향했다.
평소의 녀석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 엄격함과 기품이 담겨있는 눈.
"대가 없는 힘이란 존재치 아니하는 법. 이 분의 힘의 대가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
"유... 육신의 생명...?"
눈의 착각인가. 귀의 착각인가. 그녀의 몸이 어느샌가 희미한 빛에 감싸져 있는 것 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품 넘치는 말투.
평소와는 너무 다른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규격외의 힘을 쓰는 당신이나, 유라님을 보통의 인간의 육신으로 상대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녀의 몸 주변에 떠오른 하얀 오오라는 더욱 더 확실하게 가시화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종의 빛이 크림슨 울프의 몸에서도 드러났다.
"Raduira."
알수 없는 주문. 그것이 너무 짧은 탓에 그것이 뭔가의 주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것이 무섭게, 크림슨 울프의 몸에 하얗게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마법진은 이내 크림슨 울프의 몸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에루아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은채 그대로 고개를 픽 숙였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이! 에루아! 어떻게 된거야!"
그러자 마치 졸고 있던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날 쳐다보는 에루아.
"에...? 응? 왜 그래? 광현 오빠야."
평소와 다름없는 뭔가 맥빠진 반응을 보이는 에루아.
나는 당혹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어느샌가 크림슨 울프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에루아. 또 그것을 썼나..."
피로감이 역력한 그의 목소리. 하지만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에 에루아는 환하게 웃으며 크림슨 울프에게 말했다.
"빨간 아저씨 죽는거 싫으니까."
"바보 같으니...!! 이런 짓을 하면 죽는건 너다! 소생의 마법이라니...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이런 대마법을 행사하고 지금 네가 살아있는 건 거의 기적이란 말이다! 몇 번 말해야......"
방금전에 에루아가 크림슨 울프에게 썼던 마법은 상당히 터무니 없는 마법이었던듯, 크림슨 울프는 화를 버럭내며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의 입에 오른손 검지를 갔다대어 그의 말을 막고 에루아가 말했다.
"나는 빨간 아저씨가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에루아. 그렇게 할 말을 잃은 크림슨 울프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던 에루아가 뭔가를 떠올린 듯이 고개를 휙 돌려 날 쳐다보며 말했다.
"광현 오빠야도 좋으니까 삐지면 안돼?"
......누가 삐진다는 거냐.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에루아의 모습에 크림슨 울프도 더 이상 화를 낼 생각은 없어진 건지, 고개를 몇 번 가로젓고는 씁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나랑 마찬가지로 골치 아프겠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로 꼼짝도 않는 크림슨 울프와 에루아에게 말했다.
"일단은 좀 나가자. 또 속이 뒤집힐 것 같애."
"흥. 미숙자 같으니. 이 정도로 동요해서야, 뛰어난 기사가 될 수 없다."
"...기사 따위 되고 싶은 생각 눈꼽만치도 없네요."
내 그말에 그는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에 따라서 나도 모르게 씩 웃어보인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얼른 일어나라구. 뭐, 이 핏구덩이가 좋다면야 그냥 그대로 자빠져 있던지."
그 말에 그는 쿡쿡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크큭. 그다지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확실히 냄새는 견디기 힘들구만."
"아아. 확실히 그건 그래. 일단 이 옷들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는데... 얼룩진거랑 냄새랑... 지우지 않으면..."
그러고보니, 핏자국은 그대로이지만, 시체들은 어느샌가 하얀 모래가 되어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선 크림슨 울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배가 고픈데..."
...설마.
"설마. 댁도 눌러앉을 셈인가...?"
"아아. 물론이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군.
이래서 지나치게 솔직한 놈도 상대하기 힘들다.
누가 보아도 떫은 표정을 하고 있을 나를 앞에 두고 녀석은 말을 이었다.
"너희들을 살려두기는 했지만, 감시의 필요성이 없어진 건 아니다. 그리고 쥬라가 있는 곳을 찾아낼 때까지 기거할 곳도 필요하고 말이지. 그리고, 만약에 누군가가 너희들을 공격해 온다면 어느정도는 전력도 될테고 말이다."
의외다. 이 녀석 원래는 이런 녀석이었나...?
"핑계지. 그거."
"물론이다."
하아... 이젠 방도 없다구. 안그래도 지금 유라와 에루아가 한 방, 누나가 또 하나. 그리고 수아 녀석이 또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고. 그리고 내 방. 이렇게 네칸의 방이 만원 상태인데.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일단은 이 녀석은 내 방에서 재우기로 하지. 바닥에서 자든 어떻게든 할테니까.
물론 조건은 있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지어다. 댁이 일해서 댁의 생활비 정도 벌어온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상관없어."
내 말에 크림슨 울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나도 공짜로 얻어먹을 만큼 뻔뻔한 놈은 아니니까. 받은 만큼 확실히 갚아주지. 안그래도 일전의 일도 있고. 이래저래 빚을 많이 지는군."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셋이 나란히 1018호의 문을 닫고 나왔다.
나와 크림슨 울프가 막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에루아는 1018호 문 앞에 서서 뭔가의 마법주문을 읊고 있었다.
"에루아. 뭐하냐?"
"흔적 지우기."
"............................................"
뭔가...... 완전범죄를 노리는 살인범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
.
.
결국, 아무리 해도 옷의 냄새와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탓에, 탈취제 한 통과 표백제를 써서 해결해 버렸다.
크림슨 울프의 옷을 세탁기에 넣어버리고 보니, 녀석이 입을 옷이 딱히 없기에 내가 가진 옷 중에 너무 커서 못 입는 옷을 줬더니, 작다고 불평이다.
...그야, 키 175를 겨우 넘긴 내가 입는 옷이 190넘는 당신 몸에 제대로 맞을리가 없지.
그렇게 한 참을 옷가지고 씨름 한 결과, 그가 고른 옷은 긴팔 셔츠와 최근에 샀지만, 너무 기장이 긴 것을 사서 바꿀까 하던 청바지였다.
청바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하지만, 웃옷은 사정이 달랐다.
그의 잘 발달 된 상체를 완전히 감싸기엔 내 옷은 상당히 무리가 많았다.
겨우겨우 앞 단추를 채워도 전부 채우지는 못해, 잘 발달 된 흉판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소매도 지나치게 짧은 관계로,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뭐, 나름대로 꽤 멋은 있지만. 지금은 12월이다. 12월 초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다.
그는 겨울이건 어쨌건 춥지는 않다고는 했지만 보는 내가 추워보인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옷장을 뒤져서 옛날에 아버지가 입었던 널널한 코트를 꺼내주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녀석의 몸에 맞춘 것 처럼 딱 맞았다.
흐음. 우리 아버지가 의외로 거한이었던 모양이다.
딱히 아버지가 찍힌 사진이 없는 탓에 그 모습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아. 그러고보니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 아버지 뿐만이 아닌가. 어머니 얼굴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장의 사진을 보지 않으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인간, 영원한 것은 없는건가. 10년전의 그 사건 때만해도 절대 두 사람을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 했건만.
어릴 적의 기억과 요 10년간의 기억들 대부분이 지우개로 싹 지운 것처럼 없다.
젠장할. 벌써부터 치맨가?
영 개운하지 않은 머리를 툭툭 치며 수아의 방에 들어간다.
방 바닥을 구르며 만화를 보고 있는 수아를 가볍게 발로 차서 불렀다가 마나 쇼크에 된통 당한 후,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그녀에게 조금 전에 있던 일들과 크림슨 울프와 협력관계가 된 것을 설명했다. 그에 녀석은 예의 산뜻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헤에. 광현 오빠가 한 일 치고 꽤 잘 했는 걸?"
저 녀석... 이럴 땐 정말로 한방 때려주고 싶......
따악!!!
"아훅?!"
쿵.
어? 어라?
잠깐. 나는 아무것도 안......
그, 그래. 나는 지금 분명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상태... 일 텐데?
"자... 잘도오... 쳤겠다아...?"
"자, 잠깐! 잠깐! 나, 분명히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상태라고 하지 않았냐?! 어, 어떻게 방금 전에 그거, 마법이 나간거냐?!"
내 말에 녀석이 잠시 굳는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녀석은 내게 설명했다.
"그야. 마나를 못 느낄 뿐이지, 마법은 평상시처럼 쓸 수 있는 것 아냐? 확실히 오빠 몸의 마나는 크림슨 울프에게 당하기 전하고 별 차이 없어."
아아. 그런건가. 느끼지는 못해도 쓸 수는 있다는 건가?
그렇게 납득하며 안심한 내 이마에 녀석의 손이 올려졌다.
"그건 별도고. 어쨌거나 마나 쇼크."
"후꺄아아아악!!!"
수아의 마나 쇼크에 당하고 바닥에 축 늘어지는 나를 방문 밖에서 보던 크림슨 울프가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다.
"...흠. 용케도 지금껏 잘도 살아왔군."
그로부터 내가 다시 재기했을 때의 시각은 저녁 6시 반이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유라 녀석, 알바였던가.
크림슨 울프도 배고프다고 아까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참이고.
나도 아직 속은 완전히 안 가라앉았지만 먹은걸 다 게워내서 역시나 배고픈 상태고.
"수아. 저녁은 어쩔거냐? 일단 우리는 유라녀석 알바하는데 가서 먹을까 하는데."
"에루아도 갈래!"
빠지지 않고 에루아도 손을 번쩍들며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시 바닥을 구르며 만화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수아는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응... 난 됐어. 대충 집에 있는 걸로 해먹을거니까."
"그러냐. 그럼 집 잘 보고 있어라. 좀 있으면 누나도 올테니까, 기다렸다가 누나랑 같이 먹든지."
"오키."
그렇게 짧게 대꾸하고 수아녀석은 손을 흔드는 대신에 한쪽발을 들어 허공에 휘휘 저었다.
......건방진 녀석.
뭐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그렇게 우리는 집을 뒤로 하고, 유라가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오피스가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제미니'로 향했다.
현관문을 닫고 1018호의 문을 잠시 쳐다보고는 엘레베이터에 오른다.
아파트 출입문에서 나와 10분가량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 짧은 10분 동안 우리 세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나 혼자 다녀도 이 하얀 머리카락 때문에 눈에 띄는 판에, 똑같이 새하얀 녀석이 하나, 그리고 새빨간 녀석이 하나.
게다가 새빨간 녀석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다.
여기에 유라까지 가세하면 그야말로 서커스단이겠지. 알록달록.
이윽고 오피스가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세 사람분의 요금을 내고 뒷 좌석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한 중간쯤 왔을까, 버스 앞문 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뒤를 돌아보니, 크림슨 울프가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아. 꼴을 보아하니... 천장에 머리를 박은 모양이지.
녀석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쥔 채로, 고개를 팍 숙이고 내가 앉아있는 뒷 좌석쪽으로 왔다.
그리고는 처음 타보는 버스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낮군. 그리고 제법 아프다."
"...그야 그렇겠지."
물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얘기다.
아아. 도대체가... 이런 생활이 매일 계속 되었다간, 조만간 신경쇠약으로 돌아가시겠어.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써가며 버스로 약 10분.
패밀리 레스토랑 '제미니'는 버스에서 내리고 바로 근처였다.
제미니로 향하는 동안 한 팬시점 앞에 에루아가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그것을 달래고 떼어내는데 더욱 시간이 흘러, 제미니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사실, 에루아를 떼어내는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가게 안에서 그걸 보고 있던 인상 좋은 팬시점 주인이 나와서 '한번 보고 가세요.' 라고 에루아를 거드는 바람에 더 시간이 걸린 것.
결국 에루아와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보고 가자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겨우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덕분인가, 속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완전한 공복 상태가 되었다.
공복 상태인 것은 크림슨 울프도 마찬가지인 듯, 이번에야 말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으음. 걱정이다. 과연 유라가 잘 하고 있을까. 혹시, 지금쯤 뭔가 실수라도 해서 점장한테 혼나기라도 하고 있는게 아닐까.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딸랑 딸랑 딸랑...
문에 달려있는 방울이 울려 내객을 알린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웨이트리스가 달려나와 만면의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몇분이신가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미소. 비단결처럼 찰랑거리는 하늘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것에 어울리는 푸른 빛 계열의 제복.
매우 낯익은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분명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기 시작한 유라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누구셈?"
.
.
.
적당한 것을 주문해서 먹은 후, 유라가 일하는 것을 지켜봤다.
군더더기 없는 업무처리. 완벽한 접객. 그리고 말끔한 미소.
으음. 완벽해. 기분 나쁠만치 완벽해.
한 편, 내 옆에서는 에루아가 후식인 파르페를 끄적이며 먹고 있고, 크림슨 울프는 요 몇일동안 쥬라를 찾아다니느라 한끼도 제대로 못 챙겨먹었다면서 벌써 3인분째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돈이야 넉넉하게 들고 나왔지만... 이 기세라면 저녁 밥 값으로만 십만원이 넘게 지출 될 것 같은 예감에 크림슨 울프의 식사를 3인분 선에서 종결지었다.
크림슨 울프가 아쉽다는 듯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막 던져 넣었을 때, 유라가 후식인 커피를 가지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다가왔다.
"......후식."
탁.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던지듯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몸을 홱 돌리기가 무섭게 웃는 얼굴로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이한다.
음. 대체 왜 저럴까. 내가 뭘 잘못했나? 아, 그야. 처음에 들어오자마자 누구셈? 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야 별로 안 좋겠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크림슨 울프가 말했다.
"흠. 묘하군."
"음? 뭐가?"
내가 반문하자 그는 유라를 보며 내게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우리쪽에 올때마다 긴장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적어도 나 때문에 긴장하는 것 같진 않은데. 별 달리 그녀에게선 적의같은게 느껴지지 않고."
"헤? 긴장? 농담은 관두라고. 다른 녀석은 몰라도 저 녀석이랑 긴장이라는 단어는 가장 거리가 멀다구."
거기에, 파르페를 먹다말고 에루아가 끼어들었다.
"아니. 유라 언니. 긴장했어."
그 말만을 내던지고는 다시 눈 앞의 파르페에 골몰하는 에루아.
그런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유라를 본다.
만면에 미소를 띄우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다시 굳어버린다.
......으음... 아무래도 긴장한건 절대 아닌 것 같고, 역시 뭔가 나한테 맺힌게 있는게 틀림없어.
조만간 직접 물어보던가 해야지. 나름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제미니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녀의 태도는 변함 없었다.
뭔가 뒤가 켕기는 듯한 기분을 억지로 밀어넣고 에루아와 약속한대로 팬시점에 들어섰다.
팬시점에 들어서자, 비교적 젊어보이는 주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 정말로 다시 오셨네요? 흐음... 그쪽의 애인분께 드릴 선물인가요?"
"응? 애인?"
나도 모르게 에루아를 쳐다봤다.
에루아는 누가 뭐래도 이미 그 어떤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 가게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절대로 애인은 아닌데. 그냥... 동생 뻘인데."
절대라는 말에 악센트를 조금 넣자 상대는 내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에이, 부끄러워하시긴. 자자, 개업 기념으로 커플에 한정해서 경품 기회가 있어요∼ 잠시만요."
그렇게 내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카운터까지 가서 뭔가 상자를 들고 오는 그.
약간 짧게 깎은 반 곱슬머리의 인상 좋고, 싹싹한 청년이었기에 특별히 불쾌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서 들은 소문으로는 개업한지 일주일도 안되서 우리학교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던가.
왠지 납득이 간다.
좀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자 위에 뚫린 구멍에 손을 넣어 안에 잔뜩 있는 종이 쪽지중에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건네자 그는 그것을 펼쳐 나에게 보여줬다.
그곳에 쓰여져 있는 것은-
[이등상 : 백호 大]
백호 대?
"네! 이등상 당첨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경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그가 잠시 후에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하얀 호랑이의 인형.
조금 심각하게 큰 인형이다.
그것을 그가 에루아에게 안겨주자 에루아의 모습이 안보일 정도니까.
그게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에루아는 정신을 못 차린다.
뭐어... 나로서는 지출이 없으니 만족스럽긴 하지만.
저렇게 큰걸 유라랑 둘이 같이 쓰는 방 어디에 두겠다는거지?
그 때까지 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게를 둘러보던 크림슨 울프가 뭔가에 못 박힌 듯, 진열대의 일점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그러나, 일반적인 십자가 목걸이와는 달리, 사슬을 꿰는 구멍이 긴쪽에 달려있다.
즉, 역십자 목걸이다.
그게 마음에 들은 걸까, 해서 그의 얼굴을 보자니 그건 아닌 듯, 그의 얼굴은 잔뜩 굳은 상태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건지, 팬시점 주인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거라면 이 가게에서 제일 인기없는 목걸이에요. 비싼데다가, 불길해보이니까요."
......저것도 일종의 재능이군. 하고 많은 물건들 중에서 제일 인기없는 목걸이를 찾아내는 녀석이나, 또 그걸 아무런 여과없이 말하는 점장이나.
그렇게 잠시간을 그 십자가를 보던 크림슨 울프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점장에게 들이밀었다.
"...이것으로 사겠어."
금화다. 진짜진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형태로 봐선 금화로 추정되는 물체다.
그것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고는 목걸이를 진열대에서 꺼내어 크림슨 울프에게 내미는 점장.
...이상한 녀석들.
뭐, 본인들이 그걸로 납득한다면 별 상관은 없다만.
그렇게 팬시샾에서 볼일을 마치고 우리가 막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점장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아, 그 백호 인형있죠. 녹음 기능이 있는 건데요, 경품 당첨 축하 메세지가 들어있으니까 꼭 들어주세요∼"
"네∼!"
인형을 안은채로 활기차게 답하는 에루아.
의외의 전개로, 결국 지출은 제로.
왠지 모르게 이렇게되면 또 오히려 영 찜찜하단 말야...
어쩐지 빚이라도 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결국 사버렸다. 제법 세련된 은반지다. 가격으로 봐서는 당연히 순은은 아니지만, 그래도 디자인 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이놈의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때문에 쓸데없는 지출을 한 셈이 되지만...
뭐, 유라 녀석이 뭔가 내게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니 기분 풀어줄 겸 이거나 주지.
으음. 그나저나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걸까? 돌이켜보면, 유독 나에게만 항상 딱딱한 태도로 나오는데.
에이. 모르겠다.
일단은 집으로 가자.
.
.
.
놀랐다. 설마 그가 자신이 일하는 곳에 얼굴을 내밀 줄이야.
가게 문에서 그를 맞이했을때 그가 자신의 어색한 미소를 보고 순간적으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아아. 그렇게나 어색했을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건데.
결국 그가 가게에 있는 동안 유라는 계속 평상시의 태도로 그를 접했다.
그에게 자신의 덜떨어진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나 어째서인지 광현은 유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평소에도 뭔가 뚱한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평소보다도 더 뚱한 표정을 짓고 말이다.
일을 끝내고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시각은 밤 9시.
광현일행이 가게를 나서고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의 오늘 일은 모두 끝났다.
귀가길에 오르는 동안, 그녀는 광현이 가게에서 보여준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뭔가 내가 잘못 한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한 가게 앞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쇼윈도 안쪽으로 보이는 소박하면서도 제법 세련된 은반지. 구성성분을 대충 분석해보자니 은에 다른 것도 섞여 있지만, 꽤 괜찮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에게 첫 만남 이외에 딱히 고맙다는 말도, 표현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던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준 것이나 다름 없는 그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항상 퉁명스럽고 짜증만 내는 광현이지만, 그의 성품은 확실히 상냥한 편이다.
뭐어, 밴댕이 소갈딱지에다, 태도는 항상 삐딱, 거기에다 엄청 이기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신의 주위의 세계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길줄 아는 남자니까.
그래서...
"아가씨. 애인 줄 반지 찾나요?"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한참을 가게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유라를 보다못해 어느새 가게주인이 옆에 와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갑작스레 그가 말을 걸어와 약간 당혹한 그녀였지만, 유라는 그에게 답했다.
"...아니오."
딱 잘라 부정하는 유라에게 웃어보이며 그는 재차 물었다.
"그럼, 누구 줄 건가요?"
그 질문에 유라는 쓸쓸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그러자 상대는 빙긋 웃어보이며 유라에게 말했다.
"분명 그 분도 아가씨랑 같은 생각을 하시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점장이 쇼윈도 안의, 방금 전까지 유라가 보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묘한 날이네요. 저 반지,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어서 거의 팔리지 않는건데 말이죠. 아가씨 오기전에 어떤 남자분도 저걸 골라가시더라구요."
"......"
그 말에 따라 그 반지로 시선을 옮겨본다.
그런 그녀에게 점장이 말을 이었다.
"그 남자분도 아가씨랑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누구 줄 거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의 말에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건 광현이다. 무엇을 해도 서툴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서툴은 그.
아아. 그래.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를.
그렇지만... 이런 자신에게 그런 자격따윈 없다.
그에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다.
그녀가 자신의 언니인 쥬라를 죽이려는 이유도, 그리고 자신의 지금 몸상태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조차.
그에게 알려지는게 두렵다. 지금의 유라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정체를 그가 알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느새 그녀의 손위에는 방금전까지 보고 있던 은반지가 들려있었다.
저 멀리서 팬시샾 점장이 응원이라도 하듯, 손을 흔드는게 보인다.
역시...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다.
쥬라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옮겨간 은신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같은 세계에 있는 한, 서로간에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다시 광현과 쥬라를 만나게하면, 그녀들의 비밀을 그가 알게된다.
그건 싫다. 그게 싫기에 쥬라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다. 광현과의 지금의 관계가 깨져버리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렇기에 그가 모르게, 쥬라를 죽인다.
지금의 그녀의 몸상태로는 쥬라와 그녀가 만드는 좀비들의 상대를 할 수는 없다. 가면 확실히 죽는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반드시 쥬라를 죽인다.
더 이상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다시금 손안의 반지를 내려다본다.
아아.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무사히 살아 돌아가서 이 반지를 그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한번 떠올리고 결의를 다진 듯,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그녀의 한쌍의 애검을 소환했다.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다. 오늘 밤, 모든 것을 끝낸다.
그녀의 소환에 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대검 하이페리온과 태도 엑세리온.
10여년간 그녀의 손안에서 충실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해온 우직한 존재들.
그들에게 그녀는 미리 작별인사를 해둔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너희들의 싸움도. 그리고 이 나의 피로 점철된 저주받은 생(生)도.'
그렇게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어두운 밤의 골목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
.
.
[이등상 당첨! 축하드립니다!]
요란뻑적지근하네. 에루아가 잔뜩 들떠서 다같이 듣자고해서 같이 들은 것 까진 좋지만... 이딴 거 듣는다고 뭐가 나오나?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이런게 아닙니다. 아, 실례. 자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김 영훈. 보시는대로 팬시점의 주인입니다. 만, 본업은 따로 있지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것을 듣는 여러분. 일전의 폭동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으신지?]
!!!!
이... 이건?
나도 모르게 옆의 수아와 얼굴을 마주했다.
[제 말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오늘 밤 11시까지 가게 앞으로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신들에게 상당히 흥미가 많은 한 연구자로서 말씀드릴게 있으니까요. 그럼.]
그것을 경청하던 크림슨 울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럼 이것도 설명이 가는군."
"뭐가?"
반문하는 내 눈앞에 그는 아까 산 역십자 목걸이를 꺼내보였다.
"상당량의 마나가 응집된 물건이다. 일정 수준의 마법 한번 정도를 쓸 수 있는 마나가 축적되어 있지. 이것뿐만이 아닌, 그 가게에 있던 악세사리류가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었다."
"......말도 안돼. 일반인이 그렇게 많은 마법 도구를 구할 수 있을리가..."
크림슨 울프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에 크림슨 울프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반인은 아니군. 그만큼의 대량의 마법 도구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적인 테크놀러지를 구비하고 있는게 틀림없어."
그의 말에 그 장소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백호 인형을 끌어안고 놀고 있는 에루아는 제외하고.)
"내 예측이다만, 이 녀석은 확실히 가문 클래스의 '마법사' 다."
제 2 화 Give & Take - 자매 (2) 에서 계속...
==========================================
원래 부제로는 여자의 결의, 혹은 싸움으로 하려고 했지만 모 애니메이션, 에X 게리온에 비슷한 이름의 부제가 나오기에 자매로 변경했습니다.
르시아, 드디어 얘기가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결국 첫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별달리 큰 사고없이.
수아의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을 받고 남 우석이라는 녀석의 교실을 확인했다.
1학년 6반. 바로 아랫층이다.
오늘은 별달리 그와는 접촉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녀석을 좀더 감시할 필요성이 있다나?
그러면서 수아 녀석은 지우개 조각으로 뭔가를 꼼지락 꼼지락 만들더니 그것을 내던졌다.
흔히 말하는 [지우개 똥].
던지기 직전의 모양새는 전체적으로 구형을 취한 모양새에 날개 두장, 그리고 연필로 찔러서 만든 눈 두개를 가진, 약간은 박쥐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수아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사역마로서, 당분간 남 우석을 감시하도록 날려보냈다는 것이다.
녀석이 행여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능력을 쓸 기미가 보이면 수아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되어있다는 것 같다.
마나를 느낄 수 있다면 내 눈에도 수아와 사역마와의 연결선이 '보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보일 것 같지 않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집의 현관문을 막 열려다 맞은 편의 1018호에서 뭔가 묘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을 받았지만, 아마도 오랫만에 학교에 가서 쌓인 스트레스 탓이리라 생각하며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철컹.
묵직한 철제 문이 열리자마자,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기세로 누군가가 내게 달려들어 몸통 태클을 먹였다.
그래. 이렇게 침착하게 몸통 태클을 먹였다. 라고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무의식적으로 피해버렸다는 거겠지.
조건 반사라는 건 무서운거군. 파블로프의 개실험처럼 나도 누나와의 아침인사 겸 대련에 의해 갑작스런 기습에 어느정도 반사적으로 피할 수 있는 능력이 붙은 거겠지.
아무래도 나는 왼쪽발을 뒤로 쭉 빼서 현관문에 등을 대고 붙는 것으로 그 누군가의 공격(?)을 피한 것 같다.
쾅!
그리고 나를 공격(?)한 인물은 그 기세를 못 죽이고 멋들어지게 1018호의 문에 맹렬한 기세로 처박혀버렸다.
그 인물은 마치 새하얀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새하얀 덩어리는 1018호 앞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물론 이 집에서 새하얀 녀석이라면 제 멋대로 눌러앉은 에루아라는 녀석뿐이지.
"어이. 너 뭐하냐?"
"아... 아우... 아야..."
눈물을 글썽이며 날 돌아보는 에루아.
아아.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종일 이 녀석 혼자 집을 봤던가.
정신 연령이 6세 미만이라니 누가 오면 덥석 끌어안고 싶을 만도 해.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 큰 녀석이 덮쳐드는 건 아무래도 저항이 있단 말야.
아아... 그나저나 안그래도 앞 집 사람들 민감한데 말야. 문짝을 화려하게 박아버렸으니...
응? 그러고보니 앞 집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더라?
민감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네. 생긴 것도 기억안 나고. 가족 구성이...
좀 많았지... 하지만 그것도 잘은 모르겠고...
아아. 현대사회의 슬픈 현실인가. 바로 맞은 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알지 못하다니 말야.
그보다도 어지간히도 큰 소리가 났는데 왜 아무도 안 나오지?
좀 전에 분명히 사람의 인기척같은 걸 느꼈는데...
아아. 느꼈지. 묘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뭔가 부서지는 소리 비슷한 게.
그렇게 내가 앞집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에루아는 뭔가를 관찰하듯, 앞집의 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에루아가 말했다.
"광현 오빠야. 이 집. 이상해."
"응?"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이 집이 이상한 이유를 말했다.
"이상할 수 밖에 없는걸. 죽은 사람이 일곱명이나 있는걸?"
"뭐? ...잠깐... 죽은 사람이라고?!"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사람이 죽어있다고?
"응. 입구쪽에 두명. 거실에 어른 세명, 그리고 애기 두명."
급히 인터폰을 눌러본다.
찌르르릉... 찌르르릉...
인터폰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인기척은 있다.
누군가 안에 있다.
"에루아. 이 문, 열 수 있냐?"
그녀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이내 왼손 검지로 문의 열쇠구멍을 한번 톡 건드렸다.
그에 이어 현관문의 열쇠와 보조키가 열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찰칵. 철컥.
"마법으로 잠겨 있었네에. 응. 열렸어."
그녀의 말에 따라 조심스레 문 손잡이를 잡고 그것을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는 육중한 철문을 당겨 열었다.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 역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피 비린내와 뭔가 썩은 냄새가 뒤섞인 미지근한 공기가 집안에 늘러붙어있었다.
"우... 속 뒤집혀..."
말 그대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공기. 구토감을 억누르고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에루아는 이 역겨운 공기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내 뒤를 따라온다.
신발장과 현관의 벽 전체에 검게 늘러붙은 핏자국. 검게 변색되어는 있지만 눈어림으로 보아 마른 것 같진 않다.
그야말로 썩은 피. 현관 조금 앞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두 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조각 조각,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진 시체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그것의 각 파츠를 대충 눈으로 어림잡아 두 구라는 것이다.
에루아 녀석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게 두 명의 시체라는 것을 알았을까.
"커... 콜록..."
절로 헛기침이 나면서 구토감이 목까지 타고 올라온다.
이런 건 이전의 좀비 사건때 이후로 처음이다.
더욱 더 불쾌한 것은, 분명히 더 이상 개체 생명체로서의 기능이 불가능 할 정도로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게 흐트러진 시신의 각 부분은 제멋대로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크... 설마아... 이것들... 조, 좀빈가?"
그 때도 그랬다. 분명히 머리통이 날아간 좀비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내게 손톱을 휘둘러왔었다.
온 몸을 산산조각 내지 않는 한 계속 상대를 공격하는 좀비. 눈 앞에 흩어져 있는 시신이 좀비라면, 그 때의 유라가 그랬듯, 이들을 이렇게 만든 자는 이들을 산산조각 내야만 했으리라.
그렇다면 벽에 늘러붙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악취를 풍기는 썩은 피도 설명이 간다.
목까지 올라온 구토감을 억지로 억누르고 거실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이윽고 당도한 거실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애용의 붉은 창을 지팡이 삼아 기대어 앉아 있는 크림슨 울프였다.
그의 주변에는 산산 조각난 시체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그 시체산은 마치, 박동하듯이 꿈틀 꿈틀...
"쿠... 커억...!"
결국 참지 못하고 위속에 들은 것은 토해냈다.
에루아는 그런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등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비위도 좋은 녀석. 이런 광경을 눈 앞에 두고 전혀 동요도 안하다니......
겨우겨우 속이 가라앉았을 무렵, 크림슨 울프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벌써 저녁땐가. 배가 고프군. 꽤 센 마법을 얻어맞은데다... 이것들의 상대까지 했더니... 죽을 맛... 이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쥐고 있던 창을 놓쳐,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젠장맞을 녀석. 누군 토하고 속 뒤집히고 난리 났는데 이 마당에 배가 고프다고?
크... 입안이 쓰다. 속은 지끈지끈 아프고.
그나저나 이 녀석이 자빠져 있는 모습을 다 보게 될 줄이야.
녀석이 쓰러짐과 동시에 에루아는 녀석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주위에 고여있던 핏물이 튀겨 그녀의 하얀 옷에 검붉은 얼룩을 만들어냈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곁에 다가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크림슨 울프의 등에 손을 대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안 돼... 빨간 아저씨... 이대로라면 죽어버려...!"
"...헤? ...설마. 그 녀석이 죽을리가 없잖아."
내 그 말에 에루아는 곧은 시선을 내게 향했다.
평소의 녀석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 엄격함과 기품이 담겨있는 눈.
"대가 없는 힘이란 존재치 아니하는 법. 이 분의 힘의 대가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
"유... 육신의 생명...?"
눈의 착각인가. 귀의 착각인가. 그녀의 몸이 어느샌가 희미한 빛에 감싸져 있는 것 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품 넘치는 말투.
평소와는 너무 다른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규격외의 힘을 쓰는 당신이나, 유라님을 보통의 인간의 육신으로 상대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녀의 몸 주변에 떠오른 하얀 오오라는 더욱 더 확실하게 가시화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종의 빛이 크림슨 울프의 몸에서도 드러났다.
"Raduira."
알수 없는 주문. 그것이 너무 짧은 탓에 그것이 뭔가의 주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것이 무섭게, 크림슨 울프의 몸에 하얗게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마법진은 이내 크림슨 울프의 몸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에루아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은채 그대로 고개를 픽 숙였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이! 에루아! 어떻게 된거야!"
그러자 마치 졸고 있던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날 쳐다보는 에루아.
"에...? 응? 왜 그래? 광현 오빠야."
평소와 다름없는 뭔가 맥빠진 반응을 보이는 에루아.
나는 당혹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어느샌가 크림슨 울프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에루아. 또 그것을 썼나..."
피로감이 역력한 그의 목소리. 하지만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에 에루아는 환하게 웃으며 크림슨 울프에게 말했다.
"빨간 아저씨 죽는거 싫으니까."
"바보 같으니...!! 이런 짓을 하면 죽는건 너다! 소생의 마법이라니...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이런 대마법을 행사하고 지금 네가 살아있는 건 거의 기적이란 말이다! 몇 번 말해야......"
방금전에 에루아가 크림슨 울프에게 썼던 마법은 상당히 터무니 없는 마법이었던듯, 크림슨 울프는 화를 버럭내며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의 입에 오른손 검지를 갔다대어 그의 말을 막고 에루아가 말했다.
"나는 빨간 아저씨가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에루아. 그렇게 할 말을 잃은 크림슨 울프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던 에루아가 뭔가를 떠올린 듯이 고개를 휙 돌려 날 쳐다보며 말했다.
"광현 오빠야도 좋으니까 삐지면 안돼?"
......누가 삐진다는 거냐.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에루아의 모습에 크림슨 울프도 더 이상 화를 낼 생각은 없어진 건지, 고개를 몇 번 가로젓고는 씁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나랑 마찬가지로 골치 아프겠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로 꼼짝도 않는 크림슨 울프와 에루아에게 말했다.
"일단은 좀 나가자. 또 속이 뒤집힐 것 같애."
"흥. 미숙자 같으니. 이 정도로 동요해서야, 뛰어난 기사가 될 수 없다."
"...기사 따위 되고 싶은 생각 눈꼽만치도 없네요."
내 그말에 그는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에 따라서 나도 모르게 씩 웃어보인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얼른 일어나라구. 뭐, 이 핏구덩이가 좋다면야 그냥 그대로 자빠져 있던지."
그 말에 그는 쿡쿡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크큭. 그다지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확실히 냄새는 견디기 힘들구만."
"아아. 확실히 그건 그래. 일단 이 옷들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는데... 얼룩진거랑 냄새랑... 지우지 않으면..."
그러고보니, 핏자국은 그대로이지만, 시체들은 어느샌가 하얀 모래가 되어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선 크림슨 울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배가 고픈데..."
...설마.
"설마. 댁도 눌러앉을 셈인가...?"
"아아. 물론이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군.
이래서 지나치게 솔직한 놈도 상대하기 힘들다.
누가 보아도 떫은 표정을 하고 있을 나를 앞에 두고 녀석은 말을 이었다.
"너희들을 살려두기는 했지만, 감시의 필요성이 없어진 건 아니다. 그리고 쥬라가 있는 곳을 찾아낼 때까지 기거할 곳도 필요하고 말이지. 그리고, 만약에 누군가가 너희들을 공격해 온다면 어느정도는 전력도 될테고 말이다."
의외다. 이 녀석 원래는 이런 녀석이었나...?
"핑계지. 그거."
"물론이다."
하아... 이젠 방도 없다구. 안그래도 지금 유라와 에루아가 한 방, 누나가 또 하나. 그리고 수아 녀석이 또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고. 그리고 내 방. 이렇게 네칸의 방이 만원 상태인데.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일단은 이 녀석은 내 방에서 재우기로 하지. 바닥에서 자든 어떻게든 할테니까.
물론 조건은 있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지어다. 댁이 일해서 댁의 생활비 정도 벌어온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상관없어."
내 말에 크림슨 울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나도 공짜로 얻어먹을 만큼 뻔뻔한 놈은 아니니까. 받은 만큼 확실히 갚아주지. 안그래도 일전의 일도 있고. 이래저래 빚을 많이 지는군."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셋이 나란히 1018호의 문을 닫고 나왔다.
나와 크림슨 울프가 막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에루아는 1018호 문 앞에 서서 뭔가의 마법주문을 읊고 있었다.
"에루아. 뭐하냐?"
"흔적 지우기."
"............................................"
뭔가...... 완전범죄를 노리는 살인범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
.
.
결국, 아무리 해도 옷의 냄새와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탓에, 탈취제 한 통과 표백제를 써서 해결해 버렸다.
크림슨 울프의 옷을 세탁기에 넣어버리고 보니, 녀석이 입을 옷이 딱히 없기에 내가 가진 옷 중에 너무 커서 못 입는 옷을 줬더니, 작다고 불평이다.
...그야, 키 175를 겨우 넘긴 내가 입는 옷이 190넘는 당신 몸에 제대로 맞을리가 없지.
그렇게 한 참을 옷가지고 씨름 한 결과, 그가 고른 옷은 긴팔 셔츠와 최근에 샀지만, 너무 기장이 긴 것을 사서 바꿀까 하던 청바지였다.
청바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하지만, 웃옷은 사정이 달랐다.
그의 잘 발달 된 상체를 완전히 감싸기엔 내 옷은 상당히 무리가 많았다.
겨우겨우 앞 단추를 채워도 전부 채우지는 못해, 잘 발달 된 흉판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소매도 지나치게 짧은 관계로,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뭐, 나름대로 꽤 멋은 있지만. 지금은 12월이다. 12월 초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다.
그는 겨울이건 어쨌건 춥지는 않다고는 했지만 보는 내가 추워보인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옷장을 뒤져서 옛날에 아버지가 입었던 널널한 코트를 꺼내주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녀석의 몸에 맞춘 것 처럼 딱 맞았다.
흐음. 우리 아버지가 의외로 거한이었던 모양이다.
딱히 아버지가 찍힌 사진이 없는 탓에 그 모습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아. 그러고보니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 아버지 뿐만이 아닌가. 어머니 얼굴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장의 사진을 보지 않으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인간, 영원한 것은 없는건가. 10년전의 그 사건 때만해도 절대 두 사람을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 했건만.
어릴 적의 기억과 요 10년간의 기억들 대부분이 지우개로 싹 지운 것처럼 없다.
젠장할. 벌써부터 치맨가?
영 개운하지 않은 머리를 툭툭 치며 수아의 방에 들어간다.
방 바닥을 구르며 만화를 보고 있는 수아를 가볍게 발로 차서 불렀다가 마나 쇼크에 된통 당한 후,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그녀에게 조금 전에 있던 일들과 크림슨 울프와 협력관계가 된 것을 설명했다. 그에 녀석은 예의 산뜻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헤에. 광현 오빠가 한 일 치고 꽤 잘 했는 걸?"
저 녀석... 이럴 땐 정말로 한방 때려주고 싶......
따악!!!
"아훅?!"
쿵.
어? 어라?
잠깐. 나는 아무것도 안......
그, 그래. 나는 지금 분명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상태... 일 텐데?
"자... 잘도오... 쳤겠다아...?"
"자, 잠깐! 잠깐! 나, 분명히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상태라고 하지 않았냐?! 어, 어떻게 방금 전에 그거, 마법이 나간거냐?!"
내 말에 녀석이 잠시 굳는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녀석은 내게 설명했다.
"그야. 마나를 못 느낄 뿐이지, 마법은 평상시처럼 쓸 수 있는 것 아냐? 확실히 오빠 몸의 마나는 크림슨 울프에게 당하기 전하고 별 차이 없어."
아아. 그런건가. 느끼지는 못해도 쓸 수는 있다는 건가?
그렇게 납득하며 안심한 내 이마에 녀석의 손이 올려졌다.
"그건 별도고. 어쨌거나 마나 쇼크."
"후꺄아아아악!!!"
수아의 마나 쇼크에 당하고 바닥에 축 늘어지는 나를 방문 밖에서 보던 크림슨 울프가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다.
"...흠. 용케도 지금껏 잘도 살아왔군."
그로부터 내가 다시 재기했을 때의 시각은 저녁 6시 반이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유라 녀석, 알바였던가.
크림슨 울프도 배고프다고 아까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참이고.
나도 아직 속은 완전히 안 가라앉았지만 먹은걸 다 게워내서 역시나 배고픈 상태고.
"수아. 저녁은 어쩔거냐? 일단 우리는 유라녀석 알바하는데 가서 먹을까 하는데."
"에루아도 갈래!"
빠지지 않고 에루아도 손을 번쩍들며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시 바닥을 구르며 만화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수아는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응... 난 됐어. 대충 집에 있는 걸로 해먹을거니까."
"그러냐. 그럼 집 잘 보고 있어라. 좀 있으면 누나도 올테니까, 기다렸다가 누나랑 같이 먹든지."
"오키."
그렇게 짧게 대꾸하고 수아녀석은 손을 흔드는 대신에 한쪽발을 들어 허공에 휘휘 저었다.
......건방진 녀석.
뭐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그렇게 우리는 집을 뒤로 하고, 유라가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오피스가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제미니'로 향했다.
현관문을 닫고 1018호의 문을 잠시 쳐다보고는 엘레베이터에 오른다.
아파트 출입문에서 나와 10분가량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 짧은 10분 동안 우리 세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나 혼자 다녀도 이 하얀 머리카락 때문에 눈에 띄는 판에, 똑같이 새하얀 녀석이 하나, 그리고 새빨간 녀석이 하나.
게다가 새빨간 녀석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다.
여기에 유라까지 가세하면 그야말로 서커스단이겠지. 알록달록.
이윽고 오피스가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세 사람분의 요금을 내고 뒷 좌석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한 중간쯤 왔을까, 버스 앞문 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뒤를 돌아보니, 크림슨 울프가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아. 꼴을 보아하니... 천장에 머리를 박은 모양이지.
녀석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쥔 채로, 고개를 팍 숙이고 내가 앉아있는 뒷 좌석쪽으로 왔다.
그리고는 처음 타보는 버스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낮군. 그리고 제법 아프다."
"...그야 그렇겠지."
물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얘기다.
아아. 도대체가... 이런 생활이 매일 계속 되었다간, 조만간 신경쇠약으로 돌아가시겠어.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써가며 버스로 약 10분.
패밀리 레스토랑 '제미니'는 버스에서 내리고 바로 근처였다.
제미니로 향하는 동안 한 팬시점 앞에 에루아가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그것을 달래고 떼어내는데 더욱 시간이 흘러, 제미니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사실, 에루아를 떼어내는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가게 안에서 그걸 보고 있던 인상 좋은 팬시점 주인이 나와서 '한번 보고 가세요.' 라고 에루아를 거드는 바람에 더 시간이 걸린 것.
결국 에루아와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보고 가자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겨우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덕분인가, 속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완전한 공복 상태가 되었다.
공복 상태인 것은 크림슨 울프도 마찬가지인 듯, 이번에야 말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으음. 걱정이다. 과연 유라가 잘 하고 있을까. 혹시, 지금쯤 뭔가 실수라도 해서 점장한테 혼나기라도 하고 있는게 아닐까.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딸랑 딸랑 딸랑...
문에 달려있는 방울이 울려 내객을 알린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웨이트리스가 달려나와 만면의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몇분이신가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미소. 비단결처럼 찰랑거리는 하늘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것에 어울리는 푸른 빛 계열의 제복.
매우 낯익은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분명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기 시작한 유라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누구셈?"
.
.
.
적당한 것을 주문해서 먹은 후, 유라가 일하는 것을 지켜봤다.
군더더기 없는 업무처리. 완벽한 접객. 그리고 말끔한 미소.
으음. 완벽해. 기분 나쁠만치 완벽해.
한 편, 내 옆에서는 에루아가 후식인 파르페를 끄적이며 먹고 있고, 크림슨 울프는 요 몇일동안 쥬라를 찾아다니느라 한끼도 제대로 못 챙겨먹었다면서 벌써 3인분째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돈이야 넉넉하게 들고 나왔지만... 이 기세라면 저녁 밥 값으로만 십만원이 넘게 지출 될 것 같은 예감에 크림슨 울프의 식사를 3인분 선에서 종결지었다.
크림슨 울프가 아쉽다는 듯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막 던져 넣었을 때, 유라가 후식인 커피를 가지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다가왔다.
"......후식."
탁.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던지듯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몸을 홱 돌리기가 무섭게 웃는 얼굴로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이한다.
음. 대체 왜 저럴까. 내가 뭘 잘못했나? 아, 그야. 처음에 들어오자마자 누구셈? 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야 별로 안 좋겠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크림슨 울프가 말했다.
"흠. 묘하군."
"음? 뭐가?"
내가 반문하자 그는 유라를 보며 내게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우리쪽에 올때마다 긴장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적어도 나 때문에 긴장하는 것 같진 않은데. 별 달리 그녀에게선 적의같은게 느껴지지 않고."
"헤? 긴장? 농담은 관두라고. 다른 녀석은 몰라도 저 녀석이랑 긴장이라는 단어는 가장 거리가 멀다구."
거기에, 파르페를 먹다말고 에루아가 끼어들었다.
"아니. 유라 언니. 긴장했어."
그 말만을 내던지고는 다시 눈 앞의 파르페에 골몰하는 에루아.
그런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유라를 본다.
만면에 미소를 띄우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다시 굳어버린다.
......으음... 아무래도 긴장한건 절대 아닌 것 같고, 역시 뭔가 나한테 맺힌게 있는게 틀림없어.
조만간 직접 물어보던가 해야지. 나름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제미니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녀의 태도는 변함 없었다.
뭔가 뒤가 켕기는 듯한 기분을 억지로 밀어넣고 에루아와 약속한대로 팬시점에 들어섰다.
팬시점에 들어서자, 비교적 젊어보이는 주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 정말로 다시 오셨네요? 흐음... 그쪽의 애인분께 드릴 선물인가요?"
"응? 애인?"
나도 모르게 에루아를 쳐다봤다.
에루아는 누가 뭐래도 이미 그 어떤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 가게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절대로 애인은 아닌데. 그냥... 동생 뻘인데."
절대라는 말에 악센트를 조금 넣자 상대는 내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에이, 부끄러워하시긴. 자자, 개업 기념으로 커플에 한정해서 경품 기회가 있어요∼ 잠시만요."
그렇게 내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카운터까지 가서 뭔가 상자를 들고 오는 그.
약간 짧게 깎은 반 곱슬머리의 인상 좋고, 싹싹한 청년이었기에 특별히 불쾌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서 들은 소문으로는 개업한지 일주일도 안되서 우리학교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던가.
왠지 납득이 간다.
좀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자 위에 뚫린 구멍에 손을 넣어 안에 잔뜩 있는 종이 쪽지중에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건네자 그는 그것을 펼쳐 나에게 보여줬다.
그곳에 쓰여져 있는 것은-
[이등상 : 백호 大]
백호 대?
"네! 이등상 당첨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경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그가 잠시 후에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하얀 호랑이의 인형.
조금 심각하게 큰 인형이다.
그것을 그가 에루아에게 안겨주자 에루아의 모습이 안보일 정도니까.
그게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에루아는 정신을 못 차린다.
뭐어... 나로서는 지출이 없으니 만족스럽긴 하지만.
저렇게 큰걸 유라랑 둘이 같이 쓰는 방 어디에 두겠다는거지?
그 때까지 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게를 둘러보던 크림슨 울프가 뭔가에 못 박힌 듯, 진열대의 일점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그러나, 일반적인 십자가 목걸이와는 달리, 사슬을 꿰는 구멍이 긴쪽에 달려있다.
즉, 역십자 목걸이다.
그게 마음에 들은 걸까, 해서 그의 얼굴을 보자니 그건 아닌 듯, 그의 얼굴은 잔뜩 굳은 상태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건지, 팬시점 주인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거라면 이 가게에서 제일 인기없는 목걸이에요. 비싼데다가, 불길해보이니까요."
......저것도 일종의 재능이군. 하고 많은 물건들 중에서 제일 인기없는 목걸이를 찾아내는 녀석이나, 또 그걸 아무런 여과없이 말하는 점장이나.
그렇게 잠시간을 그 십자가를 보던 크림슨 울프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점장에게 들이밀었다.
"...이것으로 사겠어."
금화다. 진짜진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형태로 봐선 금화로 추정되는 물체다.
그것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고는 목걸이를 진열대에서 꺼내어 크림슨 울프에게 내미는 점장.
...이상한 녀석들.
뭐, 본인들이 그걸로 납득한다면 별 상관은 없다만.
그렇게 팬시샾에서 볼일을 마치고 우리가 막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점장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아, 그 백호 인형있죠. 녹음 기능이 있는 건데요, 경품 당첨 축하 메세지가 들어있으니까 꼭 들어주세요∼"
"네∼!"
인형을 안은채로 활기차게 답하는 에루아.
의외의 전개로, 결국 지출은 제로.
왠지 모르게 이렇게되면 또 오히려 영 찜찜하단 말야...
어쩐지 빚이라도 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결국 사버렸다. 제법 세련된 은반지다. 가격으로 봐서는 당연히 순은은 아니지만, 그래도 디자인 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이놈의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때문에 쓸데없는 지출을 한 셈이 되지만...
뭐, 유라 녀석이 뭔가 내게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니 기분 풀어줄 겸 이거나 주지.
으음. 그나저나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걸까? 돌이켜보면, 유독 나에게만 항상 딱딱한 태도로 나오는데.
에이. 모르겠다.
일단은 집으로 가자.
.
.
.
놀랐다. 설마 그가 자신이 일하는 곳에 얼굴을 내밀 줄이야.
가게 문에서 그를 맞이했을때 그가 자신의 어색한 미소를 보고 순간적으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아아. 그렇게나 어색했을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건데.
결국 그가 가게에 있는 동안 유라는 계속 평상시의 태도로 그를 접했다.
그에게 자신의 덜떨어진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나 어째서인지 광현은 유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평소에도 뭔가 뚱한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평소보다도 더 뚱한 표정을 짓고 말이다.
일을 끝내고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시각은 밤 9시.
광현일행이 가게를 나서고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의 오늘 일은 모두 끝났다.
귀가길에 오르는 동안, 그녀는 광현이 가게에서 보여준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뭔가 내가 잘못 한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한 가게 앞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쇼윈도 안쪽으로 보이는 소박하면서도 제법 세련된 은반지. 구성성분을 대충 분석해보자니 은에 다른 것도 섞여 있지만, 꽤 괜찮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에게 첫 만남 이외에 딱히 고맙다는 말도, 표현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던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준 것이나 다름 없는 그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항상 퉁명스럽고 짜증만 내는 광현이지만, 그의 성품은 확실히 상냥한 편이다.
뭐어, 밴댕이 소갈딱지에다, 태도는 항상 삐딱, 거기에다 엄청 이기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신의 주위의 세계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길줄 아는 남자니까.
그래서...
"아가씨. 애인 줄 반지 찾나요?"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한참을 가게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유라를 보다못해 어느새 가게주인이 옆에 와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갑작스레 그가 말을 걸어와 약간 당혹한 그녀였지만, 유라는 그에게 답했다.
"...아니오."
딱 잘라 부정하는 유라에게 웃어보이며 그는 재차 물었다.
"그럼, 누구 줄 건가요?"
그 질문에 유라는 쓸쓸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그러자 상대는 빙긋 웃어보이며 유라에게 말했다.
"분명 그 분도 아가씨랑 같은 생각을 하시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점장이 쇼윈도 안의, 방금 전까지 유라가 보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묘한 날이네요. 저 반지,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어서 거의 팔리지 않는건데 말이죠. 아가씨 오기전에 어떤 남자분도 저걸 골라가시더라구요."
"......"
그 말에 따라 그 반지로 시선을 옮겨본다.
그런 그녀에게 점장이 말을 이었다.
"그 남자분도 아가씨랑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누구 줄 거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의 말에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건 광현이다. 무엇을 해도 서툴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서툴은 그.
아아. 그래.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그를.
그렇지만... 이런 자신에게 그런 자격따윈 없다.
그에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다.
그녀가 자신의 언니인 쥬라를 죽이려는 이유도, 그리고 자신의 지금 몸상태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조차.
그에게 알려지는게 두렵다. 지금의 유라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정체를 그가 알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느새 그녀의 손위에는 방금전까지 보고 있던 은반지가 들려있었다.
저 멀리서 팬시샾 점장이 응원이라도 하듯, 손을 흔드는게 보인다.
역시...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다.
쥬라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옮겨간 은신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같은 세계에 있는 한, 서로간에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다시 광현과 쥬라를 만나게하면, 그녀들의 비밀을 그가 알게된다.
그건 싫다. 그게 싫기에 쥬라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다. 광현과의 지금의 관계가 깨져버리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렇기에 그가 모르게, 쥬라를 죽인다.
지금의 그녀의 몸상태로는 쥬라와 그녀가 만드는 좀비들의 상대를 할 수는 없다. 가면 확실히 죽는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반드시 쥬라를 죽인다.
더 이상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다시금 손안의 반지를 내려다본다.
아아.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무사히 살아 돌아가서 이 반지를 그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한번 떠올리고 결의를 다진 듯,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그녀의 한쌍의 애검을 소환했다.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다. 오늘 밤, 모든 것을 끝낸다.
그녀의 소환에 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대검 하이페리온과 태도 엑세리온.
10여년간 그녀의 손안에서 충실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해온 우직한 존재들.
그들에게 그녀는 미리 작별인사를 해둔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너희들의 싸움도. 그리고 이 나의 피로 점철된 저주받은 생(生)도.'
그렇게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어두운 밤의 골목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
.
.
[이등상 당첨! 축하드립니다!]
요란뻑적지근하네. 에루아가 잔뜩 들떠서 다같이 듣자고해서 같이 들은 것 까진 좋지만... 이딴 거 듣는다고 뭐가 나오나?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이런게 아닙니다. 아, 실례. 자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김 영훈. 보시는대로 팬시점의 주인입니다. 만, 본업은 따로 있지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것을 듣는 여러분. 일전의 폭동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으신지?]
!!!!
이... 이건?
나도 모르게 옆의 수아와 얼굴을 마주했다.
[제 말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오늘 밤 11시까지 가게 앞으로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신들에게 상당히 흥미가 많은 한 연구자로서 말씀드릴게 있으니까요. 그럼.]
그것을 경청하던 크림슨 울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럼 이것도 설명이 가는군."
"뭐가?"
반문하는 내 눈앞에 그는 아까 산 역십자 목걸이를 꺼내보였다.
"상당량의 마나가 응집된 물건이다. 일정 수준의 마법 한번 정도를 쓸 수 있는 마나가 축적되어 있지. 이것뿐만이 아닌, 그 가게에 있던 악세사리류가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었다."
"......말도 안돼. 일반인이 그렇게 많은 마법 도구를 구할 수 있을리가..."
크림슨 울프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에 크림슨 울프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반인은 아니군. 그만큼의 대량의 마법 도구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적인 테크놀러지를 구비하고 있는게 틀림없어."
그의 말에 그 장소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백호 인형을 끌어안고 놀고 있는 에루아는 제외하고.)
"내 예측이다만, 이 녀석은 확실히 가문 클래스의 '마법사' 다."
제 2 화 Give & Take - 자매 (2) 에서 계속...
==========================================
원래 부제로는 여자의 결의, 혹은 싸움으로 하려고 했지만 모 애니메이션, 에X 게리온에 비슷한 이름의 부제가 나오기에 자매로 변경했습니다.
르시아, 드디어 얘기가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댓글 5
-
히이로
2004.03.18 17:10
-
배사
2004.03.18 23:41
으음.... 주인공은 마법을 못 쓰는 것은 아니었군요.
(단지 못 느낄 뿐이라...)
조금 길다는 느낌도 들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등장인 건가요. ^^ -
카루나
2004.03.19 00:28
하이페리온과 엑세리온이 심히 거슬립니다... [이름이 겹치는 것을 안 좋아하는 人]
라지만 여전히 재미있군요. -
알면용취^^
2004.03.19 16:10
정말... 언제 한번 껄떡지근하게 싸울 분위기군요 -
낙일군
2004.03.19 17:09
멋지게 한판인가요??
흐음..
빨간 아저씨를 위해 힘을 쓰는 에루아양~
아직까지는 괜찮은 듯 하지만..
흐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배사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등장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