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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무게를 받으며 몸이 크게 흔들렸다.그와 동시에 앞으로 밀리는 상체를 피범벅이가 된 오른손으로
고정하고는, 왼손은 절벽아래의..흔들리는 소녀에게 뻗쳤다.

차가운 초겨울의 바람이 불어온다.그것들은 칼날이 되어 머리카락와 피부를 스쳐가며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히고 있었고, 지금 이 왼팔이 위태롭다.

절벽에서는 후두두둑..하고 돌조각들이 떨어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앞의 소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그 눈동자에서 감정은 읽기 힘들며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알수 없다.하지만, 그 멍한 표정은
'소녀'라는 이름의 얼굴에 너무나도 딱 드러맞기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낼수 밖에 없었다.

흡..하고 한숨을 돌린다.이렇게 하늘하늘 흔들리는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지지만, 왼팔만으로는
들 힘은 없는것 같다.어쨋든, 부상자니 말이다.옆구리와 배에서 욱씬 욱씬하고 아파온다.신경쓸 겨를은 없는것
같지만, 아무레도 삼류 영화의 시나리오 대로라면 피가 배어져 나오고 있겠지.

새하얀 손이 내 왼손에 붙잡혀 있었다.저 마을에서는 지금 이 흔들거리는 소녀가 보일까, 하는 의문도
가져보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닌듯 싶다.쭈우우욱, 이라는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그 새하얀 손이 미끄러진다.
아아..그래, 분명히 그녀의 손에도 아직 말라붙지 않은 내 피가 묻어 있겠지.그렇기에 그렇게나 미끄러 질지도
모르겠다.

왼팔만으로는 부족할것 같기에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만이라도 도와주게 하기로 했다.그리고 끌어올리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려진 소녀는 곧 허공의 다리에서 해방되 다시 땅을 밟게 되었다.

숨소리 만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 아래에 퍼진다.오른쪽 어깨의 피가 아까보다는 흐르지 않게 되어, 조그만한
안정을 되찾게 되었지만서도.문제는 지금 어깨가 아니라 일전에 다쳤던 배와 옆구리인듯 싶다.

여느때보다 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조용히 절벽 위에 앉아서 그 바람을 즐기고 있는 내 앞에..
주저앉은체로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갈색 긴머리의 소녀가 무슨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조용히 있었다.
침묵은 계속 되고 있다.그리고 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시의 한 부분이..

그러나 침묵은 깨지지 않았네.
침묵은 어떤 계시를 주지 않았네.
들리는 단 한마디.
속삭이는 목소리로 "레노어"
나도 속삭였네.
메아리 되어 다시 돌아온 "레노어"
오직 이 한마디뿐 더이상은 없네.

포우의 시다.
그저 바람소리만 들리는 이 침묵속에서 아무 감정없이 어린아이가 노래를 부르듯이 중얼 거렸다.
읊은 시의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그저 푸른 바람속의 우연일까.침묵은 더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레노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레노어 겔븐...그사람의 이름...."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기만을 몇번.그것만 아니라면 지금은 아직도 흐르는 침묵.아아, 어쩌면 이것도 또 다른
침묵일지도 모른다.이야기가 반복되는 지루함은, 옛날 할머니의 무릎베개 위에서 실컷 들었던 경험이 있다.

"레노어 겔븐...?"

하지만 그 이름은 확실히 들었던 이름.만약 맞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저택에서 보았던 그사람.

하늘이 푸르다.아까부터 계속 알수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눈앞의 여자에게..난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지만.
왠지 그럴수 없는것이 분하다고 할까나.이렇게나 아름다운 소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그러니까..내 이름은.."
"어째서..!"

그녀의 말에 내가 할려고 하던 말은 목뒤로 삼켜졌다.

"그남자는 날 구해주지 않았어..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날..절대로 구해주지 않았다고!그런데..어째서..같은
남자인데..넌 날 구해주는거지?어째서?"

고개를 숙인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내가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그 목소리는 나를 향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잠시 포우의 침묵을 지키다가 그 목소리에 응답했다.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남자는 모두 똑같은 남자가 아냐."
"에...?"
"언젠가, 책에서 여인도(女人島)라는 섬을 본적이 있어.그 섬에는 여자들만이 살아가고 모든 정치 사회를
여자들이 이끌어 가는 섬이였어.그 여자들은 남자라는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지.설령 알더라도, 남자는 모두
야만인이다.정도로 알고 있었어.하지만 그건 전혀 아니야.그 섬에 처음 발을 디딘 남자는, 그런 야만인이
아니였거든.평범한 영국의 신사.그리고 여자들은 남자라는 것에 대해서 또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어.
무슨 이유에서 남자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난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야.인간은 곤경에 처한 인간을
도와야 하잖아.
그냥, 그것뿐이야."
"하지만...그 사람은 날 돕지 않았어..."
"아니, 돕지 않은게 아냐.돕지 못했던 거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실을.

"레노어 겔븐...그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대로 놔둘 사람이 아니니까.그리고..그 사람은 기품있는
영국 신사거든.절대로..곤경에 처한 여자를 버리고 사라질 위인이 아니야."
"그럼..?그 사람을..알고 있어..?"
"알고 있지.영국 최고의 신사라고 해도 손색없는 사람.나의 스승이자 나의 친구.아마도 그사람은...그렇겠지.
너와 겔븐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누구...?"

말을 이을려고 하다가, 알수없는 목소리에 말이 삼켜졌다.제 3자의 목소리.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눈앞의 소녀는, 눈이 휘둥그레진체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 뛰었다.
뒤에서 본 소녀는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절벽을 지나 언덕 밑으로 쭈욱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후로 다시 언덕을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 성윤씨.점심밥 가지고 왔어....!!?"

전체적으로 푸른 느낌이 나는 여자다.하지만 머리카락은 흑발인걸.거기다가..

딸랑..

이라는 낯익은 방울소리는..

"서..성윤씨..!어깨에 피가..!?"
"아니아니, 괜찮아 루나링.조금 따끔따끔할 뿐인걸."
"사..상처도 벌어지신 거에요!?붕대에 피가..."
"아니아니, 괜찮다니까.."
"안되겠어요!어서 박사님을 불러올게요!!"

쟁반을 들고온 공주마마 같은 루나링은 내 모습을 무슨 큰일난듯이 이리저리 둘러보더만 곧 들고있던 쟁반을
풀밭에다가 놓고서는 또 다시 언덕 밑으로 쭈욱 내려갔다.

"하아..뭔가..이 섬 사람들은 이상해..."

그리고 놓여진 쟁반위에 숟가락을 집어 들고서는 그릇에 담겨진 알수없는 걸쭉한 수프를 한입 떠서 먹었다.

"오..꽤 맛있는데?"

아무레도, 나쁘지만은 않은것 같다.






그때도 추운 겨울이였다.
거리의 빈민들은 언제나 입에서 새하얀 김을 내뿜으며 검게 얼룩진 도로를 어슬렁 거렸고, 시커먼 자동차들은
그런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고 무시하며 달렸다.산업혁명때에나 볼수 있던 모습들이다.건물의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검은 거리의 귀부인은 검은 양복을 입은 보디가드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
고 있었다.그리고 그 아름다운 귀부인을 검게 얼룩진 빈민들은 침을 흘리며 바라볼뿐.전쟁 후의 평민들의
참혹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검은 도시 위에 서 있었다.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푸른 언덕이 있고, 푸른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이상세계.그리고 그 언덕 위에는 커다란 저택이 서 있었다.빈민들, 평민들은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검은 지옥의 유토피아.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때.
영국의 양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생활을 하여만 한다."

전쟁이 끝난 이시기에,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했다.그럴수 밖에 없는게, 전쟁은 모든것을
잃게 하고 모든것을 빼앗기에.거기서 자신은 '높은 사람'이라는걸 과시하지 않는다면 뺏긴자에게 다시 뺏기게
된다.하지만 높다고 해서 뺏지 않을 사람들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그사람이다.
TV에서나 봤던 마술사 모자를 쓰고, 검은 신사복을 입고, 가죽장갑을 낀채 지팡이를 들고 있는.콧등에 아무렇게
나 걸려져있는 동그란 안경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모자를 벗으면 숱많은 은발이 드러나 보이던 그.

'레노어 겔븐'을 만난건 그때였다.
원래 에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를 보면 레노어는 소녀의 이름.하지만 그는 영국의 멋지 신사였다.

그도 한글을 할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스승이였다.
그는 언제나 내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걸맞는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거부감 있는 말투도, 그렇게 느끼한 말투도 아니였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기품있는 동작.
이 모든것이 그사람, '레노어 겔븐'이였다.

아무레도 그렇게, 그사람 밑에서 지내왔었던것 같다.
그리고 내가 19세 되던 그해에, 그는 저택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래, 여느때와 같이 그렇게 떠난것 같다.
뮤직컬 Singin' in the rain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자유롭게, 어쩌면 지금도 빗속에서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모자를 흔들며 입가에 가득 번진 미소를 보여주며, 그 은발의 영국신사는 저택을 떠났었다.그 후로
내게 기억된 겔븐은, 인류가 낳은 최고의 신사.겔븐은 귀부인이 지나갈려는 빗길을 서슴없이 자신의 옷으로
덮어줄 그럴 사람이였다.내 추억에는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그리고,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아야야야..."
"가만히 있어요 선배!"
"하지만..아프다고."

방안에는 후배 정윤지와, 아까 쟁반을 들고온 루나링이 있었다.이미 저녁이 되어가는지 하늘은 푸르게 져가고
있었고, 방안에는 램프와 휏불들이 번쩍이고 있었다.핀셋에 집어져 있는 솜에는 아무레도 소독약이 잔뜩
발라져 있겠지.

"일단 배나 옆구리는 재봉합 했지만..그런다고 너무 움직이면 안돼요.정말..선배도.상처가 다 안아물어서
죽어버리면 어쩔레요?"
"음?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죽은 사람도 있어?"
"당연히 있죠!세균이 침투해서 상처부위부터 온몸이 조금씩 조금씩 썩어 들어가..."
"어이, 그거 오버 아니야?"
"오-버든 아니든!어쨋든 큰일 나는건 마찬가지라구요!"
"연구자라는 사람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서야...!!"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라구요!!"

내말에 더더욱 소리높혀 대답하는 후배녀석이다.
후배녀석의 이름은 정윤지.미국에 있는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다.무식한건지, 아니면 요즘 어정쩡한
패션이라는 건지, 안경은 무식하게 시커먼 테를 하고서는 안경알 너머의 커다란 눈이 깜빡이고 있다.
아무레도 의사가 되려 했는지 의대까지 나와서 여러가지 있었는것 같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 까지
받으면서도 내가 있는 연구소에 와서는 연구소장인 영감에게 제발 연구원으로 넣어달라고 사정사정한 인물이다.

바보인건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행실대로 보며는 꽤 덜렁 거린다.
방금 실험에 썼던 시험병이 어디있는지 찾아 다니고, 책더미 속에 자신이 읽었던 잡지를 찾길 위해 온 연구실을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니는, 뭐...순전히 말하자면 바보라고도 할수 있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루나링"
"에?무슨 일이죠?성윤씨?"
"아까 봤지?그러니까..그 갈색머리 여자애.."
"갈색머리..?"
"그러니까..키는 요정도 만하고, 머리카락은 이-렇게 긴.."
"아..아루린 말이군요..."

제스츄어까지 해가며 해명하니까 그녀는 이제야 알았는지 알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수없는 표정을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여자애가 아니에요..아이를 가진 주민은 애라고 하지 않지요.그건 성윤씨의 나라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애를..가졌다니..?어려보이던데?"
"6살난 여자아이가 있어요.그리고 그녀는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 아래에 그 아이랑 살고 있어요."
"아이를 가지고 있는 아줌마라니..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그럴지도 모르지요.아루린도 내년이면 19살이니까요.아직 외면으로는 소녀니까요."
"아아..그런가, 이 섬에서는 아직 어릴때도 아이를 가질수 있는건가...그런데 아이는 어떻게 가져?"
"그러니까..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알카리아 산맥이 있지요.그 알카리아 산맥을 타고 북동쪽 산 중턱에
'돌의 제단'이라는게 있어요.거기서 하룻밤동안 자지 않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가질수 있다고.."
"음..돌의 제단인가.그렇다면 그 아루린도 거기서...?"
"아뇨, 아루린은 조금 달라요.."

시선을 내리 깔고서 루나링이 말했다.

"아루린은..그러니까..'돌의 제단'에서가 아닌 다른곳에서 아이를 가졌어요.."
"다른곳..?"
"..남자와의...관계...."

그 목소리가 조용히 방안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루나링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날..성윤씨처럼 이곳으로 표류된 사람이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사람을..아루린이 처음 보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겁니다..우리가 그것을 안건 그 후 아주 오래된 후였고..그때는 이미 아루린의 배가
불러가기 시작한 때였지요..
남자는 섬에서 추방 당했습니다.서쪽 작은배를 타고서..바다를 향해 떠났지요.그리고 그 후로는..아무도
그 남자가 어떻게 됬는지 모릅니다.비밀리에 처리된 일이라서..아루린은 그 남자가 자신을 버려두고 간줄로
알겠지요.."
"아아-, 그런일이..."

그녀의 얼굴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 마저도 그 소리에는 침울함이 뚝뚝 떨어져 흘러 들어왔고, 그 목소리는 전율이 오를만큼이나 슬픈
영화에 나오는 BGM을 듣는듣한 환상마저 일게 했다.

"쿠우-........"
"아."

그리고 그런 환상을 깨게 한건 조그만한 코고는 소리.
후배녀석 윤지양이 침대를 베개삼아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훗..."
"아, 이녀석도 많이 피곤했을려나.."

아까의 슬픈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눈앞의 루나링이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미소를 지었다.

"예에, 이분도 리르씨랑 같이 성윤씨를 병문한다고 밤을 새워버렸는걸요."
"하아?이녀석이?거 참.이녀석도 선배 생각하는 마음이 있긴 있나 보군."

손을 뻗어 침대에 기대어 잠을 자고있는 후배녀석의 머리에 머리를 살짝 얹었다.좋은 느낌.샴푸는 또 무슨
샴푸를 쓰길레 머릿결이 이리도 좋은지 모르겠다.음...비달싸쑨 쓸려나?

"그런데 루나링..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에?뭐죠?"
"어째서..이녀석들이 이곳에 있는거지..?"

후배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건지, 꾹꾹 누르는건지 모르게 정윤지양을 가리키자..

"그러니까..이분이..'선배님을 그냥 놔두고 갈순 없습니다-!!!'라고 해서..그리고 그 친구분으로 보이는 분이..
'이 바보 촉새야!!너혼자 남아서 뭘 어쩌겠다는거야!?나라도 남아야지 별수 있냐-!!'라고하셔서..두분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렸어요."

에...멋지게 재현해내는 무녀씨다.
손동작 목소리 톤까지 완벽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

"헤에..그거 참 대단하네...?"
"에?뭐가요?"
"아, 아니.아무것도 아니야."

자그만한 한숨을 쉬며 침대에 푸욱 기대었다.

"음?그러고 보니..루나링은 안돌아가?"
"아, 돌아가야지요.밤도 깊었으니..."

그녀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기지개를 펴는 그녀의 팔이 위로 올라가자 소매가 스르륵 내려가 속살이
보이기도 했지만, 음...그래도 역시, 다 보여주는게 더 좋을지도...

똑똑.

누군가의 문두드리는 소리.통나무로 대충 이어 붙여진 문인데도, 참나무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문처럼 아름다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음산한 초겨울 밤에, 그런 아름다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노크소리 말고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그리고..조용히....

"레노어-"

내 입에선 그런 헛소리가 흘러 나왔다.

"레노어..?"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무언가에게 홀린건가.그녀가 알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 포우의 시.까마귀에 나오는 그 유령에게 난 홀렸을지도 모른다.그 음탕한 검은 유령에게.
천사들이 내게 속삭였다, '레노어' 라는 이름을.

"그래. 속삭였다.그 이름을."

머릿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
방안 램프의 불이 흔들리고, 바람이 불었다.

산들바람이라고는 도저히 커다란 바람.하지만 돌풍이라기 보다는 너무나도 약한 바람.이 어중간한 바람은...
새하얀 깃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새하얀 새의 깃털을 타고.
어느센가 방문이 크게 열려 젖혔졌고, 바람이 더욱더 세게 불어 램프와 휏불의 불씨를 모두 죽였다.

역시, 유령에게 홀린것이다.
새하얀 깃털을 타고온 이 돌풍이...바람을 타고 이 방안으로만 들어올일은 없다.이것은 꿈?아니면 환상?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인류의 손님이여."

또 다시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덜썩거리는 날 덮고있는 새하얀 이부자락, 겨울의 바람은 아무것도 없이 붕대만을 감은 내 몸을 너무나도
거세게 공격해오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떴다.

돌풍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함께 불어온 새하얀 새의 깃털도 모두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다.그저, 활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것은...커다란 만월을 등지고 서 있는 날개달린 사람...

"뭐..뭐지...?"
"대행자..."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루나링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월신(月神)의 대행자이시여..이곳에는 어인일로?"
"그런 형식적인 대화는 그만 두자고.루나양."

눈 앞의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다시 미간을 찌푸려 자세히 바라다 본다.어둠속에 녹아 들어있는, 하지만 너무나도 튀어 보이는 새하얀 코트.
그리고 적갈색머리카락을 정리정돈 되지 않게 아무렇게나 놔둬 버렸고 뻘건 눈동자를 가진데다가 동그란 안경은
콧등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등 뒤에는 새하얀 날개가 달려있다면...?

"천사....?"
"아니, 천사가 아니야 이성윤.난 앞서 루나가 말했듯이 월신(月神)의 대행자.뭐, 겉으로 보면 확실히
천사로 보일까나-"

태연하게 말하는 천사였다.
왠지 그 말투로만 보아도 느긋한 느낌.

"아카이..당신.이곳엔 또 뭣 하러 왔죠..?"

불신이 담긴 목소리로 루나링이 말했다.
아, 이제야 생각 난거지만.왠지 루나링은 감성은 풍부할지도.그러니까.센티하다는 걸까나.
아카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용히 루나링을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이런 이런..루나가 한밤중에 한방에 외간남자랑 같이 있는데 걱정이 될수밖에 없잖아."
"절 루나라 부르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하지만 루나가 친한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부르라고 했잖아?"
"전 아카이에게 그렇게 말한 기억은 없습니다."
"뭐, 그런가..."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곳으로 내려온게 아닌가요..?"
"아아, 역시.루나는 뭔가 잘 안다니까.."

그리고 그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이쪽을 바라다 보았다.

"카젠섬의 결계가 파괴되었다..."
"그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일전에 소동도 있었으니."
"아아, 역시 루나양이라면 알고 있군.이유는 아무레도...신과 인간의 계약을 무너뜨린 자가 있기에 무너져
버린것 같은데..아무레도 그 자가 이 섬에 있다는 정보다 들어와서 말이지."
"신과 인간의 계약?그 파기자가 이 섬안에?"
"아아, 그래.어쩌면 이녀석일지도 모르겠군..."

동그란 안경 렌즈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성윤.분명히 넌 로렐라이를 찾으러 왔다가 이곳에 표류 되었다고 했지?그때 무슨 이상한걸 발견 하지 못했나?"
"이상한거...?"

이상한거...
없는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는데...?"
"아아..그래..?"

불신의 눈초리가 그에게서 쏟아진다.
그리고 난 조용히 그 눈동자를 바라볼수 밖에 없는것.

"뭐, 그럼 할수 없나- 보고서에는 대충 쓰는수 밖에..."

그렇게 불성실하게 말하고서는 그 천사는 등을 돌렸다.

"아, 이성윤?다음부터는 그냥 성윤이라도 불러도 되지?"
"아아, 어.그런데 네 이름은..?"
"내 이름?아아, 내 이름은 아카이 텐시.그냥 아카이라 불러줘."
"그래, 아카이."
"너한테 오늘 할말이 굉장히 많은데...쓸데없는 말은 하지말라고 상부에서 보고가 와서 말이지.이 섬이나
다른곳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북동쪽의 '돌의 제단'을 넘어서 산 중턱 너머로 와봐.오다 보면
낡아 빠진 절이 있을건데, 난 거기에 있으니까."
"아아, 그러지."
"올때 선물 정도는 챙기가 와 달라고."
"음..."

그렇게 말하고 그 아카이라는 녀석은 소리없이 방을 나갔다.
방 밖에는 새카만 어둠이 깔려 있고, 만월이 이 지구를 잡아먹을듯이 가까이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만월이.

"그럼, 먼저 가지.다음에 볼수 있으면 보자."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 달려있던 조그만한 날개가 새하얀 깃털을 흩뿌리면서 크게 부풀어 오르자, 창공을
가르는 새의 날개짓처럼 펄럭 거리더니 이내 검은 하늘을 갈라버렸다.그리고 왼쪽에 있는 북동쪽 산으로
사라지는 그 정체불명의 남자의 뒷모습을 난 조용히 쳐다볼수 밖에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다가온 새하얀 달이 밤을 비춘다.아무레도 지금쯤이면 마을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겠지- 하는
예상이 든다.왜냐하면 저 절벽밑의 마을에 불이 켜진 곳은 한곳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알수없는 성격의 녀석이였다.도대체, 친절한건지 차가운건지 모를.아무레도 착하다면 착하겠지만...

"성윤씨.."
"음?루나링?"

자리에서 일어나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있던 나의 등뒤를 달빛의 무녀가 불러냈다.

"그사람 말은 그렇게 귀 기울여 듣지 마세요..헛소리가 대부분이니까요."
"아아, 그런가.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나쁜 사람이야 당연히 아니죠...그나저나, 추우실텐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쉬세요."

등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흑발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짝인다.

그녀가 기분좋게 미소를 짛고 있었다.
아아, 이럴때 나도 미소를 지어주지 않으면 안되겠지..

"응, 잘게.루나링도 어서 가서 쉬어."

그렇게 말하고 어느센가 루나링은 내 앞으로 통통 뛰어와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할말이 있었는데-"
"할말?"

루나링이 잠시 망설이듯이 생각을 한 뒤에...

"장로님이 이번 일에 대해서 이 섬에 남아도 괜찮다고 했어요.언제까지 마을 사람들 한테 숨길수도 없는 일이고
하기도 했고...그것보다는 위에서 시킨 명령같은데..이번 일에 대해서는 장로님이 저에게 모두 떠맡겨 버려서..."
"위에서 시킨 명령?"
"아아, 네.아까 보셨죠?아카이라는 사람.그 사람은 말 그대로 신의 대행자에요.신의 명령을 떠받들어 우리에게
대신 직접 알려다 주는 사람이에요.그것 말고도 많은 것을 할수 있지만..요즘은 옛날과는 다르게 북쪽에 있는
대륙에서도 자주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잔심부름만 하면서 여과생활을 즐기고 있는것 같더군요."
"그래..?"
"예, 그럼.먼저 들어갈게요."
"아, 조심해서 들어가 루나링."

등을 돌려 절벽이 있는 언덕을 내려가려는 루나링에게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성윤씨- 전 그냥 루나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저 멀리 뛰어가면서 그녀가 소리쳐 불렀다.
아아..루나인가..그렇다면 지금 충분히 루나링에게 친하다는 소리인가..

뭐, 그런건 아무레도 좋은것 같다.
일단은 그만큼 이쪽 사람들과 친해졌다는 소리인것 같으니까.
이제..정보를 얻으면서 약속을 지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역시...저 사람...."

커다란 달빛 아래에서 밤하늘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상황이 바뀐듯 하지만,
난 지금 선녀의 목욕을 훔쳐보고있는 나뭇꾼, 그리고 달빛에 젖어있는 그는 선녀.이야기상 난 선녀의
옷자락을 훔쳐가지 않으면 안되지만...그는 이 넓디 넓은 언덕에 옷자락 하나 남겨둔적 없다.

"하아...."

목구멍 뒤에서 흘러 나오는 새하얀 입김이 너무나도 외로워 보인다.
어릴때 아무렇게나 들은 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내가 이런 심정인지 알수는 없다.

'저 남자 때문에 이런 섬에 남아버리다니...'

혼자서 아무도 들리지 않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왜 이런섬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복수는 해줘야 한다.그때의 복수를.아주 먼 옛날의 복수를.
나의 고백을 거절한 녀석에게...확실히 복수 해줘야만 한다.그렇지 않으면...이렇게 두근거리는 이 내 가슴이
용서치 않으니까.

오늘따라 달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것 같다.
어릴때 화성이 제일 가까기 왔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지구의 위성인 달은 그것보다 더 크게 보이는
거겠지.새하얗게 빛나는 달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인다.그리고 그 주위를 춤추는 별마저.달빛에 젖어 조용히
잠들고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곳에서는 안되겠지.자칫하면 들키게 된다.

내가 이 총을 든것도.
내가 경호원이라는 것이 된것도.

다 저녀석 때문이니까..들키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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