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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Loreley ~녹색의 황혼~#5-습격

2004.01.12 17:06

T.S Akai 조회 수:284



흙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다본다.
여기저기 진흙이 묻어있는 손은 저 밤하늘의 달에의해 비추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였다.달이 찬것을 넘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아아아..."

언습해 오는 공포가 싫었다.다가오는 어둠에 손을 댈수가 없었다.말조차 걸수가 없었다.
구름은 달을 가리고, 지구를 어둠으로 감싸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피비린내가 날것같은 바람이 호흡에 휘감긴다.난 그저 절벽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볼
뿐이였다.시커먼 암흑천지를 내려다볼 뿐이다.

손쓸수가 없다.
난 그저, 모든것을 배부르게 먹어치우는 어둠에 삼켜졌을 뿐이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떨고 있었다.떨리고 있었다.이 칠흑의 밤 아래에...달빛마저 은빛 구름에 뒤덮혀 버려 지구를 비추어
줄것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그리고...저택의 방들도,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무서웠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아아, 그리고 슬프고..안타까운...

죽음을 보았다.
아무것도 할수없는 소년은 그저 이 일을 남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뿐.

왜 놓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나약한 이 나를 난 죽이고 싶을정도로 경멸한다.

철문을 통과해..커다란 나무로 되어있는 현관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차갑게 식은 손잡이가, 온몸에 전율이 되어 전해져 온다.

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여어, 이제왔는가.나의 형제여."

듣기싫은 목소리였다.
맡기싫은 냄새, 비린내.정육점에서의 고기 비린내.그리고...호흡에 휘감기고 혀에 감도는 향기.

끝없는 어둠이다.하지만..그 속에서는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분명히...누군가가.

"뭐야?벌써 날 잊은거야?"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소년의 목소리는,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섭섭한데에..?날 잊어버린건."

아무런 대답도 안했는데, 소년의 목소리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정신이 이상해져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낯익은 목소리.그리고...참을수 없는 호흡.두근대는 심장.
원하던 것은...이것인가?

"왜 그런 눈으로 보고있어?이성윤?넌 이 양키놈들을 싫어하지 않나?"

은빛 구름이 거두어진다.
어둠이 달아난다.달빛이 비친다.그리고...그 달빛은 커다란 창문 사이로, 저택의 중앙홀을 비추었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밑으로 비춰진듯한 그 현상.

질퍽.

모든 감각이 되돌아온다.
미지근한 액체가...신발을 뒤덮혔다.시야는 흐릿하지만, 붉다.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은..그저 달빛에 비추어진
그 풍경을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피에 젖어있는, 자기 자신을.

아니, 자신이 아니다.
피에 젖어있는건 내 앞의 거울일뿐...내가 아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성윤.난 니 앞에 세워진 거울이 아냐.난 너야.그리고 넌 나지.난 거울에 비추어진
너이고, 넌 거울에 비추어진 나야.그리고..지금 눈앞에 있는 너도, 나다."

너무나도 똑같은 소년이 둘.
차이가 있다는것은, 눈 앞의 소년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달빛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속 했잖나?모든 서양인들을 누르겠다고.그것이..그때의 네 결심이 아니었나?어머니도..아버지도..
너의 조국도.이 빌어먹을 양키놈들에게 의해 모두 기억속에서 사라졌다는 거냐?"

틀려.난 잊어버린적 없다.그날의 수모를...난 잊어버린적 없다.

"그렇다면, 너의 그 생각을 세계에 드러내 보아라.반항해라.발버둥 쳐라.그것이..네가 원하던 것이 아니더냐?"

복숭아빛의 분홍 고깃덩어리 위에 선 소년이 말을 했다.아까의 어조와는 다른 어르신의 말투.
그것은 나, 그리고 나는 그것.이 모든것은 바로 이 나다.
그렇다면..

"그래, 내가(네가) 이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소년은 그 고깃덩어리 사이에서..구체의 무엇인가를 들었다.끝이 쭈욱 늘어나있는..머리카락을 잡혀
대롱대롱 거리는 여자의 목...금발의 머리카락이 주욱 늘어뜨려 진다.금방까지만 해도..나와 함께 있었던 그녀.

"흣......!!"

시야가 더욱더 흐려진다.
달빛은 여전히, 녀석을 자랑하듯이 비추고 있다.

"니가 생각하는 대로야.아름다운 여자였지.."

소년이, 거울속의 이성윤이 씨익 하고 웃었다.그 입은..여유가 넘치는 얼굴.즐거운 얼굴.빠른 템포의 음악..
두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흐를것만 같은 웃음.

"아름답지 않았어?그 물거품 말야.난 좀더 즐기고 올줄 알았는데.역시 넌 찬스를 모르는 바보야."

어둠속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질책한다.
얼굴이 뜨겁다.분명히....난 지금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자, 화나봐라고.그것이 내가 원하는 거라면..나와 손을 잡겠어?이 더러운 인간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모두 너와 나의 손에 달렸어.너도 같은 생각이지?세상을 맘대로 하고싶지?그건 나도 마찬가지야.그것이..
네가 나를 지배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틀려.
방법은 언제든지 있어.하지만...난 그 방법을 모른다.

"자, 날 지배해봐.날 네걸로 만들어봐.그리고, 진실은 니가 만드는거다."

피범벅이의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미끌거리는 붉은 손.마르지 않은 핏물이...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아아...황홀한 밤.

바이올린의 잘못된 연주가 흘러나오는것 같았다.줄이 찢어지는듯한 느낌...아아, 듣기 싫다.
그것은 나의 목소리.하지만 내가 아닌자의 목소리.
하지만 소년은 손을 뻗었다.

듣기 싫다.
듣기 싫어.

듣기 싫어.


듣기 싫어.




듣기 싫어.







듣시 싫.............









눈을 뜨자, 아침햇살이 반긴다.
꿈을 꾼것같다.전체적으로 어두운 꿈을.하지만..생각나지 않는건 역시 꿈이기에 그럴까.
조그만한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아아, 창문의 유리는 이미 깨져있다.휏불은 그 빛을 모두 다했는지
꺼져 있었고, 어질러진 방은 어제의 일을 생생히 기억나게 하고 있었다.

싫다아..이런거..

꿈지럭 꿈지럭 대면 침대에서 일어난다.왠지, 윗도리가 아예 벗겨진채 붕대만 감겨있다.누가 벗겨놓았을까?
라는 생각은 일단 넘어가고, 어제보다 상처는 아프지 않다.하지만 위험은 금물이지, 칼로 배를 가르고 옆구리에
총맞고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고.그러니까..신께서 내려주신 이 운명을 나는 받아들여 아름답게
살아 가야......

달칵.

문이 열린다.혼자서 감정에 젖어있다니..나 바보군.아아~ 하지만 오랫만에 감정에 푹 젖어 있고 싶었는데...
그리고 문 밖에서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사람이 슬쩍 들어왔다.

"어?일났네?"

일났네?

"음...그러니까..그게....Korean..?"

코리언..?
나보고 한국사람이냐고 묻는건가?그러니까..이 여자..내가 한국사람인걸 모르는건가?

"으흠?"

미국인 특유의 목소리를 내며 제스츄어를 하는 그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바라다 보는게 아냐.쳐다보는거다.

"음..그르니까..마이 네임 이즈 윤선경..아..그게..어제는..쏘리 쏘리~ 마이 미스테이크~
그러니까...어재...총....음..건...쏜거 있잖아?빵야-"

아, 멋진 영어실력이다.
입이 저절로 벌어질려고 해.

"쿡...."

아, 웃어버렸다.

"에..엥?"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검은 양복의 여자가 의성어로 묻는다.

"헷..영어가 엉망이잖아."
"무..무슨...!?"
"발음부터 틀렸다고 발음부터."
"뭣!?내 발음이 어때서!?"
"뭐..어쨋든..."
"말 돌리는거냐..!?"
"그나저나..어제였던가.어쨋든..정말로 고마웠어."

라고 말하고 '씨익'웃었다.
누가 보며 뭐가 고마운건지 모를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로 고마워 하고 있다는것이 아닌, 그저.반어일 뿐이다.

"......."
"........."

침묵만이 흘렀다.
이렇게 좋은 하늘아래 들려와야 할 새소리 마저 들리지 않고,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풀이 흔들리는 소리도,
나무가 타는 소리도, 숨소리도.전혀 들리지 않는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그저 두 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말 하는사람...싫어."

눈동자 속의 의미를 알았는지, 눈앞의 그녀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은 들켜서 난감하고 있는게 아니다.그리고 곧, 나를 쐈던 여자는 방에서 나갔다.

옆구리가 욱씬욱씬거린다.
아직 낫지는 않았다.하지만..마음이라는걸 굳게 먹으면 먹을수록 이런느낌, 나도 왠지 싫다.

잠시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도 쐴겸 말이다.아무리 다쳤다곤 해도...방안에만 틀어박혀있는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끼익..하고 통나무를 대충 잘라놓이 이어 붙여놓은듯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제일 먼저 반겨준건 따뜻한 햇빛과 산들바람.그 햇빛 아래에 푸른 풀잎들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왠지 겨울이 다되가는 계절이 아닌, 한여름의 땡볕 아래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이번 여름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연구실에 쳐박혀 있었지.

이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에 더웠던 여름을 생각한다.역시 더운게 좋을까 추운게 좋을까.뭐..둘다 싫지만.
역시...좋으면 둘다 좋겠지.그나저나 난 가을이 더 좋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왠지, 이 섬의 모든 나무와 풀들이 초록색으로 시들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그리고 더 이상한건..

외딴곳에서 온 나에게 경비병 하나 붙여져 있지 않다.

감시를 포기한것일까..아니, 그래도 아무말 없이 포기한다는건..음...일단은 마을로 가서 물어볼까나...

주위를 둘러보자, 초록색 벌판이 뻗어져 있고, 그 끝에는 산맥이 쭈욱 뻗어있었다.그리고..지금 내가 보고있는
저-곳과 바로 오른쪽에 있는곳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발밑에는 마을들이 늘어서져 있었다.
아아, 그러면 내 왼쪽에는 산맥이 만들어져 있겠지..하고 예상하며 왼쪽을 돌아보니, 정말로 북쪽에서 이어진
산맥이 그대로 뻗혀져 있었다.

그리고..바로 발밑은 절벽.

안좋은 기억이 떠오를려고 했다.
이 외딴 절벽위에 나무로 된 집이 하나.

아아,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바람소리만이 들려온다.풀밭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초겨울에 산들바람이 온 몸을 깎아 내린다.
아프지만, 차갑지만, 왠지 좋은 기분일지도 모른다.

붕대가 감긴 온몸에 차가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그리고...

부스럭.

풀소리가 났다.
발소리일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본다.

"....."

아무것도 없다.
그저 푸른 들판이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아무것도 없나아...."

라고, 고개를 돌려 다시 절벽 저 멀리를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부스러억.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역시 아무것도 없이, 풀들이 바람에 흔들릴뿐.
그리고, 내가 몸을 돌려 다시 절벽 저 너머를 바라다 볼려고 할때..시커먼 무언가가 이미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그 시커먼 무언가, 그 시커먼 인간은 오른손에 빛나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그리고...그 손을 머리위로
높이 치켜들자, 황금빛으로 빛나는...칼날.

"제길..!!"

뒷걸음질 쳤다.느리다, 너무 느리다.지금 내 동작은 너무나도 느리다.눈 앞의 인간은...그 칼날을 내리 꽂는다.

푸욱...

살짝 피했지만..오른쪽 어깨에서 살을 찢는 아픔이 느껴져 온다.

"읏...으아아아아앗..!!!"

풀밭에 누워..그저 아무것도 할수 있는것 없이 뒹굴었다.뒹굴자..푸른 풀밭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눈앞의 인간은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역광 덕분에...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하지만..등뒤로 길다란
머리카락이 휘날린다.몸은..조금 작은 체구.가느다라고 새하얀 다리가 눈앞에 보였다.

아프다..아파온다.그리고 눈앞의 인간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다.하지만..움직일수 있다.조금만 이 아픔을
참으면..움직일수 까지는 있다.

나머지 왼팔을 이용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넘친다.넘친 피는 팔을 타고...손가락 끝으로 흘러나간다.그렇게, 잔디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죽어라..남자..."

망설이는 목소리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상체를 일으킨체, 그 얼굴을 보려고 애를 쓰지만, 역광덕에 안보이는 얼굴은 어쩔수 없다.하지만...중요한건.
방금 그 대사로 이 사람이 여자라는것을 알아냈고..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는것.바로...어제 만났던.

죽일 마음까지 품으면서 남자를 증오하는 여자.

칼날이 다시 머리위로 올라가고, 내리 꽂힌다.하지만..칼날은 허공을 갈라 땅을 찍을뿐, 난 잽싸게 왼쪽으로
굴렀다.힘겹게 뽑은 칼날을 들고 다시 그녀가 쫓아온다.지금은 얼굴을 볼 여유따윈 없다.일단은, 피해야돼!

휘릭, 하고 칼날이 또 허공을 갈랐다.간발의 차이로 몸을 휘어 피한게 효과가 있는가 보다.
이렇게 차가운 바람이 부는대도, 온몸이 땀에 젖은것처럼 끈적끈적 하다.일단은...

"도대체..."

말을 걸려했지만, 겨울바람보다 더 매섭게 칼날은 허공을 가른다.그리고 그것을 힘겹게 피해낸뒤에..

"뭣때문에.."

눈앞의 그녀가 가로로 칼날을 휘두르지만, 역시 허공만을 가른다.
그때마다 아파오는 어깨는..이미 어디에다가 신경을 놔둔것일까.

"남자를..."

대각선으로 칼날을 휘두르자, 가슴의 붕대 한줄이 힘없이 끊겨 버렸다.그리고 주르르륵 흘러내려, 가슴과
옆구리를 이어 감싸고 있던 붕대가 완전히 벗겨졌다.

"싫어하는거지..?"

물었다.어린시절의 의문을..다시 떠올려 물었다.
왜 싫어하는거지?왜 남자를 싫어하는거지?왜 나를 싫어하는거지?왜 이 나를..죽일정도로 증오하고 있지?

조금씩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것도 아닌, 눈앞에 있는 사람의 것도 아닌, 내 머릿속에 있는 제 3자의 것.

아무렇게나 휘둘리는 칼날은, 그저 허공만을 가를 뿐이다.난 가만히 서서 위험하다 싶을듯한 공격만을 살짝
피하며, 그녀를 바라다 본다.머리를 푹 숙이고, 팔을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있었다.

휘릭, 휘릭, 하는 소리가 조용한 절벽 위에 울려퍼진다.그리고..곧 칼날은 푸욱, 하고 땅바닥을 내지른채..
풀밭에 쓰러졌다.싫증이 났는지, 그녀가 칼을 상관없는 풀밭에다가 던려버렸다.

"하아...하아....하아....."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채 입에서 뜨거운 숨을 내뿜고 있었다.조그만한 몸의 목덜미에 흘러나온 갈색 머리카락이
굉장히 매력적이다.그리고 그런 그녀를 나는 똑바로 서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이 마을 주민의 평상복으로
보이는 여기저기 닳고찢어진듯한 삼베같은걸로 만들어진 옷이 성의없이 걸려져 있다.
차라리..입으나 마나일지도.

투둑..하고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이제 초겨울인데도, 그렇게나 더운건가.아니, 어쩌면 땀이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내 몸은 이미 차가운 산들바람에 식어가고 있었다.

"도대체..어째서..나를 싫어하는거지..?"

되묻는다.
아니, 아까와의 의미가 달라도, 나는 되물었다.하지만 그녀는 '하아'하고 숨소리로만 대답할뿐, 어떤 말도
하지를 않았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머리를 푹 숙이고, 한발씩 한발씩 내 앞으로 다가온다.여기저기 찢어지고 헤어진
삼베옷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이 섬의 주민들 보다 더...낡아빠져 버린 그 의복이, 왠지 이때까지의 역경을
말해주는듯한 느낌이 들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때문에...!!"

그녀는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희 남자들 때문에...!!"

그녀의 오른팔이 휘둘림과 동시에 왼쪽뺨에서 뜨거운 아픔이 전해져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체..나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눈동자에 맺힌 눈물이..모든 울분을 터뜨리는것 처럼.
하염없이, 그 눈물이, 멈추지 않고, 주우우우욱..하고 흐르고 있었다.

"내딸..그리고 이 내가..이때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리고 또 왼쪽으로 오른쪽 뺨을 가격한다.아까와 같은 아픔이 전해져 오면서..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키는 150 중간정도..작다고 생각한다.그리고..그 얼굴도 너무나도
어리다고 생각한다.아..이것은 인간을 보고있는 인간의 본능이랄까나.지금 이 상황에는 극히 안맞는것 같지만.

"죽어...죽어어어엇--!!!"

날라오는 주먹을, 살짝 피한다.그리고 뒷걸음질.아까의 아픔따윈 아무레도 좋아진것 같다.
또 다시 날라오는 주먹을 피하고 뒷걸음질.이번엔 약간 스쳤지만 전혀 아프지 않다.그리고 다시 뒷걸음질..
이렇게는 반복해서, 얼마나 지났을까..

후두두두둑...

하고 발밑에서 알수없는 효과음이 들렸다.
발 밑을 내려다 본다.

푸른 절벽 아래의 숲.

떨어지면...죽기전에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겨를도 없이 죽어버린다.
위험하다.잘못하면 이 절벽이 아예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앞에는 주먹을 꽉 쥐고있는 그녀가 서있다.

아까 찔린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
피가 아직 멈추지 않았는지 핏빛의 여행자들은 팔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떨어진다.
아, 이 얼마나 따뜻한 감촉이란 말인가.

그녀가 다가온다.
두손을 들이내며 다가온다.
그래, 곧 이 나를 절벽 아래로 들이 밀겠지.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원래의 사회로 돌아가는거다.
그렇게 되면 완전범죄?아아, 분명히 이 마을에는 현대과학기술을 동원한 수사따위를 할수 있을리가 없지..
말 그대로.완전범죄가 되는거다.

바로 눈앞에 왔다.
그리고...그녀가 팔을 들이 밀었다.

몸이 붕 뜬것 같은 느낌.
몸이 크게 어디론가로 움직인다.

중력을 받고 있다.
그녀는 나를 밀었는데..발은 아직 땅에 닿아져 있다..

"아......"

바보같이...그녀가 알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다 본다.그것은 한순간이 아닌, 슬로우모션의 한장면.
천천히..떨어진다.내가 아닌..그녀의 몸이, 천천히 절벽 아래로 기운다.

그녀가 미는 동시에..난 오른쪽으로 피해냈다.그리고..중심을 잃은 그녀는..피한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절벽
아래로 몸을 기울며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죽을정도로 궁금하다.
분명히...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누군가가 보면 하염없이 웃을정도로 말이다.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다.그것도 칠칠맞게 오른손을.
기울어져 가는 그녀의 손을 꽉하고 잡았다.하지만...이미 늦었는가.중력의 부름으로...그녀는 내 팔에 의지하여
벼랑 밑에 흔들 흔들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흔들 흔들 거린다.그 갈색 머리카락도, 그 찢어진 옷자락도, 흔들 흔들 거리며..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아, 누가 이 둘을 구해줄것인가.
내 팔에서 붉은피가 흘러나온다.그녀를 그렇게 무겁게 보이지도 않는데, 어깨뼈가 빠질듯한 느낌.아까 찔린
오른쪽 어깨의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 그녀의 새하얀 팔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

아무말 없이, 그녀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대로는...떨어질게 분명하다.이 팔로만 유지하는것은 무리다.그러니까..왼팔도...

라고 하며 팔을 뻗었을때.

쭈우우우욱..

이라는 듣기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두사람의 손은 이미 피범벅이가 된채..끈적 끈적 미끈 미끈..아아,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온다.끼이이익..
쭈우우욱..아아, 기분나쁜 소리.끝을 고할려는 소리.
그리고...핏방울이 허공에 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은 허공에 잠시가 떠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아무런 로프도 없이.잡을 지푸라기따윈 없는 이 허공에..혼자서 붕 떠있었다.
아까와 똑같이..어린 소녀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가..빠르게 이 뇌를 자극하고 지나갔다.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아아, 내가 듣기로는 이 현상은 죽기전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눈앞에는...내가 아닌 그녀가 허공에 떠 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고 있다.

검은 하늘아래의 절벽 위에서 그녀의 손을 놓은 기억.

욕짓거리를 입에서 뱉어냈다.
잘 하지도 않는 언어들을 무의미하게 뱉었다.
그리고..그녀는 아직 슬로우모션처럼, 허공에 그저 떠 있었다.

나는...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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