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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린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것이다.
무한의 어둠.
이것이야 말로 어쩌면 스티븐 호킹이 만한 블랙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없는 어둠에서,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한줄기 빛이 하늘에서 부터 내려왔다.
빛이 비추고 있는것은, 안경을 낀 적발(赤髮)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콧등엔 성의없이
걸어놓은 안경이 있는, 거기다가 새하얀 제복에, 그 등뒤에 펄럭이고 있는 조그만한 붉은 날개...

"인어족의 처녀가 신과 인간의 계약을 무시한것 같군."

달칵, 이라는 소리를 내며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푸른 빛이 솟아 오른다.그 빛에
비추어진것은 검고 동그란 구체.그 구체에는 붉은 색으로 '0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 동시에, 그 검은
구체에서는 증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아무레도 그런것 같습니다."
"그 인어족의 처녀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붉은 머리를 한 남자의 대답에, 또 다시 달칵하고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는 소리가 났다.이번에는 '02'라고
새겨져 있는 검은 구체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인어의 능력을 박탈하고 표류시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가?"

달칵, 하고 또 다시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는 소리와함께, '03'이라는 검은구체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적발(赤髮)의 머리를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개의 검은 구(球)

"그 뒤에는 그녀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그렇군, 그럼 다음일은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02'의 여성의 목소리가 물었다.

"무엇 말이십니까?"
"포세이돈이 노하셨다.신의 대행자(代行者)가 뒷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고 있는건가?"
"그대들은 무엇을 원하시는겁니까?"
"계약을 깬자에게는 죽음을."

'01'의 목소리가 크게 꾸짖자.
다시 '03'이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씀대로, 대행자(代行者)는 신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이것은 제 주군의 생각이시고 의지이시며 인간들이
말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제 주군께서는 무의미한 살상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그리고 저는 주군의 말씀
을 그대들에게 전할뿐...그대들, 사흑환영관(四黑幻影官)분들께서 저에게 명령항 권리따윈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나라하게, 날개 달린 남자는 눈을 감으며 입을 움직였다.

"이곳이 어디라고 그런 망언을!?자네 앞에 있는 우리는 너의 한참 상관인 존재다!"
"진정하십시요, 하풍(夏風)이시여."

침착한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세목소리 뒤에서..스포트 라이트의 켜짐과 동시에 붉은글자로 '00'이라 새겨져 있는 구(球)가 나타났다.

"그래, 우리에겐 널 명령할 권리는 없다.하지만 부탁이라면 들어 주겠나?"
"무엇이십니까?무(無)의 춘양(春陽)이시여."
  
무(無)의 춘양(春陽)이라는 중녀남성의 목소리에, 적발(赤髮)의 남자는 대답했다.

"그들을 도와주어라."
"무엇 때문이십니까?"
"포세이돈도 간절히 바라시는 일일것이다.자신의 자식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아버지 된 자로써 어째 걱정이
아니되겠느냐?"
"알겠습니다..그 부탁, 기꺼이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적발(赤髮)의 남자는 신사답게, 고개 숙여 대답했다.
그리고 곧 틱 하고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스포트 라이트는 off했다.

"고맙네..붉은천사여."







그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레도 며칠은 항해하고 있었다.

이 커다란 배에 나와 그 바보같은 엘리트 박사랑 선장선원 기타 부하들밖에 안탔다니.공간과 자금 낭비잖아?
대충 저런 녀석들은 컨테이너 박스에 집어 넣어놓고 싣고 가도 괜찮을 건데?

지금은 아무레도 낮이다.한국이랑 시간차가 꽤 나서 그런지, 지금 내가 차고있는 시계는 무용지물이겠지.
그러니까 시각은 양키녀석들에게 묻거나 해의 방향을 보고 알아맞출수 밖에 없다.하지만 내 성격으로는 그
미국 깍두기들에게 묻는건 무리인걸?그냥 하늘을 올려다 보자.
음...이제 곧 점심인가?

바다에 의해 흔들리는 새하얀 배가, 왠지 재밌게 느껴진다.그러고 보니 배는 오늘이 처음 타보는건가.
그동안 육지에서만 있었으니 바다를 보는것만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왠지 배멀미가 안나는것도 신기하지만, 바닷바람이 이렇게 시원한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푸른 바다가 잔잔한 파도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배에 걸맞게 새하얀 제복은 입은 선원은..

"육지가 보입니다!!선장님!!아무레도 카젠섬인듯 합니다!!"

이라며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소리친다.
쳇, 오랜만에 센티하게 있을려고 했더만..기분 잡쳤다.

아아, 내 이름은 윤선경.
얼마전 까지만해도 빌어먹을 상관에게 일을 떠맡게 된 불쌍한 경호원이다.
그리고 또..운도 지지리도 없는 불쌍한 아가씨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로...

"선경아아앗-!!!!"
"구왓-!?!"

누군가가 등뒤에목덜미를 덮쳤다.
분명히 그녀석이겠지.아아, 바로 이런녀석이 붙어버렸다는 거다.그리고 내 목덜미를 잡고 이리 저리 귀찮게
흔들는 이녀석은 정윤지라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버린후 어디에선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던 녀석.
그러니까...소꿉친구라고 해야할까?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선경아 선경아~ 나는 말이지~ 선경이가 따라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아아..그냐..?"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우리는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평선 위에 우뚝하니 서 있는 커다란 녹색의 섬.그것은 모든 하늘과 모든 바다를 푸르게 만들어
버릴것만 같은, 대기중의 모든 입자를 푸른색으로 바꾸어 버릴듯한 느낌.만약 지금이 저녁이였다면.

분명히 이 섬은 멋진 녹색의 노을이 지겠지.

"사람들이 해안가에 모여 있습니다!!"

또 다시, 전망대 위의 선원이 무전기에 그렇게 소리쳤다.카젠섬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뉴스나 신문에서 떠드는걸
몇번 본적이 있다.제 2의 버뮤다라던가..저시기라던가..거시기라던가..위성에서 촬영 해서 알아냈었던가?
아아, 그나저나 이제 뭔가 바빠지겠군.전투?저기있는 미지의 섬의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통할수 있을까?

"저곳이..카젠섬..?저곳에..어쩌면 선배가..?"

옆에 있던 엘리트 박사님께서 멍하니 녹색의 섬을 바라다 보며 중얼 거렸다.
나로써는 이해할수 없는 중얼거림이지만, 뭐 상관없다.어서어서 가보자고.

조금씩 조금씩 배가 가까워 지자, 바로 눈앞의 해안가.그러니까..정말로 저기에 갯벌같은곳 위에 사람들이
몰려있잖아?그리고 저기에 혼자서 새하얗게 튀고있는 저사람은 누구야?

"아..!"

뭔가를 알아챘다는듯이 뱃머리로 달려가는 엘리트 박사님 정윤지양.
아아..거기로 가면 위험하답니다 마드모아젤.

"서-언-배-애-------!!!!!!!!"

소리지르고 도망가고 있다.

"어...어이!!아무나 저녀석쫌 붙잡아!!!"

경호대장의 권리로 옆에서 돌아다니던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곧바로 뛰어가 뱃머리에서 경호원들에게(물론 동양인 여자다) 붙잡혀 바둥 거리고 있었다.

"선배니이이이이이임~~~!!!!"

바둥바둥 거리는 저 바보녀석은 잘도 끌어내리는 여자 경호원 두명.
하아..또 한소리 해주러 가야하지 않는가?

"하아..내 참..!정윤지 이녀석 일루와!!"
"우에..?"

목덜미를 잡힌 고양이 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손목을 잡힌채로 끌려간다.
아아..이런 피곤한 일도...
그리고 배 안으로 들어가서는.

"야이 촉새야!!"
"에?에?"
"뱃머리로 올라가면 위험하잖아!!바다에 빠지면 어쩔려고 했어!?배가 지나가는데 바다에 빠지면 그대로 익사
라고 익사!!알아들어!?"
"우응...."

조교당하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여 가만히 커다란 안경너머로 내 눈치를 본다.
아아!!그러니까!!그런 귀여운 표정쫌 짓지 말란 말이다!!

"박사님, 육지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감정없는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그녀는 내가 알기로는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S.A.I일거라고 생각한다.안드로이드, 사람의 시중을 떠받는
인조인간이라는 것이지.하지만 이 안드로이드, 뭔가 잘못 된건가?노크를 안하다니?

"돛을 내려라-!!"

선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나가봐야겠군.

"어이 정윤지.어서 나가보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촉새는 갑판을 향해 뛰고 있었다.
저녀석..뭐가 그리 보고싶은거지?




"하아...하아...하아...."

입안에서는 거침 숨소리가 베어져 나왔다.
아직 배는 아프다.피가 나는지 안나는지 구분할 겨를은 없다.방금이라도..목구멍을 넘기고 핏덩어리가 입밖으로
토해져 나올것만 같다.그러니까..왜 자학을 해가지고..!!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저 숨소리와 다리에 힘을주어 모래가 찌그럭 거리는 소리와, 바다의 파다소리만이 들린다.

정신이 오락가락 해지고 있다.
지금은 아무레도 땅바닥에 누워 가만히 쉬고싶은 기분이다.

부드럽기도 하고, 공격적이기도 한 차가운 바닷바람이 우리를 덮친다.
옷자락이 펄럭인다.머리카락이 휘날린다.그리고 모든 시선을 이미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나이프가 들려있고,
눈앞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래, 찬스는 한번뿐이다.

한발, 내딛는다.그와 동시에 움찔거리는 사람들.
멍청이.나의 이 한발은 너희들의 공격신호가 아니다.나는....

뛰었다.
아픔 정도는 감소하고 있다.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할 행동은, 굉장히 나에겐 이익이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 목숨을 단축시키고 바로 이 눈앞에서 내가 사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하지만..하고싶은 이유는
무엇일까?아니,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고(思考)를 끝냈다.
누군가의 등 뒤에서 곧바로 발걸음을 멈췄다.새하얀 천을 철럭이는 소녀, 그 소녀의 목을 왼팔로 감싸고 졸랐다.
모두들 깜짝하고 놀란다.저기에서 아무말없이 나를 보고있던 쌀나라 깍두기들도,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동양인 여자 경호원들고, 나를 끌고왔던 섬의 병사들도, 따라온 마을의 주민들도, 그리고...힘을 잃은 인어도.

"이게 무슨짓...!!"
"가까이 오지마..!!"

아까의 그 책임자처럼 보이던 남자가 소리쳤다.
아무레도 제일 놀랄 사람은..
눈앞의 바로 그녀, 새하얀 연구복을 입고있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커다랗고 검은 안경테 사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커다란 눈이 더욱 더 커진듯한 느낌.그리고 나는..그녀의 목에다가 아까의 피에 물든 칼날을 들이댔다.

"성윤씨..!!"
"박사님.....!!"
"선배...."

모두들, 제각각의 반응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그런 시시한 반응따위가 아냐.

"윤지양...?"
"에...?"

최대한, 부드럽게.그리고 영국의 예의바른 신사처럼 다정하게, 그리고 상냥하게.그녀의 목을 조르고 칼을 대며
불러냈다.여느때의 연구소에 있는 '이성윤'이라는 사람같이.하지만 그것보다는 더욱더 위험하게.

"저기있는 경호원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보고하세요.대서양에는 어떤 섬도 보이지 않는다.그리고 2대
로렐라이와 나 '이성윤'은 폭풍에 쉽쓸려 행방불명이 되었다.이렇게 말이에요."
"하지만..."
"반론은 사양하겠습니다."
"갈려면...선배도 같이 가요..!!"
"......."

난 어차피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눈앞에는 대륙으로 날 데리고 갈 사람이 있다.
난 무엇을 선택할것인가?

이때까지 품어온 꿈과 모든것을 버리고..대륙으로 가서 정부 밑에서 일하란 말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굶어 죽어란 말인가?

괴로움과 죽음.
어느것을 선택해야 할것인가.

그리고 언제인가, 나의 마음을 확실하게 해줄 폭죽소리가 들려왔다.

쾅!!

하고, 대지(大地)를 울리는 폭죽소리?아니, 이것은 단순히 폭죽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폭음일지도 모른다.아까 들어보았던 단순한 폭음.어디서인가는 모르겠지만..그 폭음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난 알수 있다.
아니, 지금은 난 알아 버렸고 알고 있기도 하며 알았다.

나를 위해 울리는 폭음.
쾅!! 이라는 소리의 폭음.
살갖을 찢는듯한 아픔.

그 폭음이 어디서 나왔는지는..어떻게 알았을까.그것은 당하는 자의 본능일까.
옆구리에 폭음의 구멍이 나면서도 난 그것을 보았다.마지막 의식(意識)이 다하기 까지 난 본것 같다.

그것을.

저 머리위, 뱃머리에서 날 저격한 검은 여자.
그는 달구어진 총구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진지하게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차가운 밤이였다.
그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차가운 밤하늘 아래, 그리고 넘치는 파도 위에.절벽에 서있는 금발의 숙녀와,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나.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질것만 같은 유리장미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다.

영어에는 조금식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것 같다.(자세히는 영국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될지는 나로써는 모른다.그녀의 곁에 있으면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생각도.

금발의 영국숙녀의 등뒤는 서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모든 생명보다 강한 그 마음이 서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타인인 난 알수 없는건 당연할 것이다.
난 어차피 타인이니까.

언젠가 어릴적에 읽은 '인어공주'라는 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녀는..마지막엔 절벽에서 뛰어내려 거품이 되고 말지.왕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왜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는지도 알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알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나도 이제 바로된 생각을 할수있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리고..앞에있는 광경은 무엇을 연상 시키는건가?

밤바다, 파도, 절벽, 하늘, 검은 바람, 흑녹의 숲, 풀잎의 향기, 차가운 대기, 황금의 숙녀.

감정은 없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것과, 이 피부로 느끼는것과, 이 귀로 들리는것과, 이 코로 맡는것.
난 그저 인간의 육체가 느끼는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은 하고 있다.지금도 난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난 아직 생각하지 않는게 있다.그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일것이다.지금..그녀가 하려는 행동을.

예상을 하고 있으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는것이다.
그 아름다운 바다의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려는 거겠지.

이 밤하늘과도 잘 어울리는 검은 고딕드레스가 검은 바람에 휘날린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환청을 느낀다.
자연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바람의 목소리.대지와 인간은 북과 북채.바람에 휘날리는 흑녹의 숲에서 들려오는
나뭇잎 소리.그리고, 조용한 발소리가 리듬에 맞추어 조금씩 조금씩 음악을 연주해 나간다.

연주는 끝났다.
후두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리듬을 타던 그 발소리도, 불던 바람도, 흔들리던 나뭇잎도, 모두가 경직되어
완전한 침묵을 만들고, 완전한 칠흑을 만들며, 완전한 암흑을 만들었다.

하지만, 재즈음악은 아직도 퍼지고 있다.

금색의 숙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바로..절벽 아래에서.
그리고...다시 연주는 시작된다..!!

빠른 템포.
빠른 리듬.
빠른 연주.
빠른 발걸음..!!

달리것 까지는 없다.
아니아니, 오히려 이곳에서 달리면 잘못해 같이 죽자- 가 될수도 있다.
그러니까..빠르게 걸었을 뿐이다.리듬에 맞추어, 연주되고 있는 음악에 맞추어, 흩날리는 나뭇잎이라는
지휘자에 맞추어, 나는 빠른 템포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검은 고딕 드레스가 흩날린다.그 검은 드레스에 너무나도 튀는 금발이 흩날린다.그리고..숙녀는 눈물을 흘린다.
말이 통하지 않는 숙녀에게 난 뭐라고 할수는 없다.나는...

등을 돌린 그녀는 나를 지긋히 쳐다본다.
의붓 누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동생을 바라다 보는것처럼, 지긋히 나를 쳐다보며 슬픈 얼굴을 지었다.
뭔가, 갑갑한 느낌.굉장히 안타까운 느낌.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내가 정말로 바보스러운 느낌.

증오한다.
하지만 그런 나를 나는 사랑하고, 그런 나에게 그녀는 진심으로 웃어 주었다.시간이...되었다.
만월이 떠올랐다.구름 사이에서 황금의 만월이 떠올라, 모든것을 비추었다.그녀의 얼굴도, 그리고 나의 얼굴도.
눈물에 젖어있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한없이 안아주고 싶었다.하지만...

한발을 딛자, 뒷걸음질 치는 그녀.
한발을 딛자, 한번 더 뒷걸음질 치는 황금의 그녀.
한발을 딛자, 벼랑 끝에서 위험에 처한 아름다운 숙녀.
지금 머릿속에서는 그녀를 다시 따뜻한 방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더이상, 더이하의 것따윈 이미 없다.

다시 한걸음 내딛자, 그녀의 오른발이 벼랑끝으로 빠진다.
후두두둑..하고 허무하게 모래가 떨어진다.그리고..그녀의 몸은 벼랑 밑으로...

"아...."

벼랑끝으로 달려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그저 달려갔다.아아..하지만 이것이 무슨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절벽의 끝을 두 손으로
힘겹게 잡고 매달려 있는 그녀가...나는 굉장히 안타까워 보였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끌어올렸다.
무겁지는 않다.
끌어올렸다.

"Я Вас Люблю[야 바스 류블류]..."
"에.....?"
"사랑합니다..나의 동생.."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하고난후..그녀는 서툰 한국어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사랑합니다..라고.
끌어올렸다.눈이 뜨거워졌지만, 참고 끌어올렸다.힘내어 끌어올렸다.하지만..무엇때문인가?


.......................왜 놓쳤는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환상따윈 이제 보고싶지 않다.

아무런 느낌도, 그녀의 온기도, 냉기도, 바람의 차가움도, 대지(大地)의 딱딱함도, 풀잎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는.그녀의 저항마저도 나에게는...그저 보이지 않는 흔들림이였을뿐.

그래서 그 새하얀 손을 놓았나?
다시 한번 묻겠다.이성윤.그래서 그녀의 손을 놓았나?

모르겠다.
나는 모른다.
정말로, 이것만은 모른다.
한가지 알고 있는건...

대기를 떠도는 검은 천조각과..
천조각이 떨어진후의 피바다와...

하늘로 올라가는 새하얀 물거품만을, 난 기억하고 있을뿐.






부시럭.
뭔가, 따뜻한 숨소리를 듣고 제정신이 돌아온것 같다.

"하아...."

입안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불어져 나온다.하긴, 이제 곧 겨울이지.감기걸린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여름에도 감기는 걸리지만 말이다.)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분명한건 내 배가 이렇게 아픈것과,
옆구리가 엄청나게 아프다는것이다.무엇 때문인지는 알고 있지만..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따뜻한 이불속이다.
그대로 그냥 더 잠을 자고 싶다.하지만..더 자면 죽을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아하암...그냥 일어나자..그러니까 여기는 어디...?"

손을 침대의 모서리에 가져다 댄다.음..모서리가 뭔가 푹신푹신한데..따뜻한데다가 동그랗고...음...
그러니까..모서리가 노란색...?

"어레...?성윤씨...?"
"아..아앙..!!?"

모..모서리가 말했다!!!모서리가 말했다-!!!
어떻게 된거야!!침대 옆에 붙어있을 모서리가 말을 하다니-!!?

"이..일어나셨군요..!!!"
"어..어레...?리르..씨..?"

모서리..아니아니, 리르씨는 곧바로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시 시작했다.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음..그런건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그러니까..난 가슴쪽의 계곡이 더...

"박사님!! 성윤씨가 깨어났어요-!!!"

아아, 아무레도 그녀 침대에 기대어 자고 있었나 보다.날 간병해주고 있었던건가?뭐..그것보다는.
살짝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울고 있었던건가?참...내가 그렇게 걱정스러운건가.

"서-언-배-애--!!!!!!"
"으와아아앗-?!!"

정체불명의 안경괴물이 덮쳤다-!!!!아?응?응?
문이 열림과 동시에..덮쳤다!!덮쳤다!!!아아- 뭔가..일어나자마자 더 피곤한듯한 느낌이다...

"아야야...아파라아..."

배와 옆구리가 아파온다.
아무레도 상처가 다 낫지 않은걸까나..

"아..미..미안해요..!선배.."
"아..아니...괜찮아 괜찮아- 그나저나...."

안경괴무..아니아니, 침대 옆에 앉아있는 리르씨를 쳐다본다..굉장히 걱정했는지 어떤지, 눈이 벌겋게
부어있는건..그렇게 많이 울었던걸까?그것보다는....그 새하얀 무릎에 반찬고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다는게..

"걱정했어..?다들?"

둘다 동시에 끄덕끄덕거린다.내가 그렇게 걱정스러웠던걸까..

꼬르르르르르르륵...

"......."
"........."

리르씨가, 뚱 하니 밥먹을 시간을 가리키는 내 배를 쳐다본다.

"아하하하~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안먹은걸까~"
"안되요 선배!배를 깊이 찔러서 밥은 왠만해선 먹으면 안된다구요!"
"아..아아..그...그래..?"

자포자기인것인가..
아~ 배고파라~

"다쳤을때는 안정을 취해야 되는게 우선무에요!그러니까..얼른 더 자라구요!"

잔소리 많은 어머니 처럼,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손가락을 이쪽으로 들이대놓고 말했다.
아아- 이렇게 압박해오면 나도 안할수가 없잖아-

"예..알았습니다아-"
"에~ 그러니까~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
"예~"

힘없이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안경소녀는 조용히 이방을 나갔다.

주위는 온통 흙으로 된 집.그러니까..조선시대때나 볼수 있는 그런 조그만한 초가집인것 같다.여기저기 보이는
나무기둥과 흙으로 된 벽.그리고 내 옆에서 불빛을 내고있는 촛불과 벽에 붙여져 있는 랜턴같은것 만이,
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저기..리르씨..?"
"네..?"

촛불이 흔들린다.

"나..많이 걱정 했어요..?"
"에에....네...."

힘없이 말한다.
얼굴을 푹 숙인채 말이다.

"걱정할거 없어요...그러니까.."

쿵-!!

문이 세차게 열린다.
그리고..그곳에서는 얼굴을 가린 괴한이..

"음...?"

달려온다.
달려온다.
괴한이 달려온다.
오른손에는 식칼을 든채, 괴한이 달려온다.제길..!!

괴한이 식칼을 침대위에 내려 꽂음과 동시에, 난 방바닥을 굴러 피해낸다.그 반동에 의해 의자에서 넘어진
인어는...그 괴한을 멍하니 쳐다볼수 밖에 없다.

"무..무슨..!!"

몸집은 그렇게 크지 않다.작을려면 오히려 작지 않을까.내 힘으로도 막을수는 있겠지만..지금은 무리다..!
아직도 온몸이 욱씩욱씬 거려온다.아프다.잘못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배어져 나올지도 모른다.
위험하다.굉장히 위험하니까....난 무엇을 해야할까?

도망쳐.

혼자서 속삭인다.
하지만 힘들다.
아프니까.

도망쳐.

그러니까...못한다고..!!!

"그..그만둬요!!"

눈 앞에 새하얀 무언가가 가린다.
새하얀 윈피스가 열려진 문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펄럭인다.그리고..인어의 공주님은 내 앞에서 그 가슴을
펼치고 나를 감싸고 있다.나를 등진채, 그 괴한을 막고 있다.서지도 못하는데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사람을 죽이면 안되요..!!"

그래..사람을 죽이면 안되는거다.
안되는 거야.

하지만, 괴한은 듣도 만척 하지 않는다.그리고 왼손으로 리르씨를 밀쳐내어 버린다.

"꺄앗-!"

단발마 비명소리, 그 다음에는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을 뿐이다.그리고..그녀의 무릎에서는 반찬고 사이로
피가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아픈...피가.

"이게..무슨집입니까..!?"
"........"

나의 물음에, 그 조그만한 괴한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복면을 한 그 괴한은, 그저 이말을 했을 뿐이다.

"죽어라, 남자."

여자목소리?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들은 이것은..분명히 여자의 목소리다.

촛불의 빛에 식칼이 번쩍인다.붉게 빛을 내고 있다.그리고..내려 찍는다.

"누구냐-!!?"

문 밖에서 경비원이 소리친다.
그와 동시에, 내려오는 식칼은 바로 옆머리를 스치고..그대로 괴한은 창문을 뚫고 도망쳤다.

"하아...살았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아..

"저기..경비병 누나..?"
"음...?"

왠지, 남자같은 말투를 하고 있는것 같은 경비병 누나다.

"저기 있는 저분을..조금 치료해주시면 안될까요?전 괜찮으니까."
"(끄덕)"

경비병 누나가 끄덕인다.
으흠..말없는 경비병 누나구만.

경비병 누나가 리르씨를 안고 방을 나갔다.

"하아...뭔가...정말로 피곤하다..."

방금 있었던 일은 내일 이야기 하고, 이만 잠이나 자자..
침대로 어느적 어느적 기어 들어갔다.아직도 욱씬욱씬거리는 몸이였지만..
하지만..뭐였을까..?그것은...

"'죽어라, 남자' 라...뭔가 남자한테 한많은 여자일까나.."

음..분명히 여자 목소리였다.
언젠가, 범인은 찾아야겠지.하아...피곤하다 피곤해..잠이나 잘까나.




굉장히 어두운 밤이였다.
그저, 눈만 감으면 생각 나서,
몰아치는 파도만 봐도 생각나서,
흩날리는 옷자락만 봐도 생각나서,

가만히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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