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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짙은 검은빛의 하늘 아래를 걷는다. 어느새 내 발걸음은 교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밤에 조용히 생각을 하고 싶을 때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던 내 버릇은 여전한가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천천히 걸으며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압도적인 마력에 의해 얼어붙은 나.

그 무력했던 나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고개를 한껏 저어버렸다. 내 몸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진영이는 식사가 끝난 뒤 자리를 비워주었고, 덕분에 난 혼자 남아 내 방에서 생각에 잠길 수 있었지만 도무지 무언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니, 특별히 무언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마술사고, 내가 마술사라는 것을 알자 자신을 어필해 왔던 것뿐. 다만 내가 가진 마력의 양이 그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

나와는 달라.

어렸을 때 양자로 들여져 배운 마술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행할 수 있던 마술은 오로지 ‘감응’. 그나마 요즘은 ‘치료’의 마술도 행할 수 있었긴 했지만 ‘치료’의 마술은 말 그대로 흉내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정도로 단순한 지혈을 하는 정도, 아니면 생채기 정도만 치료할 정도의 실력일 뿐이었다. 거기에 마술사에게는 천적이라는 ‘술’ 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반쪽짜리 마술사인 나. 그에 반해 그녀는 말 그대로 ‘진짜’ 마술사일 것이다. 그래. 저 언덕 위에서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녀는.

“안녕? 분명 가람이라는 이름이었지? 이런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였다. 너무나 평범한 목소리. 덕분에 잠시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그녀에게 답할 수 있었다.

“산책중이야. 그나저나 그 쪽은?”

“날개라고 해. 명날개.”

“예쁜 이름이네.”

“고마워.”

그렇게 짧은 통성명을 끝낸 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으로 와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키는 160이 좀 넘으려나? 조금은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는 미안했어. 사과할게.”

“.......”

날개의 말에 답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부족하기에 그녀의 힘을 감당 못하고 혼자서 벗어나기 위해 끙끙댄 것뿐인데. 오히려 사과하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이 곳에는 어쩐 일로? 집에는?”

“아. 기숙사에서 살아. 11시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지만 2층에서 뛰어내리는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날개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그리고 앞쪽에 있는 벤치에 앉으며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어때? 이야기 좀 할까?”





“그럼 혼혈이라는 뜻?”

“굳이 되물을 필요는 없지 않아? 뭐. 그래. 내 몸에 흐르는 피 중 반은 일본의 마술사 가문인 토오사카의 피야.”

토오사카. 너무나 유명한 이름인지라 기억 속을 더듬으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아인츠베룬, 마키리와 함께 가장 유명한 마술사 가계로 일본 쪽에 터를 가진 가문이었다. 꽤나 오래 전 ‘마법’의 사용에 관한 일로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현재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마술사 가계로 기억하고 있다. 마키리의 지식을 흡수한 에미야 가가 요즘 부상하고 있지만 토오사카의 오랜 지식을 따라오려면 아직 한참 먼 뒤의 일인 것이지.

“그런데 왜 토오사카가 이 한국에, 그 것도 토오사카라는 성을 버려가면서 까지 와 있는거야?”

결국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이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충분히 들어 그녀의 특기가 ‘전환’ 이라는 것이나 근처 부지에 공방까지 따로 사 놓았다는 것까지 알게되었지만 결국 ‘왜’ 이 곳에 와 있는지는 알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토오사카라고 하지만 진짜 토오사카는 아니야.”

어려운 말을 하게 만든 것 같다. 한참 뜸을 들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즉 그녀의 어머니는 토오사카의 피를 이었지만 정식으로 마술을 배운 것이 아닌 토오사카의 마술을 ‘훔쳐’ 배웠다는 의미. 아무리 같은 가문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흔히 이야기 되는 ‘절도’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마술사 가문의 마술을 훔친다는 것은 영원히 그 가문과 적이 되겠다는 뜻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 미안.”

난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마술에 대한 욕심으로 마술을 훔친 죄인이 되어 도망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토오사카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거든. 어머니는. 가족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때문에 돌아갈 방법을 찾던 중 ‘성배 전쟁’ 이라는 것을 찾게 된 거야. 성배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마술을 훔친 죄를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비친 얼굴이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 물린 작은 미소는 내 생각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성배 전쟁에서 이길 경우 마술사는 마법사에 필적하는 마력을 얻을 수 있게 돼. 과거 후유키시에서 있던 성배 전쟁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달랐기에 마술 협회에서도 무언가 말을 해왔던 모양이야. 하지만 지금 이 곳에서 벌어지는 성배 전쟁은 달라. 일종의 게임이지. 60년에 한 번 일어나는 성배 전쟁에서 이길 경우 이 나라의 토지에서 지난 60년간 끌어모았던 마력을 얻을 수 있게 돼. 오래 전 후유키시의 성배 전쟁이 어떤 이유로 종결되었을 때 성배 전쟁을 시작했던 가문들은 한국으로 눈을 돌린거야.”

“전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기운이 강한 토지로....... 인가?”

“응. 그 때 멸족한 마키리를 제외한 아인츠베룬과 토오사카는 한국으로 와서 이 곳 마술사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단’씨 가문과 어떤 협상을 했나봐. 그 뒤로 이 곳에서는 60년에 한 번씩 성배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지.”

날개는 그렇게 말을 맺은 뒤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펴며 말했다.

“그 성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올해야.”

그 때 내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내 운명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조심스레 진을 그린다. 마력을 담은 물에 루비를 갈아 넣고, 마지막으로 내 혈액을 떨어뜨린 뒤 내가 알고 있는 소환의 진을 그렸다. 마력의 리차지 시간까지는 앞으로 1분. 마지막 룬을 새겨 넣는 것으로 진을 완성한 나는 주변을 치우고 방구석에 있는 결계를 확인했다. 이상 없음. 내가 자리에 앉는 순간 내 마력의 파장이 거세지기 시작한다. 마력의 회복이 되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리차지 타임은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가장 마력을 강하게,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 즉 서번트를 소환하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마력을 쏟아 부으며 진을 발동시킨다. 서번트 소환의 진. 보통은 불러 올 수 없는 영령을 불러내는 서번트 소환의 진은 그리기 위해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해 너무나 빨리 그 결과를 나타내 보였다. 한 순간 진에 새겨진 룬 들이 빛을 내는가 싶더니 눈이 멀 것과 같은 흰 빛이 터져나와 눈을 감아야만 했다. 하지만 특별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으며, 진의 소멸이 너무나 조용했기에 난 소환의 의식이 무언가 잘못 된 것이라는 착각마저 할 정도였다.

그 것이 말 그대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실눈을 뜬 내 눈에 비친, 흰 빛 무리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묻겠습니다. 당신이 저의 마스터 입니까?”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어오는 나의 서번트. 그 서번트는 소환 한 뒤 가장 처음에 해야 하는 일인 계약의 확인을 요구해 왔다. 그와 동시에 내 왼쪽 팔에는 불에 데인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그 것이 무엇이라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Interlude

"무언가 할 말이 많은가 보네?“

소년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소녀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그녀는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는 커다란 한 명의 남성이 서 있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차피 네가 싸워야 할 상대가 6명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아. 그렇다면 누가 적인지는 미리 알고 있는게 편하지 않을까?”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기까지 한 흰 피부. 등 뒤에 메고 있는 2m 는 됨직한 거대한 검은색 검의 주인을 바라보며 소녀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왠지 저 녀석,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여자의 감이라면 한 번쯤은 믿어도 되지 않겠어?”

Interlu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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