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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천하일색/심판의 장

느와르 2004.06.10 21:06 조회 수 : 488

  [두 자루가 모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두 자루가 한 사람에게 모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천하일색/심판의 장 - 인간을 증오하는 숲의 어머니


  


  조용히 돌아앉아 옷을 걸치던 키리는 문득 자신의 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냈
다. 소녀에서 여자로……같은 것이 아니라. 몸의 마력자체가 이상하게 어그러진 느낌. 큰 이
상은 아니었지만 뭔가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키리, 몸이라도 안 좋아? 아직 아픈 거야?”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 키리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가, 꽤 걱정스러
운 표정을 짓고 있는 참의 모습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그다지.”

  속저고리의 옷고름을 묶으며 지나가는 투로 대답한다. 참은 그 이상한 대답에 조금 더 고
민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덜 아프다는 거면,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마법으로 속
옷을 말려 입는 키리를 주욱 바라보던 그는 더욱더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니, 그래도 아프
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마법사들은 몸이 아프면 마력이니 뭐니 해서 굉장히 아프다던
데. 그러고 보니 키리는 사부님보다 몸도 가느다라면서 가슴만 크고

  “참!”
  
  “아냐! 큰 게 싫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키리의 목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 참. 키리는 어이없는 얼굴
로 그를 바라보다가 앙칼지게 외쳤다.
  
  “크던 작던 상관없으니까! 나 좀 도와줘!”

  그녀의 목소리에 참은 그제야 그녀가 천하일색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니, 잡아당겨? 누구한테서? 참은 천하일색을 끌어당기는 수십 가닥의 나무 넝쿨을 발견했
다. 칼집을 타고 넘어 키리의 손목까지 휘감아 오는 가시나무 넝쿨들. 참은 순식간에 용살
검을 집어 들었다.

  “이게 지금 누구 손목을!”

  회전시킨 용살검을 내리쳐서 줄기들을 몽땅 끊어버리는 참. 곧이어 방금 잘라내버린 줄기
들의 수배가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나게 용살검을 휘둘러 나무줄기들을 썰어버리는
참. 키리는 천하일색과 자신의 손목에 감긴 가시 넝쿨을 풀어내고 양손으로 천하일색을 뽑
아들었다.

  “하아압!”

  기합과 함께 뚫려나가는 나무줄기. 막혀버린 입구대신 새로 입구를 뚫어버린 키리는 몸을
돌려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몸의 마력을 팔로 집중시켜 단번에 마법을 쏘아낸다.
  콰캉!
  대폭발. 그녀가 쏘아낸 마법은 넝쿨을 남김없이 날려버렸다. 더불어 나무의 입구와 참까
지. 폭발의 격류에 휘말려 넝쿨의 조각들과 함께 바깥으로 튕겨나간 참은 그대로 바닥을 굴
러 일어났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구멍을 뚫은 거야!”

  짧게 투덜거리고는 일어서서 용살검을 휘두른다. 주위에 있는 것은 이미 가시 넝쿨이라고
부르기 힘든 초록색의 군락. 참은 혀를 차며 그냥 닥치는 대로 검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튕겨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이 몽땅 잘려나간다. 무지막지함의 극치를 달리는 엄청난 파괴력
의 참무.
  하지만 키리는 방금 전 자신이 쏘아낸 마법에 놀라느라, 그의 참무에 감탄할 틈은 없었
다. 참의 어깨를 넘겨 덩굴에 불을 지를 요량으로 쏘아낸 마법은 나무의 반을 날려버렸다.
참이 용의 피를 뒤집어 쓴 탓에 웬만한 마법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몸이 아니었다면 그야말
로 박살이 났을 터. 그녀는 새삼 마력회로 전체에 감도는 위화감을 느끼며 자신의 몸을 바
라보았다.

  “키리, 좀 도와줘!”

  갑자기 들려온 참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
닥은 이미 초록색. 용살검을 휘두르는 그의 손을 제외하고는 넝쿨이 마구 휘감겨 있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내렸다. 이렇게 몸의 마력이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마법을 사용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녀는 대신 번개같이
품속에 손을 넣어 검은색의 갑옷조각을 꺼내들었다. 검지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조각위에 피
를 흩뿌리고 절대의 맹약을 외친다.

  [금주(禁呪)에 몸을 던진 맹약의 기사여! 마모되지 않을 영원의 기사도를 아직 가슴에 새
기고 있다면! 그림자를 걷고 모습을 드러내 나의 명을 들어라!]

  칠흑이 시야를 메운다. 명멸하는 어둠이 폭발하듯 터지며 뿜어내는 것은 늑대의 투구를
지닌 검은 갑옷의 기사. 그 자신의 긍지만큼이나 소중한 거대한 늑대검을 허리에 찬 칠흑의
기사는 자신이 소환된 곳을 주욱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주 키리여. 벌초정도는 스스로 하는 게 어떤가?]

  “시시껄렁한 농담 집어 치우고, 저기 검 휘두르는 남자나 도와!”

  빽하고 소리를 지르는 키리의 모습에 익살스럽게 어깨를 움츠려 보인 늑대의 기사는 허리
에 찬 늑대검을 뽑아들었다. 늑대의 얼굴모양을 본 딴 칼자루에 박힌 보석이 주인의 눈동자
처럼 붉은 빛을 발한다.

  [돕는 건 귀찮지만 명령이시라면야!]

  늑대의 기사는 그대로 넝쿨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손에 든 검을 회전시키는 속도
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 넝쿨들은 지금껏 참이 잘라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
도로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유린하는 늑대의 횡포를 맘껏 맛본 넝쿨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땅을 뒤집어대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라질 놈들! 지겹게 나오는구나! 어이, 까만 친구! 난 당분간 부추전은 입에도 대기 싫
을 것 같은데 그쪽은 어때?”
  
  치솟아 오른 넝쿨들의 기둥을 일도양단으로 쪼개버리며 외치는 참. 늑대의 기사는 달려드
는 넝쿨을 밟아 땅으로 돌려보내며 대꾸했다.

  [본 기사는 그래도 먹고 싶군! 실은 뭔가를 먹지 못하는 몸이 된지 30년도 넘었다네!]

  “우하하핫! 그거 굉장히 유감인데! 근데 너 누구냐?”

  [……자네 상당히 유쾌한 성격이군, 본 기사는 감탄했네!]

  농담 따먹기 같은 대화를 하며 쉬지 않고 초록색 물결을 베어 넘기는 두 남자. 천하일색
을 휘두르며 두 남자의 사이로 뛰어든 키리는 쉬지 않고 밀려오는 넝쿨에 진저리를 내며 외
쳤다.

  “이러면 끝도 없어! 길을 뚫어!”

  [Yes, My Lord!]

  자루 끝을 잡고 있는 힘껏 늑대검을 뿌리는 늑대의 기사. 자루를 길게 늘여 늑대검을 늑
대창으로 바꾼 기사는 질풍 같은 속도로 넝쿨들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키리의 몸을 안아든
참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고, 기사는 그를 흘끔 뒤돌아보고는 장난스럽게 외쳤
다.

  [조심하게 검사여! 여자를 잘못 안으면 외팔이가 될지도 모르네!]

  “안 그래도 하나 잘렸어! 설마 나머지도 잘릴까봐?”

  [뭘 모르는군, 검사여! 본 기사는 여자 한명을 건드릴 때마다 몸뚱아리를 잃어버려서 결
국 이 꼴일세!]

  “오우, 맙소사! 그럼 당신 혹시 그것도 잘린 거야?”

  “두 멍청이, 닥치지 못햇!"

  두 남자는 닥쳤다. 그리고 위기 또한 닥쳐왔다. 늑대의 기사는 혀를 찼고, 참은 이이 찢어
져라 웃었고, 키리는 이를 갈았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장대한 복숭아나무를 담고 있는 커
다란 호수. 살아온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담고 있는 튼튼한 뿌리위에는 복숭아 빛 머리칼의
미녀가 눈을 불태우며 서있었다.
  참은 그 눈빛에 식은 땀이 나는것을 느끼고 옆에 서있는 늑대의 기사에게 물었다.

  “난봉꾼 기사 양반. 그쪽 경험으로 봐서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는 위험한가, 안 위
험 한가?”

  [말하면 굉장히 침울해 할 것 같아서 자세히는 말 안하겠네만. 만약 군주 키리가 저런 표
정을 짓는 다면 나는 기사도고 뭐고 다 내던지고 도망칠 걸세.]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참은 키리에게 어퍼컷을 맞고서야 그녀의 몸을 땅에 내려
놓았다. 여인의 눈이 키리가 허리에 차고 있는 천하일색으로 향한다. 그녀는 천천히 뿌리에
서 걸어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그 쇳덩이를 내 놓아라. 인간의 여자.”

  무례할 정도로 고압적인 언사. 키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비웃음을 띈 얼
굴로 대답했다.

  “나랑 자서 이기면 그렇게 할께.”

  입을 떡하니 벌리는 참과, 검을 떨어트리는 늑대의 기사. 키리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으
르렁 거렸다.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이 멍청이들! 그리고 당신도!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뭔지나 알고 요구하는 거야?”

  “알고 있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쇳덩이지. 난 그게 필요하다.”

  호수 가장자리에 내려선 여인은 맨발인 채였다. 어느새 주위의 풀과 덩굴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것들을 마치 자식인 것처럼 쓰다듬었다.

  “너희 인간들은 숲의 소중함을 모르지. 너희가 30분 만에 베어가는 나무를 키우기 위해,
우리는 30년을 고생해야만 한다.”

  그녀는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로 참과 키리를 노려보았고, 둘은 그 눈빛에 가슴이 꿰뚫려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형형하게 빛나는 분노. 그리고 끝도 없을 저주와 증오. 여인
의 등 뒤에서 호수가 폭발하고, 숲이 포효했다. 치솟아 오르는 물기둥들, 그리고 날뛰기 시
작하는 나무들. 그 가운데에 선 여인은 증오에 찬 외침을 거칠게 토해냈다.

  “그 쇳덩이로 나의 소원을 이루겠다! 모든 인간의 멸망을 소원하겠다! 인간들아! 불로소득
의 대가를 치루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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