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서상으로는 3일차부터 먼저 올려야 되는데 전투씬 고자라 진도가 넘 느려서...ㅠㅠ 4일차 낮을 먼저 올립니다.
* 실더는 멘붕 중이라서... 글에 나오지 않습니다.
* 다이스는 굴릴 때마다 쫄깃합니다.
1.
아이리안은 구룡성채의 모습에는 별 감흥을 갖지 않았다. 아이리안의 자택─스펜서 성은 겉은 번듯할지언정 내부는 구룡성의 난잡함에 대해 불평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고, 아이리안의 경력은 구룡성의 사람들에게 도덕을 운운하기엔 지나치게 길었다. 때문에 아이리안은 그에게 있어 구룡성이 얼마나 괜찮을지에 대해서만 주목했다. 장점은 꽤 많았다. 구룡성은 한낮에도 햇빛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건물이 뒤엉켜 있다. 누군가 사라지는 것쯤은 소문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방 하나쯤 '허락 없이' 빌려도 준엄한 법의 규정을 언급하며 막으려할 공권력도 없다. 반면에 단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나절동안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물질적인 상황과는 달리 아이리안을 둘러싼 정신적인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아이리안은 몇분 째 '통화 연결 중'이라는 메시지만을 내보내는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물론, 아이리안은 자신이 전화를 걸 때 반드시 상대방이 받아야만 한다는 심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전화를 걸고 있는 사실을 상대방 역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라면 이야기는 다른 법이다.
아이리안의 표정과는 퍽 대조적으로, 스마트폰은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운운하는 발랄한 메시지를 송출했다. 아이리안은 스마트폰 화면을 난폭하게 눌러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앞선 시도와 합치면 세번째로,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클릭했다.
[남의 목숨은 안 중하면서 그대 목숨은 중한 모양이지?]
놀랍게도 세번째 시도의 결과는 첫번째와 두번째와는 달랐다. 아이리안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그렇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삼세판이라고 하던가? 잠시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아이리안은, 곧 평소의 태도로 되돌아왔다.
"죽어도 상관은 없는데 누가 날 죽이려드는지는 알고 죽어야겠다 싶어서."
[말장난 같군. 내가 여기서 그대에게 저주를 건 게 누구인지 말해주면 바로 죽어줄 수 있다는 건가? 헛소리! 그럼 그 다음에는 '겨우 그딴 거한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 걸세!]
"뭐야. 어떤 거물이길래 내 손을 이렇게 만들어놨나 했더니. 생각보다 별거 아닌 놈인 모양이지?"
아이리안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거 참, 나도 답지않게 방심한 모양이군."
[그렇고 말고. 결국 그대로 뭔가 이러니저러니 말했지만, 저 평범한 군중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지.]
"섭섭한데. 적어도 난 마술을 쓸줄은 안다고."
[이 세상에 마술사는 최소 6만 명 정도는 있네.]
"하지만 적어도 여기 홍콩에서는 그 정도로 많지는 않겠지. 이 좁은 땅에 6만명이나 되는 마술사가 몰려있다니, 재앙이라고. 재앙."
[그것은 맞는 말이겠군. 하지만 아이리안 스펜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겠지.]
워처의 음색이 한결 진지해졌다. 아이리안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하는 말을 들었다.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천사와 성녀가 어떻게든 해결해줄 터이니 신경쓰지 말게. 자네는 얌전히 성배전쟁에나 몰두하는게 나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왜 다들 그리 자신들과는 관계도 없는 문제에…… 단순히 경계만 하고 있으라 한 것에 그리 안달복달인지.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생물이야. 왜 굳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문제에 끼어들어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지?]
천사? 성녀? 아이리안은 워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홍콩에 천사와 성녀가 내려와 있다는 것일까? 아이리안은 워처가 질나쁜 농담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이리안은 즉시 그 가설을 부정했다. 워처가 굳이 그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안은 곧이곧대로 워처의 말에 수긍할 수도 없었다. 정말 천사와 성녀가 내려와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워처의 말마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라면, 상황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가 이 문제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이리안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리안은 잠시 사이를 둔 뒤 다시 말했다.
"……그 천사와 성녀가 해결하게 놔두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미 사라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은?"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겐가?]
워처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어조로 말했다.
['저것'이 탄생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사람을 먹어도, 지난 사흘간 그대들 서번트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를 넘지 않을 걸세! 60억을 구하기 위한 것에 최대 700만의 희생이라도 가치가 있을 것일진데, 하물며 그보다 적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
워처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냉소적인 어조로.
[하, 정말이지 인간은 항상 정답을 말해줘도 의심하기만 하는 족속들이란 말이지. 뒤돌아보지 말란 것을 뒤돌아보고, 의심치 말라는 것을 의심하고. 선택한 뒤에 후회하고. 되돌려달라고 떼를 쓰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그대만 해도 그렇지. 그대의 눈과 손이 멀쩡히 돌아온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 악마가 씌인 것이니, 천사와 성녀가 구마를 끝내면 자연히 사라지는 것을.]
아이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에 대한 비판에 기분이 언짢아져서는 아니었다.
"천사에, 이번에는 악마야? 이거 참……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려들었군."
엄마가 계셨다면 참 좋아했을텐데. 아이리안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런 그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는지, 워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잔을 모방하여 만든 레플리카를 절대적인 원망기로 여긴답시며 뛰어든 자들이 있는데, 천사와 악마가 나타난들 무에 신기하겠나? 신부는 모르겠지만, 추기경은 분명 환호하다 죽을 것이니.]
"신성모독으로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일 말 같은데…… 아무튼, 알겠어. 덕분에 내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한건지 드디어 가닥이라도 좀 잡힌것 같군. 악마에 씌이다니, 강령술사 망신이 따로 없지."
[그냥 악마라면 말이 간단하지. 그나마 그대는 그것의 취미…… 애완 정도의 상태겠지만 그것이 하려는건 그대의 모친조차 아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 터다.]
워처의 말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좀 전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단호했다. 특유의 음색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아이리안은 평소의 능청거리는 태도를 잠시 버리기로 했다.
"설마 우리 엄마가 예전에 강림시키려고 했던 놈이라도 나타난다는거야?"
[자네야 트라우마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겠지만, 그 정도 놈이라면 다행일걸세! 잔 다르크와 미카엘이 있으매 소멸시키는 것이야 기도 한번, 영창 한번이면 족할테니!]
"더 엄청난 놈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벨리알의 존재도, 그 자체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 아니, 새벽별(Lucifer)이 나온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 괴물은 영웅이 쓰러뜨리고, 악마는 천사가 쓰러뜨리고. 모름지기 고리는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가.]
"……벨리알?"
[말세에 한번 더 구제를. 성도의 재현. 물결 저 너머에서 일곱 머리, 십의 왕관이 나타난다. 파도 속에서 짐승이 기어오르니─]
"워처. 말이 너무 많군요."
한 번 들어본, 하지만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이리안은 표정을 굳힌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카락과는 다소 다른 빛깔의, 아침에 뜨는 해 같은 금발 머리와 가을 하늘빛 눈동자.
성배전쟁이 시작됐던 첫날, 사람 많은 카페에서 만났던 소년이,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2.
소년은 퍽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사근사근한 표정만을 지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리안은 그 때와 비교해서 소년의 입매가 명백히 굳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긴장인지, 분노인지, 본래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이리안도 입을 열지 않았고 소년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골목에는 조용함만이 감돌았다. 슬럼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무음.
꽤 긴시간의 정적을 깬 것은 소년 쪽이었다.
"아이리안 스펜서. 생각보다 살만 한 모양이네요. 입이 멀쩡한걸 보니."
아이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소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아이리안 자신이 느끼기에도 상대가 천사─아무리 기묘해보이는 워처라고 해도 남자를 성녀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라 해서 공손하게 구는 성정은 아니었다. 아이리안은 말했다.
"내가 얌전해진다고 이게 풀릴 거였다면 진작 얌전해졌겠지. 그나저나,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군."
아주 잠깐 소년의 사무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소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요."
"그땐 서번트인지 아닌지도 감이 안잡혀서 말야.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군요. 상관 없는 것이지만요."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말했다.
"아이리안 스펜서. 그럼 마지막 호의를 제안하죠. 지금 당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드릴테니, 계약을 끊고 영국으로 돌아가세요."
아이리안은 침묵했다. 동화에서든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저주를 푸는 일은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 '대가'는 저주에 걸렸던 사람이 저주를 풀어준 사람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소년의 경우에는 그 '대가'가 아이리안의 귀국이었을 뿐이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대가였기에 아이리안은 당혹했으며,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가이기에 반발했다.
아이리안은 낮게 말했다.
"돌아가면, 어떻게 되지?"
"평범하게, 여태까지처럼 지내는 거죠. 달라지는건 없을 거에요."
"그게 가능할 턱이 있나."
"어차피 괴물은 처치될 거고, 그 순간 이 도시의 모두는 그것을 잊을 거에요. 그런 게 돌아다녔다는 사실도─"
아이리안은 소년의 말을 끊었다.
"악마라는 놈이 나타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사라지고 죽었는데, 여기서 몸을 뺀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던' 일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
실더가 있었다면 꽤 놀랐을 것이다. 아이리안 본인이 느끼기에도 격정에 사로잡힌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런. 아이리안은 내심 탄식하며 머리를 짚었다. 무턱대고 흥분하는 것보다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쪽이 상황을 해결하기에 용이하다는 사실은 중학교만 졸업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렸다니. 한순간에 어린아이로 돌아가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죠. 당신의 서번트가 게오르기우스나…… 아니면 이 땅의 관운장 정도 되는 분이었다면 당신은 제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의 당신은 걸림돌일 뿐이에요. 갑자기 정의의 아군 놀이가 하고 싶어지셨나요?"
아이리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딱히 그런건 관심 없어. 나 혼자면 모를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봉변을 당한다는게 마음에 안 들 뿐이야."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처가 말하지 않았나요? 악마는 그냥 나오지 않아요. 악마도 '그것'도 이 도시가, 땅과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초한 게 맞아요."
"……그게 무슨 의미야."
"애당초 향락에 젖고, 타락하고, 서로 죽고 모함하고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 가득하지 않은 이상 '그것'의 성장에도 한계가 있어요.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대놓고 돌아다니고 있는 거구요."
소년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지금 도시에서 사람들이 의문의 습격을 받아 사라지고, 죽는 것은 사람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담백하게 표현하자면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아이리안은 다른 사람들의 업보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까지 휘말려들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몇 번 휘저어 잡생각을 끊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아이리안은 다시 평소의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기계도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태도가 바뀔 수는 없잖아. 흔한 말이지만, 세상엔 그 악마보다 더 한 사람도 넘쳐난다고."
나한테 의뢰를 한 그 늙은이도 그래. 지금 생각하면 그 놈은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 쓴 악마였던 것 같아. 아이리안은 덧붙였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홍콩에서 온갖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아이리안에게 일을 의뢰했던 모 인사는 발을 쭉 뻗고 자고 있거나 평소처럼 시계탑 내 정치 싸움을 하고 즐기고 있을 테니까.
아이리안으로서는 놀랍게도, 소년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건 옳은 지적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여기 존재하구요. 아무리 이 세상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고, 서로 죽이고 해친다고 해도 그들이 악마에게 잡아먹혀 종말을 맞이하게 내버려둘 이유는 없어요."
아이리안은 잠시동안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까지 눈 앞에 있던 소년이 생경한 무언가로 변한 것처럼.
"진짜 천사 같군."
실례라고 생각해도 될 법했지만 소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비즈니스일 뿐이에요."
"비즈니스?"
"제 일이요. 저는 그렇게 신앙받고 있으니까요. 여기가 인도의 믿음이 더 강한 땅이었다면 칼키가 나왔을 거고, 뭐, 비슷한 거에요."
"기독교 문화권인 홍콩이라 네가 나왔다 이건가."
"맞아요. 자, 그러니까 다시 묻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은 간혹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단순한 당황이든 정말 싫어하는 것이든─보통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비율이 높다. 소년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한 아이리안은 자신이 간만에 보편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갔음을 좋아해야 할 지 알수 없었다.
소년이 말했다.
"아이리안 스펜서. 저주를 풀어줄테니 성배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가실수 있나요? 원한다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해줄 수도 있어요."
아이리안은 생각했다. 계속해서 저주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워처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걸린 것은 그저 '악마가 즐기기 위한' 취미, 애완 정도의 저주라 하였으니 정말 악마가 궁지에 몰리지 않는 이상 지배를 당하지는 않을 터이고, 지금까지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저주를 몸 안에 넣은 채로 살아가는게 정말로 무해할리는 없는 것이다.
아이리안은 소년의 말에 따르는 쪽이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심리적으로 그를 누르고 있던 저주도 풀고, 아비규환이 된─혹은 그렇게 될 홍콩을 도중에 떠났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기억에 없는 일에 어떻게 죄책감을 느낄수 있겠는가? 실더는 다른 마술사와 계약하게 해주면 되는 일이다.
아이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아, 그거 말인데. 받아들이면 령주는 어떻게 수거해갈 생각이지?"
"룰러가 가져갈 거에요."
"룰러? 내 눈엔 안보이는데."
소년은 표정을 찡그렸다.
"농담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아, 그래. 철저하기도 하셔라."
아이리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저주가 풀리는 즉시 도망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아이리안은 대답했다.
"좋아. 거절하겠어."
아이리안은 그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로 지금까지 겪었던 일이 '아무 일도 없었던'것으로 치환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실더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도, 토지관리자의 사념을 따라가다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다. 아이리안 혼자서만 모르는 일이 될 뿐.
아이리안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아이리안은 소년이 화를 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소년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렇군요."
아이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담백하군. 혹시 악마가 씌이면 방해가 될 거라고 미리 죽일 줄 알았는데."
"그럴거라면 이미 처음 만난 그 순간 죽였을 거에요."
"그 땐 악마한테 안 씌였잖아."
"그 정도 가능성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항구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거구요."
아이리안은 한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른 일이면 몰라도, 그 일은 정말 그의 자업자득이었으니까.
꽤 거북한(적어도 아이리안이 느끼기에는) 침묵이 흐른 뒤 아이리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된건가."
소년은 잠시 동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동정인지, 위로인지. 혹은 그저 천사가 인간을 볼 때의 태도인지.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제가 화내는 것과 별개로 당신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원래 대부분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리안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뗐다. 아이리안은 다시 가볍게 말했다.
"걱정 마. 딱히 자책은 안해."
소년은 이번에는 기대조차 안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것 같다고는 생각했어요."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거 아냐?"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겠군."
아이리안은 납득했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소년은 천사라고 하였으니까.
"뭐, 좋아. 네가 죽이지도 않을 거고, 그 놈이 갑자기 날 죽일 것도 아니라면 목이 붙어 있는 한 할 일이나 해야겠어."
아이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주를 풀지는 못했지만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리안에게 걸린 저주는 시한부도 아니고, 갑자기 그의 행동을 장악하는─궁지에 몰린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저주도 아니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것 또한 악마라는 작자가 그냥 그를 지켜보기만 하고 손을 쓰지만 않는다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이리안은 크게 저주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소년의 행동은 아이리안을 다시 한번 당혹스럽게 했다. 이번에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선택이긴 해요. 당신은 사고를 몰고 다니니, 그것의 시선을 좀 뺏을 수는 있겠죠. 거기에 당신의 그 기가 막힌 말을 듣고 있노라면 벨리알도 짜증을 낼지도 몰라요."
하, 아이리안은 샐쭉 웃었다.
"경력에 추가할 만한 게 생겼군. 악마도 짜증낼 언변이란 말이지."
아이리안은 문득 그에게 저주를 건 악마가 얼마나 그에게 짜증을 냈는지 궁금해졌다.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소년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양심과 신실함이라는 것이 존재만 했다면 성당교회의 악마 사냥꾼으로 초빙 1순위가 될 거에요. 저와 벨리알에게조차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언변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래 살려면 물론 그런 일은 안하는게 좋지만요."
"아, 그건 상관 없어.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
"죽은 후가 문제죠. 지옥에서 강제 노역 삼천년의 미래로 직행한다던가. 게다가 당신의 성질머리로 봐서는 당신 감독관으로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악마를 붙여줄 거에요."
아이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농담할 성격은 아니겠고. 이제라도 개심해야 하나?"
"악마가 괜히 악마가 아니죠. 당신 좋은 일을 하게 냅두겠어요? 최대한 괴롭히려고 하겠지."
"정말 재수 옴 붙었단 말야……."
아이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리안이 아닌 누구라 하여도 천사에게 직접 사후에 악마를 만난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3.
"좋아. 그래서 네…… 아니, 당신 충고는 여기서 끝인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불나방처럼 진상을 파악하려 들어가는 것도, 문제가 해결되길 기다리며 성배전쟁에만 몰두하는 것도 당신 자유에요. 어느 쪽도 지금의 당신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이제 알 만큼 이것에 대해 알고 있어요. 마침 아직 '그것'이 완전히 현현하지도 않았죠.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면 선택지가 없을 것이고, 이미 그것이 현현한 항태라면 그 또한 선택지가 없을거에요."
아이리안은 표정을 굳혔다.
"잠깐 기다려. 네가 말하든 '그게' 뭐든, 적어도 죽거나 싸우거나 선택할 정도의 자유는 있을텐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일부라면 모를까, 완벽하게 현현하는 순간 천만 명을 죽여요. 자신의 의지로 뭘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게 되죠.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되, 완전히 현현하기 전에 죽이는 것이 저희의 목표구요."
아이리안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왜 지금 죽이지 않지?"
소년이 말했다.
"그게 수면위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소년은 아주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
"역설적인…… 모순적인 말이지만 '그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저희 쪽에서도 먼저 죽이는 것은 불가능해요. 단지 '그건' 조건을 충족시키면 현현을 자의로 피할수 없어요. 그게 드러나는 순간을 노리는 거죠."
"내가 전광판이 되어 있다면서. 내 패스를 통해 역추적하는 건 안되나?"
"역추적을 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그것'을 만드는…… 벨리알이 누구로 위장해있는지조차 알고 있어요. 그도 저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때까진, 그도 저희도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될 뿐이에요."
"정체를 알면서도 행동할 수가 없다 이거지. 답답하겠군."
"그런 셈이죠. 당신도 알고 있는걸요."
아이리안은 마치 조용한 풀밭에서 폭탄이 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라면 즉각적으로 천사를 추궁했을 아이리안은, 하지만, 전혀 예상지 못했던 충격을 받은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이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고? 어떻게?
소년은 말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이제 알만큼 이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당신이 여태까지 홍콩에서 만난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악마라면 누구한테, 어떻게 하겠어요?"
채 가시지 않은 충격 속에서 아이리안은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 중 마스터나 서번트들, 즉 성배전쟁의 관계자들을 배제했다. 만약 성배전쟁에 참여한 사람이 그런짓을 저질렀다면 진작에 룰러가 토벌령을 내렸을 테니까. 남는 것은 자연히 마스터나 서번트가 아닌 부외자들이었다.
아이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토지관리자─프리실라 랭과, 그녀의 아들도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 악마는 현재진행형으로 홍콩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이미 고인이 된 토지관리자가 악마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토지관리자의 아들은…… 크리샨테의 말에 의하면 토지관리자가 죽기 전까지는 줄곧 외국의 기숙학교에 있었으니 역시 악마가 될 수 없다.
잠깐.
아이리안은 문득 벼락이 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크리샨테. 크리샨테 아르코풀로스. 며칠 전에 만나 그에게 정보를 전해준 소녀. 마력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
그리고…….
맙소사. 아이리안은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어째서 린 샤오에 대해서는, 마력 반응을 확인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아이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크리샨테의 뒤에 있는, 마치 소녀의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수행원.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 집행자인 아이리안조차 일반인으로 위장한 마술사인지도 확인하거나 의심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마치 물 위를 헤엄치는 오리처럼, 아이리안은 린 샤오에 대해 생각하려면 자꾸 사고가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리안은 지금 이 순간도 천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린 샤오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니.
아이리안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속단은 이르다.
비록 마력 반응은 보지 않았지만, 일반인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을 다짜고짜 악마로 몰아가는 것은─
젠장. 집어치워.
그 때였다.
아이리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불쑥 손을 뻗어온 것이다. 언제 가까이 다가온 것인지, 소년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하.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음 순간 아이리안의 시야가 변화했다. 오른쪽 눈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악마가 그 사이에 변덕을 부려 저주를 '변화'시킨 건지 생각했던 아이리안은, 곧 소년이 그의 오른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잠깐, 손가락?
아이리안은 갑작스럽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자아내는 것보다 소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자요. 이게 당신 눈에 있던 거에요.
소년은 자연스럽게 손을 빼고─그와 동시에 아이리안의 시야도 곧 원래대로 회복되었다─손에 들려있던 것을 아이리안에게 보여주었다. 빛을 전혀 반사시키지 않아 마치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이는 검은 나비였다. 소년이 가볍게 힘을 주어 잡자 그것은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산산히 부서져내렸다.
황당 반 당황 반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리안에게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손, 내놔봐요."
아이리안은 반사적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장갑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타들어갔던 손은, 소년의 손가락이 닿자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후에야 아이리안은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안 도와준다며?"
소년은 소리쳤다.
"정말 도와주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만 하면 절하면서 다 지킬 사람들도 수두룩 한데! 이 똥강아지!"
아이리안은 순간 그의 눈앞에 있는 소년이 실더가 변신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성별을 떠나 외관 나이는 비슷해보이기는 했다……. 실로 황당하기까지 한 생각이었다. 조금전처럼 잡념을 끊기 위에 아이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애써 사고를 다잡고 아이리안은 말했다.
"그런데 왜?"
소년은 도리어 자신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이 악마한테 씌어서 저주 후유증 평생 달고 사는 것을 냅둬야 하나요? 그럴 수 없는게 당연하잖아요!"
"그저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악마를 없앤다고 하시던 분은 어디갔어?"
"그것도 진심이니까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제 말 한 마디에 웃고 기뻐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악마가 나오는 순간 모두 같은 얼굴로 절 쳐다보는 걸요."
아이리안은 아주 잠깐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마치 상대방이 계속 숨기려고 했던 비밀을 의도치 않게 알아버렸을 때와 비슷한.
아이리안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 위에 꼈다.
"진짜 그런거면, 나 같은 놈 한명쯤은 그냥 내버려두고, 악마 퇴치에나 집중하면 될텐데."
그의 곤혹스러움을 읽지 못했는지, 혹은 읽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소년은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진짜 청개구리 같은 똥강아지네! 고쳐준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아이리안은 곤혹스러움을 잊었다. 눈앞의 소년이 자꾸만 실더와 겹치는 것을 애써 지워내리며 아이리안은 말했다.
"천사 맞아?"
소년은 준엄하게 말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알아보세요. 사후세계에서 절 만나게 되면 조금이나마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게 되겠죠."
아이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 알았어. 그 대가라는게 뭔지 말해봐. 나쁜짓 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사고 치지 말아라, 이런 건가?"
"사고치지 말라고 해도 안 지킬 거잖아요. 저는 물론 당신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지만, 유모처럼 따라다니면서 멀쩡한 상태로 즉시 구해주지도 않을테니까요.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이 단 한스푼이라도 있다면 알아서 정도껏 하세요."
아이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애착이라.
그런 건 이미 진작에 없어졌는데.
아이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능청스럽게.
"날씨가 좋군."
소년은 소리쳤다.
"정말이지 천사 인생 이천년에 이런 인간 처음 봐!"
아이리안은 고개를 내려 천사를 보았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내가 좀 드물긴 해. 조금쯤은 인생에 자부심을 가져봐도 되겠군."
소년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후에 후회하시구요."
아이리안은 소년의 시선을 피했다.
"오래 살아야겠는데."
"불로불사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죽겠죠. 기대하고 계세요."
"……좋아. 기대하지."
"긍정적이라 좋네요."
아이리안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올렸다. 소년은 만족스럽다는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소년은 두어 걸음 걸었다. 마치 산책을 나가기로 한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었다.
"뭐, 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유니크함을 자기 강점으로 어필할 거라면 좀 상상을 뛰어넘는 사고라도 쳐주면 차라리 재밌을것 같네요. 벨리알 짜증내는 얼빠진 표정 보고 싶어(아이리안은 다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년은 그의 반응을 무시했다). 악마를 엿먹일…… 아니, 악마도 놀라게 만들게 보고 싶으니까요. 아무튼, 뭐, 좋아."
소년은 발을 멈췄다. 아이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년은 질책하듯, 혹은 충고하듯 말했다.
"나는 너와 달리 바쁜 사람이니까. 적당히 목숨 간수는 잘 해가면서 다니도록 해. 아이리안 스펜서."
그리고는 소년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야기속에서 보던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서.
정말 천사가 맞기는 맞군……. 멀어져가는 소년을 보며 아이리안은 생각했다.
4.
고개를 숙인 아이리안은 문득 자신이 휴대폰의 존재를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소년이 나타나고 워처와 통신이 끊어진 이후부터, 그의 휴대폰은 아무 변화도 없이 얌전히 코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마침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다. 아이리안은 휴대폰을 꺼내서 버튼을 눌렀다.
어떤 놀라운 우연이 빚어낸 것일까. 그 순간, 문자 메시지 착신이 화면에 표시되었다. 아이리안은 메뉴를 내려 문자메시지를 보았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From: Lin Xiao
Hello, Mr. Spe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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