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차 낮은 딱히 쓸게 없어서 건너뛰었습니다
* 무수한 다이스 실패의 향연
* 성공했으면 곧바로 범인을 봤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리안은 댕청미를 마음껏 뽐냈습니다
아이리안은 장례식에 참여해본적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마술 특성상 그의 가문은 후계자를 많이 두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리안은 따로 친척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친척의 장례식에 참여할 일도 없었다.
아이리안의 혈연은 오직 부모님과 여동생 뿐이었고, 그 들 모두 아이리안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이리안은 장례식에 참여해본적이 없었다.
오직 여동생을 화장했을 뿐.
1.
프리실라 랭의 장례식장에는 결코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는 할 수 없을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말로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한 사람은 한손의 손가락만으로 꼽을 수 있다 하여도 무방하다. 대부분의 조문객은 겉으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득을 계산했다. 누가 토지관리자의 자리를 가져갈지, 유산을 얼마나 차지할 수 있을지, 붕 떠버린 권력을 가져올 수 있을지.
그들은 자산가로서도 마술사로서도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프리실라 랭의 유산이나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소수의 조문객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허핍한 감탄─조롱─헛웃음─놀라움을 표하며, 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이런 시기에 저렇게 순진하게 굴다니 어리석기도 하지.
하지만 정말로 프리실라 랭의 유산이나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조문객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무표정이라는 가면 뒤로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경쾌한 분위기의 선박왕의 작은집 따님, 소녀의 수행원, 그리고, 오, 이런. 대체 뭘 노리고 나타난 거지? 악명 높은 집행자와, 그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소녀. 마술사의 관점으로도 일반인의 관점으로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어떤 이는 프리실라 랭의 유해를 노린 집행자가 소녀를 세뇌한 것 아닐까 하는 가설을 내세웠다. 어떤 이는 펜팔 친구라는 어처구니 없는 개념을 떠올렸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굳이 그들이 마술사가 아니었더라도 우연히 만난 상대를 초대했을 뿐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 애가 토미야."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샨테는 아이리안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 아주머니의 외동아들. 어제 내가 얘기했죠? 급하게 귀국해서 오늘 도착했대."
아이리안은 상주의 자리에 서 있는 소년에게 눈길을 향했다. 장례식장에 있는 누구보다도 어려보이는 소년은 정신적, 신체적 충격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은 아이리안이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시간 동안 응시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리안은 말했다.
"힘들어 보이는군."
"그야 아직 열세살밖에 안됐으니까."
"후견인은 없나?"
"저기 옆에. 보이지? 저기 살집 두둑한 아저씨에요. 벌써부터 아주머니 재산을 자기 재산처럼 쓸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과연, 배가 돋보이는 중년의 남성은 슬픔을 가장하기도 귀찮다는 기색을 역력히 띠고 있었다. 아이리안은 다시 한번 소년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입을 열었다.
"랭 여사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군. 괜히 남자친구가 한달에 한번씩 바뀐게 아닌가 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다들 그렇게 말해요. 맞다, 오빠도 인사해볼래? 저 아저씨말고도, 다른 사람이랑도."
아이리안은 당황하여 소녀를 돌아보았다.
"나? 네 눈앞에 있는 사람?"
"응. 아, '난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라는 표정 짓기 말기! 오빠는 외부인이라 다들 경계하고 있는걸. 잘못 보이면 복잡한 조사를 받게될지도 몰라요."
"……."
'복잡한 조사'라는 단어는 아이리안으로 하여금 반론할 기색을 빼앗아갔다. 중국 정부의 조사는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다. 하물며 외국인인 그에게라면야.
그렇잖아도 성배 전쟁 때문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아이리안은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아이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녀가 말해준 사람들과 인사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2.
크리샨테는 아이리안의 곁에서 여러 소식들을 조잘거렸다. 기자들이 알았다면 한줄만이라도 기사에 싣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가십이었다. 처음에는 흥미로 귀를 기울이던 아이리안은 소식들 안에 담긴 내용과, 자신이 그런 소식을 듣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소식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있다는 사실에 다소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높으신 분들이란.
하지만 크리샨테는 아이리안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크리샨테가 막 장관 B와 유명 화가 A 사이에서 벌어진 미묘한 스캔들을 꽃피우던 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르코풀로스 양, 아르코풀로스 양!"
크리샨테는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곧 여러 음색이 더해진 목소리들이 크리샨테를 불렀고, 크리샨테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크리샨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우우, 전 잠깐 저 분들에게 다녀올테니까 오빠 먼저 저 쪽에 가 계세요. 샤오, 모셔다드려."
"네. 아가씨. 몇번이나 말씀드린거 같지만─"
"이상한 말 하지 말라는거지? 정말,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정말요? 잘 됐네요. 아무리 말씀드려도 고치시질 않아서 선택적으로 귀가 막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크리샨테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몸을 돌렸다. 축 늘어뜨렸던 어깨를 다시 경쾌하게 펴면서. 아이리안은 멀어지는 크리샨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샤오─크리샨테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번에도 생각한 거지만, 너 저 녀석을 대할 때 유독 말이 험해지는거 같은데."
"다 아가씨 잘 되시라고 하는 소리에요. 이 정도로 얘기하지 않으면 도통 들어먹지…… 들으시질 않으니까."
"……."
아이리안은 조금 전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기분이 떨떠름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좋아.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면 되는거지?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이쪽입니다. 미스터 스펜서."
샤오는 아이리안보다 두어 걸음 정도 앞서 걸어갔다. 평소 크리샨테에게 건네는 말이 어떠하였건 샤오는 틀림없이 우수한 수행원이었다. 아이리안은 크리샨테 또래 정도로 보이는 샤오가 스펜서 성의 집사─몇백년은 살아온 유령이기도 한─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자세로 그를 안내하는 것에 조금 놀랐다.
3.
샤오가 그를 안내한 곳은 고인의 영정 앞이었다. "찾으실 일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불러주세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샤오는 뒤로 물러 서서 걸어나갔다.
국화꽃 안의 영정 사진과, 넋을 기리기 위한 향로. 큼직한 액자 속의 프리실라 랭은 공허한 눈으로 자신 앞에 선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술사로서, 자산가로서 프리실라 랭이 갖고 있던 명성과 지위, 권력을 생각한다면 허무감마저 떠오를 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안은 자신이 허무감은 커녕 어떠한 슬픔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유감스러워하지도 않았고, 그 사실에 대해 고인에게 송구스러운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프리실라 랭의 영정사진을 보며 아이리안은 크리샨테가 들려줬던 소문 중 하나를 상기했다.
"아, 오빠, 그러고보니 그 얘기 들었어? 아주머니가 실종되기 직전에 운전했던 차에서 말이야. 이상한 것들이 나왔대."
"이상한 것?"
"응. 목잘린 닭이랑 피가 있었다나 봐! 오빠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랭 여사가 적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건 너무 악질적인데. 아예 엑소시스트라도 찍으려고 했다고 하지 그래."
"내 말이! 그런데 다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토미 앞에서 하는 거 있지?"
엑소시스트. 빈정거림 섞인 비유였지만 아예 사실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이리안은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불러내려고는 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서번트를 소환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아이리안은 실더의 말에 수긍했다. 그가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령주가 새겨질 정도로, 도시 안의 마력은 짙다 못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물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상태였다. 토지관리자였던 프리실라 랭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프리실라 랭은 성배전쟁에 참여하고자 서번트를 소환하려다가, 그 전에 다른 마술사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그럴 리 없었다.
아이리안은 프리실라 랭의 저택에서 그녀의 팔을 발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령주의 흔적은 없는 깨끗한 팔이었다. 그리고 프리실라 랭은 나머지 부분이 토막난 시체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녀를 습격한 자는 령주를 제거하여 마스터 자격을 빼앗은게 아니라, 오히려 령주를 지닌채로 끌고 갔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아이리안은 습격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사념을 뽑아낼 수는 있었다.
아이리안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주의하세요. 마스터.」
실더의 염화는 조심스러웠다.
「관에서 이상한 것이 느껴져요.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징조는 분명히 아니에요.」
「알았어. 유념해두지.」
「그리고 혹시 마스터께서 잊어버리신거 같아서 말씀드리지만, 전 이런 '사악한' 방법은 여전히 싫어요.」
「그것도 유념해두지.」
아이리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이리안은 헌화를─가장하기─위하여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프리실라 랭의 사념에 손을 뻗었다.
4.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눈 앞은 캄캄했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것이 아닌' 시야에 보다 익숙해지자, 아이리안은 곧 주변의 암흑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움직인다고? 그랬다. 형체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촛농이나 벽에 튄 핏덩이처럼 꿈틀거리며 천천히. 공포에 질린 아이리안─프리실라 랭─은 방어할 수단을 살폈다. 예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서번트를. 아니. 소환할수 없다. 그녀의 마술각인은 이미, 진작에,
프리실라 랭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무언가'는 이미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프리실라 랭이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두고보려는 듯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사사사, 살려줘!
프리실라 랭 또한 그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이리안은 좌절, 포기, 공포, 경악 등 그의 것이 아닌 여러가지 감정이 마음속에서 끓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프리실라 랭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암흑을 향해 빌었다.
소용없었다.
그것이 다가왔다. 프리실라 랭의 다리가 바닥을 긁었고,
「마스터!」
5.
아이리안은 손을 잡혀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랬다. 눈을 뜬 아이리안은 그가 바닥에 왼손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뭐였지? 그리고 그는 어째서 끌려나온 거지? 적어도 후자의 답은 명확했다. 아이리안은 표정을 굳혔다. 아이리안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실더에게 염화를 보냈다.
그러려고 했다.
"……뭐야, 이건."
문득 느껴진 통증에 아이리안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오른손을 감싼 검은색 장갑은 곳곳이 그을려지고,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뿐만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아이리안은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오른손의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오른손은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니, 불 속에 집어넣었던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시 망아 상태에 빠졌던 아이리안은, 하지만, 다급한 실더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아이리안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프리실라 랭의 사념을 읽을 수 있었던 건 범인이 그녀의 마지막 사념을 미처 꺼뜨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조사를 한답시고 돌아다니는 얼간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남겨두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과연, 그 얼간이는 보기좋게 함정에 걸려들었다.
아이리안은 짧게 생각했다. 끝내주는군.
"구해줘서 고마워.'
"네? 그, 그야 전 마스터의 서번트니까요! 그렇지만, 마스터, 손이……!"
"됐어. 네가 안끌어냈으면 지금쯤 지옥행 편도열차를 타고 있을 테니까. 그보다, 목소리가 커. 남한테 오해받을 만한 말은 염화로 하자고."
실더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아이리안의 손이 못내 신경쓰였는지, 실더는 계속해서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리안은 장갑을 벗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끼고 있기로 결정했다. 석탄이 된─다행히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손을 남 앞에서 함부로 드러내고 다니는 것보다는 그을린 장갑을 끼고 있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 하지만 아이리안은 곧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리안은 그냥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가 손을 완전히 넣었을 때, 샤오가 방으로 들어섰다.
"미스터 스펜서, 아가씨께서 찾으십……."
샤오는 말을 맺지 못했다. 샤오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한 시선으로 아이리안을 바라 보았다. 그 표정에 의아해하던 아이리안은 샤오의 시선을 따라가고서야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떨어져나갔는지 장갑의 검지손가락 부분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것이다. 아이리안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헌화하러 들어갔다가 장갑을 홀라당 태워먹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이리안은 잠시 마술을 사용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곧 그럴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을 떠올렸다.
"아까 다른 사람들한테 불려 갔던거 아니었어? 인기가 꽤 많아보이던데."
샤오는 우수한 수행원이었다. 크리샨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얘기가 나오자, 샤오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장갑에서 흥미를 거둔 듯 다시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싫증이 나신 모양입니다. 절 보자마자 당신을 데려와달라고 하시더군요."
"그거, 그 사람들한테 결례 아냐?"
"당연합니다. 그래서 아가씨께 더 참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어디 말을 들으셔야죠. 절 달달 볶다 못해 당장 해고하실 기세여서……."
"……고생이 많군."
아이리안은 잠시 안쓰러운 시선으로 샤오를 바라보다가,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괜찮은거야?"
"뭐가 말인가요?"
"나랑 내 옆의 녀석 말이야. 높으신 분은 커녕 그냥 일개 관광객일 뿐인데, 이렇게 네 아가씨랑 붙어다녀도 되는 거야?"
"그건 아가씨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전 어디까지나 수행원이니까요. 그럼, 미스터 스펜서."
이 쪽으로, 라고 말하며 샤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아이리안보다 두어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가, 하마터면 방에 들어선 사람과 꽤 세게 몸을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아이리안은 이제는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요란하게 소리가 났으니만큼 당연히 아픔도 상당할 것이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던 크리샨테는 곧 원망의 말을 샤오에게 쏟아내었다.
"아야야, 샤오, 이게 무슨 짓이야!"
"아가씨야말로 무슨 일이신가요? 눈앞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갑자기 달려오시다니. 정말 선택적으로 귀가 막히는 건가요? 제가 이렇게 행동하시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치만 내가 오빠를 데려오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지금 모셔 가고 있었잖아요."
"정말이지, 한마디도 안진다니까!"
크리샨테는 밉살스러워 견딜수 없다는 눈길로 샤오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아이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빠. 나 이제 더 여기 있기 싫어. 향초 냄새도 머리 아프고, 사람들도 자꾸 말 걸어서 귀찮아. 내가 맛있는 식당 예약했으니까 같이 가자. 응?"
아이리안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여기 있기 싫다는 거랑 레스토랑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이 참, 정말 맛있는 곳인걸!"
"그러니까 그거랑 여기가……."
"실더 언니, 실더 언니도 맛있는거 먹고 싶지?"
"뭐?"
아이리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크리샨테를 바라 보았고, 크리샨테가 기대에 찬 눈으로 실더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더욱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아이리안은 실더를 돌아 보았다. 실더는 갑작스러운 지명에 놀랐는지 네? 라고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리안은 문득 실더가 눈앞에 닥친─아서왕과의─문제 때문에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서번트는 식사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식욕은 있었고…….
꼬르륵 하는 소리에 아이리안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거봐 거봐. 실더 언니도 가고 싶대! 그러니까 가자!"
아이리안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조금 전 시커멓게 타버린 손을 보았을 때도 이 정도로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이리안은 지나치게 익은 홍시 같은 얼굴이 된 실더와 함께 크리샨테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리안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 위해 샤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왕이면 평소에 샤오가 크리샨테에게 하던 것처럼 잔소리를 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샤오는 크리샨테가 아니라 크리샨테에게 팔짱이 끼어진 실더를 보고 있었고, 아이리안은 다소 실망하며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긴, 그의 손에 닥친 문제와 비교하면 예정에 없던 저녁 식사 정도는 매우 사소한 문제였다.
코트를 가림막 삼아 치유 마술을 썼음에도 그의 화상 입은 오른손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