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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리안은 의식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각성을 앞둔 기묘한 부유감. 아이리안은 천천히 호흡했다. 그리고 실더가 '자유 시간' 동안 그의 말을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목은 여전히 붙어있고, 오른손도 딱히 이상은 없군. 일상적인 뉴스를 보는 듯한 단조로움 속에서, 아이리안은 아주 잠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물러터져서는.

 

아이리안은 정신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을 떨쳐냈다.

아이리안은 눈을 떴다. 

 

 

 

4.

 

아이리안은 휴대폰 화면을 보고서야 자신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더는 그 사실─마스터가 서번트를 방치하고 있었다는─에 분노를 토해내는 대신, 장대한 선언과 함께 룸서비스 청구서를 내밀었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선언이었으며, 관심이 가는 메뉴를 하나씩 시켜본 것이 분명한 청구서였다. 마음대로 하라면서요? 말없이 청구서를 훑는 아이리안에게 실더는 뾰로통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랬지. 아이리안은 시원스럽게 그 모두를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더럽고 힘든 일 많이 보게 될거야. 버틸 수 있겠어?"

 

"흥. 걱정 말아요. 마스터의 말대로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더럽고 힘든 일이 없게 하면 그만이에요."

 

"세상 일이 모두 마음대로만 되면 좋겠지만 말이지."

 

 

소녀의 콧방귀와, 남자의 말소리와, 서로 다른 보폭에서 유래되는 발소리.

성배전쟁의 첫 날.

형체 없는 흔적을 남기고 그들은 방을 나섰다.

 

 

 

5.

 

아이리안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아이리안은 자신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는 않겠다는 실더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고, 그 결과 계획이 어그러졌어도 실더를 탓하지 않고 겸허히 수용했다. 일정과는 다르게 인적 드문 공터가 아니라 사람이 가득한 카페에 오게 되었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글자 그대로 '끌어모으고 있는' 소년에게 실더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며 옷깃을 잡아당겼을 때도 아이리안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마스─ 아저씨, 저한테 베풀어주신 '친절'의 반 만이라도 다른 사람한테 베풀어보세요!"

 

 

하지만 실더가 그를 부르는 명칭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이리안은 황당한, 반쯤은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아저씨?"

 

"그래요. 아저씨!"

 

"이봐. 네가 나보다 어른이라며. 그런데 이게 무슨 막말이야?"

 

"겉보기 나이로는 제가 어리니까 상관없어요. 아무튼! 도움이 필요해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에요?"

 

"글쎄. 현지인들도 가만히 서 있는데 내가 오지랖 넓게 도와줄 필요는─"

 

"못됐어요, 정말!"

 

 

실더는 톡 쏘아붙이고는 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등을 돌렸다. 엄밀히 말하면 너무 세게 돌렸다.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실더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고는 왼손으로 실더의 오른쪽 어깨를 받쳐주었다. 잠시 놀란듯 눈을 크게 떴던 실더는, 곧 누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아요? 하는 표정으로 아이리안을 쏘아본 뒤 소년에게로 달려나갔다.

 

아이리안은 달려가는 실더를 제지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비켜선 채, 아이리안은 소년에게 다가가는 실더와, 실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는 소년을 바라 보았다.

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눈동자를 가진, 금발벽안이라는 조어를 그대로 구현한듯한 소년.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선 실더. 실더가 무어라 소년에게 말하는 듯 했고, 소년은 실더의 말을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고개를 까딱였다. 청력을 강화하려던 아이리안은 곧 그것을 포기했다. 만약 적이거나, 수상한 사람이라면 실더가 먼저 알아차렸을 테니까. 아이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관광 안내 책자를 꺼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다음 순간, 아이리안은 지근거리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이리안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 보았다.

많은 변화가 있던 건 아니었다. 소년의 앞에 있던 실더가 곧바로 그의 앞에 와서 섰다는 것만 제외하면.

 

 

"뭐야, 신나게 뛰어가놓고선."

 

 

실더는 잠시 주저하는 듯 했지만, 한번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수는 나중에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한가롭게 있을 때가 아니에요, ……'마스터'!"

 

 

짧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는 그 단어에 아이리안은 지금까지의 한가로움을 깡그리 잊었다. 아이리안은 곧바로 그녀의 시선을 눈으로 따랐다.

실더가 바라보는 대상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 그녀와 대화를 하던 소년이었다. 언제 주문했는지 프라푸치노를 손에 든 소년은, 마치 실더의 경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한가로이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실더의 모습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무 적의도 전조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이리안은 혀를 찼다. 왜 진작에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아이리안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눌러버려. 여기 사람들. 영혼들이 복종했다. 형체없이 허공을 떠돌던 혼들이 내려와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간단한 암시 대용이다. 실더로부터 그다지 긍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아이리안은 왜 하필 사술을 썼는지 해명하는 대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귀한 분 같으신데 수행원도 없이 몸소 이런 곳에 커피를 사러 오다니. 요새 높으신 분들의 가치관이 조금은 달라진 모양이지?"

 

 

소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닌데. 옛날 사람이라 아무래도 뭐가 이것저것 달라져서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에요."

 

 

깔끔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평범한 높으신 분이 아니'라고, 아이리안의 숨겨진 질문에까지 동시에 답하는.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지만, 아이리안은 아, 그러셔? 라는 식으로 비꼬지는 않았다. 애초에 영령을 상대로 하기엔 조야한 함정이다.

아이리안은 말했다.

 

 

"그렇게 순순히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이번에도 소년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딱히 거짓말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군."

 

 

아이리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실더가 소년이 일반인이 아님을 눈치 채고 곧바로 마스터인 그에게 다가온 뒤였으니까. 오기가 센 영령이 아닌 이상은 굳이 그의 질문을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년이 말했다.

 

 

"지금 저를 경계하고 계신 건가요?"

 

 

피차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이리안은 진솔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건가?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저를 경계하는 건가요?"

 

"성배전쟁에 참가한 마스터에게는 서번트의 능력을 파악하는 특권이 있다고 하더라고. 지금 나도 내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이 대충 뭘 할 수 있는지 보이고 있지. 그런데 너는 그런게 전혀 보이지 않거든."

 

 

물론 아이리안은 바로 앞에 있는 서번트, 실더의 마스터였다. 따라서 다른 서번트를 보더라도 실더에게서 알 수 있는 만큼의 정보는 얻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소년은 달랐다. 아이리안은 소년이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넘어 무슨 클래스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눈 앞의 서번트. 실더. 보통의 성배전쟁에는 소환되지 않는 엑스트라 클래스. 대치중인 소년. 정식 마스터인 그가 어떠한 정보조차 알아낼 수 없는, 정규 서번트인지조차 알 수 없는 서번트.

비록 다른 성배전쟁에 참가해본 적은 없었지만, 아이리안은 이 상황이 정상적인 성배전쟁의 궤도에서 한참을 벗어난 상황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초보적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굴리면서, 정작 자기는 발 쭉 뻗고 자고 있단 말이지. 아이리안은 그에게 이 성배전쟁에 대해 의뢰한 시계탑의 모 인사에게 다시 한 번 저주를 퍼부었다.

그 때 아이리안은 방울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저기…… 마스터.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저 분, 그렇게 나쁜 분 같지는 않아요.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주세요.」

 

 

아이리안은─정신적으로─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강아지를 마주친 고양이마냥 군 건 네 쪽인거 같은데.」

 

「고, 고양이……?!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럴 농담을 할 때가……」

 

「알아. 그 정도는. 그냥 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그리고 아이리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실더가 아닌 소년에게.

 

 

"아예 탁 터놓고 물어볼까. 너는 대체 '뭐'지?

 

 

그들이 염화를 나누는 동안 생겼던 공백에는 신경쓰지 않는듯, 이번에도 소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합리적인 의심이에요. 음……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돼요. 당신들이 제게 있어 배제할 대상이 되지 않는 한, 저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적수조차 되지 않는다는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꿍꿍이지?"

 

"저는 당신들에게 있어 적이 아니다. 당신들 또한 저에게 있어 배제할 대상이 아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있어 경쟁자가 아니다. 이 세 가지는 현재를 기점으로 거짓 없는 명제에요. 이게 사실이라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요?"

 

 

아이리안은 침묵했다. 소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리안은 소년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아이리안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소년을 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리안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상자 안에 정말로 고양이가 들어있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소년이 고양이가 있다고 대답하든 강아지가 있다고 대답하든, 아이리안은 자신이 소년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아이리안은 팔짱을 꼈다.

 

 

"거짓말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래서야 꼬리 잡기 게임이 될거 같고. 좋아. 어차피 이 쪽도 신경 쓸 일이 산더미니, 네 말을 믿겠어."

 

"고마워요."

 

"하지만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군. 네가 우리를 배제하게 된다는건, 어떤 상황이지?"

 

"당신이 선량한 시민으로 남아 있는다면 제가 당신을 배제하게 될 일은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배제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건 당신이 인류사에 이름이 남을 정도의 대악한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실더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리안은 실더와 이어진 패스를 통하여 방금 그녀가 떠올린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리안은 대답했다.

 

 

"선량? 그렇게 나랑 안 어울리는 단어도 없을거 같은데."

 

"정말 나쁜 사람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포춘쿠키의 문구 같군."

 

 

진심이었다.

하지만 실더는 노골적인 비아냥으로 느꼈는지 아이리안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맑은 보랏빛 눈에 뚜렷하게 떠오른 감정을 보며, 아이리안은 이 정도면 패스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선명한 분노.

맞잖아? 마주 눈으로 말하며 아이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실더는 눈썹을 더욱 찡그렸다. 

말 없는 대화가 부딪혀, 빗겨나, 직접 소리가 되기 직전,

 

 

"포춘 쿠키? 아, 그, 과자를 먹으면 코멘트가 든 종이가 나온다는 그 과자군요? 맛있나요?"

 

 

 

아이리안과 실더는 소년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신경전을 잊었다.

소년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세상으로 산책을 나온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아이리안은 지금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 다 의미 없는 짓이 아니었을까 하는 허탈한 감정에 빠졌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두어번 젓고 아이리안은 말했다.

 

 

"직접 백화점에 가서 먹어보지 그래. 너 정도 외모라면 아예 점원이 공짜로 상자째로 건네줄것 같은데."

 

 

반 진심, 반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이번에는 아예 눈을 빛내며─아이리안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말했다.

 

 

"추천해주시는 건가요? 그럼 조만간 먹어봐야겠네요. 생각지도 않은 것에서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죠."

 

"……그래. 마음대로 해."

 

 

아이리안은 소년이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곧바로 백화점을 향해 떠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화점으로 향하는 대신 소년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음. 어지간하면 이런 말은, 불공평하니까 해주지 않는데. 당신, 이러다가 정말 위험해진다구요? 꽤나 많이 달라붙어 있어서. 교회든 절이든 가서, 고해 성사라도 하는 걸 추천해요. 명복도 빌어주면 더 나을 거구요. 보통 사람들도 대부분은 그런 걸 어느 정도 달고 살지만, 당신은 좀 많이 독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아이리안의 등 뒤를 바라 보았다. 의도를 담은 것이 분명히 느껴지는 동작이었고, 때문에 아이리안은 소년이 무엇에 대해 언급했는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망령. 원혼. 망자─ 그가 죽이거나, 강제로 끌어내어 짓밟은 영혼들.

원망. 분노. 공포. 실더를 소환한 이후에는 굉장히 작아졌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들려오는 목소리들.

아, 지긋지긋하기도 하지. 아이리안은 말했다.

 

 

"아, 그래, 명복. 좋은 말이지. 그런데, 그런걸 해준다고 뭔가 달라지는 게 있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별로 그 놈들한테 좋은 일은 해주고 싶지 않거든."

 

 

목소리가 거세졌다. 장막 너머로 들려오는 폭포 같은 목소리에 아이리안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희미하게 찡그린 것이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니까요. 여기서 만약 당신이, 단명 따위 상관 없다고 말한다면 조금 화날지도 모르구요. 저 뿐만 아니라, 아마 다른 이런저런 것들이."

 

"신경써줘서 고맙군. 심사숙고해보지."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가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좋은 말을 들었으니 나도 그 쪽에게 뭔가 좋은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아는게 아무것도 없군. 그러니 진부한 말이지만, 그냥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정도로만 해두지."

 

"고마워요."

 

 

조금 사이를 두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이.

 

 

"당신이 무사히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길 바랄게요. 그리고."

 

 

이번에는 다소─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기는 했지만─굳은 표정으로 소년은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바닷가에는 가지 않는 게 좋아요. 특히 밤이라면요."

 

 

아이리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충고 고맙군. 왜 네가 그런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적의를 숨기시지도 않는 건가요?」

 

「귀찮아. 안할래.」

 

「당신은 정말……!」

 

"제 역할은 '여러분이' '안전하게' '목표하는 것을 이루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니까요. 바닷가는 어디까지나 일각이에요. 지금 거기를 폭파시킨대도 딱히 달라질 건 없어요."

 

 

만약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면 아이리안은 이번에는 정말로 실더에게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말에 담긴 내용에 실더는 놀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 보았고, 아이리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봐. 진짜 그 바닷가에 심각한게 있다는 거야?"

 

"그래요. 만약 여러분이 너무 늦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서로 겨뤄서 이겨 준다면, 또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사실 그것도 확률은 반반이에요. 저로선 가능하면 여러분 전원이, 최소한 목숨은 멀쩡한 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라고 있지만. 위험해요. 이 곳은."

 

 

소년은─ 이번에는 실더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물론, 성검사 같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나름 승산은 있겠지만요."

 

 

아이리안은 표정을 굳혔다.

공포. 절망. 경악.

그의 것이 아니었다. 패스를 통해 전해진, 실더의 감정.

아이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떴다.

 

 

"하긴, 서번트만 해도 최소 일곱명이었지? 다양한 곳의 다양한 전설을 가진 영웅 나리들이 있겠군."

 

"네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에 비하면 굉장히 소박한 동작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여러분은 일단은 열심히, 해야 할 일을 해 주시면 되는 거에요."

 

"서로 죽고 죽이는 일 말이지."

 

"당신의 선택 아니었나요?"

 

"아, 그야 물론."

 

"그렇죠?"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으럼, 저도 일이 있어서. 아까, 도와주겠다고 한 호의는 고마웠어요."

 

 

대단한 시각적 변화는 없었다. 그저 다음 순간,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아이리안은 소년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팔짱을 낀채 소년이 말해준 것과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연결시켜 보았다. 명백히 이상한 성배전쟁.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두루뭉술한 태도의 소년이 유이하게 직접적으로 언급한 정보 중 하나─해안가. 해안가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이 기묘한 성배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아이리안은 알 수 없었다. 물론 소년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조차. 그저 해안가로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흘린, 소위 '떡밥'일지도 모른다. 아이리안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참 실없는 영령일거라고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정했다.

 

일단은─.

 

아이리안은 시선을 내렸다. 소년이 있던 곳에서 그의 바로 앞으로. 실더에게로.

 

 

"그래, 성검사가 있다고 하는군. 참 기묘한 인연인데."

 

 

실더는 얼어붙은 것처럼 침묵했다.

 

아이리안은 상대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조차 모르는데 그렇게 공황상태에 빠졌느냐고 실더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추궁하려면 소년─지금은 이 자리에 없지만─을 추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소년이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정보, '성검사.'

아이리안은 소년이 왜 하필 그 단어를 입에 담았는지, 만약 이유를 알고 담은 것이라면 어째서 담았는지, '어떻게' 그 단어가 실더에게 효과가 있다고 알아차렸는지를 밝혀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번트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마술사가 덤비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상대를 해야 할 실더는 패닉에 빠져 얼어붙었다. 

때문에 아이리안은 그저 덮어두는 것을 선택했다.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가 달랐으므로.

 

 

「어떻게 할 거지? 완전무결한 기사 나리. 갤러해드 양.」

 

 

실더의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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