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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묻겠으니, 대답하세요."

 

 

옥구슬이 공명하듯 깨끗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나의 마스터인가요?"

 

 

 

 

2.

 

하늘은 가을 못지 않게 맑았으나 기온은 지금의 계절을 널리 알리기라도 하려는듯 활개를 쳤다. 평소 추위를 잘 타던 사람들은 두꺼운 옷 위에 귀마개와 목도리를 둘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따뜻한 음료로 스스로를 달랬다. 카페들이 즐비한 거리에서는 때 이른 캐럴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들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완연한 12월의 홍콩.

아직은 해를 보내는 섭섭함보다는 연말을 맞이하는 기쁨이 더 큰 그 풍경을 선글라스 너머로 바라보며, 풍경 속에 슬그머니 섞여든 이방인─아이리안은 생각했다. 망할 시계탑의 얼빠진 늙은이 같으니.

 

잠시 동안, 아이리안은 마음속에 그려두었던 일정표를 떠올렸다. 의뢰를 마친 아이리안은 집─다른 사람들은 저주받은 탑이라고 생각하는─에서 숙면에 빠지거나, 벽난로 옆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독서를 하거나, 집안을 떠도는 영혼들이 공연하는 오페라를 보는 등 다채로운 일정으로 표를 가득 채워둔지 오래였다.

그렇다. 많은 일을 할 예정이었다.

 

집 안에서.

 

자택 안에서.

 

하지만 아이리안은 의뢰를 받았고, 지금 집과는 머나먼 이국, 홍콩의 스타벅스 안에 앉아 있었다.

아이리안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저주 받을 시계탑의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이리안은 불평을 깡그리 잊기로 했다. 아무튼 의뢰를 수락한 것은 아이리안 자신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어 직접 홍콩까지 온 것도 아이리안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였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해봐야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리안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데에 시간을 더 쓰지는 않았다. 아이리안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생각했다.

 

첫째, 홍콩에 갑작스럽게 성배가 나타났다. 어떠한 전조도 예고도 없이.

둘째, 성배가 나타나기 전 토지관리자는 행방불명되었다.

셋째,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손에서 느껴졌던 통증은 보나마나 령주가 원인일 것이다.

 

아이리안은 장갑을 벗어 령주를 확인하는 대신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프랜차이즈의 몇 안되는 장점이라고 해야할지, 홍콩의 커피는 영국의 커피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의 명제는 참이든 거짓이든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령주가 오른손에 깃들었다는 현상은 홍콩에 오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이미 불변으로 굳어진 사실이었다. 언제 확인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거짓이라 해도 그 또한 상관 없었다. 오히려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서도 홍콩을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아이리안이 집중해야 할 문제는 앞의 두 개였다. 성배의 출현. 토지관리자의 실종.

 

만약 토지관리자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홍콩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시계탑에 보고─또는 은폐─했을 것이고, 시계탑에서는 추이를 보고 성배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미 일어난 일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토지를 관리해야할 마술사는 사라졌다. 시계탑은 홍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시계탑의 모 인사는 아이리안에게 의뢰했다. 어째서 성배가 출현했는지, 홍콩에 시계탑에 보고되지 않은 모종의 마술행위가 있었는지에 대한 추적. 요컨대 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감사(마술적인 감사를 포함하여)와 다른 점이라면, 아이리안은 일련의 행위에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고, 위험성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으며, 때문에 보수를 위험수당을 겸하여 선불로 두둑하게 지급받았다는 것이다. 아이리안은 잠시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왜 수락한 것일까. 성공 확률도 낮고, 위험성만 쓸데 없이 높은 일인데.

 

대답은 간단했다. 하라면 해야지. 하기 싫어도. 비록 지금은 시계탑을 나온 프리랜서라 해도 아이리안은 집행자였다.

 

아이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에 있는 동안 전(前) 토지관리자의 자택 위치도 파악했으니 더 앉아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3.

 

더 이상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토지관리자의 자택은 황폐했다. 휑한 바닥에 떨어진 팔 한짝만이 이 곳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리안은 벽에 걸린 액자로 시선을 돌렸다. 전 토지관리자이자, 세간에는 미망인 갑부로 알려진 프리실라 랭과, 열서너살은 되었을까 싶은 남자 아이.

말없이 액자를 응시하던 아이리안은 곧 몸을 돌려 저택을 나섰다.

 

 

 

 

4.

 

추적의 술은 효과가 없었다. 육신은 고사하고 영혼조차 추적되지 않았다. 굳이 아이리안 정도의 강령술사가 아니더라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한 결과였다. 토지관리자는 사망했다. 그리고 영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당연히 귀결되는 의문에 아이리안은 생각했다. 그걸 지금부터 알아내야겠지. 아이리안은 시약 뚜껑을 닫았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아이리안은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살펴보았다. 3획의 붉은 문양은 아이리안의 거의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위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아이리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환상통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령주. 마스터가 서번트에게 행사할 수 있는 3번의 절대명령권. 성배전쟁에 참여한 마스터의 상징.

과거 혹은 미래의 지체높은 영령들마저 구속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감탄이 나올만한 각인이었다.

아이리안은 그것에 감탄할 수 없었다.

 

일견 서번트에게만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령주는 아이리안에게도 절대적인 의미를 가졌다. 성배전쟁에 참가했다는 증거이자, 아이리안이 일을 대충 끝내고 집에서 발을 쭉 뻗고 쉴 수 있는 휴가가 사라졌다는. 어느 쪽이든 그다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이리안의 표정은 잠시동안 잃어버린 휴일에 대해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리안은 손을 내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리안은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했다. 조금 전은 그저 약간의 아쉬움일 뿐. 홍콩에 내린 순간부터 성배는 아이리안을 마스터로 선택했다. 아이리안은 성당교회에 달려가 령주를 적출하는 대신─

 

 

"네 차례야."

 

 

아이리안은 가볍게 등뒤에 손짓했다. 아무것도 없던 실내에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있던 물건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쓰러졌고, 드러난 빈 바닥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그림이 그어졌다. 만약 그 자리에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있었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에 아이리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없었고, 아이리안은 팔짱을 낀 채 냉정한 표정으로 바닥에 그려지는 소환진을 응시했다.

 

 

"좋아."

 

 

아이리안이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아이리안은 집 안에서 유일하게 미동도 않던─정확히는 그러지 않게 명령한─성유물을 흘끔 바라 보았다. 보수의 일부로 지급됐던, 평범한 돌조각으로 보이는 무언가. 이것이 무슨 영령을 불러올지 아이리안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조사하지 않았던 탓이다. 아이리안은 아직 소환되지도 않은 영령의 진명을 마음대로 정해놓았다가, 어긋나는 바람에 머리를 감싸쥐게 되는 일은 피하고자 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아이리안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주문을 영창했다.

 

 

 

 

5.

 

오색빛깔의 빛의 티끌이 모여 형체를 만들었다. 마력이라는 베틀에서 짜여진 존재는 현실에 녹아들듯 조용히 소환진 위에 강림했다. 아이리안은 가녀린 어깨 위를 미끄러지는 선명한 산호빛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뽀얀 우윳빛 피부. 아직 어린 티가 남은 얼굴에는 고양이 같은 이목구비가 짐짓 새침히 자리잡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소녀는 완전히 내려섰다. 소녀의 키는 작았다. 아이리안의 쇄골깨에나 올까말까한 신장이다. 그런 소녀의 등 뒤에 소녀와 비교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방패가 매여 있었다. 방패? 아이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방패는 갑옷 다음으로 기본적인 방어구였으며, 다양한 보구를 가진 영령이라면 방패를 가져오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굳이 보구가 아니더라도 무장으로서는 충분하다. 

방패를 사용하는 영령이라. 아이리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 속에서 방패를 쓰는 인명을 떠올려보았다.

 

그 때 소녀가 눈을 떴다.

 

큰 눈 안에 자리잡은 한쌍의 자수정. 보랏빛 눈이 붉은 눈을 똑바로 담았다.

 

아이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리안은 그저 소환진을 그릴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소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침묵.

잠시 눈앞의 사람─마스터임이 분명한─을 관찰하듯 말없이 아이리안을 바라보던 소녀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묻겠으니, 대답하세요."

 

 

옥구슬이 공명하듯 깨끗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나의 마스터인가요?"

 

 

아이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소환 과정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에게서 이어진 패스에서 마력의 흐름을 느낍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마스터로 인정하겠습니다."

 

 

소녀의 어투는 거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했다. 꽤나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되겠군. 아이리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리안이 느낀 감상은 그것이 다였다. 애초에 아이리안은 서번트가 딱히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해도 별로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실 아이리안에게 있어서는, 서번트가 거꾸로 물구나무를 하며 걸어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성배전쟁을 진행하는 데에 크게 문제만 되지 않는다면.

소녀가 말을 이었다.

 

 

"우선 진명을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겠지요. 나는 서번트…… 어라……?"

 

 

소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소녀는 마치 연설문을 도중에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이리안을 바라 보았다. 아이리안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설마 진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소환 과정엔 별 문제가 없었다. 아이리안이 가볍게 던진 말대로 누군가가 개입하는 일은 없었으며, 중간에 폭발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하지만 아이리안은 곧 그 생각이 지나치게 온건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실더에요? 어째서?!"

 

 

옥구슬이 굴러가듯 청명한 목소리.

꽤나 골치 아픈 관계가 되겠군. 아이리안은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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