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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달그락

늘 들어오던 자명종 알람소리와는 사뭇 다른 소리였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그릇 부딪치는 소리인지 몰랐다.
정말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부스스한 모습으로 침대를 떠났다.
하얀 벽, 두꺼운 이불,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는 방이었는데도, 평소와는 달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하얀 벽들뿐이었다. 정신병원이 생각나게 만드는 벽, 그것들뿐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내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 음식의 냄새였다.

하지만, 누가 음식을?...

두서없이 떠오르는 머릿속을 부여잡은 채, 부엌에 들어선 나는 패닉상태로 돌입했다.
집에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게 보이는 정체불명의 귀여운 곰돌이 앞치마를 한 소녀, 소녀가 있었다.

음식을 하는 것이 마냥 즐거운지, 꼭 소꿉장난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쩌면 어린아이 일지도 모르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벽에 기대어 선 채, 나는 멍하니 있었다.

“일어났어요?”

소녀의 전음이었다. 아니, 전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음이 아니었다.
전음과 같은 음성, 그것은 뇌가 아닌 귀로 그렇게 들리고 있었다.

내 청신호들은 소녀의 음파를 잡아내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나에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니 어쩌면 나에 눈동자를 읽어내려 갔을지도 몰랐다. 소녀는 빙긋 웃었다.

“말 할 수 있어요. 어제는 방법을 잊고 있었을 뿐이에요.”

소녀의 믿기 힘든 두 번째 말이었다.

결국 믿건 안 믿건 간에 그것은 나에 선택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또 다른 나는 그것을 한 쪽에 믿음이란 이름으로 쌓아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침에 우체통에 이런 게 있었어요.”

소녀는 자신과 같은 하얀 색의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분명 저것은 정기적으로 내게 오는 돈임에 틀림없었다.
어딘가로 무기한 여행을 떠난 부모라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작은 생활비였다.
소녀는 그것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어서 받아요. 그리고 아침 먹어요.”

아침을 먹는 것은 내게 굶기보다 드문 일이었다. 아침은 으레 적으로 굶기를 생활해 왔던 나이기에 아침이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빵이 아닌 밥이라니..

내게 밥은 호화스러운 음식에 불과했다.
내 의식이 돌아와 있을 때는, 나는 이미 그 호화스러운 음식을 식탁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내 인생의 모순점이 될 것 같았다.
아침은 산뜻한 풀밭이었다. 소녀는 너무도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좋아 풀밭이지, 고기 하나 뛰어다니지 않는 밥상 앞에서 물리도록 먹은 토스트를 떠올리는 나는 역시 모순된 인간이었다.

나는 식탁위에 작은 그릇들 안에 자분이 담겨져 있는, 모든 음식들을 위장 속에 치운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맛있었어요?”

소녀는 금세 나를 따라 부엌을 나왔다.

“응. 잘 먹었어. 고마워.”

소녀는 나에 별 것도 아닌 말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소녀의 매력인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가 기뻐하며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조금 늦어버린 학교를 생각하다가 귀찮아져버렸다. 언제부터 학교 가는 것에 연연했던 나인가.. 하는 생각 끝에 소녀가 가는 날까지만 집에서 쉬는 것으로 마음을 굳혀버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또 나에 또 다른 나는 이미 나를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여전히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햇빛은 구름에 가리어 분명 뜨긴 했을 텐데, 밝은 그 본연의 빛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밖의 우중충함과 대조적으로 나에 집은 밝았다. 아니 병적인 생활을 너무 극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나는 멍하니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이 유일한 내 취미였고, 특기였으며, 장기이기도 했다.

소녀는 그런 내 모습 부분 마다 끼어들어왔다.

“식물, 화초 사러가요.”

“화초?”

소녀는 나에 손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녀의 손에 이끌려 화원에 갔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작은 우산으로 나와 소녀는 길을 걸었다.

화원까지 가는 길에 어떤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지만, 심심하다던가. 서먹하다던가 하는 느낌은 전혀 피어오르지 않았다.

집에서 약 5분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작은 화원에 도착 했을 때는, 적은 양의 비였지만 바지 밑단을 적시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인지 흠뻑 젖어 있었다.

그것은 소녀의 상황도 마찬가지 이었던 모양이다. 소녀의 신발은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화원의 문을 열자 방울 소리와 함께 주인의 인사가 들려왔다. 소녀는 고개를 까딱까딱 거리더니, 앞에 전시되어 있던 작은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선인장, 산새베리아, 개은죽....

여러 가지 식물들이 아기자기한 화분 안에 살포시 담겨있었다.
형형색색의 화분과 싱그러운 푸르름을 가득 머금은 잎사귀들까지 화원 안은 싱그러움을 방울방울 지어 머금고 있는 숲속과 같았다.

내가 화원을 구경하는 동안 소녀는 두 세 개의 화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이거 사가요. 집에 어울릴 것 같아.”

소녀는 품에 꼬옥 화초를 앉은 채, 종종걸음으로 화원 밖으로 나갔다. 물론 계산은 내가했다. 뭐 너무도 뻔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맨몸으로 쓰러져있던 소녀에게 돈이 있을 리가 전무했다.

그렇게 화초를 사가지고 집으로 어찌저찌 하여 돌아왔다. 역시 돌아오는 길에도 한마디의 대화도 오고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은 나에 착각이었던 것일까?

화분은 하얀 벽에 투명하게 밖을 향해 뚫려 있는 창문 앞에 전시되었다. 하얀색 정신병원과 같던 나에 작은 창고는 어느 사이엔가 푸르름이 물씬 풍겨오는 봄의 전시장이 되었다.

“어때요? 한결 좋아 보이지 않아요?”

소녀는 만족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했다. 아니 이미 벅차오른 상태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사실을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일 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소녀의 기뻐하는 표정과 미묘하게 섞이고 있는 나에 혈액 그 두 가지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당신은 내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이름이 뭐예요?”

“강훈. 최강훈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냥 보통 여어, 이봐 라고들 부르던데.”

웬일인지 나는 본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소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 본능이었고, 또 다른 나의 본능이기도 했다.

아니, 꼭 알려줘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색다른 그런 느낌...
무엇이라고 딱히 명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분에 물 좀 줄래요? 그리고 같이 점심 먹어요.”

부엌으로 들어가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나는 화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건 나에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화초들을 향해 갇혀있던 햇빛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은 형상에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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