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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

날개 2014.01.21 23:58 조회 수 : 13

WARNING
준비물 : 고데기, 쓴 사람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길 손(고데기로 반드시 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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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달이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모든 것이 잠든 고요함 속에서 달빛 부서지는 소리가 손에 잡힐듯 했으며, 땅은 눈을 입은 듯 하얗게 빛났다. 그 백색이 얼마나 짙은지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소녀는 풍경이 어째서 이렇게 창백한 것인지 의아하게 여겼다. 소녀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녀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차갑고 둥근 달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지러진 곳 없는 완연한 보름달. 달에서부터 뚝뚝 흘러넘치는 빛이 모든 것들을 덮고 있었다. 소녀는 한없는 생경함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 한 잔의 물이 식었을 무렵 소녀는 고개를 내렸다. 이번에는 달빛 대신 널리 펼쳐진 꽃밭이 소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달빛에 젖어 푸르게 빛나는 흐드러지게 핀 꽃. 이따금 부는 미풍이 꽃잎과 대를 부드러이 흔들었다.

  문득 소녀는 그 꽃들 속에 섞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동시에 그녀가 이 곳에 온 이유를 되새겼다. 소녀는 그 무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곧 꽃밭에 누워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소녀가 알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달빛 때문에 유독 하얗게 보인다는 것만 제외하면.

  소녀가 그의 옆에 있다면, 남자 역시 소녀의 옆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녀는 살짝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소녀는 다시 달을 보았다. 그것은 빛을 밝히는 등불이요 휘장이었다. 소녀는 남자를 보았다. 살며시 닫힌 흰 눈꺼풀이 소녀가 남자를 '마주 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작정인가. 소녀는 입을 열려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흘러나왔을 터였던 그 말은 갑자기 사라졌다. 소녀는 자신이 입을 다물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소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금빛 눈. 형태가 좋은 입술에 언제나와 같은 온화한 미소가 맺혔다.


  "무슨 일……?"


  '오야'가 아니라 '무슨 일'이었다. 그것은 소녀가 그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소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그에게 말했다.


  "네가 보이지 않기에 찾아 왔을 뿐이다. 아, 네가 방을 비우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지적은 하지 말거라.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남자는 그럼 어째서 왔느냐 묻지 않았다.


  "당신도 이곳이 마음에 든 걸까나……?"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던 소녀는 다시 입을 앙다물었다. 소녀는 생전에도 제 2의 생(비록 임시지만)을 얻은 요즈음에도 진심만을 말했으며, 거짓말에 대해서는 입 속으로 굴려본 적 조차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방식을 깨어버리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다. 소녀는 조금 전 꽃밭을 봤을 때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소녀는 결국 대답했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노라. 확실히 이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이 도시에서 본 건 처음이구나."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불어온 실바람에 머리카락에, 어깨에, 등에 붙어있던 꽃잎이 하늘하늘 가볍게 떨어졌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균형 잡힌 꽃의 색깔의 입술이 약간 사이를 두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떨 때는 달이 없는 밤처럼 잔혹하게 그녀의 마음을 찌르던 목소리지만, 지금은 부드러이 소녀를 감싸듯 소녀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평소보다도 달콤하고, 상냥하고, 따뜻하게. 갑자기 어째서일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아아, 그 쪽에서는 안 보이는구나…."


  남자는 손을 살짝 꽃의 바다 속에 담갔다. 유려하게 헤엄치던 손은 이윽고 묵직한 술병과 잔을 꺼냈다. 남자가 보여주듯 들어올린 그것들을 소녀는 유심히 응시했다. 소녀는 그것이 남자가 평소 마시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마시는 술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가 꺼낸 술은─ 정확히는 술병은 솜씨 좋게 쓰인 이국의 글씨로 덮여 있었다.


  "이것은?"

  "전통주. 꽤 좋은 게 있어서, 가져왔어."

  
  그제서야 소녀는 꽃향기와는 다른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향기롭고 맵싸한…… 술의 향기다. 소녀는 손을 들어 코를 살짝 가렸다. 본디 소녀는 술에 강하지 않았으며 당연히도 그것이 독한 술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소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남자가 든 병에 표시된 알코올 도수는 꽤 높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이 향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주변에 가득한 꽃 때문이었으리라. 소녀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으나 어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녀는 몸을 뒤로 당겼다.


  "머리가 아프구나."

  "당신은 술에 약했지…."


  소녀를 보며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는 기품마저 느껴지는 동작으로 다시 병을 내려놓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중천에 머무는 빛을 채운 술에 담듯 들어올렸다. 만족한듯 바라보다가, 입가에 가져가 흘려넣는다. 마치 물을 마시듯 흰 목울대가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녀는 문득 남자가 한 가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냐."


  입술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소녀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토라진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소녀는 그녀의 눈이 살그머니 남자 쪽으로 향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남자는 웃었다.


  "당신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둘까."


  남자는 의미 깊어 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를 아이 취급하는 미소가 명백했다. 지내온 세월로 따지면 누가 우위인지는 명백하거늘! 소녀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 한 곳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떠오른 부당한 취급에 대한 항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 그것을 눌렀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면 내가 이 곳에 더 있을 이유는 없구나. 나는 이만 돌아가겠노라."


  소녀는 새침하게 몸을 돌렸다. 소녀를 덮은 은사가 잠깐 유려하게 흩어졌다가 다시 소녀를 감쌌다. 소녀의 발 밑에서 푸르게 빛나던 꽃잎이 소녀의 푸른 의복과 엉기다가…… 그 안에 삼켜졌다.




  /1.

  소녀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하늘과 꽃밭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그녀의 시야는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꽃들을 담고 있었다. 하늘은 온 데 간 데 없이, 오직 꽃들만. 다리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넘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정.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을. '직전'인 것은 그녀를 지탱하는 다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뒤에서 뻗은 남자의 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소녀의 시야는 다시 빙글 변했다.

  밝게 내리쬐는 달빛, 별이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그리고.
  소녀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신장 차이로 언제나 소녀는 남자를 올려다 보아야 했지만 지금의 그것은 이 때까지 그랬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 전까지는 서 있거나 앉아서 고개를 꺾어 남자를 보았다면, 지금은 땅에 등을 맞대고…… 똑바로, 남자를 마주 보는 모습이다.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충격은 좀 늦게 찾아들었다. 소녀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소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은 탓이다. 화르륵, 하는 소리가 난 것만 같다. 소녀는 얼굴이 겉잡을 수 없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놓, 놓아라! …아니, 비켜라!"


  소녀는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바동댔다. 하지만 체구의 차이에 힘의 차이까지 더해져, 소녀의 시도는 오히려 소녀를 그의 팔 안에 단단히 붙들어매는 데에 일조했을 뿐이다.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한 남자에게, 소녀는 다시 소리쳤다.


  "그대는 역시 심술궂은 사람이로다!"


  남자는 쿡쿡 웃었다.


  "실로 냉정한 판단. 후후… 당신 다워."


  배부른 고양이 같은 웃음이었다.
  고양의 앞의 쥐, 혹은 늑대 앞의 양. 문득 떠오른 글귀에 소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바로 지금이 그런 상황─물론 후자가 그녀고 전자가 남자인 상태로─이었다. 게다가 남자에게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소녀는 자꾸만 불이 붙으려는 머릿속을 애써 다잡으며 어떻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하지만 소녀가 애써 꺼뜨리려는 불씨에 남자는 다시 기름을 부었다. 소녀를 감쌌던 팔에 힘을 뺀─ 하지만 한층 농밀하게 소녀를 안은 남자는 소녀의 귓가에 고개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옭아매듯, 속삭였다.


  "……Mon chou chou, Sherra."


  살짝 쉰 듯 가라앉은 목소리.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느껴지는 파급력이 다른 법이다. 그것이 듣는 사람의 이름, 즉 그 사람의 자아정체성을 결정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그동안 부르지 않던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는 사실은 소녀에게 그동안 예상하던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소녀─ 시에라는 이번에야말로 펑 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으니까. 시에라는 지금까지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냉정함을 끌어모아 말했다. 시에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이 모자랐지만.


  "또, 또또또또, 시, 시, 시, 실없는 소리를…."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물들어 있던 아름다운 미소가 좀 더 깊어진다.


  "술을 마신건 나인데, 어째서 당신의 얼굴이 이렇게 붉어진 걸까나……?"


  그렇게 말한 남자는 문득 한쪽 손을 시에라의 어깨 밑에서 뺐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윤곽을 따라 그리듯 시에라의 얼굴을 덧썼다. 그녀의 턱에서부터 볼까지,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시에라는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함에 살짝 몸을 떨었다. 쭉 올라올 것만 같았던 손가락은 그녀의 눈 밑에서 멈췄다. 엄지로 광대뼈 부근을 매만지며 남자는 말했다.


  "게다가 이렇게, 뜨거워져서……."


  시에라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윽. 나도 아는 사실을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아름다운 시에라, 그건 대답이 되지 않아."

  "무읏……. 또, 또 그런……."

  "아, 더 붉어졌네…."


  시에라는 입술의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정작 피해자는 말을 못하고 가해자가 저리 천연덕스럽게 구는 상황이라니.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넘어 있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시에라는 곧 분노한 신이 이곳에 벼락을 내리치지 않을까─약간은 그러길 바라며─ 생각했다. 하지만 신의 생각은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여전히 고요하게 빛나는 하늘에, 시에라는 결국 절망과 민망함과 분노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섞인 심정으로 소리쳤다.


  "너야말로, 어째서 알면서 묻는 것이냐!"

  "내가? 무엇을…?"


  시에라의 심정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남자는 여전히 미소지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라로서는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고의적인 행동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남자가 어떻게 하건 시에라는 결코 답을 입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눌러온 생각들이 정말로 폭발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시에라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행동은 언제나 시에라의 생각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목 부근에.


  "이렇게…… 하는 것?"


  시에라는 뺨을 쓸어넘기던 남자의 손이 목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피부에 닿은 서늘함에, 시에라는 언제나 옷깃으로 덮여 있던 부분이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굳이 그녀의 '지혜'를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명백한 감촉이 전해졌다.


  "……."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남자의 입술이었다. 마치 깃털 같이 내려앉은 그것에 시에라는 왜인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행동은 불가해할지언정 적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걸까, 시에라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남자는 안심했는지─ 혹은 애초에 그렇게만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지 살짝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윽."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와 시에라는 눈을 꽉 감았다. 남자는 말했다.


  "오야, 아팠을까나…?"


  시에라는 눈을 감은채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과 달리,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시에라는 그저 눈을 감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감각 중 하나가 닫히면 다른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기 마련이었다. 남자가 방금 전 깨물었던 곳 보다 좀더 위에 있는 피부를 입술로 어루만지는 것을 시에라는 보다 생생히 느꼈다. 조금 전보다 좀 더 세게 깨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혀로 윤곽을 덧쓴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행동은 마치 깨지기 쉬운 조각품에 접하듯 섬세했다. 시에라는 무의식적으로 땅 위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쥐었다 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처음 겪는 일, 처음 접하는 감촉. 향긋한 꽃내음이 모든 것과 뒤섞여 머릿속을 흐뜨러뜨린다. 남자가 부드럽게 피부를 빨아 올리자, 시에라는 거의 방어적으로 숨을 죽였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 위에 겹쳤다.


  "후후, 시에라."


  시에라의 목에 입맞춤한 남자는 작게 웃고 말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상냥하고, 무방비해……."


  그 말에 시에라는 눈을 번쩍 떴다. 남자의 말의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 똑바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 금빛 눈, 그녀와는 다른, 사르륵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 깨끗한 피부가 술의 영향인지 살짝 붉은빛을 띄었다.

  그렇지만 시에라는 남자의 행동이 그를 잔뜩 침식한 취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의 생전의 생활을 고려해본다면 그가 마셨던 술의 양은 그저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였을 터이다. 즉 남자는 이 모든 행동을 멀쩡한 정신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힘에서 그녀가 그를 이길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그 사실을 일깨우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시에라는 말했다.


  "역시…… 지독히 심술궂은 남자로다. 가히 악취미로구나."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명판결, 고마워……."


  남자는 손을 올렸다. 아직 손을 풀지 않았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시에라의 손 역시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남자는 눈앞에 끌어당겨진 하얗고 작은─그의 손에 비하여─ 손가락 끝에 입맞춤했다. 그러고 나서야 남자는 비로소 손을 풀었다.


  "끈질기구나."


  아까 그러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에라는 볼을 붉히며 말했다. 남자는 대답없이 특유의 미소로 시에라를 마주보았다. 그런 남자를 흘겨보고 시에라는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그만 주저앉았다. 풀썩. 날아오른 꽃잎이 부드러이 그녀를 감싸듯 휘날리다가 흩어져갔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 수 있겠어?"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그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느니라."


  시에라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시에라의 다리는 이번에도 주인의 기대를 배반했다. 시에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무릎을 굽혔다. 남자의 팔이 등을 받치고, 다리 밑으로 파고들어서…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가 그녀를 안아올린 것이다. 시에라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파닥였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안될까나…?"

  "그 정도는 나 스스로 마술로라도 할 수 있느니라! 내려 놓아라!"

  "사람들의 눈에 띄어버려…?"

  "인식 장해의 마술을 걸면 되는 일이 아닌가!"

  "확실히,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네…."


  남자는 드디어, 오늘 시에라가 그를 만난 이래로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라는 희망을 갖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쪽이 더 빠를거야."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시에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어버린 시에라를 보며 즐겁게 웃은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살고 있는 거점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시에라는 남자가 술과 술잔을 놓고 왔음을 지적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다시 가서 회수하면 되는 일이었으며,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이렇게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말 테니까.

  그렇지만 아까 그런 피해를 입고서는 이렇게 안겨 가다니. 시에라는 문득 조금전과는 다른 민망함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어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뜻대로가 아닌가. 그와 만난 이래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시에라는 이번만큼은 그 정도가 조금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거점에 도착할 때 쯤은 다시 설 수 있을 정도로는 기운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시에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방금 그가 했던 행동에 대한 응징을 가해도 늦지 않으리라. 시에라 본인이 느끼기에도 별로 효과는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경고만큼은 확실히 될 수 있도록 강하게 나서면 될 터였다. 시에라는 마음 속에 재차 다짐을 새기며 살짝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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