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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 2014.02.15 05:46 조회 수 : 6



  /0.


  "탈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노라."



  그렇게 말하며 시에라가 보여준 '탈 것'에 레이시안의 동공이 살짝 늘어났다. 제 그림자보다도 짙은 검은 몸체에 지면에 닿을듯 낮은 높이, 동족의 보편적인 특징과 달리 위로 열려 있는 문. 그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로 감탄이 나올 날카로운 생김새를 가진 자동차였다.



  "우와아아아…… 이, 이, 이거 어디서 본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달려가는 치아키의 모습에 레이시안은 시선을 차 전체에서 그녀에게로 옮겼다. 치아키는 무릎을 굽혀 차의 한 면을 살폈다. 바깥 형태만 보면 간단하지만, 안쪽에서는 복잡한 선을 그리는 문양이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무엇이었더라… 현계 후 얻은 지식을 더듬던 레이시안은 곧 답을 떠올렸다.



  "베르사체…… 네."

  "네에에에?"



  치아키는 기겁하여 몸을 뒤로 뺐다. 그녀는 자신의 눈길이 거기에 흠집을 내버리고 말 거라고 믿는 게 분명해 보였다. 황급히 물러서던 치아키는 결국 자신의 다리에 걸리고 말았다. "꺄아악!" 넘어지는 와중에도 차에서 떨어지려는 듯 치아키는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아얏!"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으나, 슬프게도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신의 이마를 강타한 손에 치아키는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완전히 넘어졌다.
  역시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에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말했다.



  "소환사 아이야, 다치지는 않았느냐."

  "네에, 괜찮아요……."



  치아키는 머리를 세게 젓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행여나 손이 차체에 닿을까 염려하는 듯 손을 꼭 마주 잡고 뒤로 달려왔다. 그녀는 시에라의 옆까지 와서야 다리를 멈추고 다시 차를 돌아보았다.
  그 작은 소동에 레이시안은 살짝 웃었다. 그는 시에라를 보며 말했다.



  "'탈 것'치고는 상당히 고급품이네…. 당신이 그만큼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까나?"

  "일 없느니라. 그저 이것이 네게 가장 적합할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혹시 아니라고 말할 셈인 게냐?"



  시에라의 새침한 눈빛에 레이시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LP640. 그 중에서도 한정판인 베르사체 모델이라면 왠만한 차주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차였다. 그런 차를 필요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선뜻 내어준 것이다. 아아, 역시 당신은 호인이네. 감탄과 다소 '짓궂은' 유쾌함에 레이시안은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예의상이나마 거절하는 겸양을 보이겠지만, 레이시안은 그렇게 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한 판단이야. 역시 만상에 뛰어난 당신답네, 시에라."

  "……그렇다면 되었느니라."



  무엇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 레이시안은 답하듯 말했다.



  "후후, 당신의 배려는 감사히 받을게. 정말로 기뻐."

  "또, 또또 그런 실없는 소리를……."

  "오야, 늘 말했지만, 이건 진심이야…?"

  "……."



  시에라의 볼이 부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후후, 웃고 레이시안은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우리에게 저걸 준다면…… 당신들은 어떤 차를 타는 걸까나?"

  "음? 아아, 그것이라면."



  시에라는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뽀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짓을 시선으로 따라간 레이시안은 주차된 또 다른 차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받은 차와는 다른 느낌의 검은색, 확연히 대조되는 중후한 실루엣. 그의 차가 현대적인 날렵함이라면, 그것은 18세기에서 걸어나온 듯한 묵직함이다. 레이시안은 즐거이 말했다.



  "롤스로이스 팬텀…… 이건 또, 희유한 차네."

  "알고 있었느냐. 박식하구나."

  "소환된 이후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



  레이시안의 설명에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당연했고, 그 역시 골목에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계산하여도 꽤 적지 않은 시일을 보냈다. 유명한 자동차라면 면밀히 파악하고 심지어 '운전 면허'라는 자격증을 얻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기간이었다. 문득 그것에 대해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시에라는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터무니없는 대답이 돌아올게 뻔하다.



  "로, 로, 로, 롤스로이스……."



  짧은 침묵을 깬 건 치아키의 신음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치아키는 거의 기절할듯 보였다. 상식이 온갖 방향으로 공격당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도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생 가까이에서 볼까 말까 한 차가 두 대나, 그것도 직접 '운전될' 용도로 눈 앞에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전부가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도움을 찾듯 갈팡질팡, 이곳 저곳을 보던 치아키는 그나마 가장 의지가 되는 시에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시, 시, 시, 시, 시에라."

  "왜 그러느냐, 소환자 아이야."



  시선을 받은 시에라는, 안절부절 못하는 치아키를 걱정과 안쓰러움에 찬 눈으로 마주 보았다. 또다시 상식이 무너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치아키는 말했다.



  "저, 저저저저저저거, 어디서 난…… 거예요……? 설마 훔친건 아니죠……? 그리고 이거, 꿈이죠?"



  시에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흔들리는 시선과 달리 치아키의 질문은 명확했다. 명확한 질문에는 대답하기 쉽다. 시에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씩 대답해겠느니라. 차를 입수한 경로에 대해서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말할 수 있노라. 원한다면 이력을 보여줄 수도 있고(시에라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력'에 대한 말을 할때 어쩐지 자신감에 빛난 그녀의 얼굴에 레이시안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니라. 볼을 꼬집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게다."



  치아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어? 진짜다…… 시에라 말대로 현실이네요."

  "음. 그렇느니."

  "헤헤, 대답해주셔서 고마워요. 이 고마움은 나중에……."



  치아키의 말은 다른 의미로 이루어졌다. 말을 하는 그녀가 정신을 잃는다면 고마움은 '나중에' 표현될 수밖에 없다. 시에라는 깜짝 놀라 크게 뜬 눈으로, 레이시안은 이렇게 될 것 같았다는 미소로 기절한 치아키를 바라보았다.






  /1.


  "그럼 다녀올게요!"



  해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저녁이 밤으로 바뀌는 미묘한 시간.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치아키는 아! 하고 탄성을 흘리고는, 남아 있는 둘에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향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자질─분위기를 밝게 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치아키가 사라지자 집은 곧 고요해졌다. 고요함과 찾아드는 어둠에 시에라는 손을 살짝 쥐었다. 낮의 소란스러움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시에라는 힐끔 레이시안을 보았다.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금색으로 물드는 그녀의 은사와 달리 처음부터 그러한 색이던 그의 머리칼에는 붉은 빛이 돌았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표정으로 치아키가 나간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걱정되는 것이냐. 그렇게 물으려다, 어쩐지 미묘한 질문인 듯하여 시에라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시에라는 다시 레이시안을 돌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소환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
  그가 눈길을 틀었다.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를 담아내는 같으면서도 다른 금색 눈. 어쩐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시에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작게 웃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당신 쪽에서 나한테 먼저 시선을 보내다니 드문 일이네. 드디어 나를 보아주는 걸까나?"



  시에라는 문득 마음 한 구석에 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오기라고 하던가…? 하지만 어째서? 그러나 차분히 감정을 되짚기에는 그의 반응이 걸렸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쓸데 없는 기대 말거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거늘, 어째서 그리 끈질기게 물어오는 것이냐."

  "앞날은 모르는 것이니까."



  레이시안은 빙긋 웃었다. 시에라는 한숨을 폭 쉬었다.



  "너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노라."

  "아아, 이건 또 매정한 말이네.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슬퍼."



  말한 내용과 달리 전혀 상처 입지 않은 태도로 레이시안은 웃었다. 더 말하기 싫은 기분이 되어 시에라는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저었다. 그 때 레이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걱정 돼…?"



  마치 날씨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한 가벼운 어조 때문에 충격은 다소 늦게 찾아왔다. 시에라는 투명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오야, 추측이었지만. 정답이었던 걸까나…?"

  "……."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수록 그의 의도대로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레이시안은 빙긋 웃었다.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어놓은 장본인치고는 상당히 한가로운 태도로 레이시안은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켰다.



  "으응, 하지만 나도 치아키를 지키러 가려 했으니까. 같이 가지 않을래?"

  "같이…?"

  "아아."



  레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난지 시간이 지났거늘, 어떻게 따라 잡는다는 뜻인가?"



  시에라는 갸웃거림을 멈추고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눈에 담겨있는 즐거움에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그의 대답에 스스로 잘못을 자초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레이시안이 말했다.



  "누구보다도 상냥한, 당신의 은혜를 통해서."






  /2.


  레이시안은 키를 돌렸다. 아주 잠깐 전자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펑 하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기지개를 폈다. 조수석에 앉은 시에라가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그녀의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시에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믿어."



  시에라는 움찔했다. 레이시안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배기음이 으르릉거리며 위협적으로 울렸다. 속도계 바늘이 몸을 올리자 점으로 이루어졌던 바깥 풍경이 직선을 긋듯 쭉 늘어졌다. 레이시안은 그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은 채 가속 페달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그에 호응하듯 차는 주저하지 않고 속도를 더욱 올렸다.

  오히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쪽은 조수석에 앉은 시에라였다. 가죽 시트가 몸을 꼭 잡고 있었음에도 시에라는 동앗줄을 붙잡듯 소담스러운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고 있었다. 레이시안은 가볍게 말했다.



  "귀여운 시에라, 아직 나는 신뢰감을 얻지 못한 걸까나."

  "……."



  시에라는 짤막한 소리를 흘렸다. 므으으, 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옅은 신음이었다. 레이시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틀었다.

  차가 대로에 들어섰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약소도시라고 할 수는 없으나 수도권이라고도 할 수 없는 후유키에서 무르시엘라고는 폭력과도 같은 반향을 시민들에게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길을 가던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었고, 주변에서 주행 중인 자동차들이 주춤주춤 뒤로 몸을 물렸다. 누구라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되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그들의 소망이 닿았는지 무르시엘라고는 신호에 걸리는 일 없이 쭉 도로를 달렸다. 시민들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품을 대할 때 으레 그렇듯 사진을 찍는 것에 만족하며, 기대 속에서, 묘한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빨리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그를 둘러싼 상황에 부끄러워 할 만도 했지만, 레이시안은 여전히 유려한 미소를 지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 안과 밖을 격리한 유리 덕분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내린 다음 몸에 꽂힐 그들의 시선을 벌써부터 걱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레이시안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자세였지만,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즉 시에라는 정교한 조각이 된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기에 그는 아무런 비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요란한 엔진음 속의 기묘한 침묵이 이어질 것 같았다.



  "……오야."



  문득 레이시안은 시선을 들었다. 그와 시에라를─ 정확히는 그들을 태운 무르시엘라고를 바라보는 눈길에 레이시안은 나른하게 웃었다.



  "어떻게 할까나…?"



  그 때 역시 기색을 느꼈는지 시에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생각을 바로잡으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 그녀는 눈을 올렸다. 달빛 같은 머리칼이 잠깐 떠올랐다가 나붓이 가녀린 어깨를 감싼다.



  "……레이시안."



  그의 의도를 깨달았음이라. 평소와는 달리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후응." 레이시안은 질문했다.



  "그렇게 하질 않길 바라?"

  "물론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가 당신의 말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하이얗던 시에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레이시안은 싱긋 웃었다.



  "후후, 그런 당신도 매력적이야. 하지만 그렇네……. 이건 당신이 준 차니까, 이번은 당신 말대로 할게."



  시에라의 뺨이 다시 평소의 장밋빛을 띄었다. 그런 시에라에게 "하지만 그 대신, 오싹해질지도 몰라…?" 부러 짓궂게 덧붙이며 그는 변속기를 잡았다. 그리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틈 사이로 끼워넣었다. 철컥 철컥, 무기질적인 기계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



  처음 느끼는 속도감이었지만 시에라는 그 사실에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굳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에 바빴고, 또한 레이시안의 운전에 공포를 느꼈다. 분명 도로를 달리는 것이었지만 안전벨트를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배기구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뿜고 엔진이 지르는 비명은 벼락 같다. 여유 있게 기어와 핸들을 조작하는 레이시안을 보며, 시에라는 결국 자신이나 차 둘 중 하나가 부서지지 않을까 울먹거렸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 레이시안이 자신 옆의 문을 열었을 때 시에라는 안도감 보다는 당혹감을 느꼈다. 눈물을 닦고 그의 뒤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서야 시에라는 자신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괜찮아?"

  "……."

  "오야, 울었어…?"



  시에라는 당황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으로 눈가를 가리려 고개를 흔들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그런 적 없느니라!"

  "으응. 역시 당당하고자 하는 당신도 매력적이야."



  시에라는 울지 않은 척 하던 것을 잊었다. 그녀는 손을 내리고 레이시안을 노려 보았다. 휙,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너, 너, 너,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나는 진심이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이건 맹세할 수 있어. 그보다 다리는 어때…?"

  "……."



  시에라는 이번에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무릎을 응시했다.



  "……무릎이, 움직이지, 않는다."



  레이시안은 빙긋 웃었다.



  "오야, 그거 큰일이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아아,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레이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좀 더 그녀에게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그럼 귀여운 시에라, 나에게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겠어…?"

  "……."



  시에라는 고운 눈썹을 살풋 모았다. 원망스럽게도 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이시안은 빙긋 미소 짓고는 손을 내밀었다.
  시에라는 고뇌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의 손을 잡는 것이 이 상황을 벗어나는 최선의 답이라는 결론밖에 내어놓지 않았다. 결국 시에라는 정갈히 소매에 감춰두었던 손을 뻗었다.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 끝에 그녀의 섬섬옥수가 닿았을 때 시에라는 조금 놀랐다. 저번 거리에서의 만남 때 느꼈던 것처럼, 천 너머로 전해오는 체온은 따스하다기보다는 서늘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손의 온도가 낮은 유형인 듯했다…… '그'. 레이시안이 이성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아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레이시안의 손가락이 감겨들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와 달리 레이시안은 놀라지 않은듯, 평소 같은 태도로 손을 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나올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몸짓이었고, 그래서 시에라는 볼이 살짝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따랐다. 토옥, 그녀의 발끝이 가볍게 땅에 닿았다.

  레이시안은 그녀가 제대로 섰는지 확인하듯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 하자마자 시에라는 몸이 휘청 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정신과 달리 몸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휙 하고 시야가 흔들려, 시에라는 엉겁결에 손을 뻗어 쓰러지는 방향에 있던 것을 붙들었다.



  "……오야."



  조금 전보다도 가까이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체온 특유의 따스함. 시에라는 자신이 무엇을 붙들었는지─ 정확히는 안고 있는지 깨달았다. 고개를 묻은 자세가 되어버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드디어 나를 의지해주는 걸까나…?"



  기뻐. 아름다운 시에라. 그가 덧붙인 말에 시에라의 양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분명히 지나치게 익은 홍시 같을 것이다. 레이시안이 얼굴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는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시에라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레이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당신의 사랑은 언제라도 환영이지만…… 이렇게 하면 움직일 수가 없는데. 아아, 물론 곤란하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언제까지나 서 있을 수 있어. 당신이 이렇게…… 꼬옥, 안아 준다면."




  펑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시에라는 조금 후에야 그것이 자신의 머릿 속에서 난 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 이상 발개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얼굴을 든다면 레이시안이 보게 될 것이기에 시에라는 그에게서 떨어지는 일도 할 수 없었다. 하여 시에라는 고개를 묻은 채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 그런게, 아니니라."

  "매력적인 시에라, 좀 더 솔직하게……"

  "그, 그, 그, 그러니까, 아니다! 그저 다리가 휘청여서,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어서, 그랬는데, 그게 너였기에,"

  "후응."



  레이시안은 짓궂게 목소리를 흘렸다. 시에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전혀 해명이 되지 않은 걸까? 하지만 시에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에라는 울상을 지었다. 지금만큼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잠시 후 시에라는 자신의 판단을 원망했다.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시에라는 새삼 그가 셔츠의 단추 몇 개를 풀어 놓았음을 되새겼다. 그래서 자연히, 가슴팍이 다소 드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유처럼 하얀, 그러나 여자인 그녀와는 다른 쇄골을 본 순간 시에라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레이시안은 한숨 섞어 웃었다. 그가 말했다.



  "시에라, 시에라."



  시에라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왜, 왜왜, 왜, 그러느냐."

  "얼굴, 보여주지 않을래…?"

  "시, 시, 싫다!"

  "어째서?"



  초조감에 시에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라면 이유를 벌써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짓궂음은 정도가 좀 지나쳤다. 그러나 계속 그를 껴안고, 아니, 그에게 기대고 있을 수는 없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런 자신에게 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래서 또다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악순환만이 일어날 뿐이다. 시에라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 내, 내, 내 얼굴을 보면 우, 우, 웃을 테니까."



  레이시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그, 그렇느니라! 내 자신이 느끼기에도 새빨갛게 되어 있을 게 뻔한데, 어찌……."



  시에라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레이시안이 양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은 탓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멍하니, 레이시안이 자신의 고개를 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점점, 점점, 시선이 올라가서.
  눈이 마주쳤다.
  레이시안은 깊게 미소 지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뭇 소녀들이라면 보는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힐 달콤한 미소였지만 시에라의 볼이 재차 발갛게 달아오른 이유는 그것과 달랐다. 요염한 금빛 눈과, 미소 안에서 그녀를 바라 보고 있는 짓궂음. 순식간에 뇌리에 번지는 민망함에 시에라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빨랐다.



  "으응. 당신 말대로…… 새빨갛네."

  "여, 역시, 웃고 있지 않느냐!"

  "아아, 당신이 너무나 귀여워서."

  "므으으으으……."



  시에라는 입을 앙다물었다. 반박할 경우 언제나 했던 대화의 반복이 될 거라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뻔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항상 그녀에게 불리했다. 시에라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빈틈을 찾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손을 움직여 부드럽게 그녀의 양 볼을 감싸는 레이시안의 움직임에 시에라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볼 위를 닦아내듯 레이시안은 손가락을 살며시 움직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문득 시에라는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이 잠깐이나마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도가 낮은 손이 열을 가라앉혀 주는 듯했다. 차갑다 느껴질 만도 한 온도였지만 시에라는 오히려 그 온도가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스르륵, 시에라의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을 감은 채 시에라는 레이시안이 자신의 뺨을 매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가만히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걸까. 그리고 그 사실에 화가 나지 않는걸까. 이상하다고, 시에라는 생각했다. 어째서일까. 약간의 낯간지러움과 조금 빨라진 고동 속에서 시에라는 서늘함에 자신을 맡겼다.

  시에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얼굴이 본래의 온도를 되찾은 뒤였다. 시에라는 눈을 떴다. 레이시안은 여전히 짓궂으면서도 달콤한 미소를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나?"

  "……훨씬 나아졌느니라."


  
  비록 허둥거렸던 자신과 달리 여유를 잃지 않는 레이시안의 모습에 꽁해지기는 했지만, 시에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 제공을 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레이시안은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야. 다리 쪽은 괜찮아…?"

  "그건……."



  시에라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서 있기는 해도 레이시안에게 기대어 있기에 그런 것일 뿐, 그에게서 팔을 푼다면 또다시 넘어질 것이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에는 이미 꽤 시간을 허비한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시에라는 결국 얼굴을 천천히 가로저었다. 레이시안이 기껏 가라앉혀준 볼이 다시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후응… 그러면 이렇게 할까."



  이렇게…?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에게 질문을 하려는 순간 시야가 반전하여 시에라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웃은 레이시안은 한쪽 손으로 문을 내리고선 좀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 안았다. 시에라는 거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정확히는 그가 자신을 안고 뛰어올랐을 때─와 똑같은 자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는 불가항력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따라오는 시체들은 없다. 시에라는 말했다.



  "내, 내, 내, 내려놓아라!"

  "으응, 그건 이제 기각… 아니, 각하."

  "어째서!"

  "당신이야말로 어째서…? 



  시에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레이시안이 지금 한 것처럼 그녀를 부축하는 게 옳았다. 그렇지만 시에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이유를 몰랐지만,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굉장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레이시안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항의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발을 내디뎠다. 그가 자신을 잘 붙잡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어쩐지 불안해졌기에 시에라는 황급히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낭패했다. 또 그가, 그녀를 놀리고 있음이 명백한 말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어째서인지 레이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방향을 응시하며 "……아직도 따라오다니, 꽤 한가한 걸까나." 라고 읊조렸지만, 아주 잠시. 뜻을 묻는 그녀의 표정에 그는 특유의 표정으로 "이쪽의 이야기." 라고 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바라보다가 시에라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이유 모를 이유에 볼을 다시 붉히며, 어쩐지 조금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의 머리카락과도 비슷한 고아한 달빛을 받으며, 시에라는 자신의 고동과─ 그녀를 안은 그의 고동에 귀를 조용히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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