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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호우

로하《리델》 2012.11.22 16:08 조회 수 : 14







00/





     존경하는 엄마 아빠께.


그동안 안녕히 지내셨어요? 그래봤자 일주일만에 보내는 편지지만요. 요즘 런던은 밀라도보다 훨씬 추운 날씨에요!

심지어 제네바나 빈, 뮌헨보다도 추워서 요즘은 꼭 코트에 부츠, 목도리까지 챙겨 입고 다닌답니다. 조만간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 만큼, 휴일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엄마의 일이 있으시다니 조금 아쉽네요. 하지만 런던의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니까, 그것도 나름대로 두근두근해요!


시계탑 분들은 매우 친절하세요. 아무래도, 숙부님께서 집안의 이름을 빛내고 유지시켜 주셨던 덕분일까요. 오자마자

이곳 저곳에서 파티나 학회 초대장도 많이 받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정중히 거절하고 있어요. 그런

자리는 아무리 가도 서툴러서... 물론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많이 간 적도 없지만요. 그러고보니 얼마

전엔 시계탑의 일반 학생들이 머무르는 기숙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쁜 곳은 절대 아니었지만,

역시 다른 곳에서 머무르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부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즐겁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갈텐데, 어쩐지 강령과로 오라는 말씀들을

많이 들어서 조금 곤란해요. 파비안도 영매과에 있고, 아빠도 영매학 분야를 주로 다루시니 다른 과는 생각치도 않고

왔으니까요. 물론, 어떤 과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두근두근하지만... 으으. 그래도 역시 피아노와 미술, 역사가 저는

더 즐겁네요. 아, 프랑스어랑 라틴어도! 뭔가...물리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엄마께 죄송하지만...물리학은 너무 어려워요.

물론 절대 싫은 건 아니에요! 


전체적으로 런던 생활은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건물들도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멋스럽고. 사람들도

일견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은 친절한 사람들이 많고요. 브리티시 악센트도 직접 들으니 멋졌어요! 하지만 역시 요리는...

프랑스나 이탈리아...하다못해 독일이 훨씬 나아요. 터키나 중국, 인도도 좋았고... 물론 본고장의 애프터눈 티 세트는

맛있지만요.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피쉬 앤 칩스는... 속에서 기름통이 끓는 기분이었어요. 느─끼─해! 


으으. 뭔가 편지가 두서 없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여태까지 와 본 적 없는 장소라서, 하루하루가 새롭고 설레요! 

이 기분을 담아, 런던 사진을 몇 장 동봉합니다. 제가 직접 찍은 거에요! 역시 디지털 카메라보다는 이런 수동이 더 

취향이네요. 앗, 이런. 또 딴 길로 새 버렸다. 아무튼, 정말로 정말로. 추운 날씨니까 부디 건강 조심해 주세요.

새해는 집에서 맞이할 수 있기를 빌며, 이만 총총.



사랑을 담아,

리델.



추신 / 오늘 킹스 크로스 역에 다녀왔어요! 정말로 벽에 반쯤 들어간 카트가 있어서 그것도 찍었답니다!





01/





     "──좋아. 다 썼다. 여기 밀랍 인장으로 봉하고...끝..! 그럼, 부탁해. 헤드위그──"



창문을 열자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듯 나부꼈다. 녹색 눈을 가진 소녀는 새장을

열어, 눈처럼 하얀 부엉이의 목에 편지를 매단 끈을 걸었고. 새는 곧 런던의 겨울 하늘을 가로지르듯 사라졌다.



"후아──서늘하고 날씨 좋다───"



보통 사람이라면 춥다고 온 몸을 떨 바람이었지만, 겨울에 태어난 탓일까. 서늘한 날씨를 훨씬 좋아하는 소녀는

아랑곳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다시 펜을 쥐었다. 이미 윗부분이 빼곡히 찬, 옛날 양피지 같은 느낌의 종이 위에서

다시 바쁘게 손을 놀린다.



"..여긴...참고 자료가.....센카와 교수....중상주의와 연금술......."



으으. 작게 싫다는 듯한 목소리. 책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과제는 아니다. 난이도의 문제를 떠나서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니. 물론 안 하면 안 되는 일이고, 또 본분이니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호불호의 문제라면 분명히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리델 양! 티 타임이야──!"



"아, 네. 허드슨 부인...! 지금 내려갈게요!"



아니나다를까. 리델 피오레 아인 카엘라이어는 아래층에서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펜을 다시 꽂아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뭣도 아니지만. 달콤한 과자와 숙제 중 고르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자를

고르는 것은 당연한 일. 라던가, 항상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과제는 분량은 보통의 두 배. 지루함도 보통의 두 배인

주제니 아마 다른 학생들도 마지못해 할 것이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라 믿었다.



"앗, 참. 핸드폰 핸드폰──"



보통의 마술사는 휴대폰 따위 현대 문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도 두세 대 내려온, 역사라고 할 만큼 오래된 시간을

갖지 않은 가문도 아닌, 몇 십대는 가볍게 내려온 집안의 후계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사실. 그렇지만 리델은

자신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신경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파비안이 아예 본가까지

계승해 준다면 좋겠지만, 말 한 마디를 꺼낸다 싶으면 숙부 쪽에서 먼저 극구 반대하니 곤란한 일이다. 감히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나. 어깨를 으쓱한 리델은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오오, 리델 양. 숙제를 하다 내려온 건가요?"



"네. 미세스 허드슨. 와아, 오늘은 블루베리 스콘이네요. . .! 맛있겠다. . .!"



시계탑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나, 잉글랜드 카엘라이어 가의 저택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리델과 그녀의 부모가 결정한

곳은 평범한 하숙이었다. 물론 그녀의 부모로서는 고이고이 기른 외동딸을 사람이 넘쳐흐르는 곳에 보내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기에, 하숙생은 리델 한 명뿐. 하지만 관리자인 여성, 미세스 마가렛 허드슨은 마술사가 아니다. 그녀는 리델을

역사와 미술을 공부하러 런던에 온 유학생이라고 알고 있을 뿐. 마술의 마, 자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카엘라이어 부부가 무엇보다도 우선시한 사항이었다.



시계탑 초청장이 오자, 리델의 의사에 따라 일단 그녀를 보내긴 했지만. 그들은 정직히 말해 리델이 마술사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마술사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면 사진

작가를 하면 되고, 옷을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한다면 디자이너가 되면 된다. 마도를 걷는 게 즐겁다면야 마술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런 걸 강요할 생각은 절대로 없는 이들인 것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마술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오늘은 강의 없는 날?"



"아, 네. 교수님이 무슨 학회가 있으시다고 휴강하셨어요."



"어머나, 기쁘겠네. 나 때도 그랬지──글쎄, 어느 날은 눈 내린 다음 날이었는데, 교수님이~"



"아하하."



"그러고보니, 오늘은 그럼 모처럼 날씨도 좋고. 강의도 없는데 예의 보이 프렌드랑 데이트 계획은 없나요?"



"에, 엣?! 보, 보이 프렌드라니. . ."



"그 왜, 지난 번에 짐 나르는 걸 도와 줬던 그 잘생긴 도련님."



"아, 파비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사촌 형제에요."



"이런, 유감이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이 어울렸는데 말이야──"



"아, 아하하. 뭐, 그다지 닮지 않았으니까요."



허드슨 부인이 들을새라, 리델은 남몰래 가만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친척 형제인 파비안 카엘라이어. 잉글랜드 카엘라이어

의 후계자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의 소년이었다. 오히려, 은발 자안이라는 눈에 띄는 외모와는

반대로, 상당히 사근사근하고, 어찌 보면 서글서글하기까지 한 성격임에도, 무언가의 이질감을 주는.



마지막 남은 스콘 조각에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바르며, 리델은 멍하니 첫 수업을 떠올렸다.







02/





     영매과의 담당 교수, 헬겐 S. 스네이프는 미간에 주름이 고정된 것 같은 찌푸린 표정의 남성이었다. 마술사의 겉보기

나이는 믿을 게 못 된다지만, 보이는 나이는 서른 초반.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교수님 같다는 느낌에, 리델은 잔뜩 긴장한

채 예의바르게 치맛단을 잡았다.



으으. 역시 이런 건 서투르다. 특히나 저렇게 뚫어질 것 같이 노려보면, 조금 대하기 힘들지도. 



잉글랜드의 분가에서 권유한 대로, 드래곤 스쿨을 초등학생 때부터 다녔다면 이런 상황에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중학교부터는 홈 스쿨링을 한 리델이 그럴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결과가 이런 복잡하게 굳은 분위기다.



"──아아. 스네이프 교수님. 교수님 성격을 아는 저희야 괜찮아도, 그렇게 노려보시면 리델은 울지도 모릅니다만."



". . . 카엘라이어."



"으음. 저를 부르신 건가요, 리델을 부르신 건가요?"



". . . 그런가. . . .그랬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미스 리델 카엘라이어. 먼저 들어가서 급우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고 있도록. 미스터 파비안 카엘라이어, 너는 잠시 남도록 해라."



"아, 네. . .!"



"말씀하신 대로."



휴우. 덕분에 빠져나왔다. 파비안이 교수님과 무슨 얘기를 할 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저 답답한 공기에서 벗어난 게 무엇보다도 다행. 게다가, 영매과 몇 백 년만의 희대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파비안이니까,

분명히 따로 용건이 있는 게 분명하다. 



종종걸음으로 강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부드럽게 웃던 보라색 눈동자가,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아 검은 눈동자를 

향하는 것을, 리델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             *              *




"음, 그럼. 미스 플로렌스(=피오레), 그렇게 불러도 될까? 카엘라이어 군, 카엘라이어 양. 이러면 조금 서먹하잖아."



"꽃의 아가씨, 라니 굉장히 예쁘다──어울려!"



"미스 플로렌스. 쿠로우 윈체스터야. 이름을 들으면 알겠지만, 참고로 혼혈. 잘 부탁드립니다."



"...제닌.....알트리시아....파르나스..."



"자, 셔플이야. 빨리 한 장 뽑아 봐. 흐음. 세계, 세계 카드인가─── 거기에 한 장 더, 는.... 호오."



"아, 네. 어, 어울린다니 감사드려요. . .! 미스터 윈체스터, 잘 부탁드립니다. 파르나스 양도...엣?"



으아아. 뭐가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한 번에 사방에서 다 말을 걸어오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으으. 혹시라도 대답 못 하고 지나쳐버리면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쁠텐데. 파비안─파비안은──



". . . 모두 자리에 앉도록. 시작하겠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델은 두꺼운 양장본을 펼쳤다.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 스네이프 교수가 수업 시간 내내

리델에게 집중적으로 발표를 시켰지만, 그녀는 쏟아지는 질문과 인사에 답하는 것보다는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 더 

편했기에, 별다른 감상은 갖지 않았다.








03/





     ──그 때, 예습을 해 와서 정말 다행이었지. .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풍미를 아쉬워하며, 리델은 가만히

홍차에 입술을 적셨다. 첫 날부터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정말 창피했을 거야. 파비안이랑 부모님의 이름에도 

실례가 되었을 테고. 으으. 그래. 역시, 숙제 힘들고 지루하다고 미루지 말고 열심히 빨리 끝내버리자!



"...델 양? 리델 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요?"



"아, 죄송합니다. 미세스 허드슨. 혹시 무슨 말씀 하셨나요. . . ?"



"음, 별 건 아니고. 이번에 대영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한다고 하는데, 혹시 가 볼 생각 있나 해서요. UCL

(University College London) 친구들하고 함께 갈 건가요? 아니면 그 사촌 형제 도련님이랑. . . ?"



으아. 사촌 형제라는 말에 왜 이렇게 악센트를 주실까! 분명히 못 믿으시는 거야. 분명히 못 믿으시는 거야──



"에. 그, 그런가요. 지금 처음 알았어요. 음, 파비안은. . . 그래. 원래 케임브리지에 다니는데 지난 번이 주말이라서

잠깐 런던으로 온 것 뿐이에요. 도와준다고. 그래도 흥미로울 것 같네요. 박물관, 정말 좋아하니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하고 한 번 가볼게요."



"아, 그리고. 다른 것도 있어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에서 하는 연말 특별전. 이건 거기 티켓."



"어? 으으... 티켓까지...."



"별로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요. 말했잖아, 우리 아들내미가 거기서 큐레이터로 일한다고.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받아 둬요."



"감사합니다. . . "



대영 박물관. 국립 미술관. 테이트 모던. 런던에 있는 세 개의 가장 큰 미술관. 왕립 미술원도 있기는 하지만

거긴 규모적인 면에서 다른 세 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또한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따위를 즐겨 찾는 리델에게

있어 허드슨 부인의 선물은 정말 감사한 것. 비록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비싼 것이 아닌, 오히려 푼돈의

극치라고 할 법한 가격이었지만, 애당초 그렇게 사치스럽게 멋대로 자란 소녀는 아닌 것이다.



──역시 대영 박물관은 좀 그렇고. . .아니. 수업 끝나고 가 볼까. 그리고 국립 미술관은 이번 주말에. . .



그간 많이 보지는 못했던 전시회의 주제를 보고, 잔뜩 설렌 채 기대하기 시작한 리델의 생각은 허드슨 부인이

새로 구운 쿠키와 머핀을 가져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소녀가 웃으며 폭신한 과자를 한 입 베어물 때, 도시 반대편의 어딘가에서. 그림자가 춤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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