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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양을 줄였어요. 지난 이야기는 심한시리즈 설정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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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저문지 오래고 이제는 새까만 밤하늘 사이를 초승달이 떠다니는 시간, 한 소녀가 수증기로 가득한 목욕탕안에서 피로를 풀고있다. 본래 이런곳에선 살짝 붉거진 얼굴로 휴식을 만끽해야하는 것이 보통일텐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빛은 너무도 짙고 어두운채 축 처져있었다.

대중목욕탕이긴하나 시간이 늦을대로 늦어서 지금은 혼자만의 공간으로 전환되어버린 이곳, 나레카는 불안한 마음과 함께 몸을 온천탕에다 담그고 있었다.
따뜻한 물이 몸의 온도를 올리면서 육체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정신적 피로는 여전히 지친 그대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머릿속의 어지러움만은 사라지지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슬슬 맴돌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레카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어째서일까? 이때까지 놈들에게서 사람을 구해준 적도 또한 그로인해 보답을 받은것도 한두번 겪어본 것이 아니다. 대중목욕탕을 혼자 쓰게해준것 따위야 이미 소녀에게 있어서는 보답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불안해 떨고있는가. 배신당할까봐 두려우니까? 이미 그 경험도 너무도 높이 쌓아놔서 이제는 무너지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다. 그것이 그녀를 이토록 고독하게 만들었고 더더욱 증오로 몸을 떠밀지 않았던가.

평소와 다를 것은 없데도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과 혼란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을때 누군가가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있어요?"

구식 미닫이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리아라는 한 여자아이로 레놀드라는 오빠와 단둘이 살고있는 평범한 소녀였다. 허나, 웬일인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나레카에게 있어선 몰래 숨기고있던 비밀을 들킨것같은지 깜짝놀라며 그녀는 물을 손으로 첨벙거렸다.

부드러운 긴 흑발이 한걸음땔때마다 흔들거리는 것이며 크리스탈보다 더 아름답게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소녀라는 생명이 얼마나 순수한것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증기로 가득한 사우나실내에서 온천탕에 어깨와 머리만을 빼꼼히 내민 나레카가 솔직한 리아를 바라보며 솔직한 심정을 느끼고 있을때, 어느샌가 그녀는 나레카의 근처에 와선 커다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역시 여기 계셨네요. 갈아입을 옷하고 마실 것을 좀 가져왔어요. 흐음, 근데 이 옷은 지금보니 사이즈가 조금 클지도 모르겠네요."

곳곳에 주황색 리본이 허리와 끝부분을 장식해주고있는 노랑색 원피스를 꺼내들며 리아가 말했다. 마실건 그렇다쳐도 갈아입을 옷이라니. 그것도 저런 원피스를 준다는 건 혹시 자기를 반쯤 놀려보려는 심산이 아닐까?

청순이라는 이미지와 자신이 얼마나 담을 쌓고있는지 잘 알고있는 나레카로써는 그런 인상받게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자기가 옷을 준비한건지 자꾸만 나레카와 원피스를 번갈아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어쩐지 부담감만 늘려주고있었다.

그런 나레카의 염려를 신이 불쌍히 여겼을까?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며 리아는 호주머니에서 지도 한장을 꺼내들었다.

"맞다. 언니. 목욕이 끝나면 여기 표신된대로 오셔서 오늘은 저희집에서 묵으세요. 제가 지금 부상자분들을 몇분 봐드려야되기에 죄송하지만 끝까지 기다리는건 조금 힘들것 같아요. 야참도 준비해뒀으니까 배가 고프시면 오빠에게 부탁하면 될꺼에요. 그럼 이따봐요, 나레카언니~."

지도를 조심히 바구니안에다 집어넣고서 리아는 문밖으로 몸을 나섰다. 자기 마음대로 들어오고서 실컷 떠들어대더니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나가버린다. 참으로 개방적인 소녀이지 않을 수 없는 리아를 바라보며 나레카는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저녀석은 이름을 가르쳐준 후부터는 '검사님'에서 '언니'로 바꿔부르기 시작하더니 계속 저렇게 불러댈 생각인가? 검사님이란 것도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이것도 닭살을 돋게하기는 매한가지. 나레카는 탕에서 나오고는 바구니에서 꺼낸 타올로 몸을 감싸며 쉼호흡을 하다가 문득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

물기로 적셔져있는 몸을 감싼 타올 한장이 오른손에 쥐어진채 가리기 형태를 유지하고있는게 어쩐지 살짝 부끄럽다. 딴데라면 몰라도 사우나실에서야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겠지만 나레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좀전에 들어왔던 리아를 떠올리며 자신의 몸과 비교해보았다.

짧을대로 짧은대도 지독한 전투로인해 엉성하게 잘려나간 갈색머리칼, 멀리서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징그러운 흉터, 짙을대로 짙어져서 빛이야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인 두 눈동자. 기나긴 피로와 고통으로 눈밑에 주름마저 지는 것을 보니 도저히 여자라는 생각을 갖게해주질 않았다.

"하, 하하하핫. 하핫. 하하하핫.."

실소한 나머지 웃음이 나오기 시작하다가 나레카는 돌연 글썽거리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역시 안돼!'

덜컹! 갑자기 미닫이 문이 힘껏 열리며 소녀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바닥을 치는 두 다리가 그녀의 몸을 옷이있던 자리로 이끌었고 그렇게 엉성한 스텝이 소녀의 몸을 망가뜨려 바닥에 내동댕치쳤다. 팔꿈치와 머리가 땅바닥에 부딯치고 구르면서 나레카는 헐레벌떡 검과 총을 쥐어들고 허공에다 겨눴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안은 물론이고 밖에도 개 한마리 지나가질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총과 검을 원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짐에 따라 무기를 든 두 손도 떨리기 시작한다. 나레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속으로 외쳤다.

'안돼. 무기를 가지고 있지않으면 몸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아무리 목욕하고 있는 동안이라도, 아주 잠깐 옷을 갈아입는 순간이라도, 무기가 손에 없으면 마음이 안정되질 않아! 공포를....정신이 견뎌내지 못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선 한 손에는 커다란 검을, 다른 한 손에는 서브머신건을 쥐어들고서 소녀는 눈을 날카롭게 뜬채 이빨을 꽉 깨문다.

"큭."

몸의 수분이 제대로 닦여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레카는 바지를 입고 코트를 걸치며 검을 등뒤에 매었다. 한번한번 몸을 움직일때마다 곳곳에 달린 탄약이며 각종 장치가 삐그덕 소리를 질러댄다. 시끄럽게 완전무장을 끝마치고 나레카는 힐끗 리아가 내려놓은 바구니를 쳐다보았다.

타올을 꺼내느라 속이 끄집어내여진 바구니는 덮여져있던 천을 바닥에 떨군채 안에있던 지도와 원피스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잠시동안 그것을 침묵과 함께 바라본후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떠나는거다. 어차피, 나는 아무 도움도 못되.'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가 발을 내딛자마자 온몸을 내던지며 환영을 해준다. 시간으로치면 약 새벽 2시인가.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혀있으면서도 그녀의 선택이 옳다는걸 증명하는듯 달쪽만은 깨끗하게 비워놓은채 있는게 참으로 저주스러운 밤. 그렇게 한 소녀는 검을 등에 짊어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차갑다. 너무도 몸이 차갑다. 곳곳에 부착해둔 라이트아머때문일까.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있어도 여전히 새찬 바람은 온도를 떨어뜨렸고 결국 후드를 머리에다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새벽, 나레카는 추위와 고통, 피로로 크게 지친채 발걸음을 옮겨대고 있었다.

오늘 하루동안 단 한숨도 잠을 청하질 못했다. 오히려 생명을 건 싸움을 두번이나 하는동안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졌다. 지금도 왼쪽 어깨가 이따금씩 따끔거리는게 휴식이란 녀석이 얼마나 필요한 놈인가를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나레카는 멈출 수 없다.

걷는다. 걸어야한다. 걷지 않으면 안된다. 혹한 추위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고있지 않으면 마음속은 또다시 답답함으로 메워진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하기가 싫다. 이빨을 갈으며 나레카가 두 다리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한참을 달리고 달리자 숨이 가쁘게 들이쉬셔지고 내쉬어지는게 이제는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나레카는 천천히 오른손을 가슴팍안으로 넣으며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찰칵.

상하로 긴 타원형 모양을 유지하고있는 펜던트의 뚜껑이 열리자 안에 내장된 사진 한 장이 달빛에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쪽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최대한 애교있게 윙크를 하고있는 모습이 틀림없는 1년 반전의 자신.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그런 그녀를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싼채 온화한 표정을 짓고있는게 틀림없는 그녀의 모친이었다.

불과 1년반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여성의 사진. 그리고 몇개월뒤 놈들에의해 육체를 빼앗겨 죽은 상태로 살인을 자행한 여자의 사진. 그렇게 친딸에 의해 몸이 조각난 한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엄마..'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표정을 지은채 나레카는 사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1년반간 한번도 이것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 하나밖에 없는 모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쉬울리가 없을텐데 괴물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무리와 전쟁마저 치르고있는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강하게 잡지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덮어두었다. 살아남기위해 망각하고 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아니, 아마 누구나가 그럴것이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극복했다고해서 헤헤거리고 그 사람의 죽는 순간을 회상할 수 있는건 정신병자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보다 큰 기쁨으로 슬픔을 억누를뿐. 그것이 아니면 보다 큰 슬픔으로 억누를뿐이다.

혼자가 되었다는 고독감이 마음을 좀 먹기 시작하자 소녀는 크나큰 쓸쓸함을 느꼈다. 그렇게 달을 올려다보며 사진으로부터 멀어져본다. 아아, 그때도 이렇게나 힘들었지. 지금은 이 검을 피로 물드는 것으로 슬픔을 억누르고있다면 그때의 자신은 무엇으로 억누르고 있었을까. 소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펜던트의 뚜껑쪽에 박혀있는 새하얀 다이아몬드같은 보석이 그녀로부터 누군가를 상기시켜주었다.

아아 그랬지. 그때는 그 사람이 곁에 있었지. 잊을 수 없는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소녀가 추억에 잠긴 순간이었다.

"호오, 꽤나 낭만적이게 되었군. 검사."

"!"

순간 온몸에 가시가 돋는듯 깜짝 놀라며 나레카는 검을 쥐고 서브머신건을 빼들었다. 잎이라곤 하나도 돋아나지 않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언덕, 그곳에서 한 흑발의 남자가 바지만 달랑 입은채 팔짱을 끼고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확실히 이상기온때문에 계절이라는걸 구분짓기가 힘들지만 아무리그래도 이 날씨속에서 에어로빅같은걸 하기는 결코 좋지가 않다. 거기다 저 남자의 단단한 근육은 취미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아니, 이런 자신을 알고있다는 자체가 이미 적이라는 증거!

나레카는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갑자기 녀석은 눈앞에 텅하니 나타나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런이런, 여전히 대화는 생각도 하질 않는건가? 그런 성격은 고치는게 좋을거라고."

왜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놈이 잡고있는 왼쪽 팔에 점점 통증이 느껴지는게 이래서는 녀석을 향해 제대로 겨눌 수도 없다. 빌어먹을!

그렇게 온갖 욕설을 속으로 퍼부으며 나레카는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은 자기앞으로 순식간에 나타난 것처럼 이번에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하하하. 뭐 하긴 너와함께 다시 붙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은 공중. 나레카가 고개를 들자 허공에선 그 남자가 양 팔을 쫙 벌린채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두 말할 여유도 주지않고 곧바로 서브머신건을 난사. 하지만 이것이 마치 계산이라도 된마냥 그녀가 방아쇠를 당긴순간 공중으로 붕 날아가던 남자의 몸은 옆에있던 암벽에 다다랐고, 녀석은 그대로 그걸 박차면서 모든 공격을 회피해냈다.

"큭!"

탄약이 나간 탄창을 빼내고 새 탄창을 집어넣기위해 오른손으로 코트안을 급히 뒤진다. 하지만 그제서야 그녀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탄창이 없어!'

쉬익! 뭐라고 방편을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측면에서 남자의 돌려차기가 휘둘러졌다. 나레카는 왼팔을 돌린후 그것을 오른손으로 뒷받친채 막아냈긴했으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그 상태로도 온몸이 미끌어질정도였다.

왼팔에 느껴지는 통증도 만만치않지만 중요한건 완치되지 않았던 다른 부위들이 공격을 당할때마다 고통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 장기전이 되면 불리하다. 최대한 빨리 놈을 쓰러뜨려야한다. 호주머니에 아직 탄창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좀전의 스피드로 봤을때 총에다 끼우는건 아마도 불가능할터. 나레카는 기관단총을 던져버리고는 등에 매었던 검을 빼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남자는 조금은 기뻐진건지 히죽 웃어보았다.

"그래. 역시 너에겐 그것이 가장 어울려, 검사. 하지만 도대체....이건 뭐일까나?"

평원의 치타처럼 놈이 순식간에 달려드는게 도저히 눈으로도 쫓을 수 없다. 하지만 정면에서 달려든다는 걸 알고있으면 방편이 없지는 않을 터. 나레카는 있는힘껏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저렇게나 빠른 속도라면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휘둘렀지만 잘려진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뀐것이 있다면 놈이 지금 자신의 목옆에다 손바닥을 놓은채 당수치는 자세를 취할뿐. 그걸 깨달은 순간 가슴이 깨지듯 오한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났건만, 검사. 너는 생각보다 강해지지 않았군."

"젠..장!"

놈의 손날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땅을차며 온몸을 옆으로 회전함과 동시에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이번에도 허공만이 갈라질뿐 성과는 제로. 놈은 이번엔 그녀의 후방쪽으로 5,6m 떨어진 곳에서 바지주머니에다 손을 쑤셔넣은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거이거 기다린 보람이 없군. 아무래도 그정도 실력이라면 차라리 지금 편히 보내주는게 낫겠어."

쉬익! 마치 총성이 울린것처럼 놈은 단번에 나레카의 코앞까지 달려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올리며 놈의 공격을 막는다. 쨍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검과 맞부닥뜨린것은 녀석의 손날. 놈의 육체 그 자체였다. 이녀석의 몸은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져있단 말인가? 분명히 지금 이순간에도 연신 검으로 이리저리 막아내고있는데도 정작 놈의 육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이상이 있는건 이쪽이다. 이 커다란 검으로 막고있는데도 힘에서 밀리고있다!

"제대로 하라고, 검사. 그렇지않으면 내가 살려준다해도 기껏해야 반년뿐일테니까."

"이익, 시끄러워!"

달아오를때로 오른 짜증을 방출시키며 나레카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쫑알쫑알 말이 많아! 도대체 네놈은 뭐야! 날 알아? 편히 보내준다고? 그럴 필요없어. 지금 이자리에서 내가 끝장을 내줄테니까!"

흥분한 마음이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하고 지친 몸을 억지로 움직이도록 이끈다. 커다란 검이면서도 남못지않게 화려한 기술로 쉴새없이 반격하는 나레카. 그 기색에 점차 방어태세로 전환되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남자는 씨익 눈동자를 크게 뜬채 웃어보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검사. 근데 말야?"

쩌렁!

수십키로그램의 해머를 철판으로 내리친것같은 충격음이 울려퍼지며 남자의 미친듯한 웃음과 함께 나레카의 검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너무 약해."

허공에 떠오른 검은 운동에너지가 제로가 되는 순간 공중에 살짝 멈춰섰고 남자의 손날은 그대로 나레카의 목을 엄습했다. 사람이 죽으면 지나간 순간이 머릿속에 비디오를 거꾸로 트는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지금 나레카에겐 10분전의 추억도 회상되지 않았다.

그건 죽는다는걸 알고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것일까? 그저 아 죽는건가하는 호기심 반의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비껴내 멍청아!

"!"

일직선으로 찔러드는 놈의 팔을 그대로 팔등으로 밀면서 하단쪽으로 떨어뜨린다. 그렇게 처음으로 완벽히 대응해내자 남자도 그리고 나레카 자신도 누구 못지않게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걸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고작해야 한번 실패한 정도. 그럼 다음에 성공시키면 그만. 남자가 다시 손날로 나레카의 목을 향해 휘두른 순간, 다시 나레카는 공격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우연은 우연이란건가.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울리던 목소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피해. 피하고 휘둘러. 베어버려!

고개와 함께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내려 몸전체를 하강시킨다. 그리고 놈의 팔이 자기 몸 위를 완전히 지나가자 그대로 뛰어오르며 나레카는 공중에 있던 검을 잡고는 허리를 비틀러 놈의 얼굴을 돌려쳤다.

스릉!

공기가 베여진 충격음이 무서우리만치 울려퍼지지만 이번에도 녀석은 베여지지 않았다. 슬쩍 뒤로 물러서며 놈은 이번엔 크게 만족했다는듯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좋았어, 검사. 그정도는 되야 내가 인정한 인간이지."

"시, 시끄러. 아까도 물었지만 도대체 너는 뭐야? 나에게 뭘 원하는거지?"

한 손으로 검을 들어 겨누며 녀석에게 묻는 나레카. 실제로 이런 대화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숨이 가쁜것이며 여러가지로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방금전 자신의 움직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게 다시 최고의 컨디션으로 돌아가고있다. 어찌됐든간에 지금은 시간을 끌어야한다.

"이런. 인간은 목소리가 같아도 외모만 바뀌면 판단을 못한다던데 정말 사실이잖아. 모르겠어? 나야. 나라고."

이마를 손으로 잡으며 한심하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이는 남자.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1년전에 서로 치고박고 싸웠잖아. 안그래, 검사? 그때는 내 키가 한 저 나무만했고 몸도 다른 녀석들과 다를바 없었지만 말이야. 아마 그때 나는 너를 우리편으로 만들려다가 웬 빌어먹을 꼬맹이한테 당했었지? 그리고 너한테 조각나버렸고."

"뭐, 꼬마? 1년전..? 설득?"

"호오 기억났나?"

딱히 저런 노출광녀석과 만난 기억은 없다. 하지만 1년전에 분명히 그녀로써는 잊지못할 기억이 하나 존재한다. 어느날, 또다시 놈들과 싸우던 도중 그녀는 한 소년을 우연히 구하게되었는데 그는 부모를 놈들에게 잃어서 홀로 동생들을 먹여살리고있는 불쌍한 아이였다.

그대로 자신이 계속 머물다가는 피해가 갈것 같아서 일찍 떠난 나레카였지만 몇시간도 채 되지않아서 다시 그와 직면했다. 이번엔 놈들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게된 소년과 말이다. 그리고 당시, 놈들무리중 나레카를 자기무리로 끼워넣고싶어했던 거대한 녀석이 하나있었다. 녀석은 놈들과 똑같이 변한 소년에게 상처입은뒤, 그후 나레카에게 완전히 아작났지만 말이다.

"그, 그때 그 거인녀석?!"

"빙고. 후우, 그자너자 그렇게 불릴 줄 알았다면 이름정도는 가르쳐줄걸 그랬나?"

"어떻게 된거지! 너는 분명히 내가 죽였는데!"

"그렇게 생각한것 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있잖아. 뭐 이번엔 몸을 약간 손봤지만 말이야."

저건 약간 손본게 아니라 변신이다 변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농담할 시간따위는 없다. 가뜩이나 잠도 잔적이 없어서 잔뜩 지쳐있는 상태인데 지금 이런 녀석과 싸웠다가는 기적을 바라지않는한 이길 수 없을것 같다. 어떻게하면 좋을까.

이빨을 빠드득 가는 나레카의 모습을 보고 녀석이 먼저 눈치챘는지, 놈은 어깨를 한번 들썩거리며 가볍게 얘기했다.

"아아,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없어. 그때야 너의 설득 아니면 시체를 가져오는게 임무였지만 지금의 임무는 설득 하나뿐이니까."

"뭐라고?"

"머리를 좀 굴리라고 검사. '임무'하면 조금은 감이 잡히지 않아? 너도 알잖아. 말할줄 알거나 지능이 있는건 나혼자만이 아니라는걸."

"무슨 소리를 하고싶은거야!"

짜증을 이겨내지못하고 나레카가 소리치자 그는 또다시 한숨을 푹쉬며 마지못해 대답해줘야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한마디로 네 시체를 가져오란 임무는 다른 녀석에게 넘어갔다는거지. 그리고 놈은, 아니 놈들은 아마 2,30분뒤엔 니가 묵었던 마을을 습격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

묵었던 마을이라면 리아가 레놀드가 있는 그 마을? 그러고보면 요즘 어쩐지 놈들의 수가 많아졌다했더니 그 이유가 이런것이었나. 놈들은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보다 훨씬 강한 녀석도 많을 것이다.

이것저것 두려워하던 것들이 진실로써 판명은 되자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새로운 의문이 나레카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런걸 나한테 알려주는거지?"

"으음? 잊은거야? 말했잖아. 난 네가 마음에든다고. 너는 우리쪽에 더 가까워. 어때? 지금이라도 손을 잡겠다면 내가 책임지고 그 마을의 안전과 너의 지위를 보장하지."

"하아? 그딴걸 내가 받아들일걸 같아!"

"하긴. 이때까지 죽일려고 아주 빠득빠득 갈고있었는데 갑자기 동료가 되라면 충분한 무리가 있지. 그때도 그랬고 말야. 뭐 천천히 생각해봐. 난 벌써 1년이나 기다렸으니까."

죽을줄로 알고있었던 사람을 기다리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녀석은 상당히 머리가 나쁜것 같지만 어쨋든 강한 것은 사실. 솔직히 말해서 놈을 이길 자신이 없다. 어떻게 방도가 없을까.

수십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지지만 해답책이 나오지 않자 인상이 험악해지는걸 보고 저쪽에서 먼저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가봐."

"뭐?"

"아까 말했었지. 지금의 내 임무는 단순한 설득. 너를 죽일 이유도 막을 이유도 없어. 거기다 미리 말하건데 지금 온힘을 다해 달려가도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날 베고 간다는건 그리 현명치 못할꺼야, 검사."

이녀석. 지금 배려해주는건가?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싸운건 혹시 나를 위해서? 가족의 추억으로인해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방황하던 나를 보고서 일으켜주려 했던건가?

갑자기 생각이 너무 커져버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크나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놈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나레카는 떨어진 서브머신건을 회수한뒤 코트주머니에서 빼낸 탄창을 끼웠다.

'마을까지는 한 40분정도 걸리려나?'

코트안쪽 곳곳에다 다시 탄창을 몇개 끼워넣고 검을 매었다. 그렇게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녀는 뭔가 깨달았다는듯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며 남자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말야. 너 말이지. 말이 너무 많아졌어."

"....뭐?"

쉬릭!

대답을 들을새도 없이 검사는 그대로 온힘을 다해 마을로 뛰어갔다. 발로 땅을 밀면서 뿌연 연기와 함께 달려가는 나레카를 보고 남자는 피식 눈을 감고는 웃었다.

"그래. 바로 그런 성격때문에 너를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고. 검사."

차가운 밤바람이 지상을 나돌면서 추위를 안겨주는 시간. 갈색바지를 입고 근육질 상체를 훤히 드러낸 흑발의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번쩍 눈을 뜨며 말했다.

"아차. 이름 안 알려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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