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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눈 The white tears

2007.02.01 16:55

로스나힐 조회 수:202

“우리, 이만 헤어지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정말로 언제까지고 이어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눈이 내리던 그때 마을 뒤편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약속했던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은 그렇게 한마디 말로 불이 붙은 듯이 녹아버렸다. 함께 떨어지는 눈송이를 향해 불던 입김도, 몇 시간을 붙잡고 있던 손도, 둘이 걸치고 있던 목도리도, 그 나무조차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리고 내 속이 새까맣게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굉장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

“어째서?”

“이유는 없어. 그냥 여기가 끝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어. 미안하다.”

그의 대답은 정말로 고요하고, 어찌 보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하염없이 깊은 목소리였다.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서있는 나를 바라보는 그는 침착했다. 어째서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걸까. 정말로 사랑이란 감정이 모두 메말라버린 걸까. 나에게는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마치 야생의 산을 탐험하듯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하고 싶은 일들이 수없이 드러나고, 그것만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눈앞을 바라보면서 정상은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였던 걸까. 그는 이미 아득히 먼 정상을 지나 반대편 밑자락까지 도착해버린 걸까. 나만을 남겨둔 채로.

“그리고 이건 마지막 부탁. 눈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눈이라면,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것일까. 그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눈이 좋아. 항상 조용하게 내리지만, 누구의 기억에라도 존재하는 눈이 좋아. 나도 네 기억 속에서 눈과 같이 언제까지고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은 맥락인 것이었을까.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하면서 평생 그에 대한 기억을 내게 떠넘기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눈물로 흐려진 시야 앞에 서 있는 그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나를 스쳐 지나갈 때 분명히 읽을 수 있었던 그의 표정은 한없이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슬픈 표정은 내 속에 들어와 텅 비어버린 가슴속에서 폭발해 한 단어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죽어버려!”

그는 말없이 사라져버렸다. 내 저주가 담긴 한마디를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한 채. 그렇게 내게서 떠나가 버렸다.


눈 The white tears.


“얘가! 벌써 며칠 째 학교를 안가는 거니!”

“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제 이틀밖에 안됐어.”

나는 아침부터 엄마와 방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학교에 가면 분명히 그와 마주칠 텐데, 어떻게 학교를 갈 수 있을까. 엄마에게는 아직 얘기 안했으니까 저렇게 반응하시는 것도 당연한데,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또 눈물이 나왔다. 좀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 어제도 하루 종일 방에 박혀 울기만 했는데 별로 소용이 없는 듯하다.

“에휴.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서 준비하고 학교 가렴. 엄마는 이제 나가봐야 한단 말이야.”

“다녀오세요. 제 걱정은 마시구요.”

억지로 울음을 멈추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엄마는 잠시 문밖에서 눈치를 살피는 듯 했지만 곧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쁜 놈! 죽어버려! 죽어버려!”

저주의 말을 침대에 쏟아 부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야, 너 왜 학교 안온 거야?”

“별일 아냐. 조금 아파서…….”

아프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다. 병은 아니지만 아픈 건 아픈 거니까.

“너랑 그 왜 너랑 사귀는 애 걔랑 둘만 학교를 빼먹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구. 너 어서 안와? 야, 듣고 있어?”

‘둘만 안 왔다…….’

그가 학교를 빼먹었다는 소리에 걱정보다는 먼저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는 내가 바보 같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도 아직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소리로 들려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 가자. 일단 내가 먼저 당당하게 나서는 거야. 그러면 그가 학교에 나와도 문제없을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두 사람이 빠진 학교는 그럼에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연한 거지만, 왠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토록 눈에 띄던 그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나마저도 학교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헤어졌어.”

가슴 아픈 한마디를 무심하게 던져놓고 나는 수업 준비를 했다. 책상 서랍을 뒤지니 미처 보내지 못한 편지가 나왔다. 그가 좋아하는 새하얀 눈이 오는 언덕 그림이 그려져 있는 편지지와 편지봉투. 나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학교가 끝나면……. 그 나무 밑에 묻어버리자.’

왠지 빠르게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다. 무엇이든 포기가 빨랐다. 필사적으로 덤벼보는 법이 없었기에,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그의 존재감은 내게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거대했다. 그가 있었기에 그를 따르며 어떠한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닮아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허사가 됐다. 결국 나는 이런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 그래 그냥 포기하는 거야.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바로 거기로 갈까.’

방과 후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번호. 왠지 받아야할 것 같은 느낌에 곧바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 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얘, 너 우리 아들놈이랑 사귀던 애 맞지?”

여자 목소리. 그의 엄마인 것 같았다. 왠지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꼭 들어야만 했을 소리는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내게 존재를 알리려는 단어가 귀로 들어왔다. 뇌를 직접 두드리는 것 같은 충격.

“죽었어…… 장소는 신암병원…… 핸드폰에 네 전화번호밖에…….”

나는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죽었다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있던 그가 죽었다니. 그저께는 나를 차버리기까지 한 그가 죽었다니. 그가 죽어 슬프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무서운 건 내가 마지막으로 퍼부은 한마디가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죽어버려!” 그 후에도 몇 번을 그렇게 소리쳤는지 모른다. 내 말을 듣고 죽은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그는 내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달려가는 내내 차라리 세상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죄책감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이런 슬픔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세상아 차라리 이대로 멸망해 버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었고, 실제로 내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 그저께 헤어졌다고…….”

나는 그와 지금은 연인사이가 아니라는 것부터 얘기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사진이 걸려있는 장례식장에 오게 되다니.

“자주 네 얘기를 했었어. 네가 헤어졌다는 그 날 아침 까지만 해도. 즐거운 얼굴로 오늘도 너를 만난다며 얘기했었는데…….”

“어떻게…… 죽었나요?”

이런 질문을 해도 괜찮은 걸까.

“그냥,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자고 있는 동안에 숨을 거뒀단다. 정말로 예상도 못했어.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가 자기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그래서 나와 헤어지자고 말했던 건가. 내가 빨리 포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하다니 그답지 않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볼게요.”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낀 듯 달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터벅터벅 그와 평생을 약속했던 나무를 찾아갔다. 나무는 조용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그와의 추억을 품은 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나무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동안 그와의 추억을 간직해줘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간직해줘. 그가 받지 못한 이 편지를.”

나는 나무 주위를 돌며 그와 새긴 하트표시를 찾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무뿌리 근처의 흙을 파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파내려니 손이 아려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그와의 추억을 포기하고 잊어버릴 생각은 버렸다. 이건 포기의 의식이 아니다. 이건 그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다. 내 텅 비어버린 가슴속을 나무가 품어왔던 그와의 추억으로 다시 메우고 평생 간직하기 위한 것이다.

“하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나는 흙을 파던 손을 멈췄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묻어놓은 편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주인이 누구인지 예상할 수 있는 순백의 편지를 열었다.

나 한평생 너와 함께할 수 있도록
순백의 조용한 눈이 되려고 하네.
슬피 우는 네 모습이 보이지만
나는 먼저 가야하는데.
미안함에 얘기하지 못하고
그저 나는 새하얀 눈이 되려 하네.
그저 추운 겨울마다 떨어져
한평생 그대의 기억에 남을
나 한평생 너와 함께할 수 있도록
순백의 조용한 눈이 되려고 하네.

그의 필적으로 쓰인 시는, 흙과 내 눈물과 번져버린 글씨를 올려놓은 새하얀 종이는 그의 원대로 조용히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달을 가린 구름이 눈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조용하게 주변에 내려앉는 굵은 눈송이들은 내 머리위에도, 어께위에도, 무릎에도 편지 위에도 떨어져 내 눈물과 뒤섞여 녹아내렸다.

“이상한 시 써도 안 멋있어 보여. 바보 같아……. 언제나 최선을 다하더니 눈이 되고 싶다는 것도 최선을 다했나 보네. 바보 같이……. 울지 마, 내 앞에서는 한 번도 안 울더니 막상 울기 시작하면 정말로 펑펑 우는 구나.”

주변은 온통 어두운데 그 어둠 위를 새하얗게 덮는 눈은, 아니, 내가 사랑하는 그는 순백의 눈물송이가 되어 온몸을 통해 내 기억으로 녹아들어오고 있었다.

눈 The white tears.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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