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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호랑이와 규방아씨 <上>

2006.03.09 01:48

느와르 조회 수:278

-호랑이와 규방아씨



  그날은 하나 가득 뜬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혼자서 굴을 지키고 있자니 산 뿌리 근처
에 사는 돗가비가 탁주를 들고 찾아왔다.

  “어라, 도령 혼자요? 산주인나리는 어디 가셨수?”
  “신령님 태우고 동해용왕님 연회에 가셨다. 보름은 걸려야 돌아오실걸.”
  “그럼 보름간은 도령이 산주인님일세. 축하하우.”

  시시덕거리면서 바가지에 탁주를 따라 내미는 돗가비의 잔을 받자, 녀석은 굼실굼실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하면서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장난질 치기 좋아하는 놈
이 또 무슨 범 찜 쪄 드실 노리개를 가져오기라도 했나하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녀석은
냅다 바지춤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도령. 이게 뭔지 아시우?”
  
  짐짓 뻐기면서 중얼거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억새풀이다. 달빛을 받아 번쩍번쩍
하는 게 채신머리없는 너구리 놈이 오줌을 갈겨놓은 꼴이긴 했더니만, 돗가비는 한 움
큼 꺼낸 억새풀을 그 자리에서 새끼를 꼬며 신명난다는 듯이 주절거렸다.

  “이게 말이우. 요 근처 시냇물들 어미인 골짜기 바위틈에서 솟아나온 감로수만 먹고
10년을 말라죽지도 않고 자라난 달억새요. 달빛 받기를 하루도 거른 일이 없고, 바람
맞기를 한시도 게을리 한 적이 없으니, 옥황상제 선녀님들이 강산에 핀 온갖 백화를 다
무시하고 이놈을 꺾어다가 노리개를 만든다고 하더이다.”
  “그러냐. 근데 그런 걸 왜 꺾어 왔어?”
  “하, 이 도령 산천을 달릴 때는 벼락보다 빠르더니 머리 안 돌아가기는 바위보다 굼뜨
오. 당연히 도령 드리려고 가지고 온 게 아니겠수.”

  순식간에 새끼를 꼰 달억새에 주머니에서 꺼낸 손톱만한 솔방울을 묶어서 솜씨 좋게
매듭을 지은 돗가비는 엉덩이를 당겨 앉더니만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내 오른쪽 앞발
에 그걸 단단히 동여매었다. 누가 돗가비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수상쩍기 짝이 없다.

  “도령. 앞으로 재주넘는 거 할 수 있으시우?”
  “산광대패 여우들한테 배워서 할 수 있긴 한데……아버님이 보시면 사정없이 후려 패
셔서 요 근래는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은 나리도 안 계시는데 뭔 걱정이우. 빨리 넘어 보시우.”

  뭐가 급한지 냅다 굴 밖으로 끌어내더니만 달빛 아래 서서 빨리 재주를 넘어보라고 성
화다. 마지못해서 몸을 조금 움츠렸다가 발로 땅을 차고 뛰어올라 앞으로 재주를 넘었
는데.

  “어어?”

  반도 안 마신 탁주에 취한 건지 재주 한번 넘는데 이상하게 어지럽다 했더니만, 땅에
내려서자마자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어이가 없어서 몸을 드는데 앞발이 생겨 먹은 게
이상했다. 발가락이 길쭉한 게 털도 없고 발톱도 없어진 게, 가지를 뻗기는 다섯 가지
나…….

  “어어어?”
  “허허허. 고놈 참 제대로 들어먹었다. 도령, 이거 좀 보시우.”

  볼만하다는 듯이 웃으며 돗가비가 거울을 들이밀었다. 냉큼 받아서 얼굴을 들여다보
니 이게 웬걸, 이마에 王자는 어디가고 수염도 없는 새파란 사람 놈이 하나 떡하니 비추
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봤지만 노송나무 스치고 가는 밤바람 뿐 사람은 없
다. 어이가 빠져나가서 그냥 입만 떡하니 벌리고 있자니 돗가비가 거울을 다시 채가며
기세 좋게 지껄였다.

  “보시우. 신통하지요? 그게 고놈의 달억새 힘이우.”
  “내, 내가 지금 사람이 된 거냐? 이놈의 것 때문에?”
  “모양만 사람이지 뼛속은 범이외다, 여우 둔갑하는 거랑 비슷하지. 다시 돌아오고 싶
으면 뒤로 재주를 넘으면 되오만은……아아아, 짐승이 사람 모양 갖추기도 쉽지 않은데
뭘 벌써 그러시우.”

  찝찝한 기분에 서둘러 뒤로 재주넘으려고 하자 돗가비 놈은 내 어깨를 잡아 말리며 고
개를 내저었다. 웬만한 계집애 몸뚱이만한 조롱박에 남은 탁주를 단숨에 다 마셔버리
고 어깨에 걸머진 돗가비는 싱글벙글하니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둘러왔다.

  “어떻수? 이렇게 사람이 됐는데, 나 좀 도와주지 않으려우?”
  
//

  아버님은 늘 말하셨다. 돗가비 씨름이랑 돗가비장난은 돕지도 보지고 말라고. 아버님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는 게 양갓집 담 위에 올라앉아서 황소만한 돗가비를 끌어올리
려니 정말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이……놈아! 돗가비란 놈이 담 하나를 못 넘어서……범 발을 빌리는 거냐앗!”
  “쇤네가 도령이나 산주인나리처럼 아무 담이나 넘을 수 있는 줄 아시우! 돗가비는 문
을 열어주지 않는 집은 담이 없어도 못 들어가우!”
  “그럼 안 들어가면……되지. 왜 이런 생고생을……!”
  “거 힘 좀 제대로 써 보시우!”

  오만 주접을 다 떨고 겨우 겨우 돗가비를 담 안으로 들여놓자 녀석은 방금 전까지 빌
빌대던 게 거짓말인양 쌩쌩해져서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동리에서 알아주는 양반 가문. 기둥뿌리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수?”
  “부엌을 뒤지려고 나보고 같이 담을 넘자고 한 거냐? 누가 돗가비 아니랄까봐 원.”
  “왜 이러시우. 나는 최가댁 메밀묵이 그리도 맛 좋다는 소리를 듣고 담을 넘은 것뿐이
우. 내 넉넉하게 찾으면 도령도 드리리다.”
  “일 없다. 범이 메밀묵을 먹다니 노루가 닭 잡아먹는다는 소리만큼 웃기구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고 있자, 돗가비는 그럼 나 혼자 먹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시
우 하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급하게 부엌채로 뛰어 들어갔다. 씨름판에 가면 외양간을
차려올 만큼 몸집이 좋은 돗가비가 어깨춤이라도 출 것같이 방정맞게 뛰어가는 꼴을 보
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나저나 돗가비 놈은 메밀묵 찾는다 쳐도 나는 사람냄새 펄펄 나는 이런 데서 뭘 한다.

  “어라.”

  하릴없이 주위를 돌아보니 야심한 시각인데도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있었다. 풍기는
분 냄새를 보니 규방인가 본데 이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문득 호기
심이 생겨서 가만히 다가가보니 닫힌 장지문 너머로 혼자 앉은 아낙의 그림자가 떠올
라 있었다.
  밤을 헤는 아낙들이 으레 그러하듯 다듬이질을 하는 것도 아니요. 등잔불에 의지하여
수를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멍하니 문가에 앉은 채 쪽진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가끔 두꺼운 장지문 너머로 들릴 정도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최가댁이라면 이
근처에서 알아주는 반가(班家)로, 부엌데기 언년이들 까지 으스대고 다닐 정도던데 규
방에 들어앉은 아낙이 밤늦게 고민할 일이 뭐 있단 말인가.
  호기심이 동해서 조금 더 다가가는데 부엌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에, 에그머니나아!”
  “게 무어냐.”

  머저리 돗가비 놈이 메밀묵 훔쳐 먹다 들켰나. 하고 혀를 차고 있는데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아낙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리 나이 먹지도 않은 젊은 아낙인 듯
싶은 것이 소리가 맑고 똑발랐다. 점점 모를 일이군. 아직 젊은 반가의 아낙이 수심에
찬 한숨의 무게가 무거운 이유라니.

  “거기 누가 있는 게냐?”
  “어…….”
  “도령! 도령! 게서 뭘 하우! 어서 도망쳐야 하지 않겄수!”

  나도 모르게 아낙의 목소리에 대답하려는 찰나, 주머니고 허리춤이고 가득 메밀묵을
쑤셔 넣은 돗가비 놈이 법석을 떨며 뛰어와 외쳤다. 이 놈 크기는 큰 것이 겁 대가리는
토끼보다 더하군.

  “이놈아, 채신머리없게 굴지마라, 산주인이 도망은 무슨 도망…….”
  “웬 놈이냐!"
  “도적놈이면 걸어서는 못 나갈 줄 알아라!”
  “저기 있다! 규방쪽이다!”

  부엌 계집종의 비명 소리를 듣고 곧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아흔 아홉 칸이 부산스럽게
울리며 몸집 좋은 남자종들이 저마다 몽둥이 삼을만할 걸 들고 서슬이 퍼래서 나오는
데, 이건 정말 범도 때려잡을 기세라 지금은 없어진 수염이 떨릴 지경이다. 나는 그 와
중에도 메밀묵을 함지박만한 입 안 가득 우겨넣고 있는 돗가비 놈을 향해 외쳤다.      

  “그러게 작작 좀 처먹어야 될 것 아니냐!”
  “메밀묵이 산처럼 있는데 눈이 안 뒤집히면 그게 어디 돗가비겠수! 여러 말 말고 빨리
나 좀 담 너머로 보내 주시우! 이대로는 맞아 죽겠수!”
  “맞아죽어도 범이 맞아죽겠지, 돗가비가 몽둥이에 맞아죽다니 농지거리라면 하나도
재미없다!”

  뜨악한 소리를 하는 돗가비 놈이 부산을 떨기에 그 허리를 잡아 냅다 담 너머로 집어
던졌다. 어이쿠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에 땅이 울릴 지경이지만 그런 건 내 알바가
아니다. 부리나케 담 위로 뛰어 올라가자마자 우르르 몰려온 남자종들이 담 위로 내던
질 기세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 도적놈! 썩 내려와라!”
  “주방을 몽창 헤집고 어딜 가려고!”
  “메밀묵 내놓기 전엔 도망 못 간다! 이놈아!”

  ……듣고 보니 부아가 치미는군. 아니, 메밀묵 훔쳐 먹은 건 저기 담 너머 처박혀 있는
돗가비 놈인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화딱지가 들어앉아서 아가리를 벌리고
그대로 목구멍에서 포효를 꺼내 올렸다.

  “어어어흐으으응!”

  역시 사람 목으로 내뱉은 거라 산울림 같이 쩌렁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슬 퍼
런 놈들 질리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놀라서 몽둥이 떨어트리고 주춤거리며 물러서
는 사내종들을 한번 쓰윽 훑어보는데 문득 녀석들 어깨 너머로 열린 규방 문이 보였다.
  장지문을 연 자세로 앉아서 놀란 눈으로 이편을 쳐다보는 마나님의 얼굴. 나이가 어
려 둥근 얼굴에 눈매고 입매고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는 아씨였는데, 먹을 찍어 그린
것같이 굵은 눈썹이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 보는 놈이 계집이면 기가 죽고, 사내면
넋을 놓을 것 같은 미인이었다.

  “……우, 깨개갱!”
  “어이쿠야! 도령, 지금 뭐하시우!”

  빈속에 소리 좀 질렀다고 정신이 빠진 건지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담 밑으로 굴렀다.
아직 까지도 미적거리고 있던 돗가비 놈은 내가 깔아뭉개자마자 정신이 들었는지 그대
로 나를 들쳐 업고 일어나 죽어라 내달리게 시작했다. 돗가비 어깨위에 얹혀 가느라 정
신없이 흔들리는 대가리로 뒤를 돌아보니 이미 타넘은 담벼락 뿐, 놀란 눈으로 날 보던
마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 예쁜 눈가가 함초롬히 젖어있었을까.

//

  돗가비 놈 말로는 사람들이 그 마님을 가리켜 규방아씨라고 부른다고 했다.
  최가댁 둘째마님으로 본디 산 너머 안가댁 맏딸이었다는데 시집오고 바로 동리에 괴
질이 돌아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로 지낸지가 삼년이란다. 첫날밤 달콤한 술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홀로 되었으니 규방에 앉아 한숨을 쉴 만도 하지.

  “근데 나는 왜 여기 와있는 거지.”

  어제 넘었던 최가댁 담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오는 건 매 한가지다. 지금이라
도 돌아갈까 하고 발을 돌렸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도 뭣해서 다시 돌다보니
어느새 달이 하늘 가운데 휘영청 떠있었다. 아마 아버님이 이 꼴 보셨으면 피시는 곰방
대 분지르고 내 수염을 왕창 뽑아 놓으셨을 텐데.

  “그냥 가기도 뭐하니 들어가 볼까.”

  앞발에 묶여있는 달억새를 흘끔 바라보고 땅을 박차 앞으로 재주를 넘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 처음처럼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역시 두 다리로 땅을 짚고 서는 건 어색했
다. 허리춤에 꽂고 온 녀석을 확인하고 담 위로 슬쩍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행히 어제 그 난리를 쳐놨는데도 담을 지키고 서있는 놈은 없었기에 그대로 담을 넘어
규방으로 향했다.
  밤이 깊은데 불은 여전히 켜져 있다. 장지문에 비친 규방 아씨의 모습은 오늘도 밤을
헬 요량인지 한숨뿐이다. 조용히 다가가서 허리춤에 꽂고 온 녀석만 두고 오려는데.

  -빠직.
  “게 누구냐.”

  그만 바닥에 구르는 나뭇가지를 밟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제도 들었던 단아한 목소
리가 그대로 도망가려던 내 꼬랑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 고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
게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 저, 어제 왔던 녀석인데.”

  ……잘하는 짓이다.

  “어제 왔다니.”
  “어, 그게. 어제 메밀묵…….”

  갈수록 얼빠진 목소리가 가관이다. 꾸짖어 줄 아버님이 없으니 스스로 자기 머리를 후
려쳤다. 아버님은 늘 이런 기분이셨던 거구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방문이 빠
끔히 열리며 눈물이 맺혀있는 낯익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그 목소리 크던 도적놈이 아니냐. 오늘은 또 무얼 훔치려고 예 온 것이냐.”
  “오, 오해요. 어제는 그 머저리 같은 돗가비가……!”
  “돗가비라니……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썩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
면 사람을 부르겠다.”

  눈가에 맺힌 이슬을 재빨리 소매로 찍어 훔치고 굵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하는 목소리
가 평범한 여염집 아낙답지 않은 기품이 배어 위엄 있기가 여간한 게 아니었다. 보통 사
람이라면 지은 죄가 없어도 도망갈 지경이지만 산주인 대리인 내가 도망가서야 범으로
서의 위신이 안 선다. 짐짓 의연한척 허리를 펴고 손에 들고 있던 꽃가지를 아씨에게 내
밀었다.

  “담 넘는 거야 일도 아니니 부르려면야 부르시오. 그래도 그 전에 이걸 받아주면 좋겠는데.”
  
  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내가 내민 꽃가지를 보고 더욱 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런 엄동설한에 꽃 달린 개나리 가지란 건 내가 봐도 신기하다.

  “이게, 그러니까, 신령님이 겨울나기 힘든 산짐승들 쉬다 나가라고 만들어 둔 동굴에
서 꺾어온 거요. 거긴 사시사철 봄 날씨에 과일이고 꽃이고 계절 안 가리고 열리지. 어
제 소란스럽게 한 게 미안해서 훔쳐간 메밀묵 대신 꺾어 왔소.”

  혼자 열심히 지껄이고 있자니 돗가비가 된 기분이다.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받아든
개나리 가지의 향기를 맡아 본 규방아씨는 더욱더 모르겠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는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가져온 걸 보니 헛소리라 할 일도 아니군요. 혹여
나를 홀리러 온 돗가비요?”
  “아니, 돗가비는 어제 와서 메밀묵 훔쳐간 놈이 돗가비고 나는 그저 산……에 사는 도
령이외다.”

  범이라고 말하면 까무러칠듯해서 대충 얼버무렸는데 별달리 의심을 하지는 않는 눈치
였다. 아니, 그 보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이는 눈치다. 등잔대 곁에 개나리 가지
를 조심스럽게 꽃은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찌되었든 이건 고마워요. 이런 겨울에 꽃을 보다니.”

  앵두물이 스며들어있는 것 같은 입술로 조그맣게 웃는 모습에 갑자기 염통이 쿵쾅거
리고 발악을 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런다. 오늘은 탁주도 한 모금 안마시고 어흥 소리
한번 안 질렀는데.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라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 그럼 나는 이만 갈 테니.”

  서둘러 외치고 냅다 규방을 등졌다. 뒤에서 뭐라는 아씨의 말도 무시하고 한달음에 담
을 넘어 죽어라고 달렸다. 숨이 차도록 달리는 데도 이상하게 최가댁에서 멀어질수록
두근거림이 사라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숲 깊숙이 들어왔는데 다람쥐니 뻐꾸기니
하는 것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차. 이 꼴을 하고 여기까지 왔네.”

  서둘러 재주를 넘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고 숨을 좀 돌리고 있자니 등 뒤에서 재미
있다는 듯이 껄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잘 쓰고 계시는군. 어떠우? 재미있지우?”
  “뭐야. 돗가비냐.”
  “재주를 휙휙 넘는 게 범이 아니라 구미호 같구려. 아참, 구미호 얘기는 하면 안 되던가.”

  나무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돗가비는 그대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흔들흔들하
다가 내 앞으로 뛰어내려왔다.

  “근데 어딜 다녀 오셨수?”
  “최가댁에 다녀왔다. 네가 그 난장판을 쳐놨으니 사과를 해야 할 것 거 아니냐.”
  “어이구, 이거 면목 없수. 먹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다더니 나랑 도령 꼴이
딱 그 짝이우.”
  
  넉살좋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는 돗가비. 말은 잘하는데 미안한 기색이 없는 그 낯짝
을 쳐다보다가 놈이 입가에 잔뜩 묻히고 있는 팥고물에 눈이 갔다. 어제는 메밀묵이더
니 오늘은 수수팥떡이라.

  “그나저나 요즘 들어 잘 먹고 다니는구나. 산 아래는 그리 풍작도 아니던데 드나들 부
엌이 뭐 그리 많으냐?”
  “어라, 도령 잊으셨수? 좀 있으면 섣달 보름이니 대망(大蟒)양반한테 예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수. 허투로 넘겼다간 또 지난번처럼 방천에 구멍을 내고 강을 온통 흙탕물로
만들 테니 말이우.”

  돗가비 말대로 산 깊숙이 즈믄해를 두 번이나 넘긴 이무기가 하나 살고 있다. 욕심이
많은 탓에 용이 될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치고 산 아래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일이
다. 여의주를 두 개나 가진 놈이 영악하기는 또 얼마나 영악한지, 틈만 나면 산을 집어
삼키려는 놈을 신령님이 지맥을 얽어서 산 깊숙이 호수에 가둬두는 게 고작이다.
  그런 놈이니 범이 나선다고 어찌할 수 있을까. 덕분에 아버님도 날로 고민만 늘고 계
셨다.

  “근데 그걸 훔쳐 먹고 있는 거냐. 네 식탐에 사람들이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쇤네가 먹는다고 해도 조금 축이나 내는 거지. 설마 대망 양반모양 산처럼 먹겠수. 말
을 해도 어찌 그리하시우?”

  입가에 묻은 팥고물을 핥아내며 억울하다는 듯이 지껄인다. 하긴 저놈이 먹어봤자 한
해 농사를 축낼 정도는 아니지. 하지만 한해에 한 번 이무기 놈 성질 가라앉히려고 드
는 곡식에 산 아래는 없는 기근이 들 지경이다. 욕심이 끝이 없으니 승천을 못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지.

  “확실히 그냥 두면 안 될 성 싶군.”
  “관두시우. 산주인 어르신도 손 못 대는 양반을 도령 같은 반푼이가 어찌 잡겠수.”  
  “반푼이라 미안하구나. 이놈아.”

  유들거리는 돗가비놈의 얼굴에 으르렁거려주고는 굴로 향했다. 달이 밝아서 풀을 밟
기도 미안한 밤이었다.

//

  오늘은 진달래다.
  어제나 오늘이나 꽃가지 물고 뛰어다니는 내 한심한 꼬락서니에는 이제 웃음도 안 난
다. 그나마 돗가비가 없는 게 다행이지. 봤으면 이 꼴을 보고 아주 배꼽이 빠져라 웃어
젖힐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뒤초리가 댕겨서 죽어라고 숲을 달렸다. 노송을 뛰어
넘고 시냇물을 가른다. 달빛을 쫓아 그림자를 뿌리치며 절벽을 뛰어넘는다.
  아버님이나 돗가비의 말대로 나는 앞뒤 없고 정신 빠진 반푼이 같기도 하다. 뒷일은
생각안하고 달리는 게 좋으니까. 바람이 수염을 쓰다듬고 발이 흙을 박찰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바람이 되고 달빛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아버님께 매일 얻어맞는 건지도 모르겠군.

  “어라. 다 왔군.”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어느새 마을 초입이었다. 숨을 좀 고르고 재주를 넘고 나니 또
염통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사람 되는 건 이제 익숙한데, 왜 최가댁 담 넘을 때마다
이 모양인가. 오늘도 역시 규방근처에는 아무도 없기에 나는 목을 좀 가다듬고 헛기침
을 내뱉었다.

  “어흥……아니, 어흠!”
  “밖에 뉘시오.”
  “그제 어제 왔던 도령이외다. 그……오늘도 꽃을 꺾어왔는데.”

  규방 문에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변함없는 아씨의 고개가 조금 움직이더니 장지문이
빠꼼하게 열렸다. 오늘도 울고 있던 건지 그 눈가가 젖었다. 날 바라보는 눈이 의아하
단 표정이기에 뒤춤에 꽂아놨던 진달래가지를 재빨리 내밀었다.
  
  “아, 추운데 문 열지 마시오. 내 여기다 그냥 두고 갈 테니…….”
  “예쁘군요.”

  조용히 문을 열고 내미는 가지를 받아든 아씨는 아직 향기가 남은 꽃가지를 코에 대보
며 슬쩍 눈가를 훔치었다. 어제 가져다 준 개나리 가지 곁에 진달래 가지를 꽂는 그 섬
섬옥수에 괜시리 마음이 뿌듯했다. 어제 가져다 준 것도 버리지 않았구나. 내가 그런 생
각을 하고 있자 아씨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 하며 나에게 물었다.

  “어째서 오늘도 꽃을 가져오신 건지요.”
  “아, 그, 그게……그렇지. 오늘도 사과하는 중이오.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그냥
동굴의 꽃을 다 꺾어다 주려고…….”
  
  내 말이 그렇게 어이없던 것일까. 커단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소
매로 입가를 가리고는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도령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로군요.”
  “그, 그런가…….”
  “꽃을 모두 따오시면 이 겨울에 화원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도령께서 너무
수고스러우시겠지요. 다음에 오실 때에는 목련이나 한 송이 가져다주십시오.”

  아씨의 입가에 매달린 그 미소에 대책 없는 염통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
게 대체 왜 이런다. 왜 저 아씨 웃는 얼굴만 보면 이런다. 내 얼굴이 꽤나 볼품없었는
지, 아씨는 나를 보고 걱정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도령?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혹여 꽃을 꺾느라 무리라도…….”
  “아니! 아니외다! 꽃이 범을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무리를 하겠습니까! 모, 목련
이라 하셨소? 내가 아주 나무 째로 뽑아다 드리리다!”
  “후후훗. 나무까지는 필요 없사옵니다.”

  즐겁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아씨.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염통이 쿵쾅거려 도통 제정신
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최가댁 담을 넘어 숲으로 돌아오면서도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목련, 목련을 좋아한다고 하셨겠다!”

  혼자서 좋아 외치며 달빛 속에 춤을 춘다. 달밤에 웃으며 어깨춤을 추는 호랑이라니
다른 짐승들 보면 독이라도 주워 먹었나 의심할 지경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은가. 규방아씨가 좋아하는 꽃은 목련이다. 그것을 알았다는 게 굉장히도 기뻤다.

  “내일 밤에는 목련을 한 아름 안겨드려야지! 어흐으으으응!”
  “아이고! 도련님! 제발 잠 좀 주무십시다요!”

  내가 외치는 소리에 넌덜머리를 내며 굴에서 기어 나오는 꼬리 둘 달린 여우 놈 냄새
가 꽃냄새로 느껴질 정도다.

  “산광대패 모가비냐! 오늘은 달이 밝지 않느냐?”
  “아니. 언제부터 도련님이 밝은 달을 챙기셨나이까? 음기를 쌓아 여의주라도 만드시
려고요? 구렁이 묵어 다리 늘리고 여우가 묵어 꼬리 는다지만, 도령은 대체 무얼 늘리
시려 그러시는지요?”
  
  길게 하품하고 입가를 핥으며 툴툴거리는 모가비를 보고 있자니 솔직히 너무 부선을
떤 느낌도 들었다. 역시 이럴 때는 아버님이 안 계셔서 다행이다. 모가비 놈은 졸음을
털어내려는 건지 주둥이를 휘휘 젓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근데 뭐가 그리 기쁘셔서 이 달밤에 어깨춤을 추시는지요?”
  “어, 뭐 별건 아니고…….”
  “별게 아니긴……어리이수욱한 도려헌님이 기뻐하알마아안한 일이 무어 있으려오오오.”

  가끔은 사람들까지 홀리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두 개 달린 꼬랑지를 살랑살
랑 흔든다. 모가비는 매끈한 등을 주욱 늘여 펴고 주위를 빙글 돌며 말을 이어갔다.

  “식(食)을 탐하시지 않으니 사냥감이 좋아서 이리 춤을 추시겠어요. 힘겨루기 질색하
시니 산 너머 곰 어르신네 씨름 이겼다고 이리 기뻐하시겠어요. 그렇다고 사람처럼 쇠
엽전에 눈이 돌아 이리 뛰시겠나요. 그럼 분명…….”

  돌던 것을 멈추고 꼬리를 눕히며 그 자리에 앉은 모가비는 길게 목을 빼고 목소릴 높
여 울었다.

  “암컷 아니겠소이까아!”
  “이, 이놈아, 소리가 크다! 조용히 못하겠냐!”
  “아이고, 암컷 복도 없는 양반이 암컷 후리는 건 기가 막히십니다! 이번엔 뭡니까요?
까투리? 망아지? 범을 후리셔야죠, 범을!”  

  냅다 그 머리통을 후려갈기려고 앞발을 들자마자 저 멀리 도망간 모가비 놈은 혼자서
재주를 넘으면서 신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날짐승, 길짐승, 귀가 밝다면 집짐승까지 내말 좀 들어보오! 산중호걸이라는 호랑님
이 틈만 나면 암컷질! 영웅호색이라고 하는 말 틀린 건 아니건만 왜 다른 짐승만 건드리
고 다니시냐 이 말이오! 어르신이 고민에 등이 굽고 수염이 새어 돌아다니시는 꼴이 새
우 꼴…….”
  “너 이놈! 잡히면 새우처럼 등뼈를 분질러 줄 테다!”
  “어디 잡으면 그리 하시지요!”

  이리저리 까불거리며 도망치는 모가비놈의 뒤를 따라간다. 하지만 도망치는 꼬리 둘
달린 여우를 쫓으면서도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은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

  “정말로 꺾어 와주시다니…….”
  “하하하, 꺾어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나는 주둥이가 하나라 두 말은 못합니다.”
  “그래도 죄송스럽군요. 저 때문에…….”

  내가 가져다 준 목련꽃을 안은 채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는 아씨의 모습에, 서둘러 고
개를 내젓고 외쳤다.

  “아, 아니오! 아닙니다! 죄송스럽긴요! 내가 좋아서 꺾어온 거니 괘념치 마십시오!”
  “좋아서요? 사과하려고 일부러 꺾어 오신 게 아닙니까?”
  “어, 아, 그, 그 말이 그 말이외다! 그 사과는 스스로가 염통……아니, 마음에서 우러나
와야 하는 게 아니겠소!”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허둥지둥 얼버무렸다. 다행히 아씨는
고개를 조금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시 목련 향을 맡느라 고개를 숙였다.
목련을 정말 좋아하는지 아까 부터 품에 안고 도통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그 모습
을 보고 있자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씨. 괜찮다면 나와 함께 동굴에 가보겠소?”
  
  그 말에 목련만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썹 짙은 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
는 눈동자가 날카롭다. 영문을 모른 채 그 얼굴을 마주 바라보던 나는 겨우 이유를 깨닫
고 기겁을 하여 외쳤다.

  “아, 아, 아니외다!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아씨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으며 슬픈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도령이 음습한 마음을 품고 아녀자에게 꽃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니라 건 알겠습니
다. 도령의 목소리에서는 거짓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럼 어이하여…….”
  “저는 지금 도령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품에 안고 있던 목련꽃을 곁에 내려놓은 아씨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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